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도래 –2-
김현이 이상함을 느낀 건 세계가 이미 어둠에 잠긴 다음이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일식이다!"
"일식? 아니야. 저기 해가 떠 있잖아."
"달도 떴네?"
"1시도 안 됐는데 왜 이렇게 어두워?"
김현은 하늘을 보았다.
흑룡정 선글라스 때문일까. 하늘은 그저 부연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선글라스를 벗는다.
그 즉시, 기이하게 변한 하늘이 두 눈에 들어온다.
"이건......"
전생에서 직접 보지는 못한 광경.
대신 여러 기록물을 통해 보았고, 불멸의 돌 등을 통해 생존한 이들에게 몇 차례 들은 적이 있었다.
어째서 지금?
당혹감을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검기만 하던 하늘이 괴상하게 이지러진다. 그 틈바구니에서 하늘을 감싼 어둠과는 다른 색채가 풀려나왔다.
그리고 어떤 광경이 엿보인다.
천사들이 구름 위를 노니는 천상계.
악마들이 끔찍한 공포를 뿌리는 악마계.
고대의 지혜를 품은 용들이 웅크린 용왕계.
아득한 기이, 모호한 침식이 빚어내는 혼돈계.
전설 속의 환수들이 살아 숨 쉬는 환수계.
역천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자들이 모인 불사계.
귀엽고 친근해 보이는 작은 존재들이 사는 요정계.
저승의 일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유명계.
야만적이되 활력이 넘치는 괴수의 땅, 시원계.
늙고 늙은 거인들이 활보하며 종말을 기다리는 거신계.
빛 속에서 태어나 빛 속에서 사는 광명계.
우주의 암흑 물질이 뭉쳐 탄생한 암흑계.
형체를 갖추지 않은, 전기 신호로 뭉쳐 있는 무형계.
타오르는 대지, 용암 행성의 종족들이 결성한 염옥계.
얼어붙은 행성에서 사는 종족들의 모임인 빙백계.
바다 행성에서 진화하여 육지 종족과는 확연히 다른 해성계.
온갖 곤충이 모여 탐욕스럽게 진화하는 충왕계.
이미 생명체를 벗어나 기계 몸을 얻은 기갑계.
이렇게 열여덟 세계.
실로 생경한 경험이었다. 각 세계의 정경이 저 하늘 위에 펼쳐졌다. 그런데 그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듯 확 다가온다. 어찌나 생생하고 가까운지 환상 속 각 종족의 표정조차 알아볼 정도.
"외계종이다!"
"뭐야, 누가 영화 튼 거야?"
"영화는 무슨!"
환상 속 외계종들이 고개를 튼다.
뻐드득, 뻐드득.
그런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다들 부자연스럽게 목을 튼다. 마네킹의 머리를 강제로 돌리는 것처럼, 그렇게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점들이 생긴다.
상당히 많은 점. 적어도 백 개는 넘을 듯한.
환상이 비누 거품처럼 사그라지고, 오로지 그 점들만 남아 이쪽을 향해 쏘아졌다.
세보지는 않았지만 몇 개나 되는지, 김현은 이미 알고 있다.
108개.
열여덟 세계의 도래가 시작된 것이다.
"8월 20일......"
원 역사보다 열흘은 빠르게.
지금도 점들은 시시각각 커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차원의 벽을 통과하여 지구로 오는 중이었다. 정확히 24시간 후 지구의 대도시에 외계종의 거점이 닿게 된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해와 달이 동시에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열여덟 세계가 일제히 차원의 벽을 뚫는 까닭에 보이는 기현상. 24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정상으로 되돌아간다.
따르릉, 따르릉.
스마트폰이 울린다.
미국 대통령.
하여간 이 사람 행동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
"여보세요."
[아, 슈퍼 김! 혹시 지금 하늘 보고 있습니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좀 마시라니까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어쨌든 워싱턴에서도 해와 달이 같이 뜬 거죠? 하늘에 괴상한 것도 보이고요."
[그, 그렇습니다!]
현재 하와이는 오후 1시가 가까워진 시점. 워싱턴은 밤 7시 정도 됐을 것이다.
"제가 경고했던 외계 도래 현상입니다. 다만 제 예지로는 8월 30일은 되어야 했는데 이번에 괴수들이 대거 침입하면서 차원의 벽이 엷어진 바람에 빨리 일어난 것 같습니다."
[이런!]
김현의 예지가 빗나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미국에 오던 때부터 이미 하나둘씩 삐걱대며 빗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현이 만들어낸 것들이 자기 역할을 다 해서 영향력을 유지한 거였다. 김현의 무력이 각성자 중 제일이기도 하고.
[혹시, 또 변할 게 있습니까?]
"아뇨. 계획했던 것만 미리 시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빨리 워싱턴으로 와주세요. 슈퍼 김이 발표할 게 있지 않습니까?]
"후우, 그랬지요. 바로 호놀룰루 공항에서 출발하겠습니다."
[조치해놓지요.]
외계의 도래......
숨 쉴 틈조차 없이 급변하는 상황에 갑갑함을 느낀다.
이렇게 역사가 변한 이상 외계종들이 본색을 드러내는 게 더 빨라질 것 같다. 원 역사에서는 2년이었지만 한두 달 정도는 빨라진다고 봐야 했다.
'아냐, 최소한 석 달로 잡아야 해.'
역사란 강물과 같아서 한 번 탄력을 받으면 가속도가 붙어 급류가 되어 흘러가기 마련이니까.
1년 반.
김현은 기존의 계획을 수정했다. 5성 각성자의 양산을 반년 앞당겨 1년 반 안에 해치우기로 한 것.
머릿속이 헝클어진다.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멀리서 김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형!"
금발 미녀들과 기세 좋게 사라질 때는 언제고 급히 달려온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또 괴수 나오는 거예요?"
"비슷해. 택시나 잡자. 워싱턴으로 가야 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어느새 호텔 리무진이 달려와 둘을 태웠기 때문이다. 짐을 챙길 것도 없으니, 옷만 한 벌씩 얻어 입고 리무진에 타기만 하면 됐다.
질주하는 리무진.
공항에 가장 빠른 비행기가 수배되어 대기 중이었다.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비행기가 이륙했다.
[김현 님. 저도 뉴욕 도착했어요.]
대한민국에 남았던 이세희에게 연락이 왔다. 미국이 헬기를 빌려줘서 연차도를 통해 뉴욕으로 이동했다는 것.
"휴우......"
뒤늦게 후회가 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얌전히 미국에 가서 쉴 걸, 괜히 쉬겠다고 하와이로 강하를 했다고.
하와이에서 워싱턴까지는 약 9시간이 걸렸다.
도착하자마자 펜타곤의 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14시간 뒤, 2018년 8월 21일 18시에 외계종이 정식으로 도래한다는 거지요?"
대통령이 확인하듯이 묻는다.
김현은 서서히 머리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럼 뭐가 달라지는 겁니까? 예전에 말씀하시길, 처음에는 외계종들은 그냥 가만히 있다면서요."
"그렇지요. 이건 교두보입니다. 아직 거길 통해서 병력을 투사하지는 못합니다. 차원의 벽이 견고하거든요. 2년...... 아니 1년 반 정도는 상점 역할만 하는 게 답니다."
"상점이라......"
"다들 아시잖습니까? 침식 세계를 무너뜨린 각성자에게는 외계종들의 사자가 찾아오는 거요. 그리고 이들은 후원 계약을 맺으려고 하지요."
"예, 그래서 지금은 생존자가 나오면 후원 계약을 맺지 못하게끔 하고 있습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후원 계약을 맺어도 손해 볼 것은 없다. 문제는 외계종들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그때부터 투자한 만큼 뽑으려고 하니까.
"당장 닥치는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앞으로는 세계 침식으로만 괴물이 나타나지 않아요."
"그게 무슨?"
"차원문이 시시때때로 열립니다. 거기서 떠돌이들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가끔은 외계의 어느 한 곳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차원문이라고는 해도 고위 외계종이 통과할 정도는 아니어서, 하급 괴물들이 나타나 분탕을 치는 게 전부지만 위협적인 건 마찬가지죠."
특수 부대가 한계가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세계 침식은 어디까지나 제한이 있다. 대침식은 1달에 1번, 소침식은 10일에 1번 정도니까. 미리 알기만 하면 찾아가 시민들을 구출할 수 있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전국 방방곡곡에 차원문이 열린다면?
특수 부대만으로는 불가. 시민들 스스로가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각자 성혼을 각성하고 직접 무장해서.
"혹시...... 이번에 나타났던 괴수들도 출현할 수 있습니까?"
"당연하지요. 1성부터 4성, 어떤 괴물이든 가능합니다."
"헛!"
"맙소사."
"이거 큰일인데."
둘의 대화를 숨죽여 듣던 백악관과 국방부 인사들이 웅성거린다.
"대신 4성 괴물은 쉽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차원문도 크게 열리고요. 천리안을 통해 보시면, 차원문이 크게 열리는 곳에는 반드시 비정상적인 혼력 집중 현상이 나타납니다. 1성 괴물이 나오는 수준이면 찾기 어렵지만, 숙련된 감시자라면 사전에 간파할 수 있어요."
"으흠, 천리안의 수를 늘려야겠습니다."
"그게 좋죠. 위성도 더 쏘시고요."
"우주 정거장을 추가로 만드는 건 어떻습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외계종들은 지상에서 직접 나오지 우주를 통해 오지는 않거든요."
차원 도약 기술이 있는데 물리적으로 직접 날아올 이유는 없다. 고위 성혼은 일격에 우주선을 격침하니 더 그렇다.
대통령이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휴우, 그래도 각성자 등록제와 자경단을 시작해서 다행입니다."
"침식 유도지도 그렇지요."
"대통령께서 불철주야 노력하신 덕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저번 대선에서 대통령께서 당선되신 건 신께서 미합중국을 돌보셨기 때문이지요. 그 멍청한 여자가 당선됐으면 지금쯤 미합중국 호는 갈 곳을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었을 겁니다."
"하하, 알아주니 고맙습니다."
때가 이때다 싶어 측근들이 아부했다. 대통령은 싫지 않은 듯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완전히 빠지지는 않은 듯 두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미국은 외계종 도래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현재 미국 내의 각성자 수가 거의 삼백만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된다. 대부분이 1성과 2성이지만 그게 어디냐. 각 주마다 인적 드문 곳에 침식 유도 장치를 설치했으니 차원문에만 잘 대처하면 된다.
"각성자 협회는 어떻게 됐습니까?"
"실은 Mr. 브라운이 추진하고 있습니다. Mr. 스미스도 서명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알렉산더가 협회를 만드는 중이라고?
원 역사에서 변한 건 있지만 큰 줄기만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원 역사에서도 알렉산더가 전미 각성자 협회를 구성했으니까.
평가가 어땠더라?
알렉산더가 협회장을 맡았던 초창기에는 잘 돌아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알게 모르게 인종 차별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일선에서 물러나 히스패닉 출신의 한 각성자가 협회장이 된 다음 얼굴마담으로 활용된 후에나 제대로 돌아갔지.
"알렉산더라고요? 으흠."
김현이 탐탁찮은 얼굴을 하자 대통령이 난처하게 웃는다.
"슈퍼 김이 Mr. 브라운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다는 건 압니다만, 항간에는 조금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우려하는 목소리라면, 어떤 겁니까?"
"슈퍼 팀이 너무 많은 걸 가져간다는 거지요."
이민자 출신에, 외국인 혼성팀이라 그렇다.
외부자를 배척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 아무리 많은 이득을 봤어도 그렇다. 지금 김현과 김현 일행이 가진 권력만 해도 엄청난데 전미 각성자 협회라는 새로운 권력까지 주면 좀 그렇지않느냐는 것이다.
그 반발로 알렉산더가 대두되는 것인데......
'어, 잠깐만.'
이거 미국의 누군가가 생각해 볼 법한 논리다?
정치인들. 특히 대통령조차 모르는 비밀 조직을 움직일 정도로 강력한 정치인이.
김현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잘하면 꼬리를 잡겠는데?'
협회장 따위 솔직히 관심도 없다. 좋게 말해서 권력자이지 제대로 일을 하려고 하면 저임금 심부름꾼에 욕받이 역할이니까. 다만 알렉산더가 순순히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을 게 뻔하긴 하지만......
'수틀리면 다 때려 부수면 돼.'
저스티스 팀? 가디언 팀?
김현이 팔 하나만 써도 다 끝장낼 수 있다. 지금 지구에서 김현을 막을 수 있는 건 김현 일행과 핵폭탄 정도밖에 없다. 원거리 저격을 해도 혼돈의 주사위로 예지하고 가볍게 피할 판에 뭘 어쩌겠나.
"협회장이라, 멋있네요."
에일리가 눈을 반짝였다.
그래......
원 역사에서 에일리가 3대 협회장이었지. 순순히 넘겨주면 재미없으니 에일리를 밀어줄까?
"왜요, 협회장 하고 싶으세요?"
"음...... 나중에요. 전 괴물들이랑 일선에서 싸우고 싶어요."
"그러시다면야."
어차피 에일리 말고는 김현 일행 중 협회장에 도전할 인물이 없다. 김현은 이민자, 김애경과 이세희, 서경태는 외국인이고 피터는 그런 감투와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이제 13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더 논의합시다. 일단 장소가 뉴욕 타임즈 스퀘어랑 LA 헐리우드......"
"제 예지는 조금씩 빗나가고 있습니다. 거의 비슷하긴 하겠지만 그 점을 감안 하셔야 합니다."
"앞날을 이렇게라도 아는 게 어딥니까? 다시 생각해도, 슈퍼 김을 미합중국으로 모셔온 것은 제 인생에서도 가장 잘한 일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회의가 길어졌다.
기자 회견은 김현과 대통령이 나란히 했다. 김현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설명하고, 대통령이 대책을 발표하는 식이었다. 기자들의 질문도 비슷하게 대응했다.
그리고 2018년 8월 21일 오후 6시.
외계종의 거점이 육안으로 보일 만큼 가깝게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