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경매 –1-
뉴욕에서 전해진 소식이 세계를 뒤흔들었다.
5성 등급 성혼이 나왔다!
누구든 경매에 참가할 수 있다더라. 지금 당장은 4성 각성자가 아니라고 해도.
"어차피 4성 각성자여야 흡수할 수 있다며."
누군가는 그렇게 폄하했지만 기회가 주어지느냐, 주어지지 않느냐의 차이는 컸다. 하다 못해 후원자와 협상해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낼 수 있는 것 아닌가.
간만에 세상이 들썩였다.
성혼을 모은다고. 거들떠 보지도 않던 1성과 2성까지. 다들 5성 각성자가 될 생각에 눈이 벌게졌다.
흔히 말하는 미국의 빅 3가 김현에게 손도 못 써보고 당했다는 사실이 그걸 부채질했다. 일단 5성만 되면 단숨에 세계 정상으로 올라설 것 같다는 환상 때문에.
난리가 난 건 인류만이 아니다. 외계종들 사이에서도 설왕설래 논란이 된 듯 했다.
[너무 한 것 아닌가, 거래자여.]
심지어 백흔혼이 무거운 엉덩이를 뗐다. 거점의 외계종들은 여간해서는 자기 거점을 벗어나지 않는데, 백혈탑을 나와 김현의 펜트하우스를 찾은 것이다.
"필요한 일이었어."
딱딱하게 말하는 김현.
백흔혼이 조용히 김현을 주시한다.
[거래자여. 나 또한 거래자의 입장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전에 의논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말투가 전에 없이 딱딱했다.
그래, 그럴 테지.
이번 일로 상부에서 질책을 들었을 테니. 김현과 가장 긴밀한 거래 관계에 있고, 김현의 요구로 탑주까지 되었는데 이번 일을 놓치고 말았으니.
[도대체 5성 성혼을 어떻게 구한 것이지? 농축 승화도 아니고...... 이제는 내가 거래자의 신원을 보호하는 데에도 한게가 있다.]
당연하지.
이제 겨우 차원의 벽이 뚫려 거점을 마련하고, 떠돌이들이나 드나드는 변방 차원이다. 그런 곳에서 5성 등급 성혼이 등장했다?
생각나는 건 단 하나.
선지자.
하지만 김현은 가만히 콧방귀를 뀌었다.
"너희는 혼돈의 지혜를 간과하고 있어."
[혼돈의 지혜? 거래자, 자네 혹시......]
"아아, 아직까진 그 정도는 아냐. 간당간당하긴 해도."
니체가 그랬지. 심연을 들여다 본 자 심연이 된다고.
혼돈계 또한 비슷하다. 그 힘에 심취할수록, 좀 더 밀접해질수록 혼돈계에 침식된다. 종래에는 혼돈괴나 혼돈수가 되어 끝장나겠지.
백흔혼이 김현을 보았다. 이것이 진실인지, 아니면 선지자로서의 김현이 진실인지 읽어내려고.
불가능.
탑주로서의 백흔혼은 5성 등급 투시 계열 성혼을 갖고 있으나, 그에 대한 방어 방법은 김현도 잘 알고 있으니까.
[거래자여......]
결국 탄식하듯 김현을 부른다.
실은 선지자라고 부르고 싶겠지. 상부의 감시 때문에 그러지는 못하지만.
그래서 원하는 답을 주었다.
"백흔혼, 아니, 백흔귀. 너는 날 알고 있지? 그렇지?"
[흐흠.]
"네가 아는 대로다. 혼돈의 지혜 덕이야. 왜 혼돈계가 그리 위험한지 알겠어. 내가 쓰던 요정계나 환수계의 힘과는 비교도 안 되더라고......"
눈을 몽롱하게 흐리는 김현.
그러나 두 눈 똑바로 뜨고 백흔혼을 보고 있었다. 그 상반된 분위기에서, 백흔혼이 마침내 김현의 진의를 깨달았다.
[그런 건가...... 알았다. 그리 보고하도록 하지.]
이심전심.
불안하게 흔들렸던 둘의 동맹이 다시 결속되는 순간이었다.
백흔혼은 지금 상황을 유지하기로 했다. 비록 상부의 문책이 있겠으나, 결국 백흔혼이 속한 현혼 탐사대는 획득한 성혼으로 말하는 법이니까.
[경매할 5성 성혼이 있다면, 내게 넘길 성혼도 있겠지.]
"맞아."
1달 동안 김현이 만든 5성 성혼은 도합 93개.
여기서 10개는 김현 자신을 위해 썼다. 일행의 강화를 위해서도 20개 정도 써야 한다. 직접 흡수는 아니고 성혼로를 강화시킬 거지만 무구 강화에 그 정도 필요하다. 또 성혼 농장과 여러 시설에 투자할 게 40개 정도 있어야 했다.
"20개 정도는 남았는데......"
[허어, 정말이지 대단하군. 그렇다면 그건 내 것이다.]
"백흔혼. 나는 다 넘긴단 말은 안 했는데?"
[거래자여. 내가 지금까지 거래자를 위해 한 일을 생각해라.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은가? 공짜로 달라는 것도 아니니.]
"그래도 몇 개는 남겨놔야 돼. 내 일행들도 승급할 때가 됐다고."
[각성하고 몇 달이나 됐다고 벌써 5성인가? 벌써 그대 종의 한게에 달하는 것은 현명치 않...... 아차.]
열변을 토하던 백흔혼이 입을 다물었다. 후드 안의 안광이 눈에 띄게 약해져 있었다.
"숨길 필요 없어. 종의 한계는 나도 아니까."
[흐흠, 안다고? 흠, 흠, 그저 실언한 거니까 괘념치 마라.]
"괜찮다니까?"
3성이 벽이라면 5성은 한계.
그것도 종의 한계다. 인력으로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이건 외계종들이 하던 말이고, 김애경이 자력으로 6성에 올라섬으로써 사실이 아님을 증명했지만.
[어, 어쨌든 거래자도 나를 배려해 주어야 한다.]
"탑주씩이나 됐는데 부족해?"
[당연하지 않은가!]
백흔혼이 소리치면서도 김현의 눈치를 살핀다. 그도 그럴 것이 백흔귀가 백흔혼이 된 건 99% 이상 김현의 도움 덕이었으니까.
"하긴, 기껏 유명계로 갔는데 천주까진 해봐야지. 안 그래?"
[그렇지!]
"기왕이면 천주를 넘어서 공급까지 가면 더 좋고. 왕급까지 가면 최고고. 그렇지?"
[그야 그렇다만......]
사실 공(公)까지는 힘들다. 지구의 천주로 지내다가 유명계로 가 신(神)의 칭호를 받는 것이 한계겠지.
그래도 그 정도만 되어도 어딘가. 성으로 따지면 6성이고 지구 체계로 따지면 3급 부이사관이다. 유명계 특성상 그 권력이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백흔혼. 너도 알지? 지구는 이제 막 개방됐어. 여기서 5성 등급 성혼을 20개나 가져간다는 거, 유명계 역사에서 있기나 했어?"
[없었지.]
"지구에 돌아다니는 사자들은 많았어. 적어도 1만은 됐을 걸. 안 그래?"
[맞다.]
"그 중에 탑주 급으로 올라온 사자는 18 세계를 통틀어서도 108명 밖에 없고. 맞아?"
[그 말도 맞다.]
"이 108명 중에 널 빼고 107명, 이들이 거래한 성혼을 다 합치면 가치가 어느 정도 될까? 그거 전부랑 5성 성혼 20개. 넌 둘 중에 뭘 선택할래?"
[당연한 것 아닌가. 5성 성혼이다! 명금으로 계산하면 다른 성혼을 합친 가치가 훨씬 더 크겠지만, 그렇게 계산해서는 안 되지!]
백흔혼이 흥분해가며 소리쳤다.
알기 쉬운 녀석이라니까.
"좋아. 그런데 너, 내가 이걸 넘기면 뭘 줄 생각이지? 설마, 시세대로만 거래하지는 않겠지?"
[끄응!]
말이야 맞는 말.
이번 거래를 성공시키면 백흔혼 자신도 상부에 눈도장을 콱 박는다. 저번에 이어서 이번에도, 앞으로도 계속.
문책?
적당히 얼버무리면 그만이지. 아니면 살짝 정보를 흘려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지기 마련이니까. 꼭 김현을 보호해야 할 의리도 없고.
[나는 탑주다. 더 이상 사자가 아니야. 시세대로 거래할 의무가 있는데......]
"진심이냐? 성의도 안 보인다고?"
성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그것.
김현이 묘한 미소를 띠고 백흔혼을 바라본다. 백흔혼 자신도 육체를 가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저 표정의 의미를 잘 안다. 예전에 명금 백만 관을 개인적으로 선사했듯 개인적으로 뭐라도 달라는 얘기다.
[알았다, 알았어! 3할, 어때?]
"너무 짠데. 조금 쓰지 그래. 천주가, 백흔신이 보이는데......"
[알았다. 4할!]
"으음."
[5할! 으으윽, 더 이상은 안 된다!]
"좋아. 딜!"
김현은 악동 같은 웃음을 지었다.
머지 않아 배신할 게 뻔히 보이다 보니 털어 먹는 게 재미 있었다.
백흔혼이 사람처럼 머리를 절래절래 저었다.
[으, 안 그래도 빚을 많이 졌는데...... 거래자, 너무 하는 거 아닌가?]
"그만큼 뽑아먹는 게 많을 거 아냐. 요즘 각성자들 하는 얘기 들어보니까 아주 노다지가 따로 없던데?"
지구의 외계종 거점 중 백흔혼이 가장 큰 세력을 보유하고 있다. 들여놓은 상품도 많고 제공하는 서비스도 많다. 따라서 미국 동부, 심지어 캐나다와 멕시코에서도 뉴욕으로 원정을 오곤 했다.
거기서 얻는 수익만 해도 엄청나다. 후원 계약으로 빨대를 꼽은 각성자도 많다. 이들을 이용해서 유명계에서 벌이는 사업도 많겠지.
[그래봐야 멀었다. 명금 백만 관은 아직도 못 채웠어.]
"투자라고 생각해, 투자."
그 투자, 조만간에 말아먹겠지만.
이번 경매만 잘 되어도 백흔혼, 아니 모든 외계종들의 수익이 줄기 시작할 것이다. 이들의 가장 큰 수입원이 무구 판매인데 그걸 잠식하기 시작할 테니.
[이번에도 명금으로 거래할 텐가?]
"아니. 오랜만에 현물 거래하자. 어차피 사야 할 게 많아서."
[후, 다행이군.]
"그래, 그래. 열심히 후려치라고. 나한테 많이 배웠잖아?"
[말이라도 못하면......]
백흔혼은 따지러 왔다가 혹만 덕지덕지 붙이고 떠나갔다. 그래도 백흔혼 본인은 만족했으니 윈윈이라고 할까?
김현이 주문한 양은 엄청나게 많았다. 각성소, 성혼 공방, 훈련소, 성혼 농장을 모두 강화할 재료니 당연한 일이다. 하는 김에 일행의 무구도 새로 맞추고.
10월 1일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새롭게 훈련생을 받는 한편 일행과 합동 수련을 시작.
식구도 늘었다.
"잭 스벤이라고 합니다."
각진 얼굴의 흑인 떡대가 손을 내밀었다.
"환영합니다. 스벤 교관님."
"교관이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을......"
"4성 각성자라고 하셨지요? 힘든 용단을 내리셨습니다."
"음, 그게......"
잭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2기 훈련생 출신이었다. 미국 해병대 소속으로 미국에서 정책적으로 밀어주는 각성자 중 하나. 그러다 갑자기 전역을 하고는 교관이 되겠다고 들어온 것이다.
전형적인 군인. 생각하는 게 다 얼굴에 드러났다. 그래서 가볍게 웃어 주었다.
"괜찮습니다."
"네? 어, 음......"
"도둑질해가도 괜찮다고요. 베낄 수 있으면."
잭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사실 잭만 그런 게 아니다. 이번에 김현이 대거 직원을 충원했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다른 의도를 품고 들어왔다.
국적도 다양했다.
미국, 러시아, 독일, 영국, 프랑스, 중국, 일본, 대한민국, 멕시코......
거의 작은 UN급이라고 할까.
"아하, 베끼는 게 불가능한가 보죠?"
화교 출신 각성자가 빙글빙글 웃는다.
"비슷하죠. 뭐, 열심히 하시면 하위 호환 버전은 만들겠지요. 열심히 보고 가세요. 단, 일하는 동안에는 열심히 하시고요. 퇴사하기 전에 미리 통보하는 거 잊지 마시고."
"음...... 기분 나쁘시지 않은가 봅니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죠. 아무리 용을 써도 원판은 못 따라옵니다. 제가 장담하죠. 그리고 그렇게 만든 훈련소를 쓰는 게 외계종들 훈련소 다니는 것보다 여러모로 낫습니다."
대승적인 관점에서 한 말.
직원 겸 산업 스파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벌써부터 매의 눈으로 훈련소 곳곳을 관찰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김현이라고 모든 것을 다 공개하진 않았다. 한철군에게 전수하는 기술은 어디까지나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성혼 농장만큼은 확실하게 지켰다.
'한 3성까지는 공개하는 게 나을까?'
지금은 고민 중.
인공 침식지 기술은 이미 공개했다. 그것과 결부시키면 지구 전체의 성혼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킨다. 거기다 세계 침식과 차원문이 근처에 집중되어 생기니 보다 안전해지는 것은 덤.
고민을 해보자. 성혼 농장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대사냥 시대의 종언을 뜻하니까.
아직은 인류가 보다 강해질 필요가 있다. 2년 내에 촉발될 외계종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이럭저럭 하는 사이에 10월이 훌쩍 다가왔다.
사람들이 모여든다.
뉴욕의 세 공항이 북적거렸다. 전세기가 수도 없이 날아온다. 임시로 비행기를 증편하는 항공사도 많았다. 흡사 올림픽이라도 열린듯 뉴욕 어느 곳을 가도 사람들로 가득 찼다.
"대목일세, 대목이야!"
"언제는 안 그랬어?"
"뉴욕만 아니라 인근 도시 호텔도 다 풀 부킹이래! 방이 없어, 방이!"
때 아닌 호황.
상인들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10월 1일.
족히 수십 만은 넘는 인파가 타임즈 스퀘어에 운집할 거라는 예상이 나왔다.
엄청나겠지.
그 날 하루는......
교통 체증, 범죄, 사건사고가 있을 거라고 언론에서 떠들어댔다.
그러나 김현의 행동은 이 모든 예상을 뛰어넘었다.
무진의 표.
풍운의 표.
건물 몇 곳을 빌려, 둘을 결합한 공간 이동을 선보인 것.
안개 공간을 통해 각성소로 들어온 정치인, 부자, 각성자들이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을 했다.
"맙소사."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신이시여......"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단면.
역사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한 구시대의 인류에게 울리는 경종이자, 자신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음을 천명하는 무언의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