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주도권 –2-
5성 등급 성혼을 경매한다니!
사람들의 얼굴이 각양각색으로 변했다.
눈이 찢어지라 부릅뜨는 사람, 입을 벌리는 사람, 잠깐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주변을 돌아보는 사람......
김현은 재미있게 그들의 표정을 감상했다.
대통령이 손을 든다.
"그거, 아무나 참가해도 됩니까?"
"예. 단, 계산은 성혼으로만 하겠습니다. 현금은 받지 않습니다."
"천은이나 지옥돌은요?"
천은과 지옥돌은 명금에 해당하는 천상계와 악마계의 화폐였다. 알렉산더와 닉 덕에 상당한 수량을 보유하고 있는 듯했다.
"성혼으로만 받습니다. 성혼으로만! 아, 경매는 4성 성혼 20개부터 시작합니다. 일단 낙찰이 되면 다음 성혼은 해당 낙찰가에서 다시 시작할 거고요. 5성 등급이 필요하시면 최대한 빨리 결정하시는 게 좋습니다. 계속 비싸지니까."
"그,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최소 입찰가부터 시작해야지요!"
"그러면 먼저 지른 분이 손해인데요? 하여튼 최종 낙찰가가 다음 성혼 최소 입찰가라는 걸 명심하세요."
"너무 불공평합니다. 4성 성혼이 없으면 손도 못 들다니, 그건 너무 해요."
"그럼 3성, 2성, 1성도 받지요. 단, 환율을 높이 적용받겠습니다. 1대 20으로 하죠. 3성 성혼 400개를 가져오시면 4성 성혼 20개를 가져온 것으로 치겠습니다."
"400개......"
사람들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3성 성혼 400개라니.
침식 세계도 이곳저곳에 생기고, 차원문도 여기저기 열려서 괴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기는 하다. 4성 성혼에 밀리고는 있으나, 3성 성혼은 여전히 가치가 있었다. 4성 성혼과는 다르게 성향만 맞으면 조건 없이 흡수 가능하니까.
그걸 400개나 가져간다고? 5성 성혼과 교환하는 대가로?
"흥."
닉이 코웃음을 쳤다.
"5성 성혼에 그리 가치가 있어? 폭리가 아주 어마어마하군. 차라리 외계종들에게 교환하는 게 낫겠다."
백악관에서 봤을 때는 그나마 예의를 차리더니 그새 예의 따윈 쌈 싸먹은 어조다.
김현도 따라 웃었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 왜 이리 말이 많아?"
다분히 도발적인 어투.
닉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고, 홀 내의 분위기도 무거워졌다.
"여기 있는 분들은 다들 아실 겁니다. 외계종들은 지금 5성 성혼이나 보물을 지구로 반입하지 못해요. 하다못해 4성 성혼도 잘 팔지 않는데 1대 20의 교환비가 너무하다고 느끼십니까?"
한 번 사람들을 쭉 둘러보는 김현.
대통령은 생각에 잠겨 있고 알렉산더는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온다. 리아는 눈이 마주치자 찡긋 윙크했고.
"능력껏 성혼을 가져오세요. 많이만 가져오면 그게 누구이든 팔겠습니다. 4성이 적다? 그럼 3성으로 채우세요. 3성이 없어요? 1성과 2성을 싹쓸이해오면 되죠. 지금은 돈만 있으면 구하는 게 1성과 2성 아닙니까?"
"흐흠."
"크으음."
몇몇이 헛기침을 토했다. 김현의 말이 못마땅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돈으로 밀어버릴 생각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리고 더 말씀드리지요. 경매는 이번이 끝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있을 겁니다. 5성 성혼에 대해 의심이 되는 분들은 꼭 무리해서 이번에 참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켜보다가 나중에 참가하세요.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어, 다음 경매는 언제입니까?"
"글쎄요. 1달 정도 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결정된 게 없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이번에만 경매하는 게 아니라고?"
"도대체 5성 성혼을 몇 개나 확보한 거지?"
"농축 승화 기술을 쓴 게 아닐까? 예전에 1성과 2성 성혼으로 3성 성혼을 만든 적이 있잖아."
"일리가 있어......"
"어쨌든 지금 무리해서 경매할 필요는 없겠지. 추이를 지켜보자고."
"멍청하긴. 네가 그러니까 2류 밖에 못 되는 거야. 지금 같은 시기에 한 발짝이라도 뒤처지면 탈락이야, 탈락!"
"무슨. 적당히 먹고 적당히 살면 그만이지."
"어, 그래. 다음 2류 인생."
어쩌면 1달마다 치러질 경매.
5성 등급 성혼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내려간다. 그건 3성 성혼과 4성 성혼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문제는 이 5성 등급 성혼의 시대가 얼마나 갈 거냐는 건데......
관건은 외계종들이다. 외계종들이 왜 5성 성혼을 못 파는지는 다들 눈치를 채고 있다. 그게 1년만 이어져도 5성 성혼의 가격이 내려갈 거란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김현이 유일한 공급처라면 당연히 가격 방어를 시도할 테니까.
'빌어먹을.'
알렉산더는 단상 위의 김현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 됐다고 생각했다.
협회장이 눈앞에 있었다. 전미 각성자 협회, 그걸 손에 얻고 버릇없는 노랑 원숭이를 응징하려 했었지.
사람은 결국 함께 사는 동물.
아무리 개인이 강해도 전방위로 압박하면 어쩔 수 없다. 더구나 놈도 자신도 똑같은 4성 등급 아닌가.
그랬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5성? 갑자기 5성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날벼락인가.
속에서는 격랑이 휘몰아치지만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5성 등급이라...... 대단하긴 대단하네요. 하지만 경매에 들어가기 전, 헌터 김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헌터......
슈퍼 김이라 불러주기 싫어 그렇게 부른 모양이다.
차라리 그게 낫지.
흔쾌히 머리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헌터 김도 알다시피 우리는 4성으로 승급할 때 뼈를 깎는 수련을 동반했습니다. 저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이 점만큼은 비슷했지요. 동의하십니까?"
"당연하죠. 저도 겪었으니까."
"그러니 5성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4성이 그 정도였으니 5성은 어느 정도일지 상상도 안 됩니다. 그걸 생각하면 4성 20개와 교환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렉산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김현이 풋, 하고 웃었다.
"하하,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구매자들이 알아서 할 일 아닙니까?"
"그건......"
"그래도 대답은 해드리죠. 5성은 4성 각성자면 무난하게 흡수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의 능력치는 갖춰야겠지만, 그게 부족하면 각종 촉매 같은 걸 쓰셔도 좋죠."
"그, 그렇습니까?"
"예. 염려하지 않으시고 경매에 참석하셔도 좋습니다. 성향이 맞으면, 그리고 하위의 성혼이 있으면 무난하게 흡수할 수 있으니까!"
아, 그렇지. 그게 있었지.
알렉산더의 눈이 번쩍 빛났다.
"아, 그럼 필요한 성혼이 없으면 경매에 참석하기 힘들겠는데요? 이거, 10개 가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의 성향에 맞출지 모르겠습니다."
"그 점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맞춰드릴 거니까."
"네?"
"맞춰드린다고요. 원하는 성혼으로. 천사검이든, 악마심이든 화염 폭파나 얼음창이든."
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두 눈에 탐욕이 번들거렸다.
김애경의 멸망포를 보고 충격받은 리아. 잠재력 검사를 통해 자신의 성향에 빙백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이후 얼음창을 추가로 각성하여 멸망포 구현에 도전하고 있었다.
아직은 요원하지만 4성 화염 폭파와 4성 얼음창의 조합은 무시무시했다. 전 세계에서 제일가는 공격수라 불릴 정도.
그런데 5성 등급 화염 폭파와 얼음창이라고?
욕심이 났다. 빨간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뭐든 맞춰준다는 거죠?"
"예. 맞습니다."
"혹시, 멸망포도 판매하나요?"
멸망포.
그 압도적인 이름에 시선이 쏠린다.
"그건 기술이라 불가능합니다."
"가르쳐주면 되잖아요?"
"전 구체적인 원리까진 모릅니다. 재현도 못 하고요. 제 누나한테 물어보세요."
"호호, 허락하신 거죠?"
"제 허락은 필요 없죠. 누나한테 허락받으세요. 어쨌든, 원하는 성혼을 판매하는 것이니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희가 세계의 모든 성혼을 다 보유한 건 아니니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환불 해드리죠. 하지만 장담컨대, 저희가 대신 추천하는 성혼이 낙찰받은 분이 보유한 성혼보다 더 나은 성혼일 겁니다."
패기 어린 말.
다들 이제는 납득 하는 표정이다.
간단히 흡수할 수 있고, 원하는 성혼으로 맞춰준다고 하니까.
성급한 이는 벌써 전화를 하는 자도 있었다. 지금 당장 성혼을 긁어모으라고. 4성 성혼은 이미 독점 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니 하위 성혼을 모아 5성 성혼을 사서 역전해 보려는 생각이다.
"흥."
잠깐 조용해진 사이 유독 큰 코웃음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닉 스미스.
얼굴을 괴상하게 일그러뜨리며 웃고 있었다.
"다 좋은데 그 5성이 되면 더 강해지는 건 맞아? 아닌 것 같은데. 당신도 약해졌잖아."
"내가 약해졌다고?"
김현은 의아한 얼굴로 닉을 봤다가 피식 웃었다.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룻밤을 까마득히 세워 성혼을 각성하고 육체를 단련한 결과 다음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능력>
[이름] 김현 [성별] 남성 [나이] 27
[진영] 지구 [종족] 인간 [상태] 정상
[근력] 44 [체력] 46 [민첩] 43 [감각] 45
[혼력] 53 [의지] 48 [통찰] 47 [위엄] 45
[성향] 혼돈
[성혼] 혼원(혼돈, 5★), 아득한 시선(혼돈, 5★), 혼돈의 주사위(혼돈, 5★)
[보물] 혼원수(5★), 혼원각(5★), 혼원체(5★), 혼원안(5★)
김현은 자신의 강화에 5성 성혼 10개를 갈아 넣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4성일 때도 어설픈 5성 각성자와 비견될 정도였는데, 이 정도면 6성이랑은 못 싸워도 5성 각성자 서넛은 간단히 때려눕힌다.
시간만 많았으면 4성으로 올라설 때처럼 소모하는 성혼 없이 승급했겠지. 하지만 세상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인류의 주도권을 가져갈 필요가 있으니 이번에는 과감하게 투자를 했다.
"내가 약해 보이는 모양이지?"
"흥! 고급 성혼 몇 개 가진다고 다가 아니거든. 진짜는 무구에서 결정되는 법이다. 조악한 수공예품 몇 개로는 한계가 있어!"
닉이 주먹을 꽉 쥐었다.
검은 칼날이 주먹의 마디 사이에서 뻗어 나왔다. 보기만 해도 흉측하고 역겨움이 느껴진다.
김현은 가소롭다는 듯 닉을 보았다. 보아하니 악마심 때문에 슬슬 맛이 가기 시작한 것 같은데 한 번 눌러줄 필요가 있겠다.
옆에서 프랭크가 닉을 말리고 나선다.
"형님! 안 됩니다! 5성이에요, 5성!"
"시끄러워. 뒤엎으라고 할 때는 언제고?"
"아, 그건 그때죠!"
"비켜. 얼마나 센지 봐야겠다. 그래야 경매 참석할지 안 할지 알지."
닉이 분연히 일어섰다. 또렷한 흥분이 두 눈에서 빛나고 있었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그저 좌우로 비켜 자리를 만들어 줄 뿐. 그들도 보고 싶은 것이다. 5성 각성자가 4성 각성자에 비해 얼마나 강할지.
흥분이 고조된다.
호텔에 작은 투기장이 열렸다. 초청자들은 관객이 되었고 김현과 닉은 검투사가 되었다.
김현이 천천히 내려간다.
단상 위에서, 허공을 밟으며, 혼돈의 불꽃을 두른 채.
"어어!"
"저, 저거 뭐야?"
혼원의족이 혼원각으로 바뀌면서 부린 작은 재주.
예전의 혼원의수와 혼원의족은 충격파를 터뜨릴 수 있었다. 그걸 쏘아 공격할 수도, 혹은 공간에 뿌려 이동하는데 쓰는 것도 가능했지.
지금의 혼원수와 혼원각은 더 나아간다. 이제는 충격파가 아니라 혼돈의 힘 자체를 다룬다. 그걸로 공간에 간섭하면 이런 묘기가 가능했다.
철컥, 철컥, 철컥.
또 하나.
김현의 전신에 기묘한 쇳소리가 울렸다. 허공에서 탁한 흑회색 쇠가 돋으며 김현을 완전히 감싼다.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게다가 얼굴까지 기묘한 형체의 투구로 변했다. 눈만 뚫려 있었는데, 그마저도 선글라스 같은 눈가리개로 막히고 만다.
혼돈안.
혼돈의 눈(混沌眼)이 아니라 혼돈의 얼굴(混沌顔).
원 역사에서의 혼돈인을 따라가지 않고, 기갑계 장갑기사의 개념과 99륜의 힘을 덧붙여 탄생한 상태였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혼돈기사 정도 될까.
"이, 이건......"
닉이 덜덜 떨었다.
혼돈기사로 변신한 시점부터 김현에게서 막대한 존재감이 쏟아졌다.
4성 괴물?
거대하고 강력하던 그놈들?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존재와 비교하면 코끼리 앞의 하이에나에도 미치지 못했다.
벌레.
아무 때나 밟아 죽일 수 있는 하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 버티고 서 있는 자신도 역시.
"으아아아!"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그런 작은 존재라는 걸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고함을 지른다.
악마심이 극도로 발현된다.
그 힘을 받아 악마 변신이 활성화된다.
불어나는 몸.
팽창하는 근육.
닉이 키 3미터의 거인으로 변화했다. 보물 악마 가죽이 발동하며 닉의 전신을 뒤덮는다. 머리에는 뿔이 돋고 전신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아울러 양손의 악마 발톱이 더욱 흉측하게 돋아나왔다.
"죽어!"
돌진하는 닉.
김현을 향해 악마 발톱을 교차하여 휘둘렀다.
수많은 괴물을 도륙 냈던 일격.
하지만 김현에게는 우스울 뿐이다.
척.
장난하듯이 내민 왼손에 닉의 공격이 둘 다 막혔다.
그 손을 본다.
날카롭고 흉측한 발톱이 몽땅 손바닥에 막혀 있다. 그리고 정말로 절망스러운 것은 발톱이 가른 강철 손바닥에 흠집 하나 없다는 점.
"노오옴!"
발악하듯 고함을 지르지만 말 그대로 발악.
김현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어둠.
정적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