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도래 –1-
'이겼다.'
역천석에 미리 입력해둔 성혼 회로가 운명 석비와 결합했다. 그에 따라, 운명 석비가 찬란한 빛을 뿌리며 세계를 뒤집기 시작했다.
공간적으로는 겹쳐진 원, 개념적으로는 무한의 순환을 그리고 있던 세계.
꿈틀거리더니 저 멀리 확장된다.
호리병 같던 세계가 하나의 섬으로 변하고 있었다.
무한하게 펼쳐진 바다. 부글부글 끓는다. 거북이 등껍질 같은 대지가 그 위를 천장처럼 덮었고, 서늘한 구름이 대기를 대신하여 들이찼다. 그리고 겹쳐진 태양과 시커먼 어둠이 서로의 꼬리를 물며 회전하고 있었다.
"후욱, 후욱."
여전히 대기가 일행을 침습하고 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최후의 조작을 가했다.
기둥이 선다.
거울에 비춘 듯 판에 박은 듯한 18개의 기둥.
천장을 덮은 대지에서 자라나 아래의 바다까지 닿았다.
저마다 색과 모양이 달랐다.
날개 장식을 돋음새김한 금색 기둥, 악마의 뿔을 형상화한 검은색 기둥, 톱니바퀴를 쌓은 듯한 회색 기둥......
대기가 용트림했다.
기둥 표면이 촉촉해진다.
아울러 시야를 가로막던 구름이 점차 옅어졌다. 18개의 기둥마다 물방울 맺히듯 응결되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기둥 끝, 바다와 맞닿는 그곳.
작은 별이 태어났다.
영롱한 빛을 뿜는 그것.
점점이 낙하하여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 끝없는 심연으로, 최초의 불이 위치한 곳, 이 작은 세계의 열원이자 근원이 있는 곳으로.
그리하여 다시 녹아 세계를 덥힌다. 별의 힘을 증폭시키며 다시 끓어오른다. 나중에는 구름이 되고, 응결되어 기둥을 통해 성혼으로 태어나겠지.
"후아아!"
이것으로 끝.
김현은 긴장을 풀고 널브러졌다.
분명히 바다 위인데 가라앉질 않는다. 사람이 느끼기에는 적당히 미지근한 바다가 부글거리며 김현을 지지해 주었다.
"힘들었다......"
정말이지 한계의 한계까지 버텼으니까.
어쨌든 좋다. 괴수 28마리를 잡아먹는 것으로 성혼 농장이 완성되었다. 그것도 5성 등급 성혼 농장이.
하루에 원하는 성향의 5성 성혼 하나를 생산할 수 있다. 그게 아니면 9개씩 4성 성혼을 생산하는 것도 가능하다. 3성이나 2성으로 내려가면 9배수씩 늘어나고. 원래 목표는 하루 5개짜리 4성 성혼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초과 성과를 이룬 셈.
"으으으......"
"어윽."
바다에 누워 있어서일까. 일행이 하나둘 깨어났다.
하나 같이 탈진 상태라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기 얼굴을 만지고, 자기 몸을 더듬어 본다.
"사, 산 거야?"
"여기가 천국이에요?"
"살았다! 만세!"
실시간으로 성혼이 소화되고, 영혼까지 침식되는 감각은 실로 기괴하기 짝이 없다. 다들 웃으며 서로를 껴안았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허공에 감돌았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간단해. 처음에는 함정이었는데, 나중에는 그걸 바꿔서 농장으로 만들었어."
"농장이요? 그럼 성혼도 인공 생산이 가능하나요?"
"가능하죠. 그러니까 이걸 만든 거고요. 괜히 성혼 수백 개, 아니 수천 개를 긁어모은 게 아닙니다."
"얼마나 만드는데?"
"하루에 4성 성혼 9개씩 가능해. 3성은 81개고."
효율만 따지면 5성 등급 성혼을 사서 백흔귀에게 파는 게 낫다. 외계종들은 대개 1대 10의 비율로 성혼의 가치를 셈하니까.
하지만 당분간은 5성 등급 성혼 생산 여부를 숨길 요량이었다. 사나흘에 하나씩만 만들어도 좋겠지. 총 여섯 개를 만들 때까지만. 4성에서 5성에 올라가는 건 쉬우니 능력치만 제대로 올려놓으면 승급은 금방이다.
'성혼로를 강화할까?'
그것도 좋지. 아니면 모아 두었다가 농장에 재투자해도 좋다. 농장이 하루에 생산하는 성혼이 1개만 더 늘어도 지금 시점에선 엄청나니까.
"슬슬 나가자. 쉬고 싶어."
"그래, 고생했어. 다들 고생했어요. 앞으로 딱 며칠만 쉽시다."
"며칠만요? 조금 더 쉬면 안 돼요? 많이 고생했잖아요."
"그게, 조금 있으면 외계종이 정식으로 도래합니다. 그때부터는 많은 것이 달라지니까요. 외계종이 도래하는 날까지만 쉬기로 하죠."
김현이 처음부터 경고했던 일.
열여덟 세계의 도래.
그게 코앞으로 다가왔다. 원 역사에서는 2018년 8월 30일에 일어났으나 지금 상황을 보면 며칠 앞당겨질 가능성이 크다. 떠돌이들이 대거 침입하면서 차원의 벽이 얇아졌으니까.
언제쯤일까?
김현은 8월 25일을 넘기지 않을 거라고 보았다. 그 증거로 백흔귀 또한 저번 거래를 마지막으로 뉴욕에서 보자며 잠적했으니까.
손을 뻗었다.
역천석으로 세계의 법칙을 바꾸면서 여기 있는 일행의 혼력 인증을 진행한 다음이다. 차원의 벽이 갈라지며 푸르른 녹지가 펼쳐졌다.
성혼 농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연차도의 평범한 광경.
너 나 할 것 없이 뛰어들었다. 거친 풀 위에다가 몸을 눕힌다. 약간은 비릿한 풀내음과 흙내음이 코로 파고들었다. 서경태가 코를 벌름거렸다.
"아, 좋다......"
조금만 있으면 미군이 데리러 오겠지.
그때까지는 잠깐의 여유를 만끽하기로 했다.
앞서 언급했듯 연차도 동쪽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지금은 다 퇴거한 다음이라 유령 마을이 되었으나 집은 아직 멀쩡했다. 김애경이 마을 장독대를 뒤지더니 기쁨에 차 소리를 질렀다.
"야! 여기 봐! 김치 있어, 된장도!"
"퇴거하면서 안 가져갔나 봐."
"보상금은 많이 받았겠지?"
"그렇대요. 다들 수억씩은 받았다는데요?"
보급품은 적당히 챙겨온 참이다. 음식은 미군 전투 식량이 다였지만 마을을 뒤지니 쌀과 부식 조금은 건질 수 있었다. 격한 전투를 치른 다음이라 허기를 반찬 삼아 맛나게 먹어치웠다.
피터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묻는다.
"저, 며칠 쉬는 거면 집에 다녀와도 될까요? 팀에 합류하고 한 번도 못 가봐서요."
"어어, 그래. 잘 다녀와. 켄트 양은 어쩌실래요?"
"저도 오랜만에 친구들 보고 올게요. 그래도 되는 거 맞죠?"
"네. 외계종들이 도래하고도 당분간은 별일 없을 겁니다. 그동안 쉬지 않고 달렸으니 쉬어갈 때도 됐죠."
지금 당장 김현 일행을 필요로 하는 곳은 없다.
물론 세계의 극빈국 중에는 괴물의 범람을 당해내지 못하고 무너진 곳도 있지만 그걸 막기 위해 UN 평화 유지군이 발로 뛰는 중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세계 어느 나라든 자국의 이익을 중시하기 마련이고, 현재 범람에 무너진 극빈국은 개입해 봐야 이득 볼 게 얼마 없으니까.
'협회를 만들까?'
원 역사에서는 신필종이 주축이 되어 만든 세계 각성자 협회.
조만간 대사냥 시대가 열린다. 협회를 만들어 그걸 부채질하는 것도 좋겠다. 각성자 수가 늘고, 괴물 사냥이 활발해지면 결국 인류의 힘도 늘어나니까.
투타타타.
미군 헬기가 일행을 태웠다. 이세희가 하늘 위에서 뜻밖의 말을 했다.
"저도 가족들 좀 보고 올게요. 언제까지 뉴욕에 가면 돼요?"
아, 이세희의 가족도 대한민국에 있었지.
"아무 때나요. 저기 통해서 오세요."
슬쩍 연차도를 보는 김현.
"아, 저기도 연결돼 있어요?"
"그렇죠."
"그럼 저길 통해서 돌아가도 되는데......"
"아."
김현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짧게 탄성을 질렀다.
이세희가 방긋 웃었다.
"김현 님도 사람 같을 때가 있네요."
"아, 뭐, 그럴 수도 있죠."
너무 힘겨워서, 너무 지쳐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보다.
하긴 이 정도로 힘을 쏟은 것은 99륜 완성 이후에는 오랜만이었지. 성혼 공방에서 161개의 3성 등급 성혼을 농축 승화했을 때가 그나마 비슷했고.
"오랜만에 좀 누워가고 싶네요. 하늘 위에서까지 뭘 만들고 계획 짜고 하는 건 사절입니다."
"김현 님도 어디 다녀오세요. 해변 같은 곳에 가셔서 미녀들과 썸도 타고요."
"하하, 이 모양으로요?"
다들 옷이 녹아내려 미군 군복을 입은 상태. 슬쩍 그걸 들추자 배꼽 조금 아래 골반 부위부터 시작되는 혼원의족이 보인다.
성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라는 뜻.
갑자기 옆에서 에일리가 김현을 껴안았다.
"저는 그거 없어도 괜찮아요."
"됐습니다."
"같이 마이애미 비치 가실래요? 거기 제 친구들도 많은데."
"어휴, 됐어요."
김현도 성 경험은 있다. 단, 현생이 아닌 전생에서.
22세기에서의 성 경험이라......
그건 단지 씨 내림이며 유전자를 짜내기 위한 교합에 불과하다. 애정도 사랑도 욕망도 없었다. 실제로 김현은 자식을 낳은 적도 있었다. 그들을 병사로 다루어 사지로 밀어 넣기도 했고.
이러한 경험 탓에 정신적으로 거세된 것이나 다름없다. 김현이 쓰게 웃으며 거부하자 에일리가 입술을 삐죽였다.
"쳇."
"그러지 말고 하은이랑 디즈니랜드 가자."
"또? 저번에 그런 일을 겪고도?"
"뭐 어때. 우리랑 같이 가면 그럴 일이 없어."
"됐어. 난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격하게 쉴 거야."
"형,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서경태가 눈치를 보다 묻는다.
하긴 갈 곳이 없지. 하나 있던 가족은 죽었고, 친구들은 다 대한민국에 있으니. 그들을 만나러 가봐야 또 아버지 소리나 들을 테고.
"그러자. 가고 싶은 곳 있어?"
"글쎄요......"
"난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하와이 갈래? 해변에 누워 있다 오자. 헌팅 하고 싶으면 하고."
"좋아요!"
서경태의 얼굴에 화색이 번진다.
김애경이 머리를 흔들었다.
"남자들이란......"
거기서 남자가 왜 나오냐.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내릴 것 없이 공중에서 뛰어내렸다. 그런 둘을 뒤로하고 김애경과 피터, 에일리가 손을 흔들었다.
"잘 놀다 와!"
"선물 사오세요!"
"에이즈 조심해!"
"쿨럭, 켁켁!"
장난기 어린 에일리의 외침에 서경태가 기침했다. 잠깐 균형을 잃을 뻔한 걸 겨우 다잡는다.
"뭐 그런 걸 가지고 놀래?"
"으, 미국은 개방적이긴 한가 봐요."
"요즘도 우리 거리 나가면 장난 아니잖아."
미국의 여자들은 민망한 짓을 곧잘 했다. 팬티를 벗어 손에다 쥐여주는 것은 약과. 브래지어를 머리에 씌우려 드는 여자도 있었다. 당연히 김현은 기겁하여 도망쳤다.
서경태가 침을 꼴깍 삼킨다. 벌써 하와이의 해변이 저 아래 보이는 까닭이다. 하얀 모래 위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여자들도.
"생각 있으면 진짜 헌팅 해 봐."
"형도 같이, 어때요?"
"내가? 됐어. 몸이 이 꼴이라."
서경태의 눈이 슬쩍 김현의 다리를 훑는다.
"그거 치료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5성만 되면요."
"어, 그렇긴 한데 고민 중이야. 치료할지 안 할지. 워낙에 성능이 좋아서."
"애경이 누나처럼 장화 신고 다니셔도 되잖아요."
"에이, 그래도 의족만큼은 아냐."
이번에도 뼈저리게 느꼈다. 늙은 마수가 성혼을 발했을 때, 김현이 찬 게 장화였다면 그 자리에서 돈좌되어 집중 공격을 당했을 테니.
'인간의 몸은 약해.'
아직 시간은 있으니 천천히 고민해 봐야겠다.
혼돈계 성향을 유지할지, 다른 성향으로 바꿀지, 바꾼다면 인간의 육체를 안고 갈지, 아니면 개조하여 뜯어고칠지.
어느새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얏호!"
서경태가 낙하산 줄을 잡아당기더니 길게 환호했다.
반짝반짝.
와이키키 해변을 마주한 한 호텔 옥상에서 빨간빛이 반짝였다. 미리 얘기되어 있었다. 호텔 예약까지 다 해놓을 테니 이곳으로 오라는 것이다. 마이애미에서 그랬던 것처럼 해변으로 바로 갔다가는 시민들이 놀랄 수도 있으니.
김현이 서경태보다 일찍 내려앉았다. 정장을 입은 백인 남자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다.
"반갑습니다, 슈퍼 김. 저는 이 호텔의 지배인인 윌리엄 모리스입니다. 윌리엄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다 좋은데, 슈퍼 김이라고는 부르지 마세요. 그냥 Mr. 김이라고 불러요."
"어떻게 그런 결례를...... 알겠습니다, Mr. 김."
김현이 얼굴을 찌푸리자 그제야 호칭을 정정한다.
체크인을 한 후 밥은 룸서비스로 간단히 먹었다. 그리고 와이키키 해변으로 나가서, 적당한 곳에 돗자리를 펴고 눕는다.
둘의 행색이 시민들의 시선을 온통 잡아끌었다.
오랜만에 수영복을 입은 김현.
의수와 의족을 몽땅 내놓았으니까. 흑회색 금속이 태양광을 받아 번들거리니 그 정체를 모르면 이건 간첩으로 몰려도 이상하지 않겠다.
"슈퍼 김이다."
"슈퍼 김!"
"오마이갓. 이건 꿈이야."
"혼자 왔나 봐!"
서경태는 진작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득한 시선으로 슬쩍 훔쳐보니 금발의 미녀 둘이랑 낄낄대고 있었다. 하도 바쁜 시간을 보낸 탓에 마음의 상처도 조금은 아물어 가는 것 같다.
김현에게도 여자들이 들러붙었으나 가벼운 미소와 함께 거절했다. 대신 호텔에서 가져온 잡지 책 하나만 얼굴에 덮고 선베드에 드러누웠다. 호텔에서 날라 준 차가운 모히또 한 잔을 들이켜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좋다......"
이 얼마 만에 갖는 휴식인지.
그렇게 망중한을 즐겼다.
하지만 운명은 이 짧은 휴식조차 김현에게 허락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아직 정오.
뜨거운 태양이 해변을 달구는 시간.
어째서인지 기이한 어둠이 하늘 위에 번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이 시간에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보름달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