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81화 (81/200)

# 81

도래 –3-

뉴욕.

김현은 센트럴 파크에 서 있었다.

도심에 펼쳐진 녹지. 인간의 휴식처이자 온갖 동물의 보금자리.

지금은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 하늘 위로부터 어떤 구조물이 다가오는 중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괴하고 거대한 건축물이.

"크네요."

피터가 입을 헤 벌렸다.

에일리가 툴툴거린다.

"유령들 주제에 뭐 저렇게 큰 집에서 산대요?"

"보여 주기용이죠, 보여 주기용."

"우리한테요?"

"비슷해요. 쟤들 말로는 현지종을 압도하기 위한 장엄한 건축의 미니 어쩌니 합니다만."

"포함 외교네요."

이세희가 아는 척을 했다.

"포함 외교?"

서경태가 고개를 갸웃하자 이세희가 씩 웃었다.

"역사 공부 좀 해라! 19세기에 열강들이 식민지 만들려고 커다란 배 끌고 가서 하던 거 있잖아! 그, 운요 호 사건처럼 말이야."

"아, 나도 그거 알아. 미국이 잘하던 거지?"

"우리가 잘하던 거?"

피터와 에일리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역사의 당사자가 아니라 잘 모르는 모양.

김현은 건축물의 전모를 확인했다.

길이 약 50킬로미터. 두 눈으로 담을 수 없을 만큼 크다. 더구나 아랫면의 가로세로 길이도 1킬로미터에 달했다. 이런 것이 우주 저편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으니 세상의 종말이 눈앞에 닥쳤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인간의 뼈를 무한히 얽고, 뼈 끄트머리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다가 굳은 것처럼 생긴 거대한 탑. 그래서 더욱 섬뜩하고 흉측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쿠우웅!

이윽고 건축물의 끝이 센트럴 파크 중심에 닿았다.

접촉면에 있던 것은 모조리 치운 다음이다. 기자들이 분주히 사진을 찍었다. 시민들도 구름처럼 몰려와 스마트폰을 들이대고 있었다.

"저게 유명계의 백혈탑이랬지?"

"으, 무서워. 저 안은 저승이라잖아."

"들어가도 죽는 건 아니라고 들었어."

"정말 아무나 들어가도 되는 거 맞아?"

김현이 슬슬 움직였다.

문은 백혈탑의 네 방향에 모두 존재한다. 가장 가까운 곳으로 걸어가자, 인간의 갈비뼈를 엮어 만든 문이 저절로 열렸다.

후오오옹.

싸늘한 공기와 함께 헛헛한 바람이 불어왔다.

"헉, 열렸다!"

"들어가나 봐!"

백혈탑 안은 차가웠다. 어두컴컴했으며 대기가 무거워 저절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피터가 눈살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견디다 못해 혼력을 끌어올린다. 연차도에서 그랬듯이 혼력 방어막이 생성되어 주위에 넘쳐나는 이질적인 힘을 멀찍이 밀어냈다.

"이봐, 아직 동화 시작 안 했어?"

퉁명스럽게 묻자 웅웅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조금 기다려라. 나도 탑의 기능을 완벽히 이해한 건 아니니......]

잠시 후 불이 들어왔다.

백색의 선명한 빛. 태양광을 닮은 빛이다. 유명계에는 어울리지 않으나 현지화시킨, 그래서 현지종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기 위한 광원이었다.

지금 김현이 있는 곳은 거대한 광장.

천장이 뻥 뚫렸다. 올려다보면 저 멀리 회색의 점 같은 것이 보인다. 다름 아닌 유명계와의 연결 지점. 여기서 날아올라 저곳까지 가면 유명계에 방문하는 것도 가능하다.

광장 주변에는 층층이 보물이 진열되었다. 대부분이 유명계의 물건이고, 지난 거래 경험을 보아 지구 인류가 탐낼 물건만 골라 가져왔다.

중심에는 한 제단이 있다. 제단 위에 어떤 존재가 둥둥 떠 있는 게 보였다.

거적 같은 예복을 눌러쓴 자. 언뜻 보면 인간 같지만, 예복의 후드 안에서 빛나는 푸르스름하고 창백한 안광이 그 존재를 인간과는 다른 종족으로 규정했다.

'읽히지 않네......'

예복 때문이겠지.

5성까지의 모든 투시 계열과 판독 계열 성혼을 방어하니까.

"백흔귀? 아, 이제 백흔귀가 아니겠구나. 뭐라고 불러야 하지?"

안광이 웃듯이 흔들린다.

[백흔혼라고 불러라.]

"승급했구나? 축하해."

[아직은 임시다. 탑주로 있으면서 성과를 거두어야 하지.]

"내가 도와줄게. 천주까지는 가능하지 싶다. 그러면 백흔혼이 아니라 백흔신이 되는 거 맞아?"

[후후, 맞다. 거래자여. 호칭의 조악함을 용서해라. 앞으로도 많이 기대한다. 나 또한 거래자에게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돕도록 하지.]

거래자......

선지자라고 함부로 부를 수는 없다. 유명계의 모든 탑은 상부에서 실시간 감찰 중이니까. 백흔혼이 선지자라는 호칭을 입에 담는 순간 유명계도 그 사실을 알겠지.

김애경이 놀란 눈으로 백흔혼을 보았다.

"당신이 백흔귀라고?"

[더 이상은 아니다. 백흔혼라고 불러라.]

"무슨 차이야?"

"누나. 유명계의 유령들은 직책과 계급에 따라 이름이 달라져. 음...... 예전의 백흔귀가 해군 중위나 대위쯤 됐다면 지금은 중령 정도로 승진했다고 보면 돼. 공사가 됐다고 생각해도 틀린 건 아니고."

"아, 그런 거야? 축하해, 백흔귀! 아니, 백흔혼!"

[고맙다.]

기분이 좋은지 백흔혼이 탑 내부를 구경시켜 주었다.

그 규모만큼이나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1층의 상점, 2층의 성혼 거래소, 3층의 성혼 공방, 4층의 각성소, 5층의 훈련소, 6층의 성혼로, 7층의 변환로, 8층의 성혼 우물, 9층의 영혼소......

"야, 이거......"

김애경이 뭔갈 직감한 듯 김현에게 속삭인다.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까지 만들었던 시설들, 처음에는 외계종의 거점을 모방하는 것에서 시작한 게 맞으니까. 다만 성혼 거래소와 성혼 공방을 합쳤고, 변환로와 영혼소는 손도 안 댔지만.

변환로는 각성자의 성향을 바꾸는 시설이다. 모든 외계종의 거점마다 존재했다. 더 많은 자기네 성향 각성자를 확보하려는 것.

성혼 우물은 성혼 농장을 소형화시켰다고 보면 된다. 성혼을 던져 넣으면 조금 그걸 씨앗 삼아 새로운 성혼을 생산한다.

영혼소는 외계종마다 이름이 조금 다르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신체 개조. 받으면 받을수록 인간을 벗어나 해당 종족에 가까워진다.

그리하여 결국......

백흔귀가 그러했듯이, 백영귀가 그러했듯이 유명계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다. 유명계라고 아무나 받아들이는 건 아니지만.

[아름답지 않나? 거래자가 지구에 구축한 시설도 훌륭하긴 하지만 우리의 것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

"좋긴 하네. 하지만 유명계 성향 각성자 전용 아니야?"

[거래자가 원한다면 9층까지 출입 권한을 주지.]

"10층은? 생긴 것만 보면 여긴 1만층도 넘게 있을 것 같은데."

[후후, 거래자가 우리 세계의 일원이 된다면 모든 층의 출입 권한을 주지.]

"사양하겠어."

[그럴 줄 알았다. 출입 권한은 줄 수 없다. 육체 있는 이들은 10층 이상으로는 올라갈 수가 없거든.]

실은 거짓말.

아직 차원의 벽에 막혀 구현되지 않아서 그렇다. 2년 후, 어쩌면 1년 반 후까지도 이 상태로 유지된다. 백혈탑이 제대로 돌아가면 즉시 유령 군대가 지상을 타격하겠지.

"알았어. 참, 살 게 있는데."

[좋지. 원하는 대로 둘러보아라.]

"수수료는 없는 거겠지?"

[불가능하다. 이제는 내 임의로 수수료를 조절할 수가 없어. 대신 최고 등급에 준하여 처리해주지.]

김현이 산 것은 정확히 9개.

혼돈석, 천상석, 악마석, 시원석, 거신석, 광명석, 암흑석, 유명석, 불사석.

굉장히 비쌌다. 하나하나가 각성자가 복용하면 혼력을 크게 늘려주고, 장비에 붙이면 강력한 증폭 효과를 주는 보물이라 그렇다.

그간 알음알음 쓴 것까지 하여, 예전에 받았던 명금 백만 관의 절반 정도를 벌써 쓴 것 같다.

[오호, 또 뭔가 좋은 걸 만들려나 보군.]

"그런 셈이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99륜의 열화판이라고 할까. 하지만 들어가는 재료는 훨씬 더 고급이다. 차오 박사의 99륜에서 파생된 연구 중 하나.

[성혼으로 계산하지 그러나? 이번에 쏠쏠하게 벌었을 것 같은데.]

"쓸 때가 있어서."

[다른 세계에 넘기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넘길 거면 그나마 최고 대우해주는 네가 낫지, 뭐하러 다른 곳을 찾아가?"

[잘 생각했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잠깐만. 7층의 변환로를 써 보는 게 어떤가? 언제까지 그 모습으로 살 수는 없으니. 내 유명계 이민까지는 권유하지 않겠네. 거래자도 몸을 되찾고 육체의 기쁨을 다시 만끽해야지.]

은근한 권유.

여태 심드렁하던 김애경의 눈이 흔들렸다.

"몸을 되찾을 수 있다고?"

[그렇다네.]

"Mr. 김......"

"형?"

일행의 시선이 집중된다.

"아직 그럴 생각 없어."

"왜? 엄마랑 아빠도 걱정하잖아."

"괜찮아, 괜찮아. 천천히 가지 뭐. 그리고 변환로 쓰면 내 성향이 유명계로 바뀌어."

"아......"

[좋은 일이지. 거래자여, 우리 세계의 힘을 쓸 생각은 없나? 차갑고 날카로우며, 뭇 혼을 부리는 게 우리 세계다. 영혼의 제왕이 된다면 그 어느 괴물도 거래자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거래자의 목표도 자연히 이뤄지겠지.]

"됐어. 내 길은 내가 정해."

[아쉽군...... 언제라도 마음이 변하면 찾아와라.]

"그러지."

[아, 지구인들에게 홍보를 부탁한다. 지구인들이 백혈탑을 이용하면 이용할수록 내 실적이 좋아지거든.]

"지구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탑을 박게 도와줬으면 됐지, 또 뭘 바래?"

[그 점은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유명계에서 다른 세계에 제법 양보를 했을 것이다.

뉴욕 맨해튼.

이곳은 열여덟 세계 모두가 탐을 내던, 노른자위 중의 노른자위 부위니까.

탑 밖으로 나왔다.

김애경이 미련을 못 버리고 옆구리를 찌른다.

"정말 변환 안 할 거야?"

"어, 안 해. 누나, 5성만 되어도 원상 복구할 수 있다고 했잖아. 굳이 서둘 필요가 없어. 다른 사람들도 알아두세요. 여기 백혈탑 말고 다른 외계종 거점 변환로는 절대 쓰지 마세요. 저도 곧 변환로는 만들 거니까 쓰고 싶으면 거길 써요."

"그렇게 성향 바꿔도 돼요?"

"되죠.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최상급은 타고난 성향 쓰는 게 나아요. 이건 완전히 리셋하는 거거든요."

오디션 당시 파악했던 잠재 능력도 다 공유한 다음이다. 그래서 이런 대화가 가능했다.

"그럼 다른 성향으로 옮기면 자질이 최상급이 아니라 중급, 상급도 뜬다는 얘기야?"

"맞아. 중급이면 다행이게. 하급 뜰 가능성도 있어."

"난 그냥 하던 대로 해야겠다."

"당연하지. 멸망포 놔두고 어딜 가게?"

그런 면에서 김현은 자유롭다. 중급 자질이면 다른 성향도 중급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지금껏 전생의 경험과 지식으로 자질의 부족을 메꿔오고 있었다.

찰칵! 찰칵!

김현 일행이 나오는 장면을 사람들이 마구 찍어댔다. 기자들이 달려와 마이크를 들이민다.

"슈퍼 김! 외계종을 만난 겁니까?"

"어떤 종류의 외계인입니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과연 친선 목적이 맞습니까? 아니면 일각에서 우려하는 대로 침략 목적입니까?"

외계종들의 정확한 목적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말했어도 대통령 등 정치인들에게만 밝혔지.

공식적인 발표는 친선 목적이며 무역 목적이라고 했으나 모두가 순진하게 믿지는 않았다. 단순한 공포심에 외계종을 꺼리는 이들도 있으나 속내를 어느 정도는 간파한 이들도 있었다.

싱긋 웃으며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굳이 저한테 들으실 필요가 있습니까?"

"네?"

"들어가 보세요, 직접."

엄지손가락으로 탑을 가리켰다.

기자들이 주춤하자 기름을 부었다.

"지금 세계 어딘가에서는 저 안으로 외계종과의 인터뷰를 시도하는 기자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뭐, 조금 늦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면 더 드릴 말씀은 없고요."

기자들이 서로를 마주 본다.

그러더니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나갔다.

"비켜!"

"내가 먼저야!"

군중 심리란 무서웠다. 김현을 포위하고 있던 기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뒤에서 눈치를 보던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 하고 달려나가서, 센트럴 파크에 운집해 있던 군중이 한꺼번에 백혈탑으로 들어갔다.

백혈탑은 크다. 당연히 문도 크고 방향마다 수십 개가 넘게 달려 있었다. 아까 김현 일행은 백흔혼 혼자 접대했지만 사실 유령 수만 개체가 상주했다.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도 충분히 감당할 것이다.

"우린 훈련소나 갈까?"

그들을 보다가 김애경이 묻는다.

"응, 부탁해."

"어? 너도 같이 가는 거 아냐?"

"난 연차도에서 할 일이 있어서."

조금 전 구입한 아홉 개의 보석을 매만졌다.

역사의 속도가 빨라진 시점.

그에 발맞추어 성혼 농장을 강화할 요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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