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훈련소 –1-
"그 무슨!"
사내가 펄쩍 뛰었다.
"할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영토 할양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 줄은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알지요."
뼈저리게 알지. 원 역사 자체가 할양과 조차를 빙자한 외계종의 인류에 대한 수탈의 역사였으니.
"제가 미국에서 받는 지원이 어느 정도인 줄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훈련소의 첫 입학생은 미군입니다. 미군에서 추린 각성자들이요. 지금 그들을 뒤로 미루고 대한민국의 각성자들을 교육시켜 드리겠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당연히 그 정도 대가는 받아야지요."
"으음!"
미국과 김현의 관계는 누구나 안다. 김현이 뭔가를 한다면, 첫번째로 수혜받는 것은 당연히 미국이어야 한다는 사실도.
그걸 감안하면 섬 하나 주는 건 사실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더더욱.
사내가 입술을 짓씹다가 말했다.
"제가 결정할 사항은 아닙니다."
"그러시겠죠. 상의해 보시고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아, 헬기가 왔네요."
투타타타타!
저 멀찍이에서 헬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미르 부대원들이 희망어린 얼굴로 일어나려다가 주저앉고 만다. 헬기의 오른편에는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붙어 있었으니까.
"가자, 경태야."
"네, 형."
헬기는 상공 5미터 쯤에 정지했다. 더 내려오지는 않았다. 당신들이라면 여기까지 충분히 오지 않느냐는 뜻.
그랬다. 이세희와 피터 말고는 모두 도약할 수 있었다. 이세희는 김애경이, 피터는 김현이 업고 뛰어올랐다. 웅장한 충격파, 혹은 거친 파도, 시커먼 어둠과 함께 여섯 명이 헬기에 탔다. 그걸 미르 부대원들이 지친 눈으로 올려다 보았다.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글쎄......"
확실한 것은, 지금 이대로라면 대한민국에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
쿠르릉, 쿵쿵.
어느새 먹구름이 낀다.
천둥이 치며 번개가 번쩍였다. 그 속에서 헬기가 멀어져 갔다.
"집에 데려다 줘야지?"
김현이 묻자 서경태가 우울한 얼굴을 했다.
"그냥 미국에 갈까 봐요."
"그래도 장례식은 치러야지."
"하아! 그렇겠죠?"
"그럼. 우리도 참석할게."
"정말요?"
"당연하지."
"고마워요. 형. 누나들...... 형이랑 누나들이 없었으면 전 정말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힘내."
"힘내, 경태야. 아버님도 하늘나라에서 웃고 계실 거야."
"고마워요, 누나."
장례식과 발인까지 며칠은 걸린다. 하루하루가 귀중한 때이지만 그 정도 시간은 낼 수 있었다. 7월 11일, 현재에는 김현의 손을 필요로 하는 곳이 없으니까.
제주 공항에 들러 미군기를 탔다. 목적지는 부산. 서경태의 고향이었다.
"경태! 야, 괜찮냐?"
"난 괜찮아."
"소식은 들었다. 힘내라, 힘들면 이 엉아한테 전화하고."
"됐거든."
부산에 도착하여 장례식장을 잡자마자 서경태의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대학교 친구들은 대부분 죽었다. 그래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친구들이 남아 있었다. 본래 쾌활한 성격이라 친구도 많았다. 그들이 경황 없는 중에도 장례식 절차를 밟아나갔다.
서경태도 이미 상처를 가슴에 품은 다음이다. 얼굴은 어두웠지만 곧잘 친구들에게 농담을 건네고 있었다. 친구들도 애써 웃으며 서경태의 등을 두드렸다.
한 꺼풀 성장한 게 눈에 보인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직접, 숫자로. 그 증거로 백록담 세계에서는 23이던 의지 능력치가 벌써 26을 찍고 있었다.
"저 분, 강하네요."
피터도 그걸 느꼈는지 한 마디를 했다.
"강하지. 그러니까 내가 여기까지 온 거 아니겠어?"
"호, 혹시 제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셨을 거예요?"
피터가 눈을 내리깐 채 김현의 눈치를 살핀다.
실소가 나왔다.
"구하러 가지 그냥 내버려 둬?"
"저, 정말이죠?"
"그럼!"
"와!"
피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에일리가 그걸 보고는 한 마디를 했다.
"단순하긴."
어느새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둘은 먼저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이 기회에 대한민국을 관광하겠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미국 밖으로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자정 무렵 어느 손님이 빈소를 찾았다.
까만 양복을 갖춰 입은, 다소 피곤한 얼굴의 손님.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다. 탈모가 왔는지 머리는 듬성듬성하고, 이마에 주름살이 더 깊게 패였다.
우연처럼 대통령과 김현의 눈이 마주쳤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대통령.
마주 목례를 해주었다. 그게 예의니까.
"서 하사,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다 제 책임인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안에서 대통령이 조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뜻밖에도 서경태의 미국행에 관련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분명히 가지 말라고 저지할 줄 알았는데.
오죽하면 서경태가 먼저 말을 꺼낼 정도. 대통령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휴우, 다 제 탓입니다. 그때 제가 서 하사에게 강권하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을...... 부디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 마음 가는 곳으로 날아가시기 바랍니다."
"가,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말.
서경태가 살짝 말을 더듬었다.
대통령은 빈소에 앉아 시간을 보내진 않았다. 경호원들 틈에 섞여 빠르게 빈소를 벗어난다. 다만 나가기 전에, 김현에게 짧게 목례만 보냈다.
그리고 경호원 한 명이 다가와 속삭인다.
"김 각성자님,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지요."
어차피 할 말도 있으니.
장례식장 근처에 24시간 하는 돼지국밥집이 있었다. 작고 허름한 곳인데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사람 한 명 없었다. 그곳에서 대통령과 국밥을 시켜놓고 마주앉았다.
"거의 한 달 반 만이지요?"
"그렇게 됐지요."
미국에 간 것이 5월말 정도였으니까.
대통령이 스스로 자신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그걸 단번에 들이킨다.
"휴우, 살면서 제 부족함을 이리 뼈저리게 느낀 것은 처음입니다. 김 각성자님 일도 그렇고, 이번 미르 부대 건도 그렇고...... 사실상 대한민국은 자가 방어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대통령에게는 중요하겠지만 김현에게는 흥미없는 이야기.
"그런데요?"
"음? 하하하. 역시 김 각성자님이십니다. 역시 단호하세요."
씁쓸한 웃음이 대통령의 입가를 스쳤다.
"알겠습니다. 과거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3차장에게 들엇습니다. 섬 할양을 요구하셨다고요?"
"예."
"할양이라,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하시는 말씀이지요?"
"잘 압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에서 떨어져 나와서, 오롯이 저에게 속한 섬을 원합니다."
"음...... 미국에 요구하지 않고요?"
그야 이미 거절당했으니까.
몇 번 운은 띄워 보았다. 하지만 김현의 열렬한 지지자인 미국 대통령도 이것만큼은 난색을 표했다. 단순히 섬을 구입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나, 개인에게 영토를 할양하는 것은 주권의 일부를 쪼개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그 뒤로는 묻어 두었다. 그러다 이번에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한 걸 보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너무한다고?
글쎄. 이번 김현의 요구는 김현에게만 좋지 않다. 대한민국도 분명히 얻는 게 있었다. 말하자면 서로 윈윈하는 것이고, 아주 좋은 거래이기도 했다.
"훈련소의 1기 훈련생 입학 허가라...... 혹시 몇 명까지 입학시킬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인 수준이라면, 얼마든지요."
"예? 그게 무슨?"
"수백 명 단위까지는 받을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파탄을 맞은 미르 부대를 재건하는 것은 물론 제 2, 제 3의 미르 부대도 만들 수 있으니까.
그 속이 뻔히 보여서 충고를 했다.
"아직도 각성자 특수 부대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대한민국에 있을 때 몇 번이나 했던 조언.
"각성자 특수 부대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수명이 다할 때가 머지 않았어요. 벌써 두 번이나 실패 하셨지만, 이번만큼은 옳은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으음!"
대통령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이 말뜻이 뭐겠나. 예전 김현과 대립했을 때, 그리고 미르 부대에 힘을 실어준 것을 말하는 거겠지. 대통령 본인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두 번의 실수를.
"혹시...... 아, 아닙니다."
대통령의 얼굴에 짙은 미련이 스친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김현이 할 말은 뻔했으니까.
"좋습니다. 그럼 각성자 1000명을 선발하여 보내겠습니다."
"1000명이요? 흠."
"안 됩니까?"
"아슬아슬하게 가능하긴 하겠네요. 좋습니다. 섬은 어딜 주실 겁니까?"
대통령이 손짓을 했다. 경호원이 널찍한 대한민국 전도를 가져온다. 남은 음식을 치우고, 테이블에다가 전도를 깔았다.
짚은 곳은 서해 남쪽에 위치한 한 섬.
연차도(허구의 섬입니다).
진도에서 서쪽으로 100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꽤 작아서 넓이가 1 제곱킬로미터 남짓했다. 주민들도 100명이 조금 넘게 산다고.
작은 섬이니 교통이 불편했다. 하루 한 번 작은 배가 들어갔다가 나오는 게 고작. 김현의 구상을 실현하기에는 완성맞춤이다.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긴 하겠습니다만, 어떻게든 성공시키겠습니다."
"계약입니다. 계약을 어기지 마세요."
"명심하겠습니다."
"참, 섬 인도 전에 주민들은 다 퇴거해 주시고요. 할양 절차도 서둘러 주세요. 최소한 이번 달 안에는 끝났으면 좋겠네요."
"허허, 그렇게 빨리요?"
"괴수 출현과 외계 도래가 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뭘 하시려고 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비밀입니다."
사실은 간단했다.
성혼 농장이라고 해야 할까. 그걸 만들려고 했다.
인공 침식 유도와 비슷하다. 다만 그것보다 훨씬 더 대규모로 이루게 된다. 세계 하나만 침식시키는 것도 아니고, 여러 종류의 것을 겹겹이 층을 쌓아서.
너무 멀리 짓는 거 아니냐고? 대한민국은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도 12시간이나 걸리는데?
풍운의 표가 있으니까.
각성소, 성혼 공방, 훈련소, 성혼 농장.
이걸 다 풍운의 표와 무진의 표로 묶는 거다. 이것이야말로 김현이 구상한 사업이자, 하나의 기업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차원 기업 정도 될까.
여기에 열여덟 세계에도 지점을 내면 진정한 차원 기업이 된다. 차원 간 무역을 통한 성혼 벌이가 결국에는 김현의, 인류의 힘이 되겠지.
대통령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곧 각성자들을 선발하여 보내지요. 이번에는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겠습니다."
"뭐, 잘해 보십쇼."
별로 기대는 되지 않았다. 정부에서 각성자를 선발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 입맛대로 휘두를 각성자를 모은다는 뜻이니.
김현과는 관계없는 일. 받을 건 받고 할 일은 하면 된다. 대담을 끝내고 일어나 휘적휘적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
호텔 객실에 배달된 아침 신문을 챙긴 참이다. 그걸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대국민 각성자 추첨?"
"뭐야, 그건?"
"각성자가 신청만 하면 내 훈련소에서 훈련 받을 기회를 준대."
"설마 아무나 다 신청 돼?"
"어, 그렇다네."
머리를 잘 썼다.
각성자 추첨과 동시에 각성자 등록제를 시행한다고 적혀 있었다. 대한민국이 특수부대 집중 육성에서 전국민 각성자 육성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순간이었다.
이건 아무래도 김현의 오디션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다. 사소한 행동 하나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걸 보니 재미있으면서도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돌아가자마자 훈련소부터 만들어야겠다.'
뼈대는 백일몽을 응용한 가상현실 체험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기본적인 전투 경험을 쌓게 하는 데에는 좋아도, 역시 실전만한 훈련은 없는 법이니까.
22세기의 저항군 기지를 떠올린다.
최소한의 공간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기 위해 설계되었던 기지. 당연히 훈련소가 딸려 있었다. 비록 자원과 기술의 부재로 그 정도까진 안 되어도 일반적인 지구의 훈련소보다는 훨씬 나은 걸 만들 수 있겠다.
도착하자마자 작업에 착수했다.
"잘 부탁합니다, 윌슨 씨."
"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과 성을 다 바쳐 일하겠습니다."
"헤이즈 양도 환영합니다. 잘 해 봅시다."
"네, 감사해요."
새로운 직원들을 뽑았다.
각성소를 전담할 직원들. 한철군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한 고연봉을 약속했다. 다들 판독 계열 성혼이 있으니 김현 혼자 각성소를 볼 때보다 더 높은 이윤을 뽑아내겠지.
아울러 훈련소 건설에 착수. 이곳에도 무진의 표가 적용된다. 백흔귀가 이번에도 참관을 하고는 탄성을 터뜨렸다.
[역시 선지자는 대단하군.]
"이제 알았어?"
이번에 훈련소 건설에 필요한 물건을 사면서 성혼을 꽤 많이 팔았다. 그 덕에 백흔귀가 전에 없이 부드러워졌다. 물론 탐욕은 저버리지 못했지만.
[멸성지경 성혼은 팔 생각 없나?]
"없다니까. 우리 팀원들 줄 거야."
[흠! 멸성지경부터는 경천지경까지와 조금 다르네. 그러지 말고 나한테 파는 게......]
"됐어, 됐다고."
8개의 4성 성혼은 일행 전원을, 더 나아가서는 다른 각성자들도 4성 등급으로 이끌 귀중한 물건이다. 이걸 팔아치울 수는 없었다.
백흔귀가 돌아간 다음 훈련소를 완성.
풍운의 표로 일단 세 거점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온갖 이계의 설비를 훈련소에 설치했다. 킹스 포인트의 성혼 공방만큼이나 별세계가 펼쳐졌다.
그리고 이때쯤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1000명에 이르는 1기 훈련생들의 명단이었다.
그걸 확인하고, 김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될 사람은 되는구나.'
명단 중간쯤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신필종, 박준.
원 역사에서 각각 신의와 유령 사냥꾼이라 불렸던, 김애경의 동료였던 이들.
또 있다.
정윤식. 건국대학교 앞에서 자신을 막았던 그 경위.
그리고......
주태일.
하은이의 아버지이자, 김애경의 전남편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