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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헌터사-62화 (62/200)

# 62

납치 –2-

쌔애액!

초고공 강하.

바람이 채찍처럼 김현을 때렸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짧은 머리가 거칠게 휘날릴 뿐 별 감흥이 없다. 마스크에 설치된 통신 장비를 통해 피터와 대화하느라 바쁘기만 했다.

[마이애미 해변 정중앙에 있다고?]

[네. 조금 전부터 꼼짝도 하지 않고 있어요.]

[알았다. 변경 사항 있으면 알려줘.]

부두도 아니고 해변 정중앙?

도망치는 건 포기한 걸까. 아니면 해변에서 인질극이라도 벌이겠다는 걸까.

느낌이 이상했다.

혼돈의 주사위를 굴려본다.

무수한 장면이 스쳐가지만 소득은 없었다. 모두 모호하고 흐릿했다. 아무리 예지 계열 성혼이라도 만능은 아닌 것이다.

[선생님, 저랑 누나는 하은이 있는 곳으로 바로 갈 테니까 선생님은 조금 돌아오실래요?]

[알았어요.]

생각 같아선 김애경도 조금 돌아오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김애경이 안 보이면 놈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이게 최선이었다.

어느새 지상이 가까워졌다.

푸르른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하얗고 긴 해변은 초승달을 보는 듯하다. 높다란 고층 건물이 주르륵 늘어서서 태양광을 반사하며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푸하학!

의수와 의족으로 충격파를 뿜어냈다. 빠르게 낙하하던 몸이 감속하기 시작한다.

이세희는 이미 저 멀리 사라졌고 김애경만 낙하산을 펼쳤다. 군용의 풀색 낙하산이 펼쳐지자 해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쪽을 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다이버다!"

"다이버? 아, 스카이 다이빙?"

"오, 마이애미에서도 저런 걸 즐기는 사람이 있네."

"재미 있겠어!"

"잠깐, 저 사람은 낙하산을 못 펼친 건 같은데?"

"어어, 위험해!"

그들 입장에서는 작은 점처럼 보이는 김현.

김현이 순식간에 확대된다. 아래에서 소리를 지르고 팔을 휘젓고 난리가 났다.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눈을 가리는 이들도 있었다.

가볍게 웃었다.

몇 차례 더 충격파를 내뿜자 속도가 확연히 줄어든다. 하지만 아래에서는 아직도 김현이 빠르게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자연히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탁.

불길한 추측과는 반대로 가볍게 착지하는 김현.

시민들이 놀란 눈으로 김현을 쳐다본다.

그리고 낙하산을 펼친 김애경이 빙글빙글 돌며 김현의 옆에 내려앉았다.

"저 사람들......"

"나 알아! 슈퍼 팀이야!"

"진짜다! 진짜 슈퍼 팀이야! TV에서 봤어!"

"슈퍼 팀? 초능력자들?"

시민들이 우 하고 몰려들었다.

알아보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마스크를 벗은 김현, 그 얼울에는 투박한 형태의 선글라스가 걸려 있고 선글라스 속에서는 혼돈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으니까.

비키니를 입은 미녀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든다.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이 상황을 즐겼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혼력을 끌어올렸다.

기이한 위압감이 공기를 찍어누른다. 사람들이 멈칫했다. 어째서인지 전신에 소름이 끼쳐서 주춤주춤 물러나게 된다.

"가자."

"응."

인이어 이어폰을 통해 피터의 목소리가 계속 들린다.

해변 중심, 지금 김현의 위치에서 딱 50미터만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된다고.

천천히 걷는다.

옆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부드러운 모래를 밟는데도 그랬다. 실제로, 김애경이 내딛는 걸음마다 모래가 녹았다가 엉겨붙으며 기이한 발자국을 남겨놓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김현은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은이를 납치했을 블랙 요원의 의도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십여 미터를 전진한 후, 블랙 요원을 발견한 다음에야 그 의도를 깨달았다.

"하은아!"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김애경.

상처 입은 사자의 포효 같다. 세상 전체가 우르릉 떨렸다. 인근의 시민들이 귀를 막고 고통스러워할 지경.

김현의 눈빛이 깊어졌다.

블랙 요원은 혼자가 아니었다. 건장한 체구의 남자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포위하듯이 둘러싼 한 어린아이.

귀여운 캐릭터 셔츠를 입고 있다. 앙증맞은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체형과 머리카락, 언뜻 드러나는 피부를 보면 그게 누구일지는 뻔하다.

"하은아!"

김애경이 또 고함을 질렀다.

한 발짝, 두 발짝 앞으로 나선다.

성혼이 요동치며 들끓고 있었다. 오른팔은 파랗게, 왼팔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 바람에 공기가 회오리치며 모래 먼지가 그득히 일어났다.

김애경이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하은이한테 손 끝 하나라도 댔다간 다 죽을 줄 알아!"

"워, 워, 진정하세요. Miz. 김."

블랙 요원이 두 손을 들어 보여주었다.

"좋게 대화로 푸시죠. 소중한 따님의 어여쁜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손을 뻗어 어린아이의 턱을 쓰다듬는다. 어린아이가 움찔하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너!"

김애경이 이를 갈며 신음을 토한다. 안타깝게도 동요하고 있었다. 양 손을 휘감고 있던 두 성혼이 잠깐 약해질 정도.

하여간 약하다니까.

인질범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어떻게 해?

최소한 냉정하기라도 해야지. 그랬으면 블랙 요원의 속임수를 알아차렸을 거고.

[스즈키 하루]

가면 쓴 여자아이의 이름이었다.

많은 것이 하은이와 비슷하긴 하다. 체형도 그렇고, 머리 스타일도 그렇고. 하지만 세세히 뜯어보면 달랐다. 하은이보다 키가 조금 컸고, 가면 너머 엿보이는 뺨도 볼살이 홀쭉했다.

"오마에와 난데스까?"

이렇게 물어보는 게 맞나?

전생에 다나까에게 얻어들은 일본어로 질문을 하자 여자아이의 몸이 살짝 흔들린다.

동시에, 당혹한 시선을 던지는 블랙 요원과 남자들.

알아차린 것이다.

김현이 자기들의 속임수를 간파했다는 사실을.

손가락을 뻗었다.

집게 손가락을, 가장 바깥에 있는 남자에게.

피융!

쏘아진다.

손가락 끝마디가, 성혼을 높은 등급으로 농축 승화하던 당시 불의 거인이 되었을 때처럼.

4성 등급이 된 혼원의수. 이제는 조각조각 분절내어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총알처럼 날아간 의수 조각.

가리킨 남자의 이마를 꿰뚫었다. 붉은 점이 찍히더니 남자가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쿵!

넘어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남자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이익!"

"꼼짝 마!"

"허튼 수작하면 죽인다!"

남자들이 일제히 권총을 빼어든다. 블랙 요원은 권총을 어린아이의 뒤통수에 대고 있었다.

"다스케테!"

어린아이가 울며 소리친다. 주변의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지금까지는 작은 깜짝 행사였다면, 이젠 실제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김애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깐만, 이거 설마......"

"응, 가짜야."

"가짜라고?"

불과 냉기가 폭발하듯 솟구친다. 블랙 요원이 이를 악물고 어린아이를 흔들었다.

"꼼짝 마! 다가오면 쏜다!"

"그러든가."

"뭐라고?"

"내 조카도 아닌데, 일본 꼬맹이가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냉정하기만 한 목소리.

김애경이 반사적으로 손을 떨었다. 그러나 끼어들지는 않는다. 원 역사에서의 김애경이라면 모를까, 딸이 살아 있는 김애경에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어린아이보단 자기 딸이 우선이었으니까.

블랙 요원이 침을 삼킨다. 선글라스 너머로 푸른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한 발짝 전진.

노리쇠를 당기는 걸 보며 비웃는다.

"블랙 요원. 이름이 톰 루이스라고 했지? 네 딸과 네 와이프가 지금 네 모습을 보면 퍽 좋아하겠다."

"그걸 어떻게......"

"뭘 어떻게야? 간단하지."

손을 펼쳤다.

손가락이 어지럽게 튀어나간다.

그리고 죽였다.

남자들을, 권총을 들고 이쪽을 겨눈 갱단을 모조리 다.

푹! 푹푹!

모조리 쓰러진다.

딱 셋만 남았다. 블랙 요원과 한 비실한 남자, 그리고 그들이 총을 겨눈 일본 어린아이만.

"히끅! 히끅!"

"주, 죽인다!"

"그렇게 해, 톰 루이스. 어린아이 살해자로 미합중국, 아니 세계 전역에 알려지고 싶으면. 난 널 죽이지 않을 거야. 대신 네 딸년이 입학하는 학교마다, 네 와이프가 이사하는 동네마다 커다랗게 홀로그램을 띄워놓을 거야. 이년은 악마의 딸이라고, 악마와 붙어먹은 창녀라고 말이야."

"이이익!"

블랙 요원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냉혈한 비밀 요원이라도, 배신자라도 좋은 아버지에 남편이라는 건가?

우습기 짝이 없다.

어린아이를 납치하고, 애꿎은 아이를 내세워 인질극을 벌이는 주제에 무슨?

철컥, 철컥, 철컥.

왼손이 쇳소리를 내며 분열한다.

수십 개의 조각. 길게 늘어서니 강철 채찍을 보는 것 같다. 다만 그 사이가 휑하니 비어 있을 뿐.

꾸물꾸물 허공을 기어간다. 그 기이한 광경에 블랙 요원이 다리를 떨었다. 결국 집게손가락에 힘이 들어갈 때, 냉정을 되찾은 김애경이 코웃음을 쳤다.

"어딜?"

화악!

블랙 요원의 오른손에 불이 붙었다.

그냥 흔한 불꽃이 아니다. 거의 용암이나 태양 표면에 준하는, 수천도의 초고열이다. 불은 단숨에 오른손을 녹였고, 심지어 권총 표면도 녹여 흐물거리게 만들었다.

"끄아아악!"

손을 쥐고 나뒹구는 블랙 요원.

혼자 남은 남자가 멈칫했다. 뒤를 돌아 도망치려 했으나 김현이 더 빨랐다. 채찍처럼 길어지던 손이 휙 하고 날아가 남자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으아아! 안 돼! 안 돼!"

발버둥치지만 부질 없다. 금세 김현의 앞에 끌려왔다.

"그 놈은 왜?"

"아, 이 놈도 각성자라서."

"뭐? 각성자?"

"응. 내가 하은이 몸에 심어 놓은 걸 이놈이 빼서 이 아이한테 옮겼어."

누구도 김현의 눈을 속일 수 없다.

[간파(요정, 2★)]

[전이(요정, 2★)]

부상이나 상태 이상을 받아들이거나 남에게 전이하는 성혼. 이걸 써서 자신의 몸에 혼돈의 자취를 받아들였다가 일본 꼬맹이에게 옮긴 게 분명했다.

남자의 팔을 움켜쥐었다.

"하은이, 어디 있어?"

"아악! 모릅니다, 몰라요!"

워낙 세게 움켜쥔 탓에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모르면 다야?

김현은 남자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무얼 느낀 건지 남자가 김현을 돌아본다. 선연한 공포가 얼굴 가득 번졌다.

우드득!

"끄아아아!"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손가락 뼈가 모조리 가루가 되어 버렸으니까. 아무리 통뼈라고 해도 이런 고문을 견딜 수는 없다.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죽을래? 말할래?"

"모릅니다, 정말 몰라요!"

"그럼 짐작가는 곳이라도 말해야지. 너희들 은신처나, 아니면 잠수정 같은 거."

남자의 눈이 커졌다.

블랙 요원도 비슷했다. 녹은 손을 붙잡고 신음하다가 목놓아 소리를 친다.

"안 돼! 말하지 마! 말하면 네 가족까지 죽어!"

오호, 그렇단 말이지.

목 뒤에다가 손가락을 깊숙히 찔렀다. 혼돈의 불꽃을 머금은 탓에 두부 가르듯이 뼈를 뚫고 척수까지 가 닿는다.

남자가 퍼드득 경련했다.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혹은 머리가 잘린 뱀처럼.

혼돈이 번진다.

척수를 타고, 뇌척수액을 증발시키며, 뇌로 들어가 한 사람의 신경계를 완벽히 틀어쥔다.

경련을 멈추고 눈을 뜨는 남자.

기이하게도, 눈에서 김현의 것을 닮은 불꽃이 섬뜩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요셉......"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름을 부르는 블랙 요원.

이미 늦었다.

"은신처, 말해."

"W 호텔 1304호, 플라밍고 14번가 17번지, 카페 쥬비스......"

"그만, 그만해! 그만해, 요셉! 네 여동생을 죽일 셈이냐!"

"잠수정 위치는?"

"사우스 포인트 항구......"

혼돈의 주사위가 돌아간다.

무수히 많은 단면이 김현의 눈앞에서 깜빡인다.

그중에 보였다.

어둑한 바다, 잠수하는 시커먼 선체, 거길 덮치는 한 여성이.

아담한 체구다. 쌍권총을 들고 있다. 남자들이 총질을 하자 방어막을 만들어 튕겨낸다. 이어 금색 흉탄을 뿌려 남자들을 제압한다.

간단히 돌파.

그리고 마지막,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한 남자와 조우하는데......

거기서 예지가 끝났다.

[선생님, 해변 남쪽 끝 부두요. 거기 끝에 잠수정이 정박해 있어요.]

[알았어요!]

[서두르세요. 급합니다!]

[네, 네!]

퍼억!

남자를 밀어찼다. 남자가 힘없이 모래바닥에 몸을 묻는다. 몇 번인가 경련하더니 오물을 쏟으며 늘어지고 만다.

블랙 요원이 몸을 뒤틀었다.

"악마! 살인자!"

"애들이나 납치하는 주제에 말이 많다."

손가락을 튕겼다.

분리된 쇳덩이가 허공을 날아 블랙 요원의 팔 다리에 박힌다. 그곳부터 혼돈의 불이 일어나 블랙 요원의 몸을 녹였다.

불꽃이라 말하지만 실은 강력한 힘 그 자체, 그것도 기이하고 이질적인 이계의 힘.

"으하하학! 으허헉!"

팔다리가 녹는다.

김현이 혼광 악어의 뱃속에서 그랬듯이, 영육조차 불사르며 촛농처럼 일그러뜨린다.

기괴하고 끔찍한 광경.

그걸 보던 아이가 기절했다. 김애경이 반사적으로 아이를 받아든다.

블랙 요원도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이내 정신줄을 놓아 버리며 히죽히죽 웃는다.

악몽은 지금부터 시작.

혼돈에 침식당한 이상 하루하루 몸과 정신, 영혼이 좀먹힌다. 그 말로는 김현이 보았던 혼돈괴. 그때가 되면 자연스레 지구에서 추방당하여 혼돈의 저 편으로 끌려가겠지.

피붙이를 건드린 데 대한 소소한 복수였다.

"누나, 나 먼저 갈게."

김애경이 김현의 손을 붙잡았다.

눈에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하은이, 꼭 무사히 데려와야 해. 알았지?"

"나만 믿어."

땅을 박찼다.

충격파가 폭발하며 김현을 쭈욱 앞으로 떠민다.

대포알처럼 날아가는 김현.

하은이가 코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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