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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헌터사-69화 (69/200)

# 69

비철룡 태산호 –2-

그것이 나타난다.

압도적인 위세를 뿌리는 존재. 풀썩 올라오는 먼지가 제왕이 두른 망토를 보는 듯하다.

키 13미터. 몸길이 29미터.

이건 말 그대로 걸어다니는 건물이다. 아니, 그보다 더한 위압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인공 구조물도 아니고 엄연히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는 것이 보는 이의 공포를 부채질했다.

흰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선명한 백호. 털 하나하나까지 생동감 넘치게 움직이며 이쪽을 쏘아보고 있다. 겁에 질리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터.

그리고 네 발에서 타오르는 새하얀 불꽃. 거기서 기이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아지랑이?

아니다.

공간 자체가 소멸하면서 이지러지는 게 그렇게 보이는 거였다.

태산호의 주무기. 멸공염(滅空炎).

닿는 것은 모조리 소멸시키는, 백호의 칼날과도 그 궤를 같이하는 강력한 성혼이었다.

"저, 저, 저......"

피터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다른 이들도 비슷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리를 떨거나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행동이 이들의 공포를 부채질했다.

"크허허헝!"

만물을 복종시키는 천자의 일성.

"어딜!"

가장 빠르게 대처한 것은 이세희였다. 손을 흔들듯 펼치자 황금색 폭죽이 터졌다. 축복과 보호가 동시에 부여되고 방어막이 생성되어 일행 전부를 감싼다.

"크르르르......"

태산호가 흥미롭다는 듯이 이세희를 주시했다. 그러더니 살짝 몸을 낮춘다.

놔둬서는 안 되지. 달려들면 방어막이고 뭐고 작살이 날 테니.

한 발짝 내딛는다. 혼원의족이 한 차례 혼탁한 빛을 뿌렸다.

파아앙!

공기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김현의 몸이 대포 쏘아지듯 앞으로 날아갔다.

태산호가 그걸 가소롭다는 듯 보았다.

뒤쪽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는 일행에겐 신경도 쓰지 않고, 오른쪽 앞발을 고양이 장난하듯 휘두른다.

불꽃이 덮쳐왔다.

보기에는 신령스럽고 영험하지만, 막강한 위력을 감춘 백색의 화염이.

"흡!"

숨을 뱉으며 몸을 뒤집었다.

김현이 기이한 궤적으로 그리며 움직였다. 혼원의수와 혼원의족이 저마다 힘을 뿜어내며 갈지자로 이동하게 한 것. 그게 3차원 공간상에서 구현되니 꼭 술 취한 사람이 휘청휘청 걷는 듯했다. 그리하여 발톱과 발톱 사이를 절묘하게 빠져나간다.

태산호의 눈이 섬뜩한 빛을 뿜었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 김현이 피하자마자 몸을 던졌다. 우월한 체급을 이용해 단박에 박살 내려는 심산이었다.

이 또한 예측한 뒤.

몸을 웅크렸다. 혼력을 폭증시킨다. 힘이 폭발적으로 배출되면서 김현이 쑤욱 가라앉았다.

허공을 가르는 태산호.

"크아앙!"

약이 올랐는지 길게 포효를 했다.

그러자 그에 화답하듯이 하늘 저편에서 웅장한 굉음이 울려 퍼진다.

"쿠오오오!"

태산호의 것과는 다른, 더 장중하면서 더 메아리치는 울음.

자연히 시선이 쏠린다. 김현도, 태산호도, 심지어 방어막 뒤에 숨어 있던 일행들의 눈도, 몽땅 다.

곧 그 주인이 나타났다.

태산호보다 조금 작은 덩치. 그러나 활짝 펼친 두 날개 덕에 오히려 더 커 보인다.

전신이 흑회색 금속질로 이뤄진 존재. 단순히 비늘이 금속성이라는 뜻이 아니다. 몸통 내부까지 몽땅 금속이었다. 그렇다고 기계라고는 할 수 없는 용왕계의 기이한 생물.

비철룡.

무형의 바람을 전신에 휘감은 채 접근한다. 천천히 접근하는 것 같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보는 것과 다르게, 비철룡은 비축한 시간을 단번에 급속 재생하여 순간 이동하듯 다가올 수 있으므로.

그렇다. 태산호가 공간조차 소멸시키는 멸공염을 사용한다면 비철룡은 시간을 제멋대로 구부렸다가 펴는 시간익(時間翼)의 주인이었다.

"크르르르......"

태산호와 비철룡은 앙숙 중의 앙숙.

저 멀리서 날아오는 비철룡도, 분홍빛 살점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태산호도 두 눈 가득 무시무시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기회.'

재빠르게 태산호의 배 밑으로 파고들었다.

만세 부르듯 두 손을 올리는 김현.

혼원의수 둘이 부르르 떨었다. 이내 불을 뿜으며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아니, 정확히 태산호의 뱃가죽을 직격했다.

"크헝헝!"

태산호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당연하지. 두 개의 의수가 날아올라 뱃가죽을 모조리 찢어놓았으니까. 피가 흐르며 벌건 내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크아앙!"

비철룡이 거기 반응을 했다. 눈이 벌겋게 빛나더니 주위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날개를 접는 것과 함께 비철룡의 속도가 몇 배로 가속했다.

꽈앙!

그대로 태산호를 들이받는 비철룡.

크기가 조금 더 작다고는 해도 전신이 금속으로 된 까닭에 무게는 오히려 더 나가는 비철룡이다. 전속력으로 내리꽂혔으니 그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태산호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타격 직전, 고양잇과 동물들이 흔히 그리하듯 바닥에 드러누우며 네 발을 휘저었다.

풀려나온다.

멸공염이, 세상을 불태우는 파멸의 불꽃이.

"쿠오오!"

비철룡의 몸을 휘감은 무형풍이 거세게 움직였다. 그것들이 멸공염을 얼싸안는다. 하얀 불길이 잔뜩 일그러져 불의 공처럼 변했다.

저 현상, 너무나도 잘 안다.

"엎드려!"

그렇게 소리는 쳤지만 막상 김현의 선택은 달랐다. 넘어져 있는 태산호를 향해 돌진했다.

비철룡이 꼬리로 태산호를 후려치는 것이 보였다. 이어 급히 몸을 날리며 자리를 피하는 것도. 거의 동시에 둔중한 소음이 고막을 두드렸다.

꾸아앙!

그냥 폭음이 아닌, 길게 범종 울리는 듯한 소리.

아까 불의 공처럼 변했던 흰 불꽃이 쟁반처럼 수평면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세계의 벽에 닿자 하늘을 쪼개버리고, 심지어 저 멀리 있는 유충탑에 닿자 그걸 그대로 반토막낸다.

시간익에 의해 느려지는 시간. 거기 응축되는 멸공염. 그러다가 시간이 제 속도를 찾으면 복원 작용 때문에 멸공염이 급속히 확산하는 것.

이 대재앙 앞에서는 비철룡과 태산호도 한낱 미꾸라지에 작은 고양이가 된다. 비철룡은 몸을 뺐고 태산호도 납작 엎드린 다음이었다.

그 위를 달렸다. 태산호의 척추 어림을 타고.

"크르릉?"

쟁반처럼 퍼진 화염,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충격.

무수한 파멸의 길을 피해 달리며 양 팔을 펼쳤다. 의수가 조각조각 분절된 채 길어진다. 조각 사이를 불길한 회색 불꽃이 연결하고 있었다. 마치 불의 채찍을 보는 듯하다.

그걸 태산호의 등에다가 거침없이 휘둘렀다. 가죽이 제법 두텁지만 김현의 의수라면 간단히 뚫는다. 태산호가 엎드린 채 성가시다는 듯 길게 울었다.

"Mr. 김! 저도 가세할게요!"

"아직 안 돼! 작전대로 해!"

"아, 알았어요!"

귀에 낀 무전기를 통해 피터의 말이 들리자 단칼에 잘랐다. 괜히 태산호의 주의를 끌었다가 공격을 당하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테니.

대신 서경태와 눈이 마주쳤다.

족히 수십 미터 밖. 무전기를 끼고는 있지만 굳이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았다. 서경태가 김현의 마음을 눈치채고 그림자로 변해 사라졌으니까.

"크헝!"

태산호가 몸을 굴렸다.

질척한 대지가 눈앞으로 다가온다.

이쯤은 예측하고 있었다. 태산호의 옆구리를 타고 달렸다. 배를 밟았다가, 다시 옆구리를 거치자 목이 나온다.

이곳이야말로 태산호의 급소 중 하나.

그러나 전진하지 않았다. 대신 등줄기로 올라탔다. 혼돈의 채찍을 교차하여 상처를 내기 무섭게, 태산호의 왼쪽 앞발이 목 뒤를 덮쳐온다.

하얀 불꽃, 멸공염과 함께.

자신의 털을 잘라가며 날린 공격이다. 게다가 네 줄기, 상당히 촘촘해서 그냥은 피하기 어려울 성 싶었다.

하지만 김현은 웃었다. 공중으로 몸을 띄운다. 혼돈의 불꽃을 전신으로 피워내며 멸공염과 멸공염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일그러진 공간이 아슬아슬하게 김현을 스치고 지나갔다.

"쿠오오!"

비철룡이 잘 됐다는 듯 울부짖었다. 태산호의 눈에 낭패어린 감정이 스친다. 작디 작은 고깃덩이가 방해를 하는 탓에 저 쇳덩어리 원수놈의 공격에 노출되고야 만 것.

재차 가속하는 비철룡. 벼락이 되어 내리꽂힌다. 재차 방금 전의 상황이 재현되었다.

다른 점이라면 하나.

태산호를 가격하고 도망치는 비철룡에게 검은 그림자 하나가 들러붙었다는 것.

"이거나 먹어라!"

서경태가 고함을 지르며 혼돈의 독을 꽂아넣었다.

목 아래 유일하게 거꾸로 난 비늘, 바로 그곳에.

비철룡이 눈을 흡떴다. 파충류의 세모 동공이 찢어질듯이 벌어진다. 이어, 고통과 분노에 찬 괴성이 울려퍼졌다.

"꾸오오오오!"

지금까지 터뜨렸던 포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쇠를 마구 긁어대는 듯한 소음.

앙숙인 태산호조차 살짝 기가 질려서 비철룡을 힐끔거릴 정도였다. 그만큼 방금 비철룡이 내지른 괴성은 여기 있는 모든 이의 심혼을 파고들었다.

서경태가 비죽이 웃었다.

"아프냐, 씹새야?"

광기에 들뜬 얼굴.

혼돈의 독을 두 손에 쥐고 있었다. 그걸 단번에 박아 버린다. 비철룡이 몸부림을 쳤다. 서경태의 몸이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흔들렸으나 그걸 또 어떻게 버틴다.

"죽여 버린다!"

원한을 불사르며 마지막 남은 혼돈의 독까지 모두 역린에 박았다. 그 다음에야 웃으며 나가떨어져 저 지상으로 낙하했다.

역린에 박힌 다섯 자루의 비수.

저마다 불길한 빛을 뿜고 있다. 힘의 수정이 파도치듯 일렁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처음 박혔던 단검이 녹아내렸다.

찐득한 액체처럼 변한 혼돈의 독. 그것이 꿈틀거리며 상처로 파고들었다. 한 자루만 그런 것도 아니고 다섯 자루가 모두 그랬다.

비철룡의 몸이 덜커덕 멈췄다.

입을 벌린다.

꾸덕한 침이 꾸역꾸역 떨어졌다.

눈에서 피가 터졌다. 핏물이 찰랑찰랑 차올라 완전히 붉게 변해 버린다.

"크르르르르......"

이 순간, 지구 인류의 지능을 웃도는 지성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하나.

피에 굶주린 마룡 한 마리가 전부였다.

"꾸어어엉!"

비철룡이 입에 거품을 물고 태산호에게 돌진했다. 이성이 날아간 상황이라 가장 위협적인 놈부터 물어뜯고 보는 것이다.

"크르릉."

태산호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전부 보고 있었다. 성가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도망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흉소를 머금으며 비철룡의 공격을 기다렸다.

모든 비철룡은 모든 태산호의 원수. 이제는 숫자를 헤아리기도 힘든 과거, 원시 행성에서 성립했던 천적 관계는 종 자체가 진화하여 차원을 넘어 용왕계와 환수계에 정착한 다음에도 혈통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작은 고깃덩이들 덕에 절호의 기회를 얻었으니 절대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크헝헝!"

일부러 크게 포효하는 태산호.

비철룡이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태산호의 목줄기를 물어뜯겠다는 것.

같잖다.

육박전은 누가 뭐래도 태산호가 비철룡을 압도한다. 그러니 비철룡도 태산호를 툭툭 때렸다가 도망치고, 다시 툭툭 때렸다가 도망치는 것 아닌가.

목은 내주었다. 비철룡이 태산호의 목을 깨물었다. 소름끼치는 감각과 함께 비철룡의 치아가 두툼한 근육으로 파고든다.

그러나 그뿐. 치명적인 타격은 입히지 못했다.

태산호가 몸을 뒤집었다.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유연하게 몸이 돌아간다. 한 마리 뱀이 된 듯 비철룡을 휘감은 다음, 네 발에서 일제히 불꽃을 피어올렸다.

휘오옹.

그런 소리가 들리고 비철룡의 몸 곳곳에 발톱이 꽂혔다.

시간익이 발동한다.

그 덕에 멸공염이 더는 전진하지 못했다. 느려진 시간에 고여 여기저기 별처럼 박힌 채 빛날 뿐.

지금!

태산호가 음흉하게 웃었다.

재차 몸을 뒤집었다. 비철룡이 덩달아 허공으로 떠오른다. 그걸 흔들며 땅에다가 메다꽂았다.

몸이 아무리 강철이라도 땅에 쳐박히는 충격을 어쩔 수는 없다. 비철룡이 짧은 신음을 토하며 입을 벌렸다. 태산호가 비철룡의 머리를 걷어차며 공중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시간익이 풀린 것은 바로 그때.

세계를 망가뜨리는 멸망의 화염이 겹겹이 터졌다.

"꾸어어어!"

여기에는 비철룡조차 어쩔 수가 없다.

날개가 찢기고 몸통 곳곳이 훼손되었다. 산성 체액이 사방으로 뿌려진다.

언뜻 보기에도 치명타.

태산호가 그걸 보고는 득의어린 웃음을 흘렸다.

"크륵, 크르르륵."

방심.

이성을 가진 괴물들이 피해 갈 수 없는 그것. 더구나 천적의 죽음을 눈앞에 둔 다음에야.

태산호는 몰랐다.

길고 긴 털 속, 김현이 찰싹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비철룡이 쓰러진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네 명의 인간이 구덩이를 파고 숨어 있다는 점도.

김현은 손을 길게 뻗었다. 의수가 해체되며 칼날처럼 변한다.

타오르는 혼돈의 불꽃.

찔렀다.

칼날이 길어지며 태산호의 턱과 입천장을 관통했다. 급기야 뇌까지 들어가 휘저어 버린다.

딱딱하게 굳는 태산호.

교활하게 반짝이던 안광이 스르륵 꺼졌다.

이것으로 죽지는 않는다. 태산호의 초재생 능력이 몇 초 안에 뇌를 재생하니까. 대신 일시적으로 지능이 크게 떨어져 야생 호랑이 수준으로 격하된다.

"지금!"

"가자!"

숨어 있던 일행이 공격을 시작한 것도 그때.

김애경이 대지를 박찼다. 충격의 장화가 발동한다. 널브러진 꼬리를 타고 질주하여 비철룡의 등 위로 올라간다. 머리 위까지 한 달음에 달려가 멸망포를 꽂아넣었다.

몰아치는 소용돌이와 노란 광선이 그 뒤를 이었다. 비철룡의 비늘을 뚫을 수 없다고? 그럼 극대 파멸 공격을 통해 상처를 내고 거길 공격하면 된다. 아니면 멸공염에 의해 파헤쳐진 곳을 때리거나.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

비철룡과 태산호는 악을 쓰며 날뛰었다. 4성 괴물 답게 치명적인 공격을 사방으로 뿌린다.

그러나 일행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이들은 지금 단순한 괴물에 불과하고, 일행은 김현의 지휘에 따라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움직였으니까. 애초에 22세기의 전술을 쓰게끔 허용했을 때부터 두 괴수의 운명은 결정되었다고 봐야 한다.

쿵! 쿵!

거의 동시에 숨통이 끊어졌다.

4성 등급 성혼.

그 귀중한 보물을 몸에 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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