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귀환
"생일 축하해!"
"삼촌 생일 축하합니다!"
"해피 버스데이!"
모두 모여 있었다.
부모님, 하은이, 이세희, 서경태, 피터, 에일리......
조금은 단출한 구성.
김현은 먹먹한 감정에 잠깐 멈추어 섰다.
전생에서는 생일 파티라는 것 자체를 해본 적이 없는 김현이다. 현생의 기억은 있지만, 솔직히 그건 남의 기억이라 이질감을 느끼곤 했다.
따라서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첫 번째 생일 파티.
고맙고, 따스하고, 간지러웠다.
거실 중앙에는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이 차려져 있다. 중심의 하얀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드라이아이스에서 흘러내리는 김이 뽀얀 우유 같았다.
"모두 고맙습니다."
가만히 허리를 숙이는 김현.
"삼촌, 얼른얼른!"
하은이가 플라스틱 칼을 들고 안달복달한다. 다른 건 모르겠고 얼른 와서 노래 부르고 아이스크림을 먹자는 것.
절로 웃음이 나온다. 상 앞에 앉자 사람들이 입을 모아 노래를 불렀다.
"사랑하는 김현의 생일 축하합니다!"
짝짝짝! 펑펑!
가볍게 케이크를 갈랐다. 그러자 하은이가 허겁지겁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으렴, 우리 딸."
김애경은 어느새 암호랑이에서 순한 어머니가 되었다. 대신 김현의 어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캐묻는다.
"대체 1달 동안 뭘 하고 있었니? 전화도 없고, 애경이나 세희가 찾아가도 대답도 없고."
"바빠서요. 중요한 일 처리하느라요."
"아무리 그래도......"
"죄송해요.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어쨌든 이번 일은 김현이 실수했으니 잠자코 물러났다. 사실 처음에는 1주일에서 열흘 정도를 기약하고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길어진 게 사실이니까.
어머니가 몇 마디 말을 더하려다가 아버지가 만류하자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아직은 못마땅한 눈빛이다.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하은이가 센트럴 파크에 다녀왔나 봐?"
"응? 어, 그랬지."
김애경의 얼굴이 살짝 흐려졌다.
괜히 이걸 묻는 게 아니다. 못 본 사이에 하은이의 성혼 항목에 새로운 글자들이 생겼다.
[성혼] 명마도(3★, 유명)
외계종이 도래하기 전부터 센트럴 파크에 드나들더니 유명계 성혼 하나를 각성한 것이다.
합치 성혼으로 용왕, 명왕, 신왕이 있으니 그중에 용왕을 각성시키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한숨을 푹 쉬었다.
"탑 쪽으로는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백조 구경하다가 들어가더니 덥썩 이걸 각성해 오지 뭐니?"
하은이가 아이스크림을 입가에 잔뜩 묻히고 웃었다.
"탑 아저씨가 나한테 선물로 줬어!"
"올라가진 않았지?"
"응응. 1층만 보고 나왔어."
"야, 나쁜 건 아니지? 닉 같은 경우도 있다며."
김애경이 걱정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럴 리가. 그랬으면 악마계나 혼돈계, 불사계 각성자들은 다 인성 파탄 괴물이 됐게? 유령혼이나 귀신 마음 같은 특별한 성혼 아니면 괜찮아. 그래도 조금 난감하긴 하다."
"뭐가?"
"실은 하은이가 각성한 용의 장막은 용왕의 하위 성혼이거든. 나중에 더 크면 용의 비상이랑 포효까지 줘서 용왕 성혼 각성시키려고 했는데......"
하은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금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꿀꺽 삼키고는 얼굴을 들이민다.
"삼촌삼촌, 나 용왕님 돼?"
"하하, 성혼 이름이야. 진짜 용왕은 아니지."
"칫, 삼촌 바보!"
"저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명마도?"
이제 김애경도 하은이의 잠재력 정도는 안다. 자신을 뛰어넘는다는 사실도, 합치 성혼이 셋이나 된다는 사실도.
"응. 명마도는 명왕의 하위 성혼이야. 여기에 명귀군, 명혼광이 합쳐지면 명왕이 돼."
"엄마, 명왕이 뭐야?"
"염라대왕 말이야."
"와! 나 염라대왕님 된다!"
하은이가 천진하게 웃었다. 김애경이 그런 하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둘 중에 하나만 할 수 있어?"
"그건 아니지. 그래도 하나씩 완성하고 넘어가는 게 좋아."
"뭐 어때? 시간은 많은데. 다음에는 신왕 하위 성혼도 하나 모아보자."
"속도 좋아."
백흔혼이 하은이에게 굳이 명마도를 준 이유는 명백하다. 용왕계 고위 각성자의 탄생을 저지하려는 것이다. 용왕, 명왕, 신왕은 모두 김현의 혼원과 비슷할 정도의 최상급 성혼이기 때문이다.
멀리 보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하은이가 세 최상급 성혼을 가질 기틀을 닦은 거니까. 당장 써먹기는 한 성향에 집중하는 게 좋지만, 어린애를 전장으로 내몰 수는 노릇이고.
'10년 뒤에는 하은이가 최강의 각성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직 먼일이고, 10살을 더 먹는다 해도 어린 건 마찬가지지만.
"Mr. 김이 돌아왔으니 이제 심심하진 않겠어요."
"심심하다뇨?"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외계종이 도래했다고 침식이 안 일어나지는 않는다. 여기에 차원문까지 더해졌다. 지구에 몇 안 되는 4성 등급 각성자들을 놀린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다들 조금 어두운 기색인 게 이상했다. 설마하니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걸까?
"진짜 모르시네요. 저희요, Mr. 김이 사라지고 한 달 동안 괴물이라고는 구경도 못했어요."
"네? 설마요. 대통령이 SOS 안 보내요? 괴수를 잡을 수 있는 건 우리밖에 없는데."
"형, 그게...... 지금 지구에 4성 각성자는 100명이 넘어."
"뭐?"
100명?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너 사라진 직후부터 4성 각성자가 쏟아지더라. 저스티스 팀이랑 가디언 팀도 다 4성 됐어."
"하......"
"오죽하면 대한민국에서도 4성 각성자가 나왔다니까? 우리 훈련생 중에서 세 명이 됐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그렇게 됐어요. 덕분에 저희만 찬밥 신세가 됐죠. 지금은 놀고먹는 슈퍼 팀이라고 놀림당하고 있어요."
맺힌 게 많나 보다. 저마다 속에 담아두었던 얘기를 토해냈다. 급기야 김현의 생일 파티가 대통령과 정치인, 언론을 성토하는 자리가 되고 만다.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전후 사정이 짐작이 갔다.
원 역사에서는 내년 5월에 벌어지는 일. 김애경이 4성 등급이 되고, 동료들과 함께 인류의 희망으로 떠오르자 외계종들이 김애경을 견제하기 위해 4성 성혼을 마구 풀었지. 능력치가 모자라면 키워주기까지 하고.
"이상하네요. 갓 승급한 얼치기 4성 각성자들이 모여 봤자 괴수들을 상대하긴 어렵습니다만."
침식 세계에서 갓 태어난 괴물도 아니고, 수십 수백 년을 묵으면서 힘과 교활함을 얻은 괴수들이니까.
피터가 눈을 끔벅거렸다.
"잘만 잡던데요?"
"알겠다. 성혼만 지원한 게 아닌가 봐? 특이한 무기 같은 거 들고 있지 않았어? 네 총 같은 거."
"아, 맞아요. 그랬어요."
"성혼 장비 말이지? 네 추측이 맞아. 다들 하나둘씩 들고 있더라."
이건 의외다.
원 역사에서도 없었던 일. 무구까지 지원해준 건 한참은 지난 다음의 일이었으니까.
'급하긴 급했나 본데.'
외계종들 입장에서는 지구의 전력이 강해지면 그리 좋지 않다. 그래도 당장 성혼 버는 게 바닥날 판이니 이렇게라도 해야지. 김현 일행이 독식하지 못하게.
"좋은 일이네요."
"응? 좋다고?"
"그럼. 우리가 강해진 거잖아."
"뭐 그건 그런데......"
김애경과 이세희가 알겠다는 표정을 한다. 김현이 말한 우리가 여기 있는 사람들만 지칭하는 게 아니라 인류 전체를 뜻한다는 걸 알아차렸으니까.
반면 22세기에 대해 모르는 부모님이나 서경태, 피터, 에일리는 무슨 말도 안 되냐는 얼굴이었다.
"그럼 이대로 보고만 있으실 거예요? 할 일도 없이?"
"그럴 리가요."
에일리가 따지듯 토해내는 말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사람들이 4성 각성자가 된 이유는 다들 알고 계시죠?"
"네. 후원자니 뭐니 하는 외계종이 성혼 선물해줘서잖아요.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후원 계약 맺을 걸 그랬어요."
"안 그러는 게 낫습니다. 세상 이치가 그렇지요. 받은 만큼 뱉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래요."
후원 계약은 나쁘게 말하면 영혼을 저당 잡히는 행위다. 외계종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계약자를 얽어매려고 하니까.
'이번 역사의 인류팔이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나올지도 모르겠다.'
벌써 유력한 후보가 몇 있지.
알렉산더, 닉, 리아......
"협회장 선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아요. 제 딴에는 견제한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골치가 다 아프다니까요?"
"어차피 우리 쪽에서는 아무도 안 나가잖아요."
"걔들은 모르죠. 지금도 줄창 쉐도우 복싱 중이에요."
"미국인 대부분은 Mr. 김이 협회장 나오는 줄 아는데요? 인터넷만 한 번 검색해 보세요. CNN이나 폭스 뉴스를 보시거나."
"어...... 제 친구들도 Mr. 김이 언제 입장표명 하냐고 물어보고 그랬어요."
에일리의 말에 피터도 동의했다.
1달 사이 더 늘어서, 이제는 350만에 이르는 미국의 각성자.
종래에는 천만까지 오를 것이다. 성혼 공급에도 한계가 있는 만큼 그 이상은 어렵지만.
그런 것 치고는 협회의 구성 속도가 빠르다. 현재 상황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뜻이겠지. 미국 정부와 시민 모두.
"후보 등록이 언제까지죠?"
가벼운 질문에 일행 전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내일까지야, 형. 도전하게?"
"글쎄. 도전할지 안 할지는 모르지만, 내일 기자 회견 하나 정도는 하려고."
"형! 잘 생각했어요. 아주 본때를 보여줘요!"
"어...... Mr. 김, 죄송한데 솔직히 당선 확률이 조금......"
"야, 피터! 도전도 안 해보고 겁부터 집어먹는 게 어디 있어? 해봐요, 해봐! 기적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이 정도에 겁먹어야 되겠어요?"
전미 각성자 협회.
구성 완료가 눈앞에 있다. 선거권은 등록된 각성자라면 누구나. 1성이든 3성이든 차별 없이 1인 1표를 행사하게 된다.
두어 달 전, 김현의 주가가 최고를 찍던 때라면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달 사이 많은 것이 바뀌었고, 외부자에 대한 거부감까지 겹쳐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어쨌든 내일 두고 보자고요."
정세가 변했으니 계획도 수정해야 한다.
이것은 치킨 런.
누가 더 많이 지르냐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는 게임.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는 김현의 판돈이 외계종들보다 훨씬 더 많다. 외계종들은 차원의 벽에 막혀 성혼과 보물을 들여오는 것에 한계가 있으니까.
대범한 결정을 내렸다.
'5성 성혼을 푼다.'
많이 풀 것도 없다. 10개 정도를 백흔혼에게 넘겨 4성 성혼을 구입하고, 다시 10개를 풀기만 해도 각성자 세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킬 수 있다.
나머지로는 김현 일행이 쓰고 기존의 시설들을 강화해야지. 새로 변환로를 만들거나 거점을 늘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건 어쩌지?'
팔과 다리를 내려다본다.
왼손이 잘려 의수를 착용한 것이 5월 초. 사지가 다 잘린 게 6월 초. 그리고 지금은 9월 20일.
이렇게 지낸지 벌써 3개월이 지난 셈. 부모님을 뵐 때마다 얼굴이 안 좋아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그래......'
슬슬 치료할 때도 되었지.
아깝지 않으냐고?
오해하면 안 된다. 김현이 쭉 생각하던 것이 있었다.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가면서 현재의 무력과 기능을 온전히 보존하는, 아니 거기서 더 나아가 한 단계 강화하는 방법을.
물론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 한 걸음 더 나아간 다음에나 가능하다. 그리고 벽을 뚫을 도구는 이미 김현의 손에 있었다.
여기저기 전갈을 보냈다. 내일, 전미 각성자 협회장 후보 등록 마지막 날에 중대 발표를 할 게 있다고.
[오호, 중대 발표라고요?]
"예. 모쪼록 자리를 빛내주셨으면 합니다."
[흠, 내일은 일정이 있습니다만...... 우리 슈퍼 김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시간을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대통령을 초청했고.
[2018년 9월 21일, 세계의 역사가 바뀝니다.]
라는 단문을 세계의 4성 각성자 전원에게 보냈다.
도발로 받아들인 걸까.
반응이 있었다.
[네 마음대로는 안 되지.]
알렉산더의 답장.
아예 자기 SNS를 통해 선전포고까지 한다. 미국은 미국인의 것이며, 미국의 정신이 없는 자는 주인의 자격이 없다고 운운한 것.
아무래도 좋다.
내일 세계의 역사가 바뀌는 것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니까.
알렉산더만 아니고 미국의 많은 각성자들이 반응했다. 뉴스도 탔다. 내일 발표를 전미 각성자 협회장 선거 출마로 생각한 탓에 반응이 열광적이지는 않으나, 1달 만에 보이는 공식적인 행보라 주목을 받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하루 뒤.
제대로 폭탄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