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67화 (67/200)

# 67

SOS

"그게 무슨 소리야?"

[실은......]

이어지는 말이 정말 가당치도 않았다.

7월 8일 오전. 아직 미국 동부 시간으로는 7월 7일 저녁이던 때. 대한민국의 미르 공격대는 창설 이래 최대의 작전을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라 한라산 백록담을 복구하고자 시도한 것.

성공만 하면 나쁘지 않은 시도다. 범람 직전의 침식 세게는 농익을 대로 농익은 여드름과 같아서 가장 많은 양의 성혼을 구할 수 있으니까. 실제로 미국의 저스티스 팀과 가디언 팀도 이번 침식 때는 완숙 세계에 도전해서 성공했고.

[처음에는 순조로웠어요.]

백록담은 충왕계였다. 6월 범람 당시 곤충 괴물들이 쏟아져 나온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

[그러다가...... 그 괴물들을 만났죠.]

스마트폰에서 들리는 서경태의 목소리가 떨린다.

[강철의 몸을 가진 용과 산처럼 큰 호랑이를요.]

응? 뭐라고?

강철의 용과 거대한 호랑이?

김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원 역사에서 나타났던 칠대 괴수 중 둘. 지구에 가장 큰 피해를 입혔던 그것들.

멸절용 파멸호.

원래 이름은 다르지만 이런 별명으로 흔히 불렸다.

"최 소위와 한 상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미르 부대를 맡기기 위해 두 계급 특진을 했던 그들.

[죽었습니다.]

하......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미래의 랭커가 꽃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죽은 셈 아닌가.

비단 대한민국만 손해를 봤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인류 전체의 손실이었다.

"그럼, 미르 부대도요?"

[네......]

듣자 하니 일부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나마 최세철과 한중우가 부대원들을 살리려고 몸을 던져 그 정도였다고. 하지만 백록담 세계에 고립된 건 마찬가지. 그 중에는 서경태의 아버지도 있었다.

[형님, 저희 아버지 좀 살려주세요.]

서경태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전후 사정이 짐작이 간다.

4성 괴물의 출현으로 미르 부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당연히 뿔뿔히 흩어져서 도망쳤겠지. 두 괴물은 주변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니 어찌어찌 세계 구석에 숨는 것은 성공.

그러나 웅크리고만 있어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결국 서경태가 탈출하여 도움을 청한 것 같다.

문제는 대한민국에 예비 전력이 없다는 것. 특히 4성 괴물을 상대로 한다면.

따라서 청와대는 김현에게 SOS를 치는 수밖에 없었다. 안 좋게 헤어지기는 했으나, 어떻게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져야지.

자, 어떻게 할까.

대한민국에는 더 이상의 미련이 없다. 하지만 서경태는 조금 아쉬웠다.

혼자서 열흘 넘게 침식 세계에서 생존했던 인물 아닌가. 이번에는 저등급 성혼과 저등급 무기로 침식 세계에서 탈출하는 묘기를 부렸고.

이만하면 김애경이나 피터, 에일리와 비슷하게 최상 등급 자질.

또, 펜타곤에서 절실하게 느낀 것이 있었지. 은신 계열 각성자만 하나 있었으면 그 고생을 안 해도 됐으니.

"조건이 있어."

[말씀만 하세요!]

"내 팀에 합류해. 그럼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당장 출발할게."

[형님 팀에요?]

"그래."

김현의 팀에는 모든 게 다 있다.

방어자, 공격수, 지원가......

딱 하나 부족한 게 있다면 조커. 은신 계열은 그런 면에서 최적의 선택이다. 어둠 질주라는 공격형 이동 계열 성혼까지 같이 갖고 있으니까.

[할게요!]

"좋아. 시간 꽤 걸릴 거야. 그 동안 아버님 버티실 수 있게 잘 도와드려. 비철룡이랑 태산호는 엄청나게 예민하니까 침식 세계 안에 들어가면 꼭 숨어서 다니고."

[예, 형님!]

"세계 탈출은 언제든지 가능하지?"

[그게, 단검이 많이 약해져서 몇 시간에 한 번씩만 가능합니다.]

"조심해. 나 가기 전까지 보급은 최소한으로 줄여. 네가 죽으면 죽도 밥도 안 된다. 각성자들이니까, 어차피 며칠은 물 안 마셔도 안 죽어. 살아 있는지, 어디 있는지만 파악하란 말이야. 알았지?"

[네, 형님.]

통화를 끝내자마자 기가 막히게 또 대한민국에서 전화가 걸려온다. 힐끗 보고는 아예 차단해 버렸다. 대신 일행 전체와 한꺼번에 약식 회의를 열었다.

[경태를 영입한다고? 괜찮겠네.]

[전 찬성!]

김애경과 이세희는 찬성. 반면 토종 미국인 둘은 떨떠름한 기색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요? 차라리 오디션 한 번 더 열어요.]

[어...... 일도 많은데 거기까지 가는 건 좀......]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요. 안 따라오셔도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위험하기도 하고요. 4성 등급 괴물 두 마리가 나왔거든요."

[헉!]

[4, 4성이면 저번에 그 악어랑 동급 아니에요?]

"그렇죠."

[너무 위험한데......]

"아니야. 나 혼자서도 한 마리는 잡을 수 있어. 누나도 다른 건 몰라도 필살기는 유효하니까 몸이나 잘 풀어둬. 가만히 놔두면 8월 15일에 괴물놈들이 지구로 튀어나와서 여기저기 다 부수고 다닐 거야. 아직 갇혀 있을 때 끝을 보자."

거기서 떨어지는 4성 등급 성혼 4개, 도합 8개는 우리가 갖고.

잠시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김애경이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하자! 솔직히 지금 같아선, 예전에 그 악어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충분히 가능한 소리다. 1대 1로는 힘들어도, 당시의 일행이 받쳐주기만 한다면.

이세희도 전의를 다졌다.

[경태 아버님이면 그때 그 분 맞죠? 경태 아버님이 죽을 수도 있다는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어어......]

[휴, 다들 가는 분위기네요. 어쩔 수 없죠. 거기까지 비행기 타고 날아가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저도 뒤로 빼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같이 가요.]

피터만 빼고 모조리 찬성.

아직 어린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입을 한참이나 우물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인다.

[저, 저도 따라갈게요.]

괴물들 상대할 때는 잘만 쳐죽이면서, 자기 의사 표현을 하는 건 아직도 서투르다.

"좋습니다. 백악관에 전화해서 비행기를 수배해달라고 하지요."

대통령과 직접 통화는 하지 못했다. 때마침 중요 회의가 있어 자리를 비운 까닭이다. 대신 비서 중 한 명과 통화를 했다.

[대한민국에 다녀오신다고요?]

조금은 저어하는 투.

"아예 가는 거 아닙니다. 전부터 눈여겨본 각성자 한 명 영입하러요."

[새로운 팀원이 필요하다면 저희가 알아봐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에이, 그렇게 데려오는 팀원은 제 팀원이 아니죠. 그리고 이번에 영입할 팀원은 탑 오브 탑입니다. 저 정도는 아니어도 알렉산더 브라운이나 닉 스미스 정도는 돼요."

잠시 말이 없다.

어쨌든 미국으로서도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잠깐의 외유를 허락하는 것만으로, 세계 탑 급의 각성자를 얻는다고 하니까.

[어쨌든, 돌아가시는 건 아니지요?]

"당연하죠. 이미 시민권까지 받았는데 돌아가기는 어딜 돌아갑니까?"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시길.]

범람 직후에는 김현이 특별히 할 일이 없다. 그래서 출장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통화를 끊으며 한 가지 사실을 짐작했다.

대한민국에서 이미 미국 정부로 SOS를 보냈던 것 같다. 김현을 보내달라고. 하지만 미국 측에서 그걸 승낙할 리가 없지. 김현이야말로 세계 최강의 각성자니까.

인근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올랐다.

지금 김현의 일행은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다. 굳이 한 곳으로 모일 것 없이 제주도로 바로 날아갈 예정이었다. 도중에 조종사들끼리 연락하여 도착 시간을 맞춘다나.

'미국에 오니 이런 건 좋네.'

말 그대로 전폭적인 지원.

하지만 놀고 있을 시간은 없다. 김현은 주머니에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백흔귀의 향을 꺼냈다.

'분노의 뿔피리를 살까?'

원 역사에서 김애경이 빌려서 사용했던 보물.

그걸로 두 괴물을 광전사로 바꾸었다. 4성 괴물에게도 통하는 보물인 만큼 천문학적으로 비쌌다. 대여료를 내는데만 엄청난 이권을 내주었지.

지금까지 벌어둔 성혼이나 명금을 쓰면 이권을 주지 않고 빌릴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을 아는데 굳이 그걸 빌릴 필요가 있을까?

김현은 비죽 웃었다.

두 괴물을 동시에 분노시키기는 힘들다. 그래도 한쪽만 격분하게 만드는 건 가능했다. 실제로 2020년을 넘어서부터는 이 방법이 대중화된다.

그리고 22세기 들어서는 이 방법을 이용, 턱없이 낮은 전력으로도 두 괴물을 잡는 방법이 정립되었지.

"백흔귀, 혼돈철 5 킬로그램이랑 광혼금 1 킬로그램, 힘의 수정 5개에 용의 피 1병, 혼돈귀 영체 5마리 부탁해."

[대금은?]

"명금으로 줄게. 달아놔."

[언제까지 명금만 줄 거냐. 난 성혼이 필요하다.]

"에이, 어차피 내가 모은 성혼은 너한테 다 팔 건데 뭘 보채고 그래. 느긋하게 기다려. 조만간에 큰 건수가 있을 거다."

[그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백흔귀는 투덜거리면서도 김현의 좌석 앞에 요구한 재료들을 쏟아놓았다.

작업실도 없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간단하다.

김현은 두 의수로 혼돈철을 주물럭거렸다. 의수에서 탁한 광채가 빛나자 혼돈철이 자연스럽게 어떤 형체를 갖췄다.

짧은 비수.

표면에 혈조가 파여 있었다. 거기에는 광혼금을 녹여 부었다. 힘의 수정은 비수 중심에 박고, 거기에다가 혼돈귀 영체를 넣었다. 마지막으로 용의 피를 기화시켜 비수 전체에 도포하면 완성.

흔히 혼돈의 독이라 불리던 단검이다. 이걸 박으면 혼돈의 힘이 침투하여 적을 한 줌 핏물로 녹여 버린다.

김현이 산체스에게 했던 것과 비슷하다. 다른 점은 용왕계 괴물 대상이라는 것. 그리고 3성 이상 괴물은 녹이는 대신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4성 괴물쯤 되면 쉽게 당하지는 않는다. 목 아래, 역린에다가 꽂아야 했다.

[이번에도 신기한 걸 만들었군.]

"혼돈계에서 비슷한 물건을 팔지 않아?"

[그럴 테지. 혼돈의 비수 비슷한 물건인 것 같다만...... 차라리 혼돈의 비수를 사달라고 하지 그랬나. 그건 한 번 쓰고 버릴 물건으로 보이는데.]

혼돈의 독이 가진 가장 치명적인 단점.

1회용이라는 사실.

김현은 의뭉스럽게 웃었다.

"혼돈의 비수는 너무 비싸."

완제품은 다 그렇다.

그러니 김현이 지금껏 수공업을 고수하는 거지. 한철군에게 기술을 전수해서, 나중에는 지구 전체의 기술 수준을 올릴 의도도 있지만.

어느새 열두 시간이 지나갔다. 김현이 탄 비행기가 일본 영공을 지나 대한민국 영공에 접어들었다.

거의 한 달 반 만에 오는 대한민국.

공항에 내려앉고 뭘 할 시간은 없다. 혼돈의 독과 보급품 가방만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렸다.

씨아앙!

양옆에서 비행기 두 기가 스쳐 지나갔다.

거기서도 새까만 점들이 떨어진다. 한쪽에서는 하나, 다른 쪽에서는 셋. 사전에 약속한 대로 같은 시간에 제주도 상공에 도착한 것이다.

백록담 기슭에서 합류.

서경태에게서 받은 문자를 확인했다.

[형, 저 지금 들어가요.]

약 여섯 시간 정도 전에 받은 문자.

지금까지 서경태는 1시간 진입, 4시간 휴식 주기를 지키고 있었다. 혹시나 두 괴물에게 발각될까 봐, 그리고 단검이 부숴질까봐 봐 조정한 거였다.

전화를 걸어보지만 통화권 이탈이라고 나온다. 아직 침식 세계 내부에 있다는 뜻.

"전화 안 받아?"

"어,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저기 누가 와요!"

일행이 강하한 기슭 쪽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 높은 한라산 위에서 다들 양복을 잘 차려입은 것이, 특정 직업군의 냄새가 났다.

김현과 김애경의 눈이 마주쳤다.

"굳이 얽힐 필요 없지?"

"응. 가자."

백록담의 은빛 돔은 바로 지척.

오른손을 휘둘렀다.

기이한 색채가 겹겹이 일어나며 은빛 돔을 직격 했다.

은색 장막이 갈라지고 징그러운 세계가 엿보인다.

다들 몸을 날렸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대한민국의 공무원들이 닭 쫓던 개가 되어 쳐다보았다.

'역시 충왕계구나.'

서경태에게 들은 그대로.

진흙 구덩이 같은 세계다. 정면에는 거대한 진흙 탑이 서 있었다. 벌집을 보듯 육각 구멍이 송송 뚫린, 어린아이가 진흙을 대충 뭉쳐 쌓아 올린 듯한 탑.

유충탑.

22세기에서 자주 보았던 그것.

이것뿐이었다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 김현의 심장을 서늘하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경태랑 경태 아버님은?"

"찾아볼게."

선글라스를 벗었다. 아득한 시선이 공간을 꿰뚫고, 혼돈의 주사위가 돌아가며 길을 인도한다.

'어디냐?'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냈다.

귀신 깃든 단검 덕에 쉬웠다. 벌레 특유의 생명력이 충만한 이 세계에서, 홀로 유명계의 싸늘한 기운을 뿜고 있었으니까.

그 기운을 따라갔다.

기생파리와 싸우고 거대 개미를 썰어가며......

그러나 서경태에게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아버지!"

긴 절규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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