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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헌터사-70화 (70/200)

# 70

엎질러진 물

"죽어! 죽어!"

서경태가 눈물을 흘리며 비철룡의 시체를 짓밟았다.

손을 뻗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진정해. 이제 다 끝났어."

"형!"

서경태가 김현에게 안겼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운다. 가볍게 안고는 등을 토닥였다.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진정했다. 손으로 대충 눈물을 닦더니 김현에게 감사 인사를 한다.

"형, 고마워요. 형 덕분에 괴물 새끼들을 죽일 수 있었어요."

"미안하다. 내가 가까이 있었으면 아버님을 구했을 텐데......"

"아니에요. 멀리서 와주셔서 감사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저번에 형 따라갈 걸 그랫어요."

얼굴이 다시 우울해진다.

옛 생각을 하나 보다. 병원에서 김현에게 제안을 받던 때의 일을. 만약 그랬다면, 함께 미국으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가정이란 무의미하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현아, 반혼석 같은 걸 쓰면 안 돼?"

김애경이 묻는다.

처음 백흔귀와 거래할 때 백흔귀가 제시했던 물건. 최근에 명금이 아까워서인지 구매를 권유한 적이 있었다.

가볍게 머리를 젓는다.

"아무리 이계의 보물이라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건 불가능해."

엄밀히 말하면 생전의 그 모습으로 살아오지는 않는다.

반혼석만 해도 그렇다. 떠난 영혼을 불러와 육체에 심기는 하지만 그뿐, 그래서야 걷는 시체에 불과하다. 반혼석은 생명이 간당간당하여 영혼이 떠나려고 할 때 써야 효과적이었다.

다른 보물들도 부작용이 많았다. 흡혈귀가 된다거나, 영혼이 바꿔치기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서경태가 아프게 웃어 보였다.

"누님, 전 괜찮아요. 마음 써주셔서 감사해요."

"경태야......"

"형, 저거는 해체 안 하세요? 호랑이는 몰라도 도마뱀 새끼는 저한테 맡겨주셨으면 좋겠어요."

서경태가 단검을 흔들었다. 톱니처럼 곳곳에 이가 빠지고 그 빛을 잃은 귀신 깃든 단검. 수명이 다해가는데도 비철룡을 직접 해체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게 해. 대신 성혼은 내 거다."

"당연하죠. 저도 염치 없지는 않아요."

서경태가 비철룡에게 다가가 광기어린 눈빛을 빛냈다. 죽은 뒤로 전신이 물렁물렁해졌다. 부숴지기 직전의 단검으로 머리를 쪼개고, 심장을 가르고, 배 안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거대 호랑이는 김현의 몫. 김애경과 에일리도 와서 도왔다. 크기가 워낙 컸지만 셋이 뜯어내자 금방 몇 조각이 났다.

부우우웅.

냄새를 맡았는지 기생파리들이 몰려왔다.

"저희가 맡을게요!"

피터와 에일리가 나섰다. 성혼을 쓸 것도 없이 소총을 마구 쏘아댄다. 침식 세계에서 모험을 수 차례나 한 다음이라 기생파리들이 속절없이 터져 나가고 있었다.

덕분에 4성 등급 성혼을 모두 수습할 수 있었다.

총 8개.

지금 김현의 일행을 모두 4성 등급 각성자로 올려놓고도 남을 숫자였다.

'누나는 충분한데, 다른 사람들이 문제네.'

다들 어엿한 3성 등급 각성자. 능력치가 그만큼 많이 올랐다는 소리다. 다만 4성 등급에 올라서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이세희만 조금 가깝다고 해야겠다. 그래도 조금만 더 닦달하면서 굴리다 보면 이달 말까지는 4성 등급에 도전할 자격을 얻겠지.

나머지 사람들? 8월 말을 목표로 하자. 8월 15일 이전에 4성 등급이 되면 더 바랄 게 없고.

'4성 등급 각성자 6명이라......'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르다.

여기서 한 가지. 지금 지구에 암약하는 열여덟 세계의 사자들은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을까?

답은 4성 등급이다. 김현이 거래하는 백흔귀도, 잠깐 마주했던 명월천이나 백영귀도 모두 4성 등급이었다.

그리고 8월 말에 도래하는 거점의 주재 외계종들은?

5성 외계종이다. 비록 차원의 벽을 넘어오느라 힘이 약해지긴 해도 약 1년 후에는 그 힘을 회복하지.

'1년이면 충분해.'

원 역사에서는 외계종들이 강해지는 속도를 인류가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휘둘렸고, 이권을 약탈당한 끝에 영원히 침묵하게 되었다. 이번만큼은 다를 것이다.

'괴수들 잡고 얻을 4성 성혼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야겠다.'

백흔귀는 자기한테 이걸 팔라고 할 거고, 그게 개인적으로는 이득이지만 지구 전체로 보면 손해다. 결국 4성 각성자들의 출현을 늦출 테니까.

경매를 해? 아니면 적당한 값을 받고 팔아넘겨?

고민해 봐야 할 일.

김현은 우뚝 솟은 유충탑을 돌아보았다.

"끝을 보죠."

"가자."

백록담은 완숙 세계다. 그러나 대범람 때 모든 괴물들을 밖으로 분출한 탓에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미숙 세계와 성숙 세계의 중간 정도 된다고 봐야겠다. 세계는 확장을 끝내어 고정되었으나 나타나는 괴물은 대부분이 1성 등급 괴물이었다. 2성 등급 괴물조차 찾아보기 어렵고, 축 지킴이는 이제 조금씩 성장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유충탑 꼭대기, 세계 지킴이만큼은 제법 위용을 자랑했다.

사마귀 여왕.

거대한 체구에 새끼 사마귀들과 함께 공격해오는 전술이 일품이다. 앞발의 칼날은 예리했고 움직임은 쾌속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봐야 비철룡과 태산호를 쓰러뜨리고 온 일행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 머리가 쪼개져 한 줌의 액체가 되어 사라졌다.

사마귀 여왕이 남긴 것은 3성 등급 성혼 2개.

이세희가 그걸 집고는 혀를 찼다.

"옛날에는 이것도 중요했는데 요즘에는 가치가 떨어지는 느낌이에요."

"4성 등급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치가 점차 떨어지겠죠."

"궁금해서 그러는데 도대체 몇 성까지 있는 거예요?"

"9성까지요. 이렇게 침식 세계에서 버는 건 7성이 한계입니다만."

사실 7성까지 생산하는 별은 이 드넓은 우주에서도 드물다. 그래서 열여덟 개나 되는 세계에서 달려든 거지. 7성을 이리저리 조합하면 8성까지는 어떻게든 추출해낸다는 뜻이니. 전생의 아론이 그랬던 것처럼.

어느덧 세계가 부숴지고 있었다. 유리창 깨지듯 와장창 깨져 나간다. 꺼먼 공허가 엿보이고, 그 너머로 한라산의 절경이 펼쳐졌다.

"돌아왔다......"

서경태가 허무한 표정을 하고는 주저앉았다.

그래, 허무하겠지.

단검 한 자루에 의지하여 세계를 드나든 보람도 없이 모든 것을 잃고 말았으니.

풍덩!

진흙 땅이 커다란 호수로 변해 버렸다. 일행 모두 속절 없이 빠져 버린다. 하지만 누구 하나 당황하는 사람이 없었다. 능숙하게 헤엄을 쳐서 근처 기슭으로 다가갔다.

"으아아!"

"사람 살려!"

일행이 벗어난 곳 근처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떠 있었다. 다들 창졸지간에 물에 빠진 탓에 정신이 없어 보인다. 능숙하게 수영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놀라 손을 휘젓는 사람이 더 많았다.

'지원은?'

백록담이 침식되어 만들어진 세계다. 복구되면 당연히 물에 빠질 것을 예상했어야 한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아도 헬기 하나, 구명용 고무 보트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저기 기슭 쪽에서 양복 입은 남자들이 그쪽을 손가락질 하는 게 전부.

"쯧!"

혀를 한 번 차자 김애경의 얼굴이 흐려진다. 김현이 본 것은 김애경도 보았으니까.

서경태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형, 저 잠깐 갔다 올게요."

"마음대로 해라. 이거 하나 마시고."

항상 가지고 다니던 극혼약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 마시자 술을 마신 것처럼 얼굴에 불콰하니 혈기가 돈다. 서경태가 허리를 굽히고는 백록담으로 몸을 던졌다.

지금 일행이 있는 기슭에서 백록담 중심까지 거리는 약 200미터. 서경태가 단 두 번의 질주로 거기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물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 다시 이쪽으로 돌아온다.

"휴!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서 하사!"

"별 말씀을."

지치고 피로한 와중에도 서경태는 물에 빠진 사람들을 전원 구조했다.

모두가 미르 부대원, 즉 각성자.

그런 처지에 도움이나 받는 게 마뜩찮았으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차피 관계도 없는 사람들. 굳이 충고하고 어쩌고 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돌아서면 그만인 것을.

"서 하사! 서 하사!"

뚱뚱한 사내가 급히 달려왔다.

서경태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손을 잡고 과장되게 흔든다.

"다행이네, 다행이야! 고생했어! 많이 힘들었지?"

"아닙니다. 여기 형이 도와주셔서 수월했어요. 사실, 전 뒤에서 구경만 했죠."

"아, 김현 각성자님......"

사내의 얼굴에 난처하다는 기색이 스친다.

당연하지. 김현은 대한민국 정부가 감추고 싶은 흑역사니까. 누구든 세계 최고의 각성자로 인정하는 김현을 놓친 까닭에 국민들에게 얼마나 많이 욕을 먹었나.

이번에도 그렇다. 기껏 키운 미르 부대는 거의 해체되기 직전까지 갔다. 최세철과 한중우가 모두 전사했으니. 그걸 김현이 와서 해결했으니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두 눈에다가 콱 칼을 찌르고 싶은 심정일 게다.

"정말이지 감사합니다. 김현 각성자님께서 오시지 않았으면 우리 소중한 대원들이 다 죽었을 겁니다."

"공치사 받으러 온 거 아니니까 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참, 경태야."

"네?"

"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다. 장례식 끝나는 대로 비행기 보낼 테니 그거 타고 와."

"어...... 잠깐만요."

사내의 얼굴이 당혹감에 일그러졌다.

"비행기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감지했나 보다.

다급히 서경태를 보지만 서경태는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렸다. 김현은 슬쩍 서경태의 앞을 막았다.

"경태는 저와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예? 뭐라고요?"

눈을 부릅뜨는 사내.

"말도 안 됩니다! 서 하사, 거짓말이지? 응?"

대답이 없었다.

사내가 비칠비칠 서경태에게 다가온다. 서경태는 아예 몸을 틀어 버렸다. 김현이 앞에 버티고 서자, 사내가 무릎을 꿇고는 소리쳤다.

"서 하사! 이러면 안 돼! 이제 우리나라에는 서 하사 밖에 없다는 거, 서 하사도 잘 알잖아! 전우들을 봐! 정말 자네 전우들도 다 버리고 가려고 그래? 그러지 마! 응?"

역시 묵묵부답.

이번에는 김현을 올려다본다.

"너무 하십니다! 그래요, 우리나라가 김 각성자에게 너무 했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둥을 다 뽑아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서 하사까지 가고 나면 우리나라에 남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청와대가 침식되도 보고만 있어야 하고, 여의도가 공격당해도 구경만 해야 한단 말입니다! 김현 각성자, 제발 그러지 마십쇼. 서 하사라도 남겨주십쇼. 안 그러면 우리 5천만 국민들, 그 죄없는 국민들만 죽습니다. 우리가 싫으면 차라리 칸쿤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만 죽이라, 이 말입니다."

사내가 펑펑 눈물을 쏟았다.

안타깝긴 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김현은 백록담에다가 손을 뻗었다. 왼손이 느리게 날아와서는 백록담의 물을 떠온다.

오목하게 구부린 의수가 무릎 꿇은 사내의 앞에 놓였다. 때마침 비춘 햇살이 의수에 고인 물에 반사되어 영롱하게 빛난다.

사내의 눈이 거기에 머물렀다.

바로 그때 의수를 기울였다. 맑은 물이 쪼르륵 소리를 내며 지면으로 낙하한다. 그걸 보고 사내가 절망에 찬 탄성을 터뜨렸다.

"아!"

한국인이라면 대부분이 아는 유명한 고사.

엎질러진 물.

대한민국과 김현의 관계도 그와 같았다. 재결합은 불가능했고, 서로가 서로의 사정을 봐주는 것도 불가능했다.

"야."

김애경이 미련이 남았는지 김현의 허리를 쿡쿡 찌른다.

무시하고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경태는 저희 팀의 일원입니다. 이건 이미 미국 대통령에게도 허가 받은 사항이니까 뒤집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외교 문제로 비화하고 싶지 않으면."

"아......"

사내의 얼굴이 절망으로 얼룩진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합니다. 김현 각성자께서는 우리나라가 정말로 멸망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관심이 없을 뿐.

아니, 오히려 멸망하질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비루한 처지에 빠지긴 했어도 그 잠재력만큼은 대단한 곳이니까. 세계 정상급 각성자를 몇 명이나 배출하는 나라 아닌가.

그런 나라를 멸망하게 놔두는 건 아쉽다. 수년 뒤, 혼돈계가 몽골을 집어삼키고 남하하여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동시에 공격하는 걸 생각하면 더 그렇다.

'변수를 더 만들 수는 없지.'

혹시라도 대통령이 미쳐서 외계종들과 보호 조약이라도 체결하면 곤란하다. 어느 정도 숨통을 틔워줄 필요가 있다.

물론, 공짜로는 안 되지.

"경태를 제가 데려가는 건 확정입니다. 하지만 뭐, 저도 조그만 도움을 드릴 수는 있겠지요."

"도움이라고 하시면......"

"조만간에 제가 훈련소를 설립할 겁니다. 원하신다면, 1기 교육생으로 대한민국의 각성자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훈련소?

사내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한다.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어서.

김현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피터와 에일리를 보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저 둘을 키운 그 교육 과정이구나! 하고.

피터와 에일리는 오디션 당시 꽤 화제가 됐었다. 그냥 평범하기만 한 둘이 침식 세계에 들어가서 곧잘 활약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 하루짜리 속성 교육을 마치고 그랬는데, 훈련소에서 정식으로 몇 주 구르고 나면 얼마나 대단해지겠는가.

침을 삼키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암요! 하고 말고요!"

"그럴 권한은 있으신 거죠?"

"당연하지요. 제가 나름대로 미르 부대의 상급자입니다. 미르 부대에 대해서는 제가 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통령님께서도 허락하실 겁니다."

"글쎄요, 제 조건은 아직 듣지 않으셨습니다만."

김현은 싱글싱글 웃었다.

사내가 눈을 굴리다가 묻는다.

"조건이라면......"

김현의 웃음이 짙어졌다.

"서해나 남해, 아무 곳이나 제게 섬을 하나 할양하십시오. 너무 작지 않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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