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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헌터사-72화 (72/200)

# 72

훈련소 –2-

'살아 있었네?'

김현이 기억하는 주태일은 허우대만 멀쩡하지 남자 구실을 못 하는 작자였다. 아니, 남자 구실을 너무 잘해서 문제일까? 아랫도리를 아무 곳에서나 휘두르고 다녔다. 그래서 김애경과 이혼을 했지.

아버지로서 잘 행동했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처음에는 하은이를 조금 보러 오더니 금방 의무를 내팽개쳤다. 하은이가 자기 아버지 얼굴도 모를 지경이니까.

비릿한 웃음이 치고 올라온다.

'아주 경술팔적이 다 모였고만, 다 모였어.'

전원이 모인 건 아니지만 경술팔적이라고 다 각성자인 건 아니니까.

그외에 미래의 랭커도 포함되어 있었다.

홍예화, 이관수, 문기상......

대한민국에서는 100% 무작위로 뽑았다고 하던데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김현이 그러했듯 잠재력을 파악하고 뽑은 건지 모를 일이다.

7월 20일쯤 되어 대한민국의 각성자들이 도착했다.

대한민국과 김현의 계약이 알려지면서 약간의 소요가 발생했지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주태일이 김현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처남, 오랜만이야!"

예나 지금이나 넉살은 참 좋다.

그래서 김애경이 반했었지. 진지하기만 한 자신에 비해 쾌활한 주태일에 끌렸으니까.

김현은 팔짱을 낀 채 주태일을 주시했다.

묵묵부답.

주태일의 얼굴에 잠깐 경련이 스쳤다. 그러더니 주위 시선을 의식하고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다가온다.

두 팔로 껴안으려고 하나 그냥 두고볼 생각은 없었다.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그 간단한 동작에 주태일의 균형이 흔들렸다. 어어 하는 사이 옆으로 넘어지고 만다. 백악관에서의 그때, 알렉산더 브라운이 그랬던 것처럼.

"처남! 뭐하는 짓이야?"

주태일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손가락 마디 끝이 날아가 주태일의 이마를 민다. 주태일이 당황하여 뒤로 밀려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난 댁 같은 매형 둔 기억이 없는데."

"야! 모르는 척 할 거야? 애경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김애경도 당연히 나와 있었다. 주태일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자 김애경이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돌렸다.

"다들 모이세요."

김현이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천둥이 치듯 목소리가 우렁우렁 사방에서 울린다. 동시에, 기이한 압력이 밀려들어 비행기에서 내린 각성자 전원의 두뇌를 압박했다.

각성자들이 겁을 집어먹고 김현을 본다. 그럴 만도 했다. 이명이 울리며, 두피를 누군가 쥐어짜듯 압박하고, 김현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뇌에 새겨지는 것은 대부분이 처음 경험했을 테니.

침착한 이들도 있었다. 미르 부대의 생존자들이다. 약 스무 명 남짓, 저번에 백록담에서 구했던 당시보다는 수가 줄었다.

아마 지원자만 왔겠지. 나머지는 치료 받고 있거나 전역했지 싶다.

"반갑습니다. 혼돈 성향 각성자 김현입니다."

"혼돈 성향?"

"요정이랑 환수 성향 아니었어?"

각성자들은 무질서하게 서 있었다. 몇몇은 김현이 말을 하건 말건 잡담을 나눈다. 군대가 아니니 규율이 없는 건 당연하지만, 이건 조금 너무하지 싶었다.

쿠우웅!

발을 굴렀다.

유형의 충격파가 땅을 타고 전달된다. 혼돈의 힘이 파도처럼 저 멀리까지 번져가자 각성자 중 상당수가 허우적거리다가 그 자리에 넘어졌다.

"우왓!"

"으아악!"

그걸 보다가 손뼉을 쳤다.

따앙! 따아앙!

둔중한 금속성이 울려퍼진다.

기이한 진동이 길게길게 퍼져나갔다. 인체의 세반고리관을 자극하는 진동이다. 김애경을 비롯한 김현의 일행은 혼력으로 스스로를 보호했지만 눈앞의 각성자들은 그런 요령이 없다. 귀를 막고 비틀거리는가 하면 견디지 못해 구토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마이갓."

참관하던 미국 장교가 입을 쩍 벌렸다. 김현의 박수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에게는 그냥 박수로만 들렸는데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 몰랐다.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일어나세요."

거의 다 반응이 없다. 얼마 안 되는 미르 부대 출신 각성자들과, 눈빛이 예리해 보이는 이들만 일어났을 뿐.

다시 박수를 치는 김현.

구토하는 각성자가 더욱 늘어났다. 일어나라고 재차 말하자 이번에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인다.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뭘 말입니까?"

"저흰 훈련 받으러 온 거지, 이렇게 기합 받으러 온 게 아니거든요?"

제법 당차게 외치는 여학생.

여기저기서 옳소! 하고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김현은 싱긋 웃었다.

"그럼 돌아가세요."

"뭐, 뭐라고요?"

"돌아가시라고요. 제가 알기로 여기 계신 분들 모두, 대한민국에 10원짜리 한 장 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행기 타고 미국까지 와 봤으면 됐잖아요? 돌아가세요. 전 아쉬울 거 없습니다."

1000명을 훈련시켜 준다고 했지, 그들을 모두 졸업시켜준다고는 안 했다. 여기 있는 1000명이 다 돌아가도 손해 볼 건 없었다. 그게 계약이니까.

"채, 책임감이 없으시네요!"

"네, 저 책임감 없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세요."

여학생이 또 입을 벌리려고 한다.

귀찮았다.

두 팔을 날렸다. 날아간 팔이 여학생의 어깨를 양쪽에서 쥔다.

"이거 놔!"

여학생이 발버둥치지만 당해내기란 불가능.

팔이 여학생을 들어올려 각성자들 사이에서 끌어냈다. 따로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미군들이 달려온다. 우악스럽게 여학생을 제압해서는 비행기로 끌고 갔다.

그리고 기다리던 미국 국적 각성자 한 명이 합류.

대한민국의 각성자들이 이건 뭐냐는 듯이 쳐다보자, 김현은 의수를 회수하고는 설명해 주었다.

"제 훈련소의 1기 훈련생 정원은 1천 명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용단을 내린 까닭에 우선 배정을 했지요. 하지만 제가 받는 게 있으니 미국도 배려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낙오자가 생기는대로 미국에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누구든, 몇 명이든 좋습니다. 원하시는대로 돌아가세요. 중간에 포기하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포기하시고요. 안 말립니다."

멍석을 깔아주면 하던 짓도 안 하는 게 사람 심리.

웅성거리며 서로의 눈치만 본다. 아까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고함을 쳤던 이도 마찬가지.

"그리고 이 시간 부로 훈련소에서 벗어나면 바로 퇴거 처리합니다. 명심하시고 모두 절 따라오세요."

훈련소에는 아무것도 없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훈련소를 둘러싼 높은 담장이 전부. 심지어 그 흔한 막사도 존재하지 않았다.

김현이 훈련소의 중심, 휑한 공터로 발을 옮겼다. 각성자들이 웅성거리다가 따라온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들이 눈을 의심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저 앞 김현의 몸이 안개처럼 녹아 스러진 것.

"어?"

"뭐야 시발?"

"어떻게 된 거?"

자연히 발이 멈췄다.

김애경이 선두의 각성자들을 노려보았다.

"뭐해요? 들어가지 않고?"

"그, 그게......"

"그냥 눈에서 안 보이게 된 거니까 신경쓰지 말고 가요. 얼른!"

김애경도 김현에게 묻혀서 그렇지 그 기세가 장난이 아니다. 성난 암호랑이를 보는 듯했다. 각성자들이 기가 죽어서는 슬금슬금 앞으로 움직였다.

금세 김현이 사라진 곳까지 도달한다. 자연히 안개 영역이 펼쳐지며 그들을 감싸 안았다.

"우와!"

"어어! 이건 또 뭐야?"

"으아악! 누가 나 좀 잡아줘!"

각성자들이 들어온 곳은 기이한 공간이었다.

우주와 같다.

먹과 같은 어둠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와중에 별빛이 은하수처럼 도도하게 흘러갔다. 가히 무한에 가까운 곳. 더구나 중력이 없어 몸이 저절로 떠올라 이리저리 흘러다녔다.

"이쪽으로 오세요."

김현이 수평면 저쪽에서 손짓을 했다. 각성자들이 보기에는 커다란 별무리 가운데에 김현이 파묻힌 것처럼 보일 터였다.

"어, 어떻게 가지?"

"어어! 움직인다, 움직여!"

어떤 각성자들은 혼란스러워하고, 또 어떤 각성자들은 금세 적응하여 김현 쪽으로 나아갔다.

서경태가 헤엄치듯 공중을 날아다니며 소리쳤다.

"그냥 가겠다고 생각만 하시면 됩니다. 가고 싶은 방향만 또렷하게 생각하세요!"

이곳에서 이동은 오로지 의지에 따라 이뤄진다. 의지가 약하면 평생 여기서 표류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정도로 의지박약이면 애초에 고통을 참아내며 각성했을 가능성이 없지만.

각성자들은 이내 적응하여 김현이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미국의 참관 장교도 마찬가지였다.

김현은 도착한 순서대로 별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자, 여기 숙소입니다."

"네? 으아아!"

별을 받아든 각성자가 비명을 지르며 별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그걸 보더니 각성자들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선다.

"왜들 그래요? 공간 안의 공간 처음 봐요?"

"처, 처음 보는데요."

"영화나 소설에서 많이 나오잖아요?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시간 없어요."

각성자들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때마다 별을 날렸다. 별에 닿은 각성자들이 비명과 함께 흡수된다.

다행히 몇 분 지나지 않아 하나둘 복귀했다. 모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대박!"

"각성자님, 이거 저 주시면 안 돼요?"

"안 됩니다. 훈련소 안에서만 쓸 수 있어요."

"아쉽다......"

별 안에는 거대한 대저택이 들어 있다. 침실은 화려하고 식당에는 24시간 맛좋은 음식이 공급되며, 수영장과 골프장, 영화관이 딸려 있는 대저택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미국 거부의 대저택이라고 보면 되겠다.

사실은 환상. 별이 담은 이공간은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크기에 불과했다. 어쨌든 꿈을 꾸는 동안 영양 보충과 노폐물 배설, 피로 회복을 다 해주니 숙소는 숙소 맞다.

"다들 별을 받으셨죠? 별을 자기 이마에 붙여 보세요."

눈치를 보다가 한명씩 이마에 별을 붙인다. 순간 별이 반짝이며 각성자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피터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고생 좀 하겠다."

"그래도 이게 첫 훈련에는 최고지. 너 기억 안 나니? 처음에 좀비랑 싸웠을 때......"

"으아아! 말하지 마세요, 말하지 마요!"

피터가 기겁을 하며 두 손을 휘저었다.

잠시 기다렸다.

역시나 반응이 있다. 각성자 하나가 구역질을 하며 깨어난 것.

"우웩! 우웨에엑!"

훈련소 1층, 가장 아래쪽은 예전에 피터와 에일리와 겪은 백일몽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다만 불사계의 좀비만 나오지는 않는다. 열여덟 세계가 각성자마다 다르게 선정이 된다. 바로 각성자 성향에 따라서. 환수 성향이면 환수계 괴물이, 혼돈 성향이면 혼돈계 괴물이 나온다는 뜻.

대부분은 구역질을 하고 난리가 났으나 개중에는 침착하게 눈을 빛내는 이들도 있었다.

미르 부대 출신들.

그들이야 실전을 겪었으니 1성 등급 괴물쯤은 우스운 것이다.

"성공한 분들은 위로 올라가세요."

"어, 위로요?"

김현은 시범을 보였다. 각성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위로 쭉 솟구쳤다. 그걸 따라 각성자들이 상승하는데, 낑낑대며 아래쪽에서 허우적대는 이들도 있었다.

"1단계 성공 못 하면 2층으로 못 올라옵니다. 분발하세요. 1성 등급 괴물 정도는 잡아야죠."

총 10층.

층수가 올라갈수록 난이도도 올라간다.

1층은 쉽다. 1성 등급 괴물 한 마리만 나오니까. 2층도 거의 비슷하다. 동시에 1성 등급 괴물 세 마리를 상대하면 끝.

쉰 명 남짓한 각성자들이 단번에 2층으로 올라왔다. 금세 2층을 해결하고 3층까지 치솟는다. 그러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묵직한 중력이 그들을 짓눌렀다.

"우웃!"

"몸이 무거워!"

"숨이 안 쉬어져!"

1층과 2층은 백일몽을 응용하여 훈련하는 곳이라면 3층은 고농도 혼력 상태에 적응하는 곳이다. 당연히 몸을 움직이기도, 호흡을 하기도 힘들고 감각에도 제한이 된다.

그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말했다.

"2층까지는 쉬웠지요? 3층부터는 조금 어렵습니다. 지금부터 별들이 여러분을 공격할 텐데, 그걸 피하거나 막기만 하면 돼요."

"네? 그게 무슨......"

"아, 시작됐네요."

위이이잉.

벌떼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시야 저편에서 별무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들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진다. 각성자들이 놀라 퍼덕거렸다.

"정신 차려!"

개중 강단 있어 보이는 남자가 소리쳤다.

"이러려고 그 지옥에서 살아 왔어? 최 소위님하고, 한 상사님이 이 꼴을 보면 뭐라고 하겠어?"

삽시간에 숙연한 분위기가 번진다.

누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해보자고!"

"저딴 괴물 따위가 우릴 어쩔 수는 없어!"

"그래! 가자!"

그렇게 나선 이들이 약 스무 명.

그들은 굳이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진형을 짜고 빛무리의 돌진에 대비했다. 방어 담당은 앞으로 나서고, 원거리 공격수들은 멀리서 성혼을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김현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장면.

민간인들도 미르 부대 출신 각성자들에게 휩쓸려 잘 싸우고 있었다. 별이 영활하게 움직이며 몸을 때릴 때마다 움찔움찔하면서도 자신의 성혼을 발현한다.

"이얍! 이얍! 죽어라, 이것들아!"

개중 유독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한 번 손을 떨칠 때마다 푸르스름한 전광이 화려하게 번뜩이며 별들을 쓸어버린다. 워낙 눈에 띄여서 각성자들이 은연중에 그 자를 중심으로 모이는 중.

"흥!"

김애경이 그걸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주태일. 나서기 좋아하고 이목 끄는 걸 즐기는 인물이기 때문에. 저렇게 성혼을 낭비하다간 곧 탈진하여 별들에 얻어맞고 1층까지 가라앉을 것이다.

"올라가자. 할 일이 있잖아."

"알았어."

1층과 2층에서는 전투 감각을 기르고, 3층에서는 실질적인 힘을 성장시킨다.

바로 능력치.

혼력 능력치가 15, 다른 능력치도 10대 초반을 찍어야 한다. 그래야 4층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각성자들이 거기까지 도달하려면 한참은 더 시간이 필요했다.

날아올랐다.

4층으로, 5층으로, 6층으로, 그리하여 9층까지.

"헤엑, 헤엑."

"헉, 헉."

여기부터는 김현의 일행도 힘겹다. 졸업 조건이 혼력 능력치 30에 다른 능력치 20대 초반이니까.

이걸 만족하는 건 김현의 일행 중에서도 김애경이 유일했다.

"여기서 놀고 계세요."

"으, 또요?"

"최소한 여기 훈련소는 모두 졸업하셔야죠."

이곳을 지나면 마지막 층만 남는다.

10층 성혼로.

8개의 4성 등급 성혼은 물론 100개 이상의 3성 등급 성혼을 이 공간에 녹인 후, 그것이 몽땅 집중되게 한 설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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