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76화 (76/200)

# 76

몰이 사냥 –1-

미국 네바다 주.

핵 실험장.

김현은 그곳에 서 있었다. 그 뒤로 길쭉한 기둥이 보인다.

총 18단. 정육면체의 벽돌을 쌓아 만든 것처럼 생겼다. 벽돌 하나하나가 한 변의 길이가 1미터나 되는 만큼 높이가 상당했다. 다 합치면 무려 18미터에 달하니까.

기둥을 가동시켰다.

웅웅웅.

18개의 벽돌이 저마다의 색깔로 빛난다.

금색, 백색, 청색, 적색, 흑색, 녹색, 갈색, 자색......

그리하여 각기 다른 파장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괴물들, 그 중에서도 4성 이상의 강력한 괴물들만 끌어들이는 치명적인 유혹을 담은 채.

"얼마나 걸릴까?"

"데스 밸리에 암산거수가 나타났다니까 금방 올 거야."

"다 끝나려면?"

"모르지. 지구 반대편에서도 찾아와야 되니까."

이 기둥이 김현이 구상한 미끼다. 4성 떠돌이들은 지구에 나온 즉시 기둥이 뿜는 기운을 느낄 것이다. 자연히 미친 듯이 달려와 이곳을 덮치겠지.

피터가 불안한 기색을 보인다.

"우리끼리 28마리나 잡을 수가 있어요?"

"우리가 3성일 때 3성 괴물들 잡던 거랑 같아. 한꺼번에 싸우는 거 아니니까 두려워 할 필요 없어. 괴물들은 한 마리 한 마리씩 달려들다가 우리 밥이 될 테니."

사실 확실하진 않다.

지금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괴물들은 모두 떠돌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족속이지만 떠돌이들 나름의 연락망 정도는 있었다. 혼광 악어를 잡은 것도, 비철룡과 태산호를 잡은 것도 그걸 통해 알려진 것 아닌가.

"으, 전 방사능이 제일 걱정 돼요."

에일리가 투덜거렸다.

"축복 받았으니 괜찮아요. 3성 등급이면 방사능에 영향을 조금 받지만 4성부터는 다릅니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발전소 안에서 활개쳐도 아무런 영향이 없다. 4성 각성자의 자가 보호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니까. 축복까지 걸린 상태라면 더더욱.

두두두두두.

이때, 땅이 조금씩 울어 젖히기 시작했다. 황량한 대지에 먼지가 피어오르고, 바람이 불어와 발목 크기로 난 풀이 힘없이 허리를 숙였다.

[슈퍼 김, 데스 밸리에 출현한 괴수가 접근하는 중입니다. 길이 약 100미터, 키 10미터, 거대한 지네 형태인데 몸 전체가 바위로 이뤄져 있습니다!]

인공위성을 통해 주시하던 미군의 경고.

김현은 나직이 투덜거렸다.

"아, 글쎄. 슈퍼 김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요."

[10분 이내에 도착합니다!]

"좋습니다. 다른 괴수들 움직이는 것도 계속 알려주세요."

암산거수.

시화룡이 태양과 용암의 가능성을 품었듯이 대지와 산의 가능성을 품은 괴물이다. 그 내구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3성 등급 성혼으로는 생채기조차 내기 힘들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암산거수와 동급의 각성자가 여섯이나 모여 있다. 김현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곧 암산거수가 몰고 오는 먼지 구름이 뿌옇게 앞쪽을 가렸다.

"꾸우우웅!"

길고 긴 포효.

가볍게 몸을 풀었다.

"전초전입니다. 빠르게 처리하고 다음 괴물 기다리죠."

"조심해야 할 게 있나요?"

"없어요. 방심하지만 마세요. 특히 피터 너."

"에이, 슈퍼 김. 저도 예전의 제가 아니라고요."

피터가 반지를 매만졌다.

4성 등급 파멸의 반지.

반지가 빛나며 피터의 전신에서 혼력이 넘쳐흐른다. 1회에 한하여 공격력을 세 배로 증폭시키는 물건.

소총을 들어 올리는 피터.

방아쇠를 당기자 총구에서 타닥 하고 노란색 불똥이 튀었다.

광선을 쏘는 대신 그게 전부. 대신 달려오는 암산거수의 머리 위쪽 하늘에 누르스름한 빛이 생성되었다.

쾅! 쾅쾅쾅!

그 빛이 그대로 내리꽂힌다.

말 그대로 폭격. 우주 함대가 일제히 광선포 사격을 하는 듯한 광경.

광선 폭격이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한 줄기 한 줄기 낙하할 때마다 땅거죽이 뒤집혀 모래 먼지가 솟구친다. 아울러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다.

"꾸우우!"

물론 이걸로 어찌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암산거수는 단단하기로 정평이 났으니까.

"제가 막을게요."

에일리가 앞으로 나선다. 처음에는 걷다가 점차 속도를 올린다. 그러다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한다.

전신에서 물이 뿜어진다. 급기야 소용돌이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세력을 불리며 커진다. 나중에는 거대한 벽처럼 변한 다음, 해일이 되어 밀려간다.

해일만으로도 무시무시한데 회오리치듯 회전하고 있어 상당한 위압감이 들었다. 크기도 암산거수를 아득히 넘어서서 단번에 뭉개버릴 듯하다.

"꾸앙!"

암산거수도 위압감을 느낀 걸까.

몸을 웅크리며 포효한다. 등에서 가시가 돋았다. 투명하여 햇살을 이리저리 산란시키는, 그래서 기이한 빛깔로 반짝이는 괴상한 가시였다. 그 상태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아 더욱 속도를 높인다.

거대한 해일.

빛나는 가시 공.

규모를 키운 에일리와 힘의 집중을 꾀한 암산거수의 부딪침이다. 피터와 서경태가 어어, 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김현과 김애경은 침착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가시 공이 물의 벽으로 파고들었다. 순두부에 넣은 숟가락처럼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쏙 들어간다.

그게 노림수.

소용돌이가 극심해졌다. 전진하던 힘까지, 물의 벽을 유지하던 힘까지 전부 회전력으로 변환된다. 그리하여 흡사 용처럼 길어져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가시 공이 풀리며 거대 지네가 거기 휘말려 버린다.

"꾸오오오!"

등의 가시를 사방으로 날리고, 바위를 진동시켜 충격파를 쏘아도 아무 효과가 없다. 소용돌이가 만든 용오름이 암산거수의 거체를 높이 띄웠다. 원심 분리기에 넣은 듯 지독하게 휘둘러 대며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가 땅에다가 패대기친다.

꾸아앙!

메마른 대지에 꽂히자 범종 깨지는 소리가 난다. 워낙 강력한 충격에 암산거수가 몸을 길게 뻗고 부르르 떨었다.

서경태가 어깨를 으쓱했다.

"에일리도 대단하네. 자, 저 먼저 갑니다!"

땅을 박차는 서경태. 아직 거리가 상당한 데도 단숨에 좁힌다. 상처 부위에 돌진한 다음 유리검을 휘둘렀다. 검은 칼날이 겹겹이 일어나며 암산거수의 육체를 난도질했다.

"꾸우웅!"

암산거수가 발광하며 깨어났다.

서경태가 공격한 부위는 목뼈와 가슴뼈가 이어지는 부위. 그곳에 3개의 심장 중 하나가 있었다. 3개의 심장을 모조리 부숴야 하니 거기부터 공격하고 본 것이다.

"내가 1 심장."

그 말을 남겨두고 김애경이 몸을 날린다. 김현은 씁쓸하게 한 번 웃고는 암산거수에게 질주했다.

"꾸오오! 꾸우우!"

암산거수가 땅바닥을 뒹굴었다. 그러자 대지가 흔들리며 바위가 솟구치고, 그 바위들이 저절로 암산거수에게 달라붙어 상처 입은 자리를 대신했다.

"피터!"

"네, 네!"

피터가 멀리서 저격에 나섰다.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광선이 이제 막 달라붙은 바위를 때린다. 아직 엉겨 붙지 않은 시점에 떨어뜨려야 빨리 해체할 수 있으니까.

이세희도 가세했다. 불과 십여 미터 거리도 못 맞추던 이세희는 이제 없다. 그 먼 거리에서도 쌍권총을 쏘아 성 속성 공격을 꾸준히 맞추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매의 눈으로 전장을 살펴 일행이 공격에 맞을 것 같으면 멀리서 성혼을 맞춰 방어막을 씌워준다.

에일리도 끼어들었다. 소용돌이를 폭넓게 일으켜 암산거수의 바위 껍질을 뜯어낸다. 회전력 하나만큼은 가장 잘 다루는 성혼인만큼 꽤 쉬웠다.

"꾸어억!"

뜻대로 되지 않자 암산거수가 성질을 낸다. 몸을 살짝 웅크리더니 가시를 등 전체에서 뽑아냈다.

김현이 경고를 발했다.

"조심!"

다들 이런 것에 당할 때는 지났다.

피해는 제로.

김애경이 서리거인으로 공격을 막은 다음 나직이 코웃음을 쳤다.

"어디, 얼마나 단단한지 볼까?"

파랗게 물든 몸.

오른팔에서만 붉은 광채가 솟구친다. 이어 서리거인과 시화룡이 섞이며 투명한 광채로 변하고, 그것이 암산거수의 가슴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때마침 웅크렸던 몸을 푸느라 제대로 얻어맞은 암산거수.

구멍이 뻥 뚫린다. 흑회색 바위들이 우스스 떨어졌다. 심장을 강타하는 충격에 암산거수가 몸을 떤다.

아직은 온전한 심장.

그렇다면 더 때려줘야겠지.

"죽어! 죽어! 죽어!"

정확히 7연타.

짧은 순간 가장 강력하게 박아 터뜨리는, 그러면서도 호흡 한 모금으로 회복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그것이 전부 암산거수의 가슴을 강타했다.

"끄르륵!"

결국 괴상한 소리를 내고 만다.

가슴에 위치한 제 1 심장이 박살냈기 때문.

그러나 목 아래 위치한 제 2 심장과 아랫배에 위치한 제 3 심장은 온전하다. 암산거수가 위협을 느끼고 머리를 휘저었다. 이내 땅에다가 박고 탈출하려고 한다.

암산거수는 땅파기의 명수. 내버려 뒀다간 지하 깊은 곳으로 도망치겠지.

지금이야말로 김현이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경태야! 피터!"

"네!"

"알았어, 형!"

피터의 집중된 공격이 목 부근을 훑는다.

서경태가 거기 달라붙은 것도 바로 이즈음.

암산거수는 그것도 모르고 입을 크게 벌렸다. 땅을 베어먹으며 그 안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머리부터 목까지, 거대한 부위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동시에 높이 들어 올리는 꼬리.

카메라의 조리개 같은 항문이 뻐끔거리며 노출된다. 바위와 흙이 거기서 대량으로 뿌려졌다.

쌔애액!

날아가는 왼팔.

불길한 회색 불꽃에 휩싸여 있다. 바위나 흙 같은 건 모조리 소멸시키며 지나간다. 항문 안으로 들어간 다음, 김현의 인도에 따라 구불구불한 대장을 간단히 주파했다.

그리하여 아랫배에 도달, 심장을 꿰뚫었다.

푸확!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득한 시선으로 보는 암산거수의 내부. 유리검이 2 심장을 찔렀고 혼원의수가 3 심장을 꿰뚫었다. 막 땅으로 사라지려 하던 꼬리가 허공을 향한 채 뻣뻣이 굳는다.

오래가진 못했다. 꼬리가 축 늘어지며 땅을 때린다. 달라붙어 있던 암석이 우르르 쏟아졌다.

"경태야, 괜찮아?"

[으으, 네. 형, 저는 괜찮아요.]

통신기를 통해 대답이 들린다.

"나올 수 있겠어?"

[으, 아무 것도 안 보여서요...... 애경이 누나, 구멍만 조금 뚫어주실래요?]

[알았어. 현아, 방향이랑 거리 알려줘.]

김애경이 땅에다가 멸망포를 날렸다. 사람 하나 통과할 구멍이 생기자 서경태가 거길 통해 솟구쳤다.

"휴! 힘들었네요. 저거 성혼은 언제 회수하죠?"

"괴물들 다 잡은 다음에. 다음 괴물이 올 때가 됐거든."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출현했다는 언덕 거인이 부지런하게 뛰어오는 중이었다. 10분 정도 뒤면 도착할 거라고. 그때까지 짧은 휴식이라도 취해야 한다.

언덕 거인도 가뿐하게 격파. 그다음은 샌디에이고에서 나타난 움직이는 성, 환상미로성을 맞이하여 방어했다.

이놈은 제법 어려웠다. 군체 의식을 가진 괴물로 수많은 요정 괴물을 거느리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김현 일행 앞에서는 몸을 쓰러뜨리고 성혼을 헌납하는 신세가 되었다.

남은 것은 25마리.

얌전히 핵실험장에서 하나둘씩 잡았으면 쉬울 텐데, 떠돌이들도 지능이 있는지라 쉽게 당해주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저, 슈퍼 김. 괴수들이 이상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 그렇게 안 부르면 안 됩니까. 괴수들이 어쩐대요? 한곳으로 모이기라도 합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북미 대륙에 출현한 괴수는 총 다섯 마리. 두 마리가 남았고 남미 대륙에도 세 마리가 출현했다.

처음에는 네바다를 향해 뛰더니 모두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북미에서는 남쪽으로, 남미에서는 살짝 북동쪽으로. 그들의 방향을 분석한 결과 멕시코 북부에서 모이는 것으로 추정된다나.

다른 대륙도 마찬가지다. 아시아는 아시아끼리, 유럽은 유럽끼리, 아프리카는 아프리카끼리 모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로 다른 세계 출신끼리 연합을 해?

"형, 어쩌죠?"

"어쩌긴. 역공해야지."

처음부터 네바다에서 다 잡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서너 마리가 한계일 것으로 봤다. 세 마리로 끝난 것은 아쉽지만 얻은 것은 있다.

괴수들에게 김현의 존재를 각인시켰다는 점.

이제 괴수들도 누가 혼광 악어를, 비철룡과 태산호를 잡았는지 알았다. 자연히 김현을 잡아먹으려고 눈을 벌겋게 뜨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이동하는 대로 쫓아올 가능성이 컸다.

괴수들의 성혼을 챙긴 다음 자리를 떴다. 근처에 공항이 있어 이동하기 쉽다. 미군기를 타고 멕시코로 향했다.

멕시코에서 벌어진 일전.

5대 6의 대전이 벌어졌다. 산이 무너지고 강이 새로 생기는 규모의 대전이다. 괴수들은 강력했으나 김현 일행을 당할 수는 없었다. 무력도 무력이거니와 괴수들은 따로 논 반면, 김현 일행은 기민하게 서로를 보조하며 싸웠으니까.

그러자 남은 괴수들이 모두 뭉친다.

그 수가 무려 스물.

답이 안 나오는 숫자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