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아귀지옥
혼암 파리가 비웃는다.
[그래, 네놈의 지옥이 되겠지.]
[후흐흐, 너는 내 것이다.]
[이 흉악한 것들아, 가만히 있지 못하겠느냐? 어르신 앞에서 무슨 장난질들이냐.]
4성 괴물쯤 되면 대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다만 인간을 먹이로 보는 탓에 대화를 시도하지 않을 뿐.
놈들이 흉악한 얼굴로 김현 일행을 노려보았다. 저마다 식욕이 돈다는 눈빛이다. 이미 자기네 입에 들어온 것처럼 잡아놓은 씨암탉 취급을 했다.
"누나, 선생님, 경태, 피터, 켄트 양."
하나하나 부른다.
"응, 말해."
"왜요?"
"듣고 있어, 형."
"네, 네?"
"말씀하세요."
위험하고 위태로운 상황.
하지만 목소리에 다들 힘이 살아 있었다. 김현을 믿기 때문이다. 최소한 무엇이라도 대비가 있을 거라고, 그냥 괴물들에게 당하지는 않을 거라는.
"성혼로, 기억나죠?"
"당연하죠."
"거기랑 비슷합니다. 명심하세요."
성혼로라면 훈련소의 10층. 혼력이 밀집되어 이들의 성혼을 연단하던 공간이다. 그거랑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일행을 뒤로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그리고 앞에 놓인 커다란 석비에 손을 가져갔다.
[흐흐흐.]
[쿠쿡.]
괴물들은 먹이의 재롱을 보는 눈으로 김현의 행동을 지켜본다.
김현의 얼굴에 비수 같은 냉소가 맺혔다.
운명 석비에 혼력을 불어넣는다.
째앵!
변화하는 세상.
안개 공간이 빠르게 수축한다. 땅과 하늘이 뒤집힌다. 땅은 밖으로, 하늘은 안으로 들어와 구형의 세계를 형성한다.
완전히 닫힌 세계. 누구도 출입할 수 없게 하는, 그래서 차원 감옥이라고 불리는 곳.
[크카카카!]
[으햐햐햐햐!]
괴물들이 비웃는다.
혼암 파리가 싱글싱글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흐리게 번뜩이는 눈에서 구더기 눈물을 몇 방울이나 떨어뜨리더니, 반투명한 날개를 마찰시키며 꾸물거린다.
[이 멍청한 족속아! 이따위 차원 감옥으로 뭘 하려고? 네 치기를 단숨에 부숴주마.]
윙윙윙윙.
날개를 더욱 거세게 비빈다. 파리 날갯짓 소리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징그러운 수염에서 기이한 광채가 번지더니 혼암 파리의 전신을 뒤덮는다.
일직선으로 날아오르는 혼암 파리.
몸이 빛으로 변해 사라진다. 광선이 하늘을 관통했다. 그리하여 차원의 벽마저 뚫는다.
팟!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혼암 파리가 부순 차원의 벽 맞은편, 하늘이 크게 울렁이며 깨지는 것이다. 그리고 빛으로 변해 사라진 혼암 파리가 바로 그곳에서 재구성되며 나타난다.
[으윽, 이게 어떻게 된......]
머리라도 부딪쳤나 보다. 혼암 파리가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린 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사자의 몸에 노인의 얼굴을 가진 늙은 마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박쥐의 날개를 펼치며 힘껏 도약한다. 몸 전체가 어둠으로 화하여 하늘을 관통하자, 역시나 반대편 하늘이 깨지며 늙은 마수가 튀어나왔다.
[교활한 놈! 뫼비우스 구조구나!]
김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정확하다.
보통 차원 감옥은 구 형태다. 단단한 껍질로 차원을 격리하여 나오지 못하게 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
하지만 떠돌이들은 차원의 벽 돌파에 있어서 전 차원계 최고의 전문가. 일반적인 차원 감옥으로는 가둬놓는 게 불가능하다. 특별한 껍질을 만들던가 특수한 구조를 짜내야 한다.
아귀지옥의 형태가 그랬다.
∞ 형상. 구와 구가 맞붙은 구조.
여기서는 차원의 벽을 깨도 맞은편 구로 넘어갈 뿐이다. 이 두 개의 구가 한 공간에 겹쳐져 있었다. ∞보다는 ◎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 개념적으로 무한의 구조를 하고 있으니 뫼비우스 구조라고 부를 뿐.
늙은 마수가 곧 평정을 되찾았다.
[뫼비우스 구조면 다인 줄 아느냐? 무엇이든 한계가 있는 법! 여기 있는 우리들이 반복해서 차원 도약을 하는 것만으로도 으깨진다!]
김현의 웃음이 짙어진다.
아귀지옥이 그렇게 간단한 줄 알아?
손가락을 내밀었다.
괴수들이 뭔가 싶어 볼 때, 화악 하고 불을 당긴다.
회색빛 혼돈의 불.
그것이 너울너울 떨어졌다. 지면을 파고 들어가 저 아래까지 단숨에 질주했다. 그리하여 이 세계의 심연, 가장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별의 힘에 접촉한다.
후우웅......
한 초월적인 존재가 있어 한숨을 내쉬는 듯한 소리.
기이한 진동이 세계를 뒤흔들었다. 아울러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이건......]
[혼력이다!]
성혼에서 비롯되는 모든 힘을 통칭하는 이름.
이건 그중에서도 특히 순수하고 강력했다. 괴수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코를 벌름거렸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뿐. 대지가 들썩이며 더욱 심하게 혼력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혼력이 이 조그마한 세계 전체에 가득 찬다. 나중에는 농도가 지나쳐 아예 끓기 시작했다.
"아앗!"
피터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언젠가부터 얼굴에 푸른 불꽃이 튀어 타오르고 있었다.
"혀, 현아!"
"언니, 조심해요!"
"으아악!"
"왜, 왜 이래요?"
피터만 아니라 다 그랬다. 피부가 노출된 곳을 중심으로 푸른 불꽃이 타오른다. 당장 아픈 것은 아닌데 그 모습이 너무 끔찍하고 이질적이라 공포스럽다.
다들 허둥지둥거릴 때 냉철한 목소리가 그들의 두뇌를 강타했다.
"정신 차리세요."
김현의 일침.
얼굴이 푸르게 불타고 있어도 두 눈만큼은 여전했다. 흑룡정 선글라스 뒤에서 희뿌연 불꽃을 토해낸다.
"자, 보세요."
가만히 입술을 깨무는 김현.
뭉클뭉클 혼돈의 힘이 일어난다. 그것이 김현의 몸 주위에서 흡사 방어막처럼 뭉쳤다.
혼력 기법의 한 종류.
물리적인 방어 능력은 약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는 아주 좋다. 그 증거로 푸른 불꽃이 김현의 얼굴이 아닌 방어막 주변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성혼로에서 수련한 거, 기억하죠?"
"기억은 하는데......"
"괜찮습니다. 연단이랑 비슷하면서도 다르니까. 그때는 최대한 받아치거나 흡수하거나 둘 중 하나였죠? 그냥 밀어낸다고 생각하세요. 혼력을 방출해서."
성혼로와 아귀지옥은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다른 점은 성혼로는 자신의 안에 들어온 각성자를 도와주려고 한다면, 아귀지옥은 뭐든지 다 녹여 흡수한다는 게 다를 뿐.
모두 눈을 감는다. 초조한 가운데서도 혼력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중구난방이던 것이 점차 그 형태를 갖추었다.
애초에 어려운 기법이 아니었다. 얼마나 유지하느냐가 관건이지. 최대한 적은 혼력으로 최대한 균일하게 퍼뜨려서 몸 대신 태울 혼력을 공급해야 한다.
"허억, 허억."
"으으으, 으윽."
일행이 숨을 헐떡였다.
"야, 오래는 못 버텨."
"괜찮아. 괴물들도 마찬가지니까."
"꾸어어엉!"
김현의 말에 화답하듯 괴수들이 길게 비명을 지른다.
모든 괴수가 푸른 불꽃에 휩싸였다. 하나같이 발악을 한다. 차원 도약을 시도하여 아귀지옥에서 도망치려 하는 놈도 있고 방어 성혼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놈도 있었다. 어떤 놈은 대지에다가 강력한 공격을 쑤셔 박기도 했다.
다 헛짓이다. 아귀지옥 내에서 소모하는 혼력은 아귀지옥에게 빼앗겨 그 힘이 되니까.
"저놈들만 다 죽으면 우리가 이겨."
"이긴다고? 여기서 나갈 방법이라도 있어?"
"비슷해. 단, 명심할 게 있어. 그 전에 우리가 죽으면 안 돼. 버텨야 해. 혼력 방어막 계속 유지해. 혼력 낭비하지 말고."
이렇게 당부를 하는 이유가 있다.
혼암 파리가 진물 흐르는 눈으로 일행을 돌아본다.
[이놈들, 이 벌레들...... 이 교활한 것들!]
아득한 시선을 통해 보이는 혼암 파리의 능력치.
[혼력] 49
오래 묵은 탓에 괴수들 대부분의 혼력 능력치가 40대 후반이었다. 김현 일행은 김현과 김애경을 제외하면 40을 못 넘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격차가 크다.
[이렇게 하는 건가?]
늙은 마수가 웅얼거리며 혼력을 뿜어냈다. 시커먼 기운이 휘몰아치다가 굳건한 방어막을 만든다.
[아, 이게 아니군.]
검은 구체가 옅어졌다.
속이 보이도록,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도 힘들게끔.
푸른 불꽃을 망토처럼 두른 마수. 다른 괴수들이 따라서 했다. 지능으로 따지면 평범한 인간보다 똑똑하고, 혼력 제어 능력 또한 최상위 각성자들보다 뛰어난 놈들이다.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푸른 불꽃의 침습에서 벗어나게 된다.
"저놈들......"
"괜찮아, 괜찮아."
혼력 능력치가 높으면 뭐하나. 덩치가 워낙에 큰 것을. 그로 인해 근력이나 체력이 높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크나큰 단점이었다.
[놈들을 죽여!]
괴수들도 그걸 잘 안다. 악다구니를 쓰며 덤벼들었다.
기이잉, 철컥.
길게 울리는 쇳소리.
피터를 잡아챘다. 몸을 날리며 소리친다.
"튀어요! 30분만 도망 다니면 우리가 이깁니다! 경태야, 선생님 챙겨!"
"예, 형!"
일행 중 피터와 이세희만 도망 다닐 능력이 없다. 여섯 명이 메뚜기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쿠어어엉!"
무려 일곱 마리의 괴수가 김현을 쫓는다.
혼암 파리가 날개를 비빈다. 기이한 압력이 김현을 짓누른다.
저항하지 않았다. 받아들였다. 그걸 혼원으로 흡수하여 팔다리로 보냈다. 더 강력한 충격파가 발생하여 김현을 앞으로 날려 보낸다.
그렇게 거리를 벌리는 김현.
"쿠앙!"
공간을 찢고 앞을 가로막는 푸른 늑대.
거대한 아가리가 벌어진다. 나직이 속삭였다.
"피터."
"네!"
허공을 찢는 누런 광선.
푸른 늑대가 입을 다물었다. 길쭉한 주둥이를 옆으로 틀어 광선을 튕겨낸다. 바로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까만 코를 걷어차자 푸른 늑대가 반사적으로 머리를 쳐들고, 그 힘을 빌려 이번에는 저기 오른쪽으로 날아갔다.
쌔애액!
바로 조금 전 김현이 달리던 그 궤적을 향해 용암 덩이가 날아왔다. 김현이 피한 탓에 푸른 늑대가 용암 덩이를 얻어맞고는 분노에 찬 비명을 토했다.
[잡았다.]
소리도 없이 그림자가 솟구친다.
그것이 김현과 피터를 동시에 껴안으려 했으나 막혔다. 김현의 손이 수십 조각이 나서 주위를 위성처럼 돌고 있다가 일제히 혼돈의 불을 내뿜은 까닭이다. 그림자 왕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섰다.
[우흐흐흣!]
요정 고목이 괴악한 웃음을 터뜨리며 앞을 막는다.
무시.
혼력을 가속한다.
성혼을 불태우는 푸른 불꽃이 늘어져 혜성처럼 보인다. 그 상태에서 지그재그로 치달린다. 날아오는 투명한 나뭇가지가 느릿느릿 보였다. 가늘디가는 생로를 돌파하며 달리자 나뭇가지가 푸른 꼬리만 때리고 말았다.
간단히 요정 고목을 돌파한 김현. 숲 거인이 옆에서 뛰어들어 김현을 덮쳤다. 아예 몸으로 찍어누르는데, 위압감이 엄청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정지해 버린다.
넘어지는 거체. 숲 거인의 눈이 김현을 본다. 속도를 계산하고 뛰어든 까닭에 너무 멀었다. 손을 내밀어 붙잡으려고 하지만, 가볍게 땅을 박차고 손목을 찬 후 몸을 돌려 달아난다.
[이 쥐새끼!]
분통을 터뜨리지만 늦었다.
그러나 김현의 질주도 종국을 맞이했으니......
[굳어라.]
한 마디 언령과 함께 김현의 발이 돌로 변하고 만다.
"우웃."
그대로 고꾸라지는 김현.
늙은 마수가 거드름을 피우며 걸어온다.
[역시 미물은 어쩔 수...... 아니?]
분명 넘어졌었는데 지금 보니 어느새 멀쩡하니 달리고 있었다. 그것도 땅 위를 미끄러지듯 빠르게.
김현은 속으로 늙은 마수를 비웃었다.
'보통 인간인 줄 알았어?'
발목 아래가 사라져도 문제가 안 된다. 어차피 통짜 의족이니까. 충격파는 발바닥만 아니라 발목에서도, 무릎에서도, 심지어 장딴지 위에서도 발할 수 있었다. 선입견을 품고 성혼을 발현한 게 늙은 마수의 패착.
다른 일행들도 잘 도망 다니고 있었다. 설령 잡혀도 요령 있게 빠져나오면 그만이다. 지금 김현의 일행은, 슈퍼 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충분히 그 정도 실력을 갖추었다.
그리고......
푸른 불꽃은 점차 기세를 키워갔다. 아니, 세계의 공기가 아예 변화한다.
이젠 숨을 쉬기도 어렵다. 산소는 없이 수증기로 가득 찬 것 같다. 언젠가부터 희미한 속삭임이 대뇌로 스며들고 있었다.
대뇌가 녹아 버릴 것 같다. 업힌 피터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화르르륵.
세계 전체가 불타고 있었다. 괴수들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진다. 그러다 마침내 한 괴수가 길게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거대한 포식자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소화되는 듯한 감각.
지글지글.
귀 안의 통신기가 녹아 없어진다. 통신기만이 아니다. 김현이 입고 있던 옷도,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도 녹아 한 줌 액체로 변했다. 또르륵또르륵 의족을 타고 내리는 소리가 불쾌했다.
본능처럼 걸음을 옮겼다.
세계의 중심, 운명 석비를 향해서.
"으어어......"
"끄흐윽......"
답답한 신음이 여기저기서 귀로 파고든다.
숨이 경각에 달한 피터의 울음도 함께.
"흑, 흐윽, Mr. 김...... 살려주세요."
"조금만 견뎌."
혼력을 불어넣는다.
일행 중에서도 가장 혼력 능력치가 떨어지는 피터. 역시나 한계에 달해 있었다.
걷는다.
푸른 화염으로 가득 찬 세계를 뚫고서.
정신과 육체, 영혼을 한꺼번에 불사르는 맹독 대기를 호흡해 가며.
시공간마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득한 시선 또한 먹통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육감만 믿어가며 전진했다. 그러다 무엇인가 거대한 것과 콩 하고 부딪쳤다.
[크크크...... 네놈도 별 수 없구나.]
혼암 파리가 김현을 인지하고는 웃는다.
그것도 잠시. 천천히 물 먹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 거대한 육체가 땅에 흡수되는 걸 보며 피터가 울먹거렸다.
"전 죽기 싫어요."
"견디라니까. 혼력 방어막 유지해."
"이제는 안 돼요......"
무시하고 걷는다.
이지러지는 공간 사이에서 드디어 운명 석비에 도달. 원래는 아담한 운명 석비가 성혼을 흡수하여 거인처럼 커져 있었다.
"현아!"
"형!"
"으으으......"
다행히 다른 사람들도 운명 석비에서 대기 중이었다. 에일리는 거의 졸도하기 직전이고 서경태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이세희만큼은 생생하다.
"선생님, 부탁합니다."
"네!"
둥글게 모여앉았다. 이세희가 천상 장막을 펼친다. 서로를 의지하며 혼력을 이세희에게 모여주었다. 잠깐은 안전지대가 형성되었다.
괴수들이 얼마나 살아남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견딜 뿐.
최대한 오래. 자기 자신을, 그리고 동료들을 믿으며 죽음과도 같은 시간을 보낸다.
세계가 방어막을 침식한다.
사각사각사각사각.
벌레 갉아먹는 듯한 소리에 정신이 흔들린다.
어쩌면 산성 용액을 뿌린 것 같기도 했다. 방어막이 쉬지 않고 출렁였다. 얇아졌다가 두꺼워지고, 다시 얇아졌다가 구멍이 뚫려 일행의 몸을 크게 베어먹는 것을 반복했다.
땅도 하늘도 없어졌다. 빛도 어둠도 없다. 출렁이는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짓밟을 뿐.
육중한 무게가 영혼을 쥐어짜고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성혼을 뽑아내려 발악을 한다.
"으으으으......"
누군가의 신음.
"힘내."
"우리가 옆에 있어."
또 누군가 격려를 한다.
버티고 버텼다.
죽음 직전까지, 하나둘 졸도하여 의식이 날아갈 때까지.
"더, 더는......"
심지어 이세희가 눈을 까뒤집었음에도.
방어막이 사라졌다. 세계가 덮쳐온다. 일행의 몸이 녹아내리기 직전, 김현이 크게 몸을 일으켰다.
99륜을 돌린다.
또다시 나타나는 혼돈의 마왕.
조심스럽게 일행을 품는다. 어미 새가 알을 품는 듯한 광경.
오래갈 수는 없는 상태.
김애경이 김현을 올려보다가 끼무룩 정신을 잃고 만다.
그게 신호였다.
[후우우......]
처량한 한숨이 세계 저편에서 흘러온다.
그 순간 혼돈의 주사위가 멈추며 오로지 한 장면만을 비추었다.
눈을 빛내는 김현.
역천석을 운명 석비에 꽂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