# 61
납치 –1-
"그게 무슨 말이야! 하은이가 없어지다니!"
김애경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 잠깐 화장실 갔다 온 사이에 없어졌지 뭐니? 사무실에 오긴 했는데 이 사람들이 우리 말을 못 알아듣는다.]
"경호원들은? 경호원들은 다 어디 갔어? 네 명이나 붙여 줬잖아."
[모르겠다. 아까부터 안 보여.]
잠시 침묵.
미국 정부에서 보낸 경호원들이다. 24시간 교대하며 김현의 가족들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그런 그들이 안 보인다고?
이건 비상사태다. 부모님이 왜 전화를 했는지 알겠다.
[어? 아니다. 경호원들 왔어.]
상상이 비약되려는 찰나 다행스러운 말이 들렸다.
"얼굴 아는 사람들이야? 처음 보는 사람들이야?"
[얘는, 이상한 상상하지 마. 아침에 우리 태워다 준 사람들이야.]
최소한 경호원 바꿔치기는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하은이는?"
[하은이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스마트폰 너머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lost, kid, man down, 이런 단어가 고막에 아프게 박혔다.
뭔가 심상치가 않다.
그걸 직감했는지 김애경의 목소리가 깊이 잠겼다.
"설마, 납치는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니?]
대답은 그렇게 해도 어머니의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직감적으로 아는 것이다. 자기를 둘러싼 경호원들이 다급하게 이리저리 무전을 치고, 더 많이 경호원들이 몰려와 주변을 포위하는 것을 보면서.
따르르릉. 따르릉.
이때 김현의 스마트폰도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경호팀장이었다.
"여보세요."
[Mr. 김......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보고드릴 것이 있어 전화 드렸습니다.]
"하은이 문젭니까?"
[예.]
김애경과 이세희의 눈이 이쪽으로 따라온다. 피터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고, 에일리는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Mr. 김의 부모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어린 주 양이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른 모양입니다. 그래서 주 양을 경호하던 두 요원 중 스미스 요원이 아이스크림을 사러 이동했습니다.]
"그래도 한 명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죄송합니다. 블랙 요원에게 연락이 닿지 않고 있습니다. 항상 소지하는 위치 추적기의 신호도 잡히지 않고, 주 양의 신발도 인근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건 뭐 싸구려 스파이 영화도 아니고......
말인즉슨, 블랙 요원이 애초부터 이걸 노리고 접근했다는 거 아닌가. 명색이 그래도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보안 체계에 이토록 구멍이 뻥뻥 뚫렸을 줄은 몰랐다.
'아니지.'
어쩌면 미국이 수작을 부리는 걸 수도.
대통령은 확실히 김현에게 호감을 넘어 강력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미국 전체가 그러리라는 법은 없지. 현 대통령은 미국 내에서는 확실히 비주류이고, 공화당에서도 그러하니까.
"그래서 정확히 무슨 상황입니까?"
냉정한 목소리.
경호팀장이 스마트폰 너머에서 침을 삼켰다.
[파악 중입니다. 10분만 시간을 주시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해결하죠."
[네? 자, 잠시만요.]
단호하게 스마트폰을 끊어 버리는 김현.
이런 일이 한 번은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하은이와 부모님의 성혼을 각성시킬 때 혼돈의 자취를 이식했지.
"어떻게 됐대?"
"납치당한 것 같아."
"뭐?"
김애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누가?"
"할 사람은 많지. 안 그래?"
"넌 조카가 납치됐는데 걱정도 안 되나 보다?"
"그럴 리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렇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작은 거울을 꺼냈다. 거기에 혼력을 불어놓자 불길한 빛과 함께 광점이 맺혔다.
거울을 반대로 잡아 앞쪽을 비췄다. 광점이 거울에서 튀어나오더니 한 차례 부르르 떤다. 이내 화살표 모양으로 변하더니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거리는?'
속으로 묻자 화살표가 쭈우욱 길어졌다.
적어도 100킬로미터 이상. 거울만 가지고는 그 이상의 거리를 찾아가기란 불가능했다.
상관없다. 김현의 펜트하우스에 이런 경우를 상정한 물건이 잠자고 있으니까.
김애경의 방으로 들어갔다. 붙박이 화장 거울이 하나 있다. 그걸 우왁스럽게 잡아 뜯은 다음 뒤로 돌리자, 탁한 청동 거울이 하나 나타난다.
"저런 건 또 언제 만들었어?"
어이 없어 하는 김애경.
손거울을 청동 거울에다가 갖다 댔다. 손거울에서 촛농 같은 빛방울이 떨어져 청동 거울을 뒤덮는다. 청동 거울 표면이 몇 번 일렁이다가 불쑥, 좌하단에 점이 하나 찍혔다.
확대.
하나가 아니었다. 셋이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언니, 저거!"
"보고 있어."
김애경이 눈에서 불을 토하고 있었다. 푸르고 붉은 섬광이 뒤섞여, 굶주린 호랑이보다 더한 위압감을 자아내는 김애경.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면 누구라도 실금하고 말 것이다.
점은 거울의 좌하단에서 완만하게 기울어져 우상단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디즈니 월드에서 약간 북동쪽, 즉 올랜도 공항으로 간다는 것.
"582번 도로에요! 어어, 저러면 안 되는데!"
피터가 자기 스마트폰과 거울을 번갈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살짝 돌아보자 거울에 손가락질을 한다.
"저거, 저거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잖아요! 저렇게 0.8 마일(약 1.3킬로미터)만 가면 바로 공항이에요!"
의외로 눈치가 빨랐다. 거울의 점만 보고 스마트폰의 지도와 대조하여 현재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지체할 틈이 없다. 경호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올랜도 공항, 셧다운 가능합니까?"
[셔, 셧다운이요?]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됩니까, 안 됩니까?"
여기서 굳이 설명해달라고 하면 그건 바보 멍청이다.
다행히 경호실장은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는 짧게 대답했다.
[즉각 셧 다운 하고, 범인을 잡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맨해튼에서 라과디아 공항이 가장 가깝죠? 거기에 비행기만 대기시켜 주세요. 타고 날아갈 테니."
[저희가 손을 쓰는 게......]
"블랙 요원 같은 사람이 또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팀장님의 목을 건다면 한 번 고려해보지요."
대답이 없었다.
김현은 몰랐으나 블랙 요원은 경호팀장과 십 년 넘게 생사를 함께 했던 인물. 그런 블랙 요원이 배신했는데 언제 어디서 또 배신자가 튀어나올지 몰랐다.
"헬기, 준비 됐습니까?"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올랜도에서 뵙지요."
그걸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주먹을 꽉 쥔 김애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무슨 일이 있지는 않겠지?"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아무리 끔찍한 괴물을 마주해도 눈썹 하나 꼼짝하지 않던 인물이 놀라기는 많이 놀란 모양.
"당연하지. 아무 일 없을 거니까 걱정말고 나만 믿어. 정 불안하면 이거 갖고 있던가."
"거울은 왜?"
"혼력 주입해 봐. 그러면 알게 돼."
김애경이 주저하다가 손거울에 혼력을 주입했다.
비록 혼돈계 혼력은 아니어도 지극히 순수한 혼력. 손거울이 반응하며 광점을 띄운다. 그걸 보던 김애경이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다행이다......"
"이제 알겠지?"
손거울에 혼력을 주입하면 연결된 세 명의 위치와 생체 신호를 느낄 수 있다. 지금 하은이의 모든 생체 징후는 정상이었다. 잠이 들었는지 심장이 조금 느리게 뛰고는 있으나.
에일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린아이를 납치하다니 창녀 자식들이 따로 없네요. 모조리 잡아서 천 년 간 교도소 빵을 먹여줘야 해요."
교도소만?
김현은 전후 사정을 조금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일을 적당히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행정안전부 장관의 수작에 걸렸을 때보다 더욱 난장을 피울 것이다. 이제는 힘이 있으니까. 미국 전체가 달려들어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강해졌으니까.
"피터, 켄트 양. 저흴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럼요!"
"말만 하세요!"
"저희 가족 문제이니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대신 여기 남아서 이 거울에다가 혼력을 주입해서 제 조카가 어디 있는지만 파악해 주세요."
"넵! 맡겨만 주세요!"
"따라가면 안 돼요?"
피터는 즉시 대답을 했지만, 에일리는 굳이 따라오고 싶은 모양이다.
"혹시 모르니까요. 여기 남아서 상황이 길어지면 피터랑 교대해 주세요. 아셨죠?"
"쳇, 알았어요."
"그럼 부탁합니다."
헬기를 타고 라과디아 공항으로 이동.
조금 불편하다. 킹스 포인트에서 라과디아가 가까우니 풍운의 표만 연결했어도 빨리 움직였을 텐데......
라과디아 공항에는 익숙한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미국으로 올 때 탔던 비행기다. 비록 간이 작업실은 해체되었지만 내부는 그때 그대로였다.
위성 전화와 와이파이 정도는 당연히 달려 있다. 이륙 직후 피터에게서 전화가 왔다.
[Mr. 김! 아이가 올랜도 공항을 빠져 나왔어요! 지금은 417번 도로 따라서 달리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417번 도로?
스마트폰 지도를 보니 올랜도 공항에서 남쪽으로 난 도로다.
"그냥 보고만 있으라고 해. 괜히 경찰들 동원하지 말고."
[어...... 그래도 괜찮아요?]
"설건드렸다가 하은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게? 비행기나 배만 못 타게 해. 공항 있는 도시에 들어가면 셧다운 시키라고 하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네, 알았어요.]
하은이를 납치한 블랙 요원도 자기 상황은 알 것이다. 위치 추적 장치는 분명히 제거했는데 공항에 들어가기 무섭게 공항이 봉쇄되었으니까.
확신은 못할 수도 있다. 경찰들이, 경호팀이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으니. 그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 도시의 공항으로 향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다음 목적지가 밝혀졌다.
바토우 공항.
바로 인근에 위치한 소규모의 공항이었다.
"거기도 내리세요."
[네, 넵!]
이쯤이면 알아차렸겠지.
자신의 위치를 훤히 들여다본다는 사실을.
피터와의 통화에서 그걸 알 수 있었다.
[정지해 있어요.]
"바토우 공항에서?"
[아뇨. 거기 들어가려다가 말았어요. 어어...... 다시 움직여요! 꺾어가지고 바머 로드로 들어갔어요! 남쪽으로 가는 것 같은데요?]
이제 블랙 요원이 고를 선택지는 별로 없다.
도망치다가 잡히거나, 적당한 안가에 숨어들어 일발역전을 꾀하거나.
하은이를 다른 누군가에게 넘기고 잠적?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그러나 변하는 건 없다. 김현은 하은이만 찾으면 된다. 그 과정에서 걸리적거리는 게 있으면 모조리 쓸어버리고, 배후는 하은이를 안전하게 보호한 다음에 찾아도 늦지 않다.
까드득, 까드득.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펴자 금속이 마찰하며 쇳소리를 냈다. 평소 같았으면 한 소리 했을 김애경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마음이 격동된 탓에 몸에서 새하얀 냉기가 일어났다가 뜨거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세희도 비슷했다. 하은이를 자기 조카처럼 생각하게 된 이세희였다. 권총 두 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성혼을 부여했다가 흐트러뜨리며 이를 갈고 있었다.
미국은 넓다.
지나치게 넓다.
대한민국 같았으면 벌써 도착했을 거리를 아직도 날아가는 중이었다. 연료 소모를 각오하고 최대 속도로 날아도 그랬다.
[저...... Mr. 김? 그놈이 멈췄는데요......]
"어디야?"
[마이애미에요. 마이애미 해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 하나.
거긴 왜?
경호팀장의 전화로 의문이 풀렸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진출해 있다고요?"
[예. 위성 전화 감청을 통해 블랙 요원이 그들과 접촉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거기서 잠수정을 동원해 쿠바를 거쳐 멕시코로 주 양을 데려갈 속셈인 것 같습니다.]
김현에게 면박을 당하고 놀지는 않았나 보다.
멕시코......
마약 조직으로 유명한 나라 중 하나지. 오죽하면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갱단을 공격하다가 역공을 당해 한 시의 시장과 그 남편이 살해당하기까지 했을까.
도대체 블랙 요원과 멕시코 마약 카르텔 사이에 무슨 연결 고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뭐, 족치면 나오겠지.
김현의 눈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불길하게 흔들렸다.
다가오는 파국을 예고하듯이.
[5, 4, 3, 2, 1...... 강하!]
비행기의 뒷문이 열렸다.
힘껏 몸을 날렸다.
그 뒤를 낙하산 가방을 멘 김애경과 이세희가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