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몰이 사냥 –2-
정면대결은 필패.
지금 괴수들은 시리아 사막에 모여 있다. 하지만 조만간에 행동을 개시하겠지. 자기네끼리 협력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니까.
김현이 어디 있는 줄 아느냐고?
괴물들 중에도 투시 계열 성혼을 가진 놈이 있다. 예지 계열도 마찬가지다. 김현이 그러하듯, 둘을 함께 쓰면 김현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
"핵폭탄 날리죠, 그냥."
피터가 아무렇지도 않게 끔찍한 소리를 했다.
머리를 저었다.
"안 돼."
"왜요? 사막인데요."
"핵 날려도 안 죽을 가능성이 높아."
몇 번이나 말했듯이 괴물들은 바보가 아니다. 또, 강력한 성혼 덕에 영감도 예민하다.
핵에 얻어맞으면 4성 괴물쯤은 즉사한다. 하지만 자기들한테 근접하자마자 알아차리고 도망친다는 게 문제였다. 땅속으로 깊이 숨고, 초음속으로 하늘을 날아 도망치면 뭘 어쩔 것인가? 방사능 때문에 인류만 손해를 본다.
김현의 눈이 핑글핑글 돌아갔다.
"함정을 쓰자."
"함정? 그런 게 통해?"
"일반적인 함정이라면 안 통하지. 차원 함정을 쓸 거야."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계획이 조립되었다.
당초에는 괴수들을 잡고 느긋하게 성혼 농장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니 조금 서둘러야겠다.
인근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륙. 네바다 주의 핵 실험장에 있던 지표석도 분해하여 김현의 목적지로 향한다. 진도 서쪽에 외따로 존재하는 섬, 연차도를 향해.
"괴수들은 뭐하고 있습니까?"
[조용합니다.]
"다른 괴물들 상황은 어때요?"
[네? 아...... 미국 내에는 더 이상 살아 있는 괴물이 없습니다. 다른 나라까지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만, 알아보고 말씀해 드릴까요?]
"아뇨, 됐습니다. 알아서 하겠죠. 괴수들 움직임만 주목해 주세요. 움직이면 바로 알려주시고요."
[예. 건투를 빕니다.]
비행기는 최대 속력으로 날아갔다. 김현은 의자에 눕듯이 앉아 차원 함정을 구상했다. 약 3시간 뒤, 정신에 접촉해 오는 이가 있었다.
[안녕하신가.]
음울하고 탁한 음성.
익숙한 반향......
혼돈계의 괴물이다. 지금 시리아 사막에 있는 괴물 중 하나. 거대한 구더기들이 뭉쳐 파리 형상을 한, 혼암 파리라는 괴물이었다.
[괴물 놈이 무슨 일이지?]
속으로 집중하여 묻자 혼암 파리가 입맛을 다신다.
[혼돈을 통해 보았다. 네놈, 깜찍한 짓을 꾸미고 있더군.]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혼돈계는 이게 문제다.
동급의 성혼 중에서는 가장 강력하지만 침식이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의도나 지식이 혼돈의 저편으로 흘러들어가니까.
지구에 넘어온 혼암 파리는 제법 오래 묵은 녀석 같다. 혼돈에 접속하여 김현의 의도를 읽을 정도면.
하지만 김현은 걱정하는 대신 되레 여유를 부렸다.
[자신 있으면 막아 보던가. 너희 떠돌이들은 모두 이곳 행성에서 뼈를 묻을 거다.]
[후흐흐...... 먹잇감을 늘려준다니 고마운 일이지. 차라리 우리에게 공물을 바치는 게 어떠하냐? 그럼 너희 원숭이들의 종을 보존시켜줄 요량도 있다.]
[헛소리.]
연결을 끊지는 않았다. 되레 무한한 정보를 실어 보낸다.
심상 속에서 수십 곳의 정보를 떠올린다. 각종 치명적인 함정도 마찬가지. 김현의 뇌 안에서는 지구 곳곳이 흉험한 곳으로 변하여 괴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혼암 파리는 말이 없었다. 김현이 보낸 정보를 분석하고 있겠지. 임시로 손을 잡은 괴물들끼리 합심하여.
[가당찮은 짓을......]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김현의 행선지는 어디인가.
이것은 수 싸움이고 예지 싸움이었다. 김현은 전생에서 이런 걸 해본 적이 아주 많았다. 아무리 떠돌이가 오래 묵었고 무수한 각성자를 집어삼켰어도 싸움의 질이 다르다는 소리다.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부수기만 하던 자와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며 살려고 발버둥치던 자의 차이.
예지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거짓 속에 진실을 섞는 것. 그리고 다시 뒤트는 것이다. 결국 예지 계열 각성자는 진실을 알아낸다. 중요한 것은 시간. 김현이 원하는 시간에, 놈들이 대비되지 않은 시간에 진실을 까발려야 한다.
[거기구나!]
혼암 파리가 벼락같이 외침을 토한다.
[으하하하! 어리석은 놈! 파멸이 기다린다!]
연결이 끊어졌는지 기척이 멀어졌다.
김현은 싱긋 웃었다.
조금 전 기장에게 전달한 쪽지에 혼암 파리가 속아 넘어간 것이다.
[고비 사막으로 가죠.]
"정말 갑니까?"
"정말 갑니다. 아, 항로는 그대로 유지해주시고요."
기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주 간단한 속임수.
그대로 날아가다가 강하하면 그만이다. 지표석들도 미군기가 알아서 배달해줄 거고. 낙하산에 매달아 떨어뜨리면 섬에 착륙시키는 정도는 쉽다.
하지만 이걸 의식하면 안 된다. 김현은 고비 사막으로 가기로 아주 마음을 먹었다. 일행을 불러 모아 작전 회의까지 한다.
"차원 함정을 설치한다고 말했지? 이제부터 할 일을 알려줄게."
"아, 너 혼자 하는 건 아니고?"
"시간이 없어서. 모두 날 도와줘야 해. 그래야 시간에 맞출 수 있어."
괴수들의 움직임은 실시간으로 들어온다.
모두 동쪽으로 이동하는 중.
시간을 계산해 보면 김현보다 먼저 도착할 게 분명했다.
당연히 생각하겠지.
김현이 방향을 바꿀 거라고. 고비 사막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할 거라고.
그럴 생각은 없다.
오로지 고비 사막만 생각한다. 일행에게 내리는 지시도 차츰 구체화되었다.
"설치할 함정은 차원 미궁이야."
"미궁?"
"응. 18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괴수들을 분리하는 거지. 그리고 놈들을 각개 격파할 생각이야."
갓 태어난 침식 세계의 차원 분할을 응용한 함정이다.
"그게 말처럼 쉬워?"
"일단 끌어들이기만 하면 끝인데? 괴수들은 못 벗어나. 자기네 구역에서 머리만 찧어대다가 죽는 거지."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가 관건이네."
"그렇지."
"함정 설치할 시간도 벌어야 하고."
"내 말이."
김애경이 눈을 가늘게 뜨고 김현을 본다. 이게 진짜냐고, 진심이냐고 묻는 눈빛.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인 계획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답했다.
정말이라고,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에휴, 너 알아서 해.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된다고?"
"나는 무진의 표로 공간을 왜곡시킬 거야. 누나 역할이 가장 중요해. 백흔귀한테 무한의 거울을 살 건데 거기다 혼력을 최대한 불어넣어야 해. 그걸 무진의 표랑 연계하면 차원 분할이 시작돼."
"우리 둘 호흡이 중요하겠는데."
"당연하지."
사실 거짓말이다.
무진의 표와 무한의 거울을 연계하면 차원 분할이 일어난다는 것은 참. 그러나 이건 왜곡되는 공간을 겹쳐서 배치했을 때였다. 사실 김현은 차원 분할을 할 생각이 없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김현은 이런 식으로 일행 전원에게 역할을 나눠주었다. 설명만 듣고 보면, 수박 겉핥는 예지로 보면 차원 미궁이지만 실은 전혀 다른 함정이 될 기획을.
백흔귀를 소환하여 모든 재료를 구비했다. 백흔귀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한 마디를 했다.
[선지자, 또 재미있는 걸 꾸미나 보군?]
"그런 셈이지."
[내 상급자, 아니 이젠 내 선배지. 백마혼과 강력한 백명신, 그리고 위대하신 백염공께서도 그대를 주시하고 있다. 이번에도 기대하지. 상급 떠돌이 20마리면 보통 강력한 전력이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선지자 그대가 어떻게 될 것 같지는 않군.]
"기대해도 좋아."
[선지자의 시도가 잘 통하길 빈다. 이 모습으로 보는 건 지금이 마지막일 테니.]
"아하, 승진하나 보지?"
[으흐흐. 그런 셈이지. 다음에는 내 이름이 달라져 있을 거다.]
"축하한다. 다음에 보자고."
비행기가 어느덧 태평양을 거의 가로질렀다.
목적지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았다.
적당히 쉬어가며 기초 작업을 했다. 그래봐야 재료에 혼력을 미리 주입해 놓는 정도다.
아직까지 괴수들은 고비 사막에 도착하지 못한 상황. 김현이 도착한 다음에야 속도를 올려 달리겠지. 약 10분 정도 간격을 두고서 도착하게끔.
여기서 김현은 괴수들보다 한 발짝 먼저 움직였다.
"강하 준비하세요."
"응? 강하?"
"그래. 목적지는 바꾼 적 없어. 연막이었어."
"왜 굳이?"
"괴물들도 투시 계열이랑 예지 계열 성혼은 있거든. 지금쯤 내 의도를 알아차렸겠다."
아니나 다를까.
급박한 목소리가 일행 전원의 귀로 파고든다.
[괴물들, 속도 올립니다. 어? 어어...... 빠릅니다! 시속 1천 킬로미터! 고비 사막에 곧 닿습니다!]
"내 말이 맞지?"
고비 사막에서 연차도까지는 약 3600 킬로미터. 여기서 속도를 더 올려도 3시간은 걸린다. 그 정도면 함정을 설치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연차도, 곧 도착합니다. 도착 5분 전!]
"준비하자."
김현은 몸을 털며 일어났다. 이세희가 낙하산 가방을 메며 묻는다.
"괴수들이 연차도로 올까요?"
"옵니다. 올 수밖에 없죠."
"근처 민가나 도시를 습격하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김현 일행이야말로 최고이자 극상의 진미니까.
경쟁자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 어서 달려가서 한 입 깨물어 전부 먹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낚시하듯 민가를 습격하는 것도 생각해 보겠으나 지금으로선 불가능.
다만 김현이 설치하는 게 차원 미궁이 아니라는 사실은 깨달았겠지. 하나만 함정을 팠을 리가 없으니.
무진의 표, 무한의 거울, 불어나는 흙, 구름 씨앗, 바다 우물, 중첩 태양, 끝없는 심연 등등.
이걸로 만드는 게 차원 미궁인데, 제법 알려진 구조물 중 차원 감옥이라는 것도 있다. 일단 갇히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는 곳.
'차원 감옥을 만든다고 생각하겠지.'
사실은 다르다.
김현이 정말로 만들 건 성혼 농장이다.
지금 농장을 만들어서 뭐하냐고?
성혼 농장 초기형 중 아귀지옥이라는 게 있었다. 성혼 농장의 수많은 변형 중에서도 특출 나게 성혼을 잘 만드는 반면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지.
안에 들어온 건 다 녹여 성혼으로 만든다는 것. 괴물도 인간도 가리지 않았다. 이건 농장이 아니라 거대한 위장을 보는 듯했다. 일단 들어오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건 덤.
'이게 중요해.'
운명 석비와 역천석을 챙겼다. 본래는 각각 차원의 벽을 공고히 하고, 드나들 구멍을 만드는 물건. 이번만큼은 아귀지옥을 성혼 농장으로 개편할 열쇠가 될 것이다.
아무리 괴물들을 다 쓰러뜨려도 김현 일행까지 녹아 사라져 버리면 이야기가 안 되니까.
"가죠."
"고! 고! 고!"
줄을 지어 뛰어내린다.
∞ 모양으로 생긴 연차도. 서쪽이 조금 더 크고 동쪽이 더 작았다. 대신 서쪽은 높다란 산이어서 마을과 부대시설은 동쪽에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은 모두 퇴거한 다음이지만.
서쪽 산꼭대기에 내려앉는다.
가장 먼저 펼치는 것은 역시 무진의 표.
조그마한 종잇조각이 허공에 안개 공간을 만든다. 지금까지는 적당한 규모로 만들고 말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전력을 다했다.
비율로 따지자면 1만 배.
서울종합운동장이 송두리째 들어가고도 남는 크기였다.
"크다......"
이세희가 꿈꾸는 듯한 눈으로 허공에 뜬 안개 공간을 쳐다본다.
"누나, 부탁해."
"알았어."
무한의 거울이 세계를 복사한다.
그 아래에서 흙이 자라고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바닷물이 저절로 빨려들어 격랑을 만들고, 태양이 겹쳐진 채 세계를 분리하려 했다. 그걸 탁한 어둠이 새어 나와 방해한다.
김현은 이걸 모두 조율하고 있었다. 차원을 분할할 수도, 아예 격리하여 감옥을 만들 수도 있는 힘이 김현의 손에 감돌았다.
'지금부터 시작이지.'
단순히 아귀지옥을 재현해서는 안 된다. 괴수들이 도착 즉시 의구심을 가질 테니까. 겉으로는 차원 분할을 닮아야 하고, 투시해서 보면 차원 감옥이어야 하고, 속으로는 아귀지옥이어야 하니 김현으로서도 머리가 아팠다.
99륜을 돌렸다.
역으로, 예전에 농축 승화를 하던 때처럼.
혼돈과 화염의 마왕이 나타난다. 이 모습을 처음 보는 서경태가 입을 쩍 벌렸다.
"혀, 형?"
[후으으음.]
길게 숨을 불어낸다.
회색의 불꽃이 뿜어지다가 총천연색으로 변하며 길게 자지러졌다.
세계가 꿈틀거린다.
안개 공간 속에 재현된 세계가 어린아이 손에 놓인 찰흙처럼 어떤 형상을 갖추었다.
땅이 있고 하늘이 있으며 낮과 밤이 운행하고 외곽에는 바다가 휘몰아치는 세계. 안개 속에 있어서인지 흐릿하고, 수 겹으로 겹쳐 보인다는 게 특이하다.
그러나 그것은 위장. 실은 땅을 껍질로 삼고 하늘을 뚜껑으로 덮어, 안에 바다를 담은 호리병 형상의 세계였으니......
여기에 김현은 성혼을 뿌렸다.
땅에다가, 지금까지 얻은 4성 등급 성혼 20개는 물론이고 3성 등급 성혼 1백 개 이상에 2성이나 1성은 수천 개씩 마구마구.
일종의 양분이라고 할까.
불을 당기는 즉시 성혼이 펄펄 끓으며 세계를 아귀지옥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들어가죠."
무진의 표는 연차도의 산을 집어삼켰다.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근처에 떨어진 지표석을 수거해 다시 탑을 세운다.
도발.
조악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괴수들에겐 통했다. 외부에서 연차도를 관찰한 뒤 김현의 함정을 알아냈다고 자축한 다음 앞다투어 진입한다.
차원 감옥을 벗어날 방법 따위 진즉에 마련한 다음이니까.
"쿠오오오!"
"그르렁."
"쉬이잇, 쉬익."
괴수들이 차원의 벽을 가르고 나타난다.
목 없는 천사, 허기진 자, 늙은 마수, 화산룡, 혼암 파리, 푸른 늑대, 뼈의 뱀, 요정 고목, 천살귀, 숲 거인, 근원어, 태양조, 광명 군대, 그림자 왕, 투영괴, 용암군, 극점공, 심해 상어, 행성 파멸차, 거미 여왕.
그것들이 김현을 보고 으르렁거렸다.
김현은 두 팔을 벌려 괴수들을 맞이했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제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