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주태일
그 인간?
누굴 말하는지 알겠다.
김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 인간이 왜? 하은이 보겠대?"
"어. 어머니가 안 된다고는 했는데 아버지가 문 열어준 것 같아."
"경호원들은 뭐하고?"
"어쨌든 하은이 아버지니까 막을 수는 없지......"
김현은 내심 콧방귀를 끼었다.
이혼하고 벌써 3년. 주태일은 임신한 김애경을 두고 바람을 피웠다. 하은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이혼 소송이 진행 중이었다. 그 뒤로 서너 번 얼굴을 비추고는 연락을 끊더니 이제 와서 뭘?
무슨 의도인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김현과 김애경이 워낙 유명해졌으니 그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거지. 원 역사에서 김애경에게 접근하여 랭커까지 올랐던 것처럼.
"어쩌지?"
김애경은 평소 단호하던 모습답지 않게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본인 생각으로는 당장 쳐내야겠으나, 아빠 없이 자라는 하은이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
"내가 처리할게."
"너......"
"아빠가 없으니까 걱정 돼? 잘 생각해 봐. 주태일 같은 아빠가 있는 거랑 없는 거, 뭐가 하은이한테 더 도움이 될까? 주태일이 다른 평범한 아빠들처럼 순수한 사랑을 하은이에게 줄 수 있을까?"
평범하기만 해도 된다. 능력이 없어도 좋다. 문제는 주태일이 김현의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가장 무책임한 남자라는 사실.
김애경은 모르겠지만 이 시점에 이미 다른 여자에게 아들을 하나 보았다. 그 여자도 버리고 도망다니고 있었다. 그게 알려지는 건 수년 후 주태일이 각성자로서 이름을 얻은 다음.
어떻게 됐느냐고?
매몰차게 버렸다. 돈 몇 푼만 던져주고서. 그 아들이 후에 인류 저항군에 합류하고 남긴 일기를 통해 알려진 사실이었다.
김애경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직 미련 있어? 그럼 난 손 뗄게. 알아서 해."
"그래도, 하은이 의견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은이?"
잠시 침묵했다.
하은이라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여느 어린아이 같았으면 아빠라는 존재만으로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하은이는 유령에 빙의되었다가 깨어난 후 전에 없는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하긴 각성했으면 이미 성인이지......'
전생에서는 그랬다. 신체 나이가 어려도 각성했으면 성인으로 취급을 했다. 김현, 전생의 아론이 5살에 신체 개조되고 바로 전장으로 나갔듯이.
"좋아. 하은이한테 물어보자."
"응? 아직 어린데?"
"어린아이라고 무시하지 마. 애들이 가장 정확하게 본다는 말도 있잖아."
"후, 알았어."
훈련생들에게는 자율 훈련을 하라고 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모든 것이 자동으로 돌아가니 김현이 할 것도 없다.
김현의 부모님은 펜트하우스 바로 아래층에 집을 받았다. 원래 김애경 앞으로 나온 곳에 들어간 참이다. 따라서 부모님 집에 가는 건 쉽다.
손을 허공에다가 휘저었다. 뿜어낸 혼력이 특정한 문양을 그리자 공간 전체가 반응한다.
바람이 불었다.
한 발짝 걷자 주위 정경이 변한다.
거대한 원형 공간.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차 있다. 기이한 유형의 바람이 사방을 돌아다닌다. 거기 몸을 싣고 목적지를 말하면 저절로 날라다준다.
1층은 대기실, 2층은 상담실, 3층은 각성실, 4층은 추출실 및 창고.
공간 왜곡을 통해 변화된 각성소였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부사장님도 오셨네요!"
직원들이 상담을 하다 말고 손을 흔든다. 마주 인사를 하고 빠르게 사무실을 벗어났다.
"이렇게 만들길 잘 했네."
"내가 뭐랬어?"
각성소를 나오면 바로 엘리베이터 앞이다.
부모님 집에 들어가자 주태일이 넉살 좋게 손을 흔들었다.
"여어! 왔어?"
아주 자기 집 안방이 따로 없다.
겉옷은 벗고 메리어스만 입고 있었다. 소담하게 썬 과일을 앞에 두고 드러누운 게 예전에 보던 모습 그대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낯빛이 별로였으나 하은이가 앞에 있는 까닭에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엄마!"
하은이가 반색을 하더니 달려와 김애경에게 안긴다. 김애경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유, 우리 하은이. 잘 놀고 있었어?"
"응! 응! 근데근데 엄마엄마, 저 아저씨가 진짜 우리 아빠야?"
하은이가 낯설다는 눈으로 주태일을 본다.
주태일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요 녀석, 아빠를 오랜만에 봤더니 그세 다 잊어버린 거냐? 하은아, 정말로 기억 안 나니? 아빠가 하은이 꼬물거릴 때 하은이를 얼마나 예뻐했는데."
신생아일 때 본 걸 누가 기억한다고 그래?
하은이는 눈만 깜빡거렸다. 그리고 대답을 재촉하듯이 김애경을 올려다보았다.
"맞아, 네 아빠야."
"흐응......"
눈을 가늘게 뜨더니 콧소리를 낸다.
또래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묘하게 성숙한 행동.
"진짜 아빠면 왜 우린 따로 살아? 원래는 아빠랑 엄마랑 같이 살잖아."
대한민국에 있을 적 어린이집에서 배웠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핵심을 짚는다.
주태일이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같이 살 거야."
"뭐?"
"애경아?"
어머니와 아버지가 깜짝 놀란다. 그리고 정말이냐는 눈으로 김애경을 돌아보았다.
김애경이 인상을 썼다. 그 하나 만으로, 조금 전 말이 합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 저 화법.
예전에도 저랬지. 항상 들어주기 힘든 요구를 먼저 한다. 그리고 수위를 조금씩 낮추는 것이다. 이번에는 돈이 될 수도, 성혼 관련 요구가 될 수도 있다.
"같이 살아?"
하은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묻는다.
"하은이도 좋지? 아빠랑 같이 살면?"
"응! 좋아!"
주태일이 어떠냐는 듯 빙글빙글 웃음을 흘린다. 김애경이 옆에서 치를 떠는 게 느껴졌다. 오래 전, 이혼할 당시의 모습이 지금의 주태일과 겹쳐 보이는 까닭에.
이 작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하은이를 함락시켰다면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처리할 수 없다. 완력으로도 마찬가지. 이 집안의 가장 강한 권력자는 하은이이니까.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어린아이를 이용해서 이득을 보겠다고?
그럼 나는 갓난아기를 이용해주지.
"태식이는 어쩌고?"
여유롭게 과일을 집던 주태일의 손가락이 잠깐 경직됐다.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하은이를 돌아본다.
"아빠가 많이 무심했지? 이제부터는 그러지 않을게. 내일 놀이공원도 가자. 어때?"
"와, 놀이공원이다!"
애써 무시하는 주태일을 향해 비죽이 웃어 보였다.
"주태일. 태식이는 어쩌고? 설마 하은이한테 그랬던 것처럼 태식이도 버리려는 건 아니겠지?"
"삼촌, 버리는 게 뭐야?"
혼력까지 불어넣어 낮게 깔아내린 일갈이다. 가족들의 뇌리에 화인처럼 박혀들었다. 자연히 하은이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묻는다.
태식이.
그 이름만으로도 부모님과 김애경은 사정을 짐작했다. 부모님은 벌레 보는 듯한 눈으로 주태일을 노려보고, 김애경은 숫제 눈에서 불똥을 튀겼다.
"너 이 자식! 또 더러운 짓을!"
"무, 무슨 소리야? 태식이? 그건 또 누군데?"
"누구긴. 당신 아들네미지. 지금은 대구 살고 있지 아마? 그, 박미혜라고 하는 분? 조만간 당신을 찾아올 텐데, 핑계거리라도 미리 생각해 두지 그래?"
"더러운 자식!"
김애경이 하은이를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이어 암호랑이 같은 눈으로 주태일을 쏘아본다. 그 눈빛이 하도 독살 맞아서, 주태일이 잠깐 움찔했다.
한 번 눈을 굴려 분위기를 살피더니 뻔뻔스럽게도 활짝 웃는다.
"아, 그래. 기억났어. 그런 아이가 있었지. 왜? 내가 언제 걔를 버린데? 걔도 책임질 거야. 그렇다고 하은이를 책임 안 지면 안 되잖아? 그래서 책임지러 왔어. 늦게라도 아빠 노릇을 하려고."
"말은......"
김애경이 주먹을 몇 차례 쥐었다가 편다. 타오르는 눈길이 주태일의 입을 향하고 있었다. 한 대 후려쳐 입을 터뜨리고 싶다는 표정이다.
"태식이가 누구야?"
하은이는 여전히 천진하다. 김애경이 말을 잃고 낱말을 고르는 사이, 김현이 정확히 일러주었다.
"하은이 동생이야."
"하은이 동생? 진짜?"
"응. 아빠는 같은데 엄마는 다르니까 이복동생이겠다."
"이복동생?"
하은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니가 나서서 뭐라고 하려는 찰나, 하은이가 짝 하고 손뼉을 마주친다.
"나 그거 봤어! 그럼 아빠가 바람...... 바람 피운 거지?"
말을 하면서 서서히 얼굴이 어두워지는 하은이.
이미 육체적, 지적, 영적으로 성인에 필적할 만큼 성장한 뒤. 비록 상식은 부족할망정 각종 매체에서 쏟아지는 정보를 조합하면 속사정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아빠, 바람 피웠어?"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주태일의 철면에 균열이 생겼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직 어린 딸이 캐묻는 상황은 상상도 못 했던 것.
"바람이라니! 엄마랑 헤어지고 만났으니까 바람 아니야. 아니, 하은이 너 이런 못된 단어는 어디서 배웠어? 야, 김애경! 너는 애를 어떻게 키웠으면 애가 벌써부터 이런 말을 하고 그래?"
방귀 낀 놈이 성낸다더니.
김현은 통렬한 일침을 가했다.
"하은이가 누나 뱃속에 있을 때 만나던 아가씨는 최정경 씨 아니었어? 재주도 좋다. 그새 여자 바꿔서 임신시키고, 아들까지 낳았네."
"넌 뭘 안다고 그 따위로 지껄여?"
어쭈?
버릇 나오네.
김현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선입견은 무섭다. 인류 최초의 4성 각성자가 된 지금도 주태일의 머리 한 구석에는 방구석 판타지 소설가 김현의 기억이 남아 있었나 보다.
퉁!
손가락을 튕겼다.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한 마디씩이 날아간다. 주태일의 두 눈 코앞에 정지하여 웅웅거리며 진동했다.
"헉!"
주태일이 급히 물러나지만 무소용. 시야를 가득 채운 무쇠 조각이 자석에 붙은듯이 따라간다. 급기야 두 손으로 번개를 불러 후려쳤다.
고작 2성 등급 각성자가 어떻게 해볼 혼원의수가 아니다. 번개를 몽땅 집어삼킨 채 여전히 도도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하은아, 아빠 죽는다! 아빠 죽어!"
결국 하은이를 끌어당기는 주태일.
하지만 하은이가 보인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안 죽는데?"
"뭐라고?"
"삼촌은 그런 걸로 사람 안 죽여."
유령에게 빙의된 후 보이는 변화.
아이답게 천진하고 순수하지만 가끔 오래 묵은 귀신처럼 음습하고 교활한 면모를 보일 때가 있다. 사람의 심리를 간파하는 것도 마찬가지. 주태일이 엄살을 피워도 김현의 의도를 꿰뚫어보고 방관하는 것이다.
"하은아."
침착한 목소리로 불렀다.
"왜?"
"아빠, 필요하니?"
"우웅...... 응, 있었으면 좋겠어."
"엄마나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하은이를 사랑하지 않는 아빠여도?"
소름끼치도록 냉정한 말투.
하은이는 별 반응이 없다. 그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주태일만 난리를 피웠다.
"무슨 소리야? 내가 하은이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하은이를 못 보는 동안 얼마나 그리워 했는지 알기나 해? 응?"
하은이가 고개를 들어 주태일 쪽을 본다. 주태일이 손을 휘저으며 일어나 다가오려 하자 자기 볼에다가 손가락을 쿡 찔렀다. 그게 하은이만의 신호였는지 보랏빛 방어막이 일어나 주태일의 접근을 막았다.
"아빠는 하은이를 안 사랑해?"
처연한 그 말에 김애경이 뾰족한 외침을 토했다.
"야, 김현!"
"말도 안 되는! 하은아, 아빠 말 들어. 아빠한테 와, 알았지?"
당연히 주태일도 발광하듯 소리친다.
김현은 묵묵히 하은이를 보았다. 조금은 아프고, 조금은 담담한 눈동자가 마음에 들어온다.
아직 어린 하은이.
그러나 이미 성숙한 하은이.
유령의 빙의 탓에, 또한 성혼의 각성 탓에 하은이의 정신은 어린아이와 성인의 것이 공존하고 있었다.
"글쎄. 그건 하은이가 직접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하은이가 입을 삐죽인다.
주태일은 물론 김현과 김애경,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을 한 번씩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었다.
"삼촌 말이 맞아. 아빠는 하은이를 안 사랑해."
"너......"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그 말에,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 말에 김애경이 눈물을 짓는다.
꽉 안아주려 하자 하은이가 폴짝 뛰어 피했다.
그러더니 괜히 으시대며 말했다.
"엄마도 참, 나 이제 어린애 아니거든?"
"너 어린애 맞아."
"메롱이다!"
김현에게 혀를 내밀고는 발랄하게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오늘도 센트럴파크에 가서 백조 친구들이랑 놀겠다는 것이다.
그제야 김현도 손가락 마디를 원상복귀시켰다. 주태일이 김현을 노려보며 몸을 돌리자, 김애경이 손을 꺾으며 앞으로 나섰다.
"이 새끼, 하은이를 건드려?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잠깐만. 뭘 어쩌려고?"
"어쩌긴!"
주먹이 날아갔다.
입에 흉터 투성이의 주먹이 박힌다. 치아가 모조리 털리면서 심대한 충격이 주태일의 정신을 흔들었다. 제대로 버티지도 못하고 일격에 기절하고 만다.
김현은 경호원들을 호출했다.
"저거 치우세요."
"예, Mr. 김."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물건 집에 들여놓지 마세요. 아, 훈련소에 돌려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실격 처리 할 테니 대한민국으로 추방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애초에 무단 외출 시 실격이라고 고지했다. 전적으로 수작을 부리려고 한 주태일의 잘못이었다.
훈련소로 돌아왔다.
다시금 훈련에 골몰한다.
시간이 지나 7월 말, 겹경사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