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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헌터사-64화 (64/200)

# 64

고혼 의식

뼈에 구멍이 뚫렸다.

여자가 경악한 눈으로 김현을 본다. 그것도 잠깐, 곧 눈에서 빛이 꺼지며 스르륵 몸이 늘어졌다.

단절.

완벽한 죽음.

김현은 냉정한 얼굴로 손을 거뒀다. 이세희가 입을 쩍 벌렸다.

"김현 님! 그냥 죽이면 어떻게 해요?"

"그럼요?"

"배후는 캐야죠!"

"그럴 거면 굳이 살려둘 필요가 없죠."

21세기의 상식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

이세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죽은 사람에게서 어떻게 정보를 알아내나 싶어서.

이때, 부두 위를 맹렬히 달려오는 자가 있었다. 기이하게도 모래 구름이 뭉클뭉클 일어난다. 파랗고 붉은 기운이 뻗치며, 하나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엄마다!"

하은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대로였다. 김애경이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멀리서 하은이가 손을 흔들자 그제야 기세가 죽으며 소용돌이가 잠잠해진다.

"하은아!"

"엄마!"

벼락처럼 달려들어 하은이를 껴안는 김애경. 거의 온몸을 던지다시피 했으나 하은이는 잘 받아냈다. 김애경이 하은이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하은아! 엄마가 잘못했어!"

"잘못했어?"

"응! 응! 엄마가 잘못했어! 미안해!"

"그럼 아이스크림 사 줘!"

"뭐?"

계속 잠들어 있어서일까? 하은이는 지금 상황이 잘 파악이 안 되나 보다. 천진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요구하는 통에 김현은 그만 웃고 말았다.

조금 진정한 후 김애경이 김현을 돌아보았다.

"범인은?"

"저기 있어."

"어......"

김애경이 잠시 말을 잊었다.

처참한 시체. 거의 고깃덩이 수준 아닌가. 그나마 미간에 구멍이 뚫려 사망한 여자 정도만 시체를 보존하고 있고.

원래 답답할 정도로 강한 도덕 관념을 가진 김애경이다. 이런 광경을 보면 발작하다시피 화를 내어야 정상. 하지만 이 자들이 자기 딸을 납치한 장본인이라고 하니, 인과응보라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가 그 동안 너무 무르게 군 것 같아."

"응? 뭐라고?"

"너무 물렀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바짝 세웠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걸. 안 그래?"

범죄를 시도하기 전에 뒤탈부터 걱정하게 될 테니.

김애경은 그저 침묵했다. 들불 같던 분노가 가시고 나니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오는 모양.

사실 이미 많이 죽였지. 마이애미에 도착하자마자 납치범의 머리에 구멍을 뚫어주고 시작했으니. 블랙 요원은 아예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선고했고.

"엄마, 엄마, 삼촌이 이렇게 하니까 나쁜 놈들이 이렇게 쪼개졌다!"

여기에 하은이까지 부채질을 한다. 조금 전 김현이 X자형 칼날을 그은 장면을 재연해 보인 것이다.

흔들리는 눈.

김현은 그런 김애경을 빤히 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무수히 많은 무언의 대화가 오간다.

어느 순간 김애경이 강렬한 섬광 같은 눈빛을 토했다.

앞에서 까부는 하은이 때문이다.

하은이야말로 김애경의 가장 큰 보물. 그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김애경은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오직 하은이를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괴물과 싸웠고, 미국까지 김현을 따라온 거니까.

"고슴도치 정도로 되겠어? 호랑이 정도는 돼야지."

명쾌한 대답.

김현도 씨익 웃었다.

"하긴 아픈 정도로는 안 되지. 우릴 건드리려면 죽을 각오는 해야지."

"내 말이 그 말이야."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보고 있던 이세희가 머리를 흔들었다.

삐뽀 삐뽀 삐뽀.

멀리서 사이렌이 울렸다.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출동하는 것 같다.

무시하고 여자의 시체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품에서 백흔귀의 향을 꺼내자 이세희가 헛바람을 들이킨다.

"아, 그런 방법이 있네요!"

유명계의 소환 계열 성혼이 있으면 백흔귀를 통할 필요도 없다. 관련 보물이 있어도 마찬가지. 그래서 22세기의 각성자들은 영혼에 특수한 처리를 하곤 했다. 죽으면 즉각 저승으로 갈 수 있게끔.

[흐으음, 선지자여. 무슨 일이지?]

백흔귀는 전에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3성 등급 성혼 150개를 거래한 게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니까. 최근 각성소를 운영하며 쌓인 성혼도 꽤 많고.

시체를 가리켰다.

"고혼(拷魂) 의식을 주관해 줬으면 한다."

고혼 의식.

이름처럼 영혼을 고문하는 의식이다. 특수한 대비가 안 되어 있다면 절대 견딜 수 없다.

백흔귀가 음험한 안광을 흘렸다.

[후후, 누군가 선지자에게 단단히 밉보인 모양이군. 어떤가, 이 참에 명부의 씨앗을 받는 건?]

"됐어. 의식이나 치러줘."

[수수료는?]

"달라면 주겠지만, 정말로 받게?"

[쯧, 처음이니 무료로 진행해 주지. 다음부터는 안 돼. 나도 노동의 대가를 받아야겠어.]

"좋아, 동의하지."

백흔귀가 음울한 진언을 읊었다.

언젠가 언급했듯이 외계종의 사자는 지금 시점에서는 일개 환영에 불과하다. 그래도 낙인을 찍거나 간단한 주문을 외우는 등 제한적인 간섭은 가능했다. 고혼 의식 또한 그 중 하나였다.

주문이 진행되자 옅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그것이 시체를 세상으로부터 격리한다. 아지랑이가 뭉쳐 촉수처럼 변해 시체의 정수리로 들어갔다.

"꼼짝 마!"

"손 들어!"

경찰들이 도착해 일행을 둘러쌌다. 널브러진 시체들을 보더니 당장 권총을 꺼냈다.

김현이 김애경에게 눈짓을 보냈다.

안 그래도 이미 스마트폰을 꺼낸 다음이다. 경호팀장에게 전화하여 상황 설명을 하자, 상황을 파악 중이던 경호팀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무전을 받은 지역 경찰들의 얼굴이 덜떠름하게 변한다. 그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

그러거나 말거나 김현은 고혼 의식만 살폈다. 백흔귀가 뻗은 아지랑이 손이 뭔가를 힘껏 뽑아냈다.

어스름한 어떤 그림자.

희뿌연 안개 뭉치 같다. 그것이 나타나자 공기가 차가워지며 태양이 가려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음울한 소음.

[죽었는데......]

안개 뭉치에 푸르스름한 안광이 맺힌다. 주위를 한 번 돌아보다가 김현을 보더니 멈칫했다.

[너! 너!]

안광이 불꽃처럼 변했다.

[죽인다!]

몸을 날려 김현을 덮쳐오는 유령.

그러나 김현의 얼굴은 냉담할 뿐이다.

대신해서 반응한 자가 있었다.

[이 하찮은 종자가!]

백흔귀가 유령을 잡아당겼다. 유령을 감싸고 있던 아지랑이가 족쇄처럼 작용하여 유령을 결박했다.

[끄아악!]

유령이 귀곡성을 터뜨렸다.

몸을 뒤틀지만 소용 없다. 그때마다 백흔귀가 고통을 가했다. 살아 있을 때 겪는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말 그대로 영혼이 찢어지는 고통이다. 결국 유령이 순종하며 얌전해졌다.

[뭐든지 물어보아라, 선지자. 이 하찮은 종자는 어떤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답할 것이다.]

"고마워. 자, 이름이 뭐지?"

유령이 노여움에 차 김현을 노려본다. 역시나 오래가진 못했다. 백흔귀에게 얻어맞고는 잔뜩 주눅이 들어 대답했다.

[켈리 가르시아.]

"좋아, 가르시아 양. 그렇게만 하라고. 왜 내 조카를 납치한 거지?"

유령이 원독어린 눈빛을 뿌렸다.

[의뢰였다.]

"의뢰? 누구의?"

[알렉산더 브라운.]

뭐?

김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CIA나 미국 정계 유력 인사가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알렉산더 브라운?

백악관에서 까불다가 된통 혼난 인물 아닌가. 그 자가 멕시코 카르텔을 움직여서 하은이를 납치했다고?

"그때 죽여 버릴 걸 그랬어."

김애경이 주먹을 꽉 쥐었다.

"엄마, 뭘 죽여?"

"응?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하은이가 칭얼거리자 김애경이 애써 하은이를 달랜다. 시체가 보이지 않게 경찰들을 헤치고 나가 바다쪽에서 하은이를 얼러댔다.

알렉산더 브라운이라.

물론 그 작자라면 충분히 이런 일을 벌일 만하지. 알려진 것과 다르게 매우 옹졸한 인물이니까.

하지만 부자연스럽다. 알렉산더가 어떻게 멕시코 카르텔과 선을 대어 의뢰를 한단 말인가. 원래는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했고, 각성자가 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이.

냄새가 난다.

'뭐, 상관없지.'

흔히 하는 말로 도구는 죄가 없다고 한다.

김현은 그 말에 반대했다.

자유의지가 있든 없든 사람은 사람이고 죄는 죄다. 남의 도구가 되어 자신을 찌른다면 주인은 물론 도구도 모조리 박살을 낼 참이었다.

그래야 안전해지니까.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 그리고 멍청한 적들의 도구들 모두.

"알렉산더는 어떻게 너희와 접촉했지?"

[마이애미에서 접촉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카페 쥬비스에서 특정한 키워드를 말하면 우리 조직원과 연결된다. 알렉산더 브라운은 그렇게 의뢰를 넣었다. 직접 왔더군.]

"직접 왔다고? 언제?"

[1주일 전, 지금 이 시간쯤에.]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1주일 전이면 저스티스 팀 전체가 미국 전역을 돌며 침식 세계를 복구할 때였다. 며칠 전부터는 쉬고 있으나, 1주일 전이면 분명하다.

'이간계구나.'

연막 작전이기도 하고.

"백흔귀. 소멸 직전까지 고문해."

[알았다.]

백흔귀가 사악한 안광을 뿜었다. 희끄무레한 불꽃이 유령의 전신을 뒤덮는다. 유령이 비명을 질렀다.

[왜! 왜! 난 본대로 말했어!]

"그래, 본대로 말했겠지. 아는대로 말하지는 않았고."

누굴 호구로 알아?

차분히 기다렸다.

유령의 영체가 차츰 녹아내린다. 안광은 거의 빛을 잃었다. 불투명하던 영체가 극도로 투명해져 뒤쪽이 훤히 보였다.

구경하던 시민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뇌리를 찢는 귀곡성에 타격을 입은 것.

김현은 오른손에서 회색 불꽃을 피어올리며 말했다.

"알렉산더라고? 쯧, 그때 알렉산더는 미국 서부에 있었어. 그런데 플로리다에서 나타난다는 게 말이 돼? 그리고 고작 알렉산더 정도 피래미의 의뢰에 너나 저기 쓰레기 같은 거물들이 움직인다? 말이 안 돼잖아."

각성자들의 권력은 아직 크지 않다. 연예인과 권력자, 그 사이. 그 쯤이 현재 각성자들의 위치라고 보면 딱 맞겠다.

[으으, 으으으......]

겨우 백흔귀의 고문이 멈췄다. 유령이 김현을 보고 호소하듯이 신음을 뱉는다.

"쉽게 쉽게 가자. 누구야? 아까 보니까 네 부하 중에 간파 성혼을 가진 놈도 있던데. 그놈이 알렉산더를 봤으면 정체를 알아냈을 거 아냐. 잠수정까지 가지고 마약 밀매를 하는 조직이 가짜 알렉산더에게 속았을 것 같진 않은데."

유령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아주 가느다란 울림을 전달해 온다.

[니켈 멕켈란......]

"뭐? 그게 누군데?"

[나도 모른다. 미국 어느 정보 조직의 요원이라는 것밖에.]

"그렇게 나오면 곤란한데. 정확한 이름 정도는 대 줘야지."

손을 들어 손짓을 하려 하자 유령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정말, 정말 모른다! 나도 알아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어! CIA, NSA, I&A, 다 조사해봤지만 모두 아니었어! 미군을 동원해서 우릴 밀어버릴 수 있는 조직이라는 것만 알아냈어!]

"거짓말."

[정말이다, 정말! 내가 조사하려고 들자 경고가 들어왔다. 내 고양이의 머리를 잘라서 내 머리맡에 놔뒀다고! 정말이다!]

어이쿠, 꽤 고전적인 수법일세.

이건 정말인 것 같다. 소멸 직전까지 몰아붙였는데 거짓말을 하는 유령은 없으니까.

"좋아, 그럼 아는 거 다 말해 봐."

[무엇을......]

"일단 네 조직부터. 본거지가 어딘지, 조직원은 누구누구가 있는지, 중간 간부는 누구인지 같은 거."

[으으......]

"아직 뜨거운 맛이 부족했나 봐?"

[마, 말하겠다! 그러니 제발!]

켈리 마르시아가 속한 조직은 칸쿤에 위치해 있었다. 원래는 멕시코 북동부에 자리를 잡았으나 최근에 밀려났다고. 하긴 그러니 잠수정을 이용해 마이애미로 마약을 밀매했겠지.

한 가지 의외인 점은 켈리가 보스가 아니라는 사실. 보스의 애첩이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성혼을 사용하여 2인자 자리까지 올라갔지만.

'각성소를 풀었더니 개나소나 다 각성하긴 하네.'

피할 수 없는 부작용이다.

백흔귀에게 눈짓을 보냈다. 백흔귀가 유령을 해방시켰다. 유령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아아, 드디어......]

굳이 소멸시킬 필요는 없으니까.

김애경이 가까이 다가왔다.

"알아낸 거 있어?"

"응."

미켈 멕켈란이라고 했지.

켈리는 추적할 방법이 없다고 했지만 김현은 다르다. 스마트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활달한 목소리가 김현을 맞이했다.

[오, Mr. 김. 소식은 들었습니다. 조카를 무사히 구출했다면서요? 정말 다행입니다.]

미국의 대통령.

김현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이자 가장 덕을 크게 본 인물.

거기다 대고 물었다.

"미켈 멕켈란이 누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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