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63화 (63/200)

# 63

납치 –3-

'운이 좋았어.'

이세희가 속으로 생각했다.

남쪽으로 이동한 것은 김현의 지시 덕이었지만, 지금 오토바이를 얻어탄 건 자신의 기지 덕이 아닌가.

거의 강탈에 준하여 오토바이를 얻었으나, 법인 카드를 던져 주었으니 오토바이 주인장이 새로운 오토바이를 알아서 구매할 것이다.

부아아앙!

오토바이가 굉음을 터뜨리며 부두 위를 질주했다.

길게 뻗은 방파제.

한가로이 바다를 만끽하던 사람들이 욕설을 뱉으며 비켜섰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두 끝을 향해 달렸다.

타앙!

날카로운 총성.

반사적으로 성혼을 펼친다. 최근 눈물을 뽑아가며 연습했던 천상 장막이 부드럽게 전면을 가로막았다.

앞쪽에 불똥이 튄다. 그걸 확인한 이세희의 눈도 금색으로 빛났다.

'이것들이?'

조카 같은 하은이를 납치한 것만으로 충분히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놓고 총질까지 해?

부아앙!

오토바이가 더욱 가속한다.

탕탕탕! 타타타탕!

그와 함께 연거푸 울리는 총성.

"도, 도망쳐!"

"테러다!"

사람들이 흩어지는 가운데, 마침내 부두 끝에 도착했다.

시커먼 선체가 보인다.

잠수정.

다만 대한민국에서 견학한 바 있는 잠수정보다는 확연히 작았다. 밀수용으로 쓰는 작은 잠수정인데 이세희는 그것까진 몰랐다. 잠수정의 존재를 확인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몸을 날린다.

잠수정 앞에 서 있던 자들이 짧은 총을 연사해댔으나 모조리 막혔다. 이세희는 공중에서 M1911을 남자들에게 난사했다.

퍼억! 퍼억!

"컥!"

"끄르륵!"

권총에서 금빛 광선이 날아갔다. 그걸 얻어맞은 남자들이 까무러치는 신음을 내며 졸도한다.

이세희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죽이긴 싫었다. 그래서 공포탄을 쓰고 있었다. 대신 성 속성을 부여하여, 맞으면 프로 권투 선수의 어퍼컷에 맞은 것과 비슷한 충격을 주었다.

뼈에 맞으면 뼈가 부러지고, 배에 맞으면 장기가 찢어질 정도.

이만하면 관대한 처사지. 어린아이나 납치하는 작자들을 죽이지 않는 게 어디야.

쿠르르릉.

잠수정이 길게 진동했다. 아울러 열려 있던 해치로 하얀 손이 뻐끔 올라온다.

"안 돼!"

바로 총을 쏴서 날려 버렸다. 손이 기이하게 꺽인 채 떨어진다.

그런데 수동으로 닫는 시스템이 아닌가 보다. 해치가 저절로 닫히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혼력을 폭주시켰다.

혼력 가속!

수 미터를 간단히 단축한다. 해치가 닫히기 직전 몸을 밀어넣었다. 흉악한 인상의 남자들이 잠수정으로 들어온 이세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권총을 꺼내지만 이세희가 더 빨랐다. 불 붙은 신경계를 통해 총을 쏘아댄다. 남자들이 광선을 얻어맞고 쓰러졌다.

쾌속 진군.

조타실에서 문제가 생겼다. 재갈이 물리고, 수갑과 족쇄가 채워진 하은이를 앞으로 들이민 것.

총 다섯 명.

한 명은 여자, 네 명은 남자다. 이세희는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경고했다.

"아이 놔주고 항복해. 안 그러면 당신들 죽어."

"흐흐흐, 무서워서 살겠나."

여자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뻐끔뻐끔 피웠다.

설마, 저 여자가 두목인가?

여자를 노려보다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담배 연기가 허공에서 흩어지지 않고 주위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흡사 한 마리의 구름용처럼.

"너, 혹시......"

"호호, 맞아. 요즘에는 각성자가 대세거든. 뭐라도 하나 각성하지 않았으면 대우를 못 받는다니까? 우리 이쁜이들도 그렇고."

여자가 담배를 터는 시늉을 한다. 그에 따라 담배 구름이 네 명의 남자를 한 차례씩 간지럽혔다.

남자들의 눈이 반짝인다.

성혼 발현.

한 명은 근육이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다른 자는 왼팔이 칼날처럼 변했다. 또 하나는 손끝에서 전기를 형성하고, 마지막 남자는 방어막을 형성하여 여자를 보호했다.

여자가 후욱, 담배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

"명성 높은 슈퍼 팀의 Miz. 리. 그쪽 혼자 우리를 다 어쩔 수 있을까? 기회를 줄 테니 돌아가는 게 어때? 지금이라면 탈출 캡슐을 타고 도망치는 것도 가능해."

구오오오.

잠수정이 어느새 출항했다.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 건지는 몰라도 바다 안으로 가라앉은 것.

이세희는 하은이를 확인했다.

초췌한 얼굴. 잠들어 있다.

"그건 안 되겠는데."

"어머, 우리 다섯을 다 상대하겠다고?"

"다시 경고하지. 아이 놔주고 항복해. 안 그러면 당신들 다 죽어."

"호호호! 정말로? 해볼 테면 해보던가."

"틀렸어."

"응? 뭐가?"

"너흴 죽이는 건 내가 아니니까."

"그게 무슨...... 어?"

그때, 기이한 소음이 머리 위에서 울려퍼졌다.

쩌저정, 쩌저저정!

뭔가 찢어지는 소리.

아, 그래. 뭔지 알겠다.

이건 쇠가 찢어지는 소리다. 침식 세계, 특히 기갑계의 괴물들이 생으로 찢어지면서 내던 소리.

"합!"

듣자마자 돌격했다.

남자도, 여자도 무시한 채 하은이를 몸으로 감싼다. 그들이 대응을 하기도 전 찬상 장막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다.

쩌저정!

잠수정이 쪼개졌다.

여자가 서 있던 조타실 바로 위. 그 두터운 철판이 칼로 도려낸 것처럼 뜯어져 나간다. 아울러 바닷물이 해일처럼 들이닥쳤다.

"으아악!"

"뭐, 뭐야!"

비명을 지르는 일행의 앞에 거대한 손이 들어온다.

강철로 만든 손.

크다.

기이하게도 수십 조각으로 분절되었는데, 그걸 다 합쳐도 사람의 손 크기보다 아득히 클 것 같다.

이것은 거인의 손인가, 아니면 로봇의 손인가.

여자는 멍하니 그 손을 쳐다보았다.

손이 덮쳐온다.

다섯을 한꺼번에 옥죄인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바닷물에 잠긴 채, 손이 자신을 구속하자 저절로 발버둥을 치게 된다.

그러나 소용 없다.

수톤짜리 파괴력을 자랑하던 로일드의 근육도, 예리하던 하우스의 칼날도, 번개 공격이나 방어막도 다 통하지 않았다. 여자 자신의 구름용도 마찬가지.

다만 덧없이 녹아 없어진다. 손의 휑한 부분에서 타오르는 기이한 불꽃에, 회색 같기도 하고 무지갯빛 같기도 한 그 불길한 화염에.

"으으으......"

의식이 멀어진다.

끼무룩, 어둠 저 편으로 건너가려는 찰나 손이 다섯을 한꺼번에 잡아 끌었다.

거침없이 솟구친다.

언뜻, 머리 부분이 따여 서서히 침강하는 잠수정이 보였다.

'저게 얼마짜린데......'

혼몽한 정신 탓일까.

아득해지는 가운데도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퐈악!

물보라가 솟구치면서, 여자와 남자들이 수면 위로 내팽개쳐졌다. 자연히 부두 위에 떨어지면서 심대한 충격이 그들의 육신을 뒤흔든다.

"쿨럭! 커헉!"

"켁, 켁 켁! 커헉!"

"컥컥!"

저마다 바닷물을 토해내는 일당.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물을 먹은 건 그렇다고 쳐도, 조금 전 거대한 손이 그들을 옥죄면서 풍긴 위압감 때문이다.

그나마 여자가 가장 먼저 정신줄을 붙잡았다.

"도, 도망쳐야 해."

이미 늦었다.

바다가 부글부글 들끓었다. 거품이 우르르 올라오더니 한 남자가 끓는 바다를 배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팔과 다리가 다 강철인 남자.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선글라스 너머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다.

왼팔에는 어린아이를, 오른팔에는 아담한 체구의 여성을 안고 있었다.

남자의 존재감이 번져온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끼룩대는 갈매기 소리도, 철썩대는 파도 소리도, 푸른 바다에 부숴지던 햇볕마저 모두 정지한 것 같다.

"주, 죽어!"

여자가 발악하듯 고함을 지른다.

맹렬히 찌른 손끝에서 뭉클뭉클 연기가 쏟아졌다. 그것이 한데 뭉쳐 창의 형상을 하더니 일직선으로 날아온다.

제법 강하다.

3성 등급 성혼. 혼력 능력치도 준수한 편이고.

김현의 입가에 웃음이 그어졌다.

살짝 얼굴을 기울여 여자를 본다. 흑룡정 선글라스 너머가 아니라 맨눈으로 직접 주시했다.

숨막히는 정적.

시간이 멈춘 듯한 적막 속에서 한 줄기 광선이 그어졌다.

쭈앙!

회색 기이한 광채.

그것이 구름창을 꿰뚫고 여자의 얼굴 바로 옆을 스친다.

여자가 얼어붙었다.

무엇을 느꼈는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부두 인근에 있던 한 그루 야자수, 그 윗부분이 몽땅 사라져 있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볼품 없는 줄기 하나가 전부.

"마,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기는.

혼원 성혼과 아득한 시선의 결합이다.

현 시점의 각성자들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심장이니 시화룡이니 혼원이니 하는 근원 성혼이 있으면 이러한 묘기도 가능하다.

"우우웅......"

하은이가 마침 깨어나려고 했다.

왼손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손가락 마디가 분리되며 촉수처럼 하은이의 전신을 가볍게 쓸었다. 재갈을 자르고, 수갑과 족쇄를 가루로 만들자 하은이가 길게 기지개를 폈다.

"삼촌? 여기 어디야?"

"바다야, 바다."

"엄마는?"

"오고 있지. 세희 이모한테 갈까?"

"이모!"

이세희는 이미 부두에 발을 디딘 상태다. 하은이를 내밀자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뭔가 걸리는 게 있는지, 바다 쪽을 보며 입을 뗀다.

"저기 기절한 사람들 있는데요......"

"내버려 두세요."

"네, 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물러선다.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여자와 남자들이 질린 얼굴을 하고는 뒷걸음질을 친다.

"자, 잠깐만! 협상하자!"

"협상?"

"그래! 누가 우리 배후인지 알고 싶지 않아? 우리만 이대로 보내주면 알고 있는 건 다 털어놓을게! 우릴 보내줘!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 제발!"

가볍게 웃었다.

"가족? 가족 핑계를 댈 인간들이 어린아이를 납치해?"

"어쩔 수 없었어! 우리도 협박당했다고!"

"오호, 그래?"

잠수정까지 운용하는 마약 카르텔을 협박하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 힘을 가진 인간이어야 하지?

김현의 반응을 보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 걸까. 여자가 다급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했어! 내 부하들과 가족들은 죄가 없어! 날 죽여도 좋으니까 내 부하들만, 여기 이 멍청이들만 제발 보내줘! 제발!"

급기야 눈물까지 찍어낸다. 진한 눈물 방울이 부두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 뚝뚝 떨어졌다.

"김현 님......"

이세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김현을 부른다.

그만큼 꿇어앉은 여자는 애처롭고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김현은 여자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손을 한 번 까딱하자 손가락 몇 개가 분리되어 뒤쪽으로 날아갔다. 잠수정이 침몰한 부근에서 뭉개뭉개 피어오르던 연기를 관통하니 화악 하고 화염이 솟구쳤다.

"뭐, 뭐!"

"불꽃놀이다!"

이세희는 놀라고, 하은이는 재미있다고 손뼉을 쳤다.

"너무 무릅니다, 선생님."

"아......"

이세희가 여자를 노려본다. 여자가 입술을 짓씹었다.

"죽어!"

남자 하나가 달려든다.

팔을 칼로 변환시킨 남자.

아니, 그 하나만이 아니다.

다른 남자들도 모두 일어났다. 사방에서 김현을 덮쳐온다. 근육이, 번개가, 방어막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리석기는.

두 팔을 벌렸다. 이어 빠르게 교차한다.

허공에 X자형 상흔이 그어졌다. 그 상흔이 남자 넷을 모조리 갈라 버렸다.

"안 돼!"

찢어지는 비명.

여자가 기어온다.

무릎을 꿇은 채 땅바닥을 벅벅 긴다.

그런 여자의 앞에 생명을 잃은 고깃덩이가 우스스 떨어졌다.

"안 돼......"

여자의 눈이 흐릿해졌다.

그것도 잠깐. 빛이 돌아오며 표독한 눈빛을 한다. 이를 갈며 우뚝 선 김현을 올려다보았다.

"복수할 거야...... 당신! 당신을 반드시 파멸시키고 말겠어......"

순식간에 10년 넘게 늙어 보이는 여자.

젖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 다짐하는 모습이 섬뜩하다. 김현은 말없이 오른쪽 집게 손가락을 여자의 미간에 가져다가 댔다.

"깔깔깔!"

여자가 광소를 터뜨렸다.

"죽이게? 죽여 봐! 죽여보라고! 그랬다가는 오늘 일이 왜 벌어졌는지 절대 알 수 없을걸?"

"그러던지."

손가락이 미간을 파고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