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농장 가동
김현은 감회 깊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벌써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상식을 기준으로 보면 뒤집힌 세상.
땅은 머리 위에 있고 발밑은 바다가 펼쳐졌다. 바다가 쉬지 않고 부글부글 끓으며 성혼의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들이 18개의 기둥에서 응결되어 새로운 성혼으로 거듭난다.
대부분은 바다에 녹아 세계에 열기를 더하지만 가끔은 녹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존재한다. 세계의 가장 밑, 무한하게 펼쳐지는 심연 아래에.
[악마심(5★, 악마)]
하필이면 이거냐. 차라리 5성 혼원이라도 나오지. 그러면 흡수할지 말지 행복한 고민을 해볼 것을.
'시작할까.'
철벅철벅 걷는다.
성혼 농장의 중심에는 역천석이 박힌 운명 석비가 있다. 거기서부터 낮은 파도가 일며 작은 세계 전역으로 번졌다. 그 앞으로 다가가 주저앉았다.
성혼으로 가득 찬 바다. 부력이 엄청나게 컸다. 갯벌 밟듯이 발목만 잠기는 정도로 걷는 게 가능할 지경.
"후우......"
아홉 개의 보석을 꺼내고 가볍게 한숨을 쉰다.
강화하는 건 좋다. 문제는 강화하고 나면 당분간 성혼 농장에 상주해야 한다는 점. 기존의 성혼 농장은 가만 놔두면 알아서 성혼을 생산하지만 이건 누군가 상주하며 제어해야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한다.
할 수 없지. 단기간에 전력을 끌어올리려면.
"후웁."
숨을 들이마시고 혼돈의 거인으로 변신했다. 아홉 개의 보석을 모조리 가슴에다가 꽂는다. 99륜과 아홉 보석이 반응하며 흐린 광채를 뿜어냈다.
성혼을 농축 승화할 때와 비슷하다. 압착과 이완을 반복하자 아홉 보석이 스르륵 녹았다. 농익을 빛을 뿌리는 액체를 한데 얽자 하나의 물질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아홉 빛깔 별]
남은 것은 찬란한 빛을 뿜는 무언가였다.
형체는 없다. 빛만이 남았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손을 대 보면 뜨거운 듯 차갑고 가벼운 듯 무거운 어떤 감촉이 느껴진다.
그걸 운명 석비에 주입.
역천석이 반응하여 튕겨내려고 했다. 힘을 주입하여 살살 달랬다. 아울러 아홉 빛깔 별과 조화시키기 위해 힘을 실처럼 늘어뜨려 연결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운명 석비가 앙탈을 부린다.
'역시 쉽지 않아.'
지극히 섬세하고 위험한 작업.
그래봐야 김현에게는 별 것 아니다. 전생에서 김현은 강력한 전사이자 고위 기술자였으니까.
웅......
기이한 진동이 성혼 농장을 훑고 지나갔다.
변화는 그게 전부.
눈에 보이는 건 없다. 사실 이번 강화는 성혼 농장 자체를 강화하는 건 아니고, 특정한 기능을 새롭게 부여하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시작해 볼까?'
김애경을 비롯한 일행들에겐 미리 말해두었다. 당분간 성혼 농장에 메여 있을 거라고. 스마트폰도 안 통하니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 중 누군가가 직접 와야 한다.
운명 석비에 손을 얹었다. 내부에 담긴 힘이 느껴진다. 특히 아홉 빛깔 별의 존재감이 크게 다가왔다.
눈을 감고 99륜을 역으로 돌리자 몸이 기화되어 사라졌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같다.
다른 것은 지금부터.
화아악!
거대한 불꽃이 일었다. 평소에 김현이 변신하던 정도가 아니다. 이 작은 세상을 뒤덮을 듯이, 모든 것을 다 태울 듯이 거대하게 일어났다.
김현의 의식이 세계 전체를 뒤덮는다. 뚜껑 대지도, 끓는 바다도, 성혼을 품고 농밀하게 맺힌 구름 하나하나까지도.
'가속.'
그 모든 과정을 가속했다.
혼돈의 불길이 수온을 극도로 올린다. 부글부글 끓다 못해 삽시간에 증발해서 사라진다. 가장 깊은 곳, 인지하기도 힘든 곳에 있던 심연이 언뜻 노출될 지경.
세계 전체가 탁한 연기로 가득 찼다. 누가 보면 구름이 아니라 화산재인 줄 알겠다. 당연히 기둥이 쉬지 않고 성혼을 토하고, 맺힌 성혼이 또르륵 떨어졌다.
연단, 연단, 연단.
당연한 말이지만 극한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잘못하다간 세계 자체에 융합될 위험이 있어 더 그렇다. 주기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육체를 돌봐야 하는 것.
대신 성혼 농장의 효율이 엄청나게 올라간다. 5성 기준 하루에 1개 생산하는 것을 무려 3개로 올리니까.
4성이면 27개, 3성이면 243개!
고생하는 보람이 있다고 하겠다.
과연 며칠이나 매달려야 할까?
김현은 따로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 김애경이나 다른 일행이 찾아올 때까지로 정했다. 빠르게 흐르는 역사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순수하게 성혼 농장에 모든 것을 투자할 생각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세계는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기존의 성혼 농장이 염전이라면, 이건 끓는 가마라고 보면 되겠다. 아니, 그걸 넘어 용광로에 넣었다고 봐야지.
모든 것을 잊은 다음. 열여덟 세계도, 탑주가 된 백흔혼도, 일행과 가족의 일도 모두 머릿속에서 삭제했다. 오로지 혼돈의 불길로 세계를 데우는 것에 모든 정신을 쏟았다.
그러느라 몰랐다.
세계의 심연에 얼마나 많은 성혼이 쌓였는지, 가끔 세계 외곽이 흔들리며 정체 모를 고함 같은 것이 들려오는 것도.
"야! 김현!"
그러다 투명한 광채가 세계의 일각을 허물어뜨린 다음에야 익숙한 목소리를 인지했다.
[후움......]
세계 전체에서 울리는 기이한 신음.
김현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처음에는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대신해서 불어왔다. 그러다가 무너진 차원의 벽을 뚫고 난입한 이를 감지하면서 비로소 목소리로 변했다.
스르르륵.
운명 석비 앞에 떠 있던 99륜이 맹렬하게 돌아간다. 거기서부터 핏줄이 뻗더니 심장이 생겼다. 심장이 나뭇가지 뻗듯 혈관을 성장시키고, 혈관을 중심으로 사람의 육체가 생긴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금속 조각들이 올라왔다. 의수와 의족이 저절로 맞춰지고 흉갑이 한참 자라나는 몸통을 가린다. 최종적으로 허공에서 물살을 가르듯 김현의 머리통이 나타나 몸통에 달라붙었다.
김애경이 눈살을 찌푸린다.
"너 대체 뭘 한 거야? 여긴 또 뭐고?"
회색의 연기로 꽉 찬 공간.
기억 속 성혼 농장과는 퍽 다를 것이다. 차라리 혼돈계의 정경에 가깝다. 특히 혼돈의 대해라는 곳을.
김애경은 혼력 보호막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현명한 선택이다. 지금 이 세계에는 열기로 가득해서, 아귀지옥처럼 모든 존재를 다 녹여 버리려 하니까.
"시간 얼마나 지났어?"
"야! 넌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어머니랑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신 줄 알아?"
"좀 몰두해서. 너무 화내지 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달 동안 아무 연락도 없는 게 말이 돼? 여기 오라고 했으면 얌전히 문이나 열어둘 것이지, 들어오지 못하게 문도 닫아 놓고 말이야. 오죽했으면 내가 비행기 타고 여기까지 직접 날아왔겠어?"
"뭐? 1달?"
짧으면 사나흘, 길면 1주일 정도일 줄 알았더니?
반사적으로 저 아래쪽을 확인한다. 아득한 시선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자 어릿한 은빛 보광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몇 개야?
김애경의 손을 잡아끌었다. 김애경이 눈살을 찌푸린다.
"왜?"
"일단 와 봐."
바닷물이 다 증발해 있는 상태라 심연까지는 금방.
깎아지르는 절벽 아래 무한한 어둠이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성혼 한 무더기가 심연의 입구에 둥실둥실 떠다녔다.
"헉?"
시큰둥한 눈이던 김애경이 별안간 당황하여 탄성을 지른다.
김현은 손을 뻗어 성혼 하나를 집었다. 그걸 김애경의 눈앞으로 가져왔다.
[악마심(5★, 악마)]
또 이거냐?
반사적으로 웃음이 나온다.
"이거 도대체 몇 개야?"
"91개야. 아마 2, 3개 정도는 더 나오지 싶어. 며칠만 더 늦게 오지. 기왕이면 100개 채우게."
"이게?"
김애경이 김현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김현은 피하지도 않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5성 등급 성혼 93개다!
이걸로 성혼 농장의 힘이 다했다. 다시 가동하려면 한동안 쉬어주고 성혼도 투자해야 하지만 뭐 어떤가.
지금 얻은 성혼만 재투자해도 한 단계 강화해서 재시작할 수 있는데. 그것도 김현이 상주할 필요도 없이 5성 등급을 2개씩 마구 생산하게끔.
6성 등급을 만들면 안 되냐고?
시기상조다. 지금 6성으로 넘어가면 차원의 벽이 더 얇아진다. 자연히 역사의 흐름이 가속되겠지. 아직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게 좋다.
자, 1년만 더 성혼 농장을 써먹는다고 생각해 보자.
5성 등급 성혼을 도합 730개는 만들 수가 있다. 각성자들의 승급만 잘 유도하면 당초 계획했던 5성 각성자 수백 명은 간단히 찍어낸다는 뜻.
"바로 5성으로 넘어갈 거야?"
"글쎄. 고민 좀 해보고. 어...... 누나도 5성으로 올라가게? 지금 보니까 충분히 가능하겠다."
멸망포로 4성이 될 때부터 능력치가 높았던 김애경이다. 지금은 더욱 능력치가 올라서 성혼을 삼키기만 해도 5성이 되지 싶었다.
"4성처럼 힘든 건 아니지?"
"5성은 쉬워. 조금 고민되는 건 훈련소 때문에 그래. 거기 성혼로 강화하면 성혼을 쓰지 않고도 5성으로 올라가거든."
"그럼 그게 낫겠......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야, 너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몰라?"
"무슨 날인데?"
8월 21일에 들어와서 30일이 지났으니 9월 20일이다. 그게 무슨 날이었더라? 설마 외계종들이 벌써 민낯을 드러내진 않았을 거고.
아니지, 그러고 보니 9월 20일이라는 날짜가 익숙한데......
김애경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야! 너 생일이잖아, 생일! 너는 어떻게 된 애가 지 생일도 기억 못 해?"
"맞다. 내 생일이지. 그런데 그게 뭐?"
"잔말 말고 따라 나와. 엄마가 미역국 끓여 놓는댔어. 미국 기준으로 벌써 오후라고. 기껏 엄마가 미역국 끓이고, 하은이가 선물도 만들었는데 그냥 지나갈 거야?"
"끄응, 알았어. 그동안 별일은 없었지?"
"응. 차원문이 시도 때도 없이 열리는 거 빼면."
세계를 더듬어 혼력을 주입하면 바로 뉴욕의 각성소다.
각성소는 1달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커다란 백색의 공간을 유형의 바람이 유영하고 있었다. 직원들이 김현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님!"
"사장님 오셨어요?"
예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한산해졌다. 그때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는데 지금은 몇 명만 서성이는 게 전부였다.
"요즘에는 한가하죠?"
직원들이 김현의 눈치를 살핀다.
"그게......"
"거의 다 센트럴 파크로 가서요."
"경쟁 업체도 많고......"
"저기 사장님, 우리 수수료가 너무 높은 게 아닐까요?"
김현의 각성소는 초기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성혼 두 개를 가져오면 원하는 성혼 한 개로 교환. 자질 판독이나 각성 도움이 따라오고.
여기에 성혼 감정료가 100달러에 자질 판독료가 200달러이니 비싼 감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외계종 도래 전, 한시적으로 가능한 장사였다.
김현은 씩 웃었다.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우리 각성소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건 저도 아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시고요."
"네, 사장님!"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 불안함을 느끼는 듯했다. 부모님 집으로 가기 전 잠깐 직원들을 격려해주었다. 그러자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각성소 한쪽이 반짝거리며 한철군이 들이닥쳤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슈퍼 사장님이잖아!"
"어휴, 슈퍼 사장은 또 뭡니까?"
"미국 애들이 우리 사장님을 슈퍼 김이라고 부르니까 줄여서 슈퍼 사장님, 어때?"
"되지도 않는 개그는 하지도 마세요.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은. 요즘 파리만 날려서 왔지. 휴, 내 연봉만큼 일을 해줘야 하는데 걱정이 말도 아니야."
김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한철군을 살폈다.
영입했을 때 2성 등급으로 승급시켰고, 이후에는 거의 손을 떼놓고 있었다. 기술만 꾸준히 전수하면서 1성과 2성 등급 무구를 만들어 여러 곳에 팔아먹었지. 그런데 스스로 성혼을 구입한 것인지 불의 보호와 강철손 성혼 모두 3성에 달해 있었다.
또 하나.
열심히 일하긴 일했나 보다. 능력치가 3성의 한계에 도달한 다음이었다.
"열심히 하셨나 봅니다."
"응? 당연하지! 연봉 받아먹는 값을 해야 할 거 아냐?"
"잘 됐습니다. 훈련소 출입 권한 드릴 테니 거기서 수련하세요."
"뭐......"
"장인도 성혼 등급이 받쳐줘야 좋은 물건을 만들죠. 지금 만드는 게 2성까지죠?"
"흠, 그렇지."
"4성까지 올리고 4성까지 만듭시다. 제가 새로 기술도 전수해드릴게요. 가격 경쟁력에서 차이가 나니 백혈탑이든 뭐든 다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오, 정말이지?"
한철군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1성과 2성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김현이 그러했듯 소총이나 기관총 갈기는 게 훨씬 강하고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3성, 4성 무구를 만들어 팔면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것이다.
"조만간에 성혼 공방을 확장할 겁니다. 미리 사람들 뽑아놓으세요."
"어, 실은 내가 친구들 몇 명 한국에서 불렀는데......"
"그래요? 며칠 뒤에 자리 좀 만들어주세요. 계약은 어떻게 하셨지요?"
"아직은 계약 안 했어. 내가 용돈만 좀 줬지."
"알겠습니다. 한 아저씨한테 했던 게 특별 대우였던 건 아시죠? 그만큼은 못 맞춰드립니다. 솔직히 1/10도 힘들어요."
"알지, 그럼."
"야,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대화가 길어지자 김애경이 재촉을 했다. 한철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는 시늉을 했다.
"그렇지, 나도 선물 가지고 왔는데. 가자고! 자네 조카가 아까부터 눈이 빠지라고 기다리고 있어."
"안 그래도 됩니다만......"
"그래도 그게 아니지. 가자고, 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부모님 집에 도착했다.
팡! 팡팡!
들어가자마자 폭죽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