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84화 (84/200)

# 84

주도권 –1-

닉은 오후 늦게 전갈을 받았다.

짧은 편지를 보고는 휙 던져 버렸다.

"그 잽 놈이 보낸 거라는 말이지?"

"아, 보스. 잽이 아니라 코리안이라니까요."

"코리안이나 잽이나 그놈이 그놈이지. 뭐 한대?"

"뻔하지 않습니까? 협회장 선거 출마하겠다는 거죠."

"훙. 미국인 된지 얼마나 됐다고 협회장에 출마해? 여태 선거 운동도 안 했으면서 입후보라니, 이건 우리를 우습게 본 거야."

"그래도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지지율 조사에서 꽤 높이 나와요."

"겨우 십몇 퍼센트 가지고 너무 벌벌 떨지 마."

"그 십몇 퍼센트 가져오면 우리가 저기 하얀 쓰레기들을 이길 수도 있는데요?"

동료이자 동생인 프랭크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현재 협회장 선거는 2강 2중 형세다. 2강은 당연히 알렉산더와 닉. 각각 25%를 넘나드는 지지율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약 5% 정도 앞섰고.

여기에 김현과 리아가 10% 정도 나온다. 초기에는 김현이 끼어 3파전 양상이었으나 활동을 중지한 사이 이런 판국이 된 것.

알렉산더가 리아의 지지 선언을 받으려고 물밑 작업을 펼쳤으나 실패. 그 결과 저스티스 팀이 쪼개지기 직전이었다. 만약 선거에 이변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분열될 것이다.

"리아가 하얀 쓰레기를 지지하진 않겠지?"

"설마요. 그 여자도 보통 아닌데요."

"그 여자도 참 이상하다니까. 예전엔 그렇게 죽고 못 살더니 왜 그런데?"

"여자들은 다 그렇죠. 여자 마음을 누가 알겠어요."

"흐흐, 뭐 마음은 좀 몰라도 그만이지. 안 그래?"

닉이 음흉하게 웃으며 손을 까닥였다. 외설적인 손짓에 프랭크도 씩 웃는다.

"외계종 만세죠. 뒷골목에서 약이나 빨던 우리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어요? 클럽에서 엉덩이만 뭉개도 다들 알아서 다리를 벌리는데."

"흐흐, 만세지. 만세야. 그건 그렇고 이상해. 그 동양인 놈은 협회장 같은 거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이상하긴 해요. 하지만 1달 동안 꼼짝도 안 하다가 내일 나오는 걸 보면 그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잖아요."

"가봐야겠지?"

"네. 칭챙총이 출마 선언할 것 같으면 그냥 엎어버려요."

"엎으라고?"

"네. 그 자리에서 누가 협회장에 어울리는지 보여달라고요. 알렉산더도 패대기치시고."

"음...... 솔직히 힘들지 싶은데."

"뭐가 꿇려서요?"

"야, 그놈 동영상은 너도 다 봤잖아. 그놈, 1달 전에도 그렇게 셌는데 지금은 얼마나 더 세졌겠어?"

"글쎄요. 우리 보스가 꿇릴 것 같진 않은데...... 그 칭챙총은 2달 전이나 1달 전이나 똑같았으니까요. 발전이 없어요, 발전이."

하긴......

요 1달 닉은 엄청나게 강해졌다. 후원자인 검은 뿔의 악마로부터 4성 등급 성혼을 2개나 받았고, 전용 무기인 악마 발톱과 방어구인 악마 가죽도 얻었다. 비슷한 지원을 받은 각성자들이 껄끄럽긴 했으나 김현은 내심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외계산이 최고야.'

조악한 수공예품으로는 상대가 안 되지.

닉은 그런 생각을 꿀꺽 집어삼켰다.

대부분의 각성자들이 공유하는 의견. 김현 일행의 무구가 자기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좋아. 가보자고. 너도 같이 가자."

"저도요?"

"어, 그래. 놈이 무슨 생각하는지 봐야 할 거 아냐."

"그건 그렇죠. 제가 미리 읽고 알려드릴게요."

"오냐."

프랭크 스미스는 저스티스 팀의 크리스티나 화이트와 비슷하게 투시 계열 성혼을 갖고 있다. 그걸로 괴물들의 공격 의도를 꿰뚫어 보며 위험할 때 경고해주곤 했지.

그 날 저녁 비행기를 탔다. 뉴욕에 도착하여 최고급 호텔에서 하루를 묵는다. 바쁜 나날이지만 호텔 내의 클럽에 가 미녀를 유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씨발 년.'

닉은 아래에 깐 미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랫도리에서 쾌락이 올라오지만 모자라다.

불현듯 미녀의 풍만한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가슴이 아니라 가슴 안에서 뛰고 있을 붉은 빛의 심장이......

머리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듣는다.

미녀가 교성을 지르며 닉의 머리를 껴안았다.

갑자기 음산한 충동이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날려버렸다. 강렬한 사정감에 머리 속이 새하얗게 변했기 때문.

"휴우!"

다음 아침, 졸린 기색으로 앉아 있자 프랭크가 짓궂은 미소를 던졌다.

"뜨거우셨나 봅니다?"

"나야 언제나 뜨겁지."

충동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아니,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일탈과 마약, 여자로 풀고 있으며 지금까지는 어쨌든 큰 사고는 치지 않고 있으니까.

행사가 열리는 곳은 뉴욕 내 어느 호텔의 커다란 홀.

미국 정부에서 부랴부랴 마련했다고 한다. 프랭크가 입술을 삐죽이며 홀 안을 분주히 오가는 양복쟁이들을 노려보았다.

"흥, 그놈의 철 지난 슈퍼 팀이니 뭐니 하는 것이 좋기는 좋네요. 저런 엘리트를 손끝으로 부릴 수 있고."

"내버려 둬. 슈퍼 팀의 시대는 이미 갔어."

"그래도 명예 훈장은 아쉽습니다."

"하하하. 그것도 있었지?"

실내가 웅성거렸다.

곧 시작할 시점. 초청 받은 이들이 하나둘 입장하고 있었다.

그 중 한쌍의 남녀가 도드라진다.

하얀 양복과 드레스를 각자 차려 입은 둘. 다름 아닌 알렉산더와 리아였다.

둘 다 외모가 훌륭하기로 이름이 높다. 자연스레 시선이 집중되며 사람들이 다가갔다. 둘 다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눈다.

닉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건방진 것들.

하얀 쓰레기의 목을 비틀어 뜯고, 하얀 미녀를 깔고 허리를 내리찍으면 과연 어떤 소리를 낼까?

목이 마르고 심장이 불타듯 뜨거워졌다.

워낙 열렬한 시선을 보내서였을까.

알렉산더가 이쪽을 의식하고 눈빛을 보낸다.

"흥!"

코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려버리는 알렉산더.

반면 리아는 달랐다. 유혹하듯 은은한 웃음을 보내온다. 알렉산더가 그걸 알아차리고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우스웠다.

"와, 저 썅년 진짜 꼴리네요."

프랭크가 속삭였다.

닉은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저 쌍년 언젠가 꼭 깔고 만다."

"흐흐흐, 형님 다음은 접니다."

"잘해봐. 그러다 좆은 불타고 몸은 얼어 뒈져."

"으윽, 그냥 형님이나 잘 드십쇼."

어느새 오후 2시 정각.

김현이 발표하기로 한 시간이다.

대통령도 참석하여 한쪽에 앉아 있었다. 1달 동안의 잠적이 영향을 끼친 걸까. 영 뚱한 표정이었다. 김현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듯이 굴던 예전과는 다른 태도.

'좋은 일이지, 좋은 일이야.'

제대로 된 미국인도 아닌 동양인을 밀어주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다. 미국은 미국인의 손으로 지켜야지. 암, 그렇고말고.

"정숙해 주십시오!"

진행을 맡은 한 요원이 외쳤다.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점차 가라앉는다. 요원이 그걸 확인하고는 열렬히 김현을 소개했다.

"세계 최초의 4성 등급 각성자, 미래 예지자, 미국의 영웅, 명예 훈장 수여자, 슈퍼 팀 리더, 현 김입니다!"

짝짝짝짝!

박수가 요란하게 울린다.

마음에 안 들었다.

닉은 거칠게 박수를 쳤다. 아주 느리게, 힘을 담아서, 그 힘이 좌중을 압도하도록.

텁! 텁! 텁!

둔탁한 소리가 홀을 울렸다.

그 울림이 모든 박수 소리를 압도한다. 더구나 기이한 압력이 홀 전체를 찍어 내렸다. 자연히 박수 소리가 잦아들면서 모두 이쪽을 주시한다.

대통령도, 알렉산더와 리아도. 다른 각성자들도.

흉측하게 웃는 닉.

그래, 나를 봐라.

하찮은 동양인 따위를 보지 말고 날 보란 말이다. 이 강력한 영웅이자 미래의 지배자인 나를.

그러나 닉의 시간은 금방 끝나고 말았다.

저벅, 저벅, 저벅.

무대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거기 깃든 울림은 닉의 박수보다 더 강력한 힘을 품고 있었다. 기이한 진동이 홀 전체로 퍼져 나간다. 아울러 사람의 뼈마디 하나하나를 진동시켰다. 뼈가 울며 내장이 찌르르 자극 받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멈추게 된다.

땀을 뻘뻘 흘리는 닉.

닉만 그런 게 아니다. 옆에 앉은 프랭크도, 저쪽에 보이는 알렉산더와 리아도 그랬다. 각성자란 각성자는 모두 거무죽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일반인에게는 아무 영향도 없다는 점. 당장 가장 앞에 앉은 대통령은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왜들 그래요?"

그리고 이 적막 속에서 발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 동양인 남자.

평범하다. 무엇을 봐도 이상한 것이 없다.

호리호리한 체구도, 어디서나 볼 법한 얼굴도 마찬가지. 얼핏 보면 돌아서서 잊어버릴 인상이다.

"어?"

프랭크가 입을 쩍 벌렸다.

"어어?"

저만치 옆에 앉아 있던 크리스티나도 그러했다.

왜들 그래?

물어보려고 했으나 심령이 장악당한 까닭에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대신 남자를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금방 정체를 깨닫는다.

'김현이잖아?'

그런데 왜 얼른 알아보지 못한 거지?

간단했다.

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선 얼굴.

항상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없다. 혼돈의 불꽃으로 타오르던 두 눈도 마찬가지다. 동양인 특유의 갈색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팔과 두 다리.

보란 듯이 반 팔 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상태라 맨살이 바로 노출된다.

그래, 맨살.

김현하면 떠오르는 게 뭐냐. 의수와 의족 아닌가. 지금은 그게 다 없어졌다. 팔도 다리도 사람의 것으로 변한 것.

갑작스러운 변화가 놀랍기는 하다. 하지만 왜 저렇게까지 놀라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갔다.

탄식처럼 흘리는 프랭크의 말을 듣고야 이해하게 되었다.

"말도 안 돼. 5성이라니......"

뻣뻣하게 굳고 마는 닉.

세계 최초로 4성의 문턱을 넘었던 자가, 이제는 세계 최초의 5성 각성자가 되어 나타났다.

***

'많이 놀라셨어요?'

속으로 질문을 던져본다.

웃음을 억제할 수가 없다. 투시나 판독 계열 성혼을 가진 이들이 혼백이 나간 얼굴로 이쪽을 주시하는 통에.

5성.

그것도 3개의 성혼을 전부 다.

놀랍겠지. 당황스럽겠지. 1달 동안 죽어라 달려서 이제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아득히 앞서 나갔으니.

"5성? 5성이라고?"

"그게 정말이야?"

"맙소사!"

"오마이갓. 5성을 어떻게? 지금 5성 성혼을 얻을 방법도 없잖아!"

"후원받은 거 아닐까?"

"그럴 리가. 성혼도 보물도 5성짜리는 넘어오지도 않으니까 불가능한 일이야."

"빌어먹을......"

김현은 등장하는 것만으로 충격과 공포를 일으켰다.

잠시 기다렸다가 왼손을 들었다.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항상 의수였던 부위.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뼈와 살로 이루어졌다.

좌중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그들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안녕하세요. 혼돈 성향 각성자 김현입니다."

짧은 침묵.

"먼저 보잘것없는 제 초청에 응해주셔서 감사 말씀을 올립니다. 여유가 얼마 없었는데도 와주셔서 감사히 생각합니다."

단상 옆으로 살짝 비껴 나온다.

팔과 다리가 잘 보이도록.

기대했던 대로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다. 다들 숨을 죽인 채 김현의 입술을 주시한다.

"눈치채셨다시피 저는 지난 1달 동안 모종의 일에 골몰했고, 그 결과 5성 각성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수개월 동안 절 괴롭힌 상처도 완벽히 치유할 수 있었지요."

왼팔을 내밀었다.

오른쪽 집게손가락으로 왼팔을 길게 긋는다. 상처가 나며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제가 오늘 중대 발표하겠다고 한 건 저 개인의 승급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발표는 따로 있습니다."

좌중의 시선이 집중된다.

정말 중요한 건 따로 있다고?

물론 김현의 5성 승급 소식은 중요하되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다. 세계의 역사에 기록될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세계의 역사를 바꾼다고 선언할 정도는 아니라는 의미.

그렇다면 역시 출마 선언일까?

사람들의 얼굴이 살짝 식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실망이니까. 누구나 예측했고, 언론에서 수도 없이 떠들어댄 내용 아닌가.

그들을 굽어보며 말했다.

"제가 이번에 얻은 5성 성혼은 하나가 아닙니다. 여기 있는 분들은 모르시겠지만, 꽤 많은 수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5성 등급 성혼을 확보했다.

어떻게?

의문과 술렁임이 해일처럼 홀 안을 휩쓸었다.

몇몇의 눈빛이 변했다. 밝히지 않아도 될 특급 정보를 굳이 밝히는 것에서, 이어질 선언이 무엇인지 예측한 까닭이다.

"5성 등급 성혼 10개."

툭 내뱉었다.

"경매에 부치겠습니다."

잠깐 침묵.

곧, 경악이 세상을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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