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91화 (91/200)

# 91

소말리아 –2-

"크와악!"

파도 아래서 거대한 괴물이 머리를 내민다.

전신이 우둘투둘한 돌기로 덮여 있다. 머리는 크고 8개의 촉수를 채찍처럼 휘두른다. 부리부리한 눈이 붉은 안광을 터뜨렸다.

갑각 문어.

혼광 악어를 만났던 샌프란시스코의 침식 세계에서 마주친 바 있지. 당시에는 처리하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는데 지금에 와서는 조금 다르다.

주먹을 당겼다가 힘껏 뻗는다.

김애경의 멸망포와 비슷한 투로.

콰콰콰콰콰!

힘이 일어났다.

회색 불꽃이 마구 중첩된다. 한 점으로 응축되었다가 정면을 향해 무한하게 뻗어나갔다. 막강한 힘에 공간이 이지러지며 탁한 천연색 무지개가 일직선으로 걸렸다.

거리를 단축하고 쏘아지는 빛!

텁텁한 광선이 갑각 문어의 머리통에 직격했다.

구웅!

둔중한 소음이 갑각 문어를 지웠다.

머리를, 흩어지는 포말처럼, 이어 다리까지도, 심지어 갑각 문어가 막 나타났던 파도와 그 아래의 진흙땅마저.

광선은 사라졌다. 그 자리를 폭풍이 메운다. 미친듯이 용솟음치며 물보라를 사방으로 뿌리고 벌건 수증기를 뽑아낸다.

그리고 충격.

섬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해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제대로 쑤셔 박은 것도 아니고, 그 여파가 땅을 살짝 스친 것인데도 이랬다.

"으앙!"

"엄마야!"

아이들이 엉엉 울부짖는다. 김현은 의식적으로 한 발짝 나서 아이들 앞에 섰다. 납치된 아이들은 죄가 없으니 지킬 생각이었다.

"쿠오오오!"

하늘 위를 떠돌던 괴물이 가까워졌다.

날개 달린 뱀.

놈이 접근하며 독을 뱉으려고 했으나 김현이 더 빨랐다. 힐끔 시선을 던진 것.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져 길게 비명을 지르며 낙하하고 만다.

그런 김현의 머리 위쪽에서 작은 보석이 찬란한 빛을 뿜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영혼을 홀리는 요악한 광채. 해적 두목이 그걸 보고는 신음을 흘렸다.

"도망쳐라, 도망쳐! 섬에서 나가!"

"대장님! 여기서 어디로 가라고......"

"얼른, 얼른 도망쳐! 지금 이게 다 우연 같으냐!"

그래도 생각은 할 줄 아는 모양. 하긴 괴물들이 잘 찾아오지도 않던 곳에 3성 괴물이 연달아 나타나는 것은 절대 우연일리가 없지. 공중에서 떨어진 저 각성자가 무슨 수를 썼다고 봐야 합리적이다.

"이보시오, 일본인 각성자!"

이대로 놔두면 다 죽을 판이다.

해적 두목이 용기를 내어 접근했다.

"우리가 잘못했소! 조건 없이 인질을 석방할 테니 자비를 베푸시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김현은 이 아이들 때문에 여기 찾아온 게 아닌데.

시선조차 주지 않으니 해적 두목의 말투가 더욱 다급해졌다.

"제발, 제발, 우리를 살려주시오! 안 된다면 여자와 아이들만이라도!"

해적도 가족은 있다. 이 가족들 모두 해적섬에 함께 산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현은 이미 마음을 굳힌 뒤.

22세기에서 인류 저항군의 주적은 외계종이지만 가장 많이 맞서 싸운 것은 인간 군대였다. 외계종들 모두 세뇌를 하든 개조를 하든 해서 지구인을 노예병으로 부렸으니까.

그 과정에서 적에게는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걸 배웠다. 어리다고 살려주고, 불쌍하다고 살려주면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니까.

이것은 21세기라도 마찬가지일 터.

무표정한 얼굴로 해적 두목을, 아니 그 너머의 바다를 주시했다.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인근 바다를 헤엄치던 해성계 괴물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아아......"

"제, 제기랄!"

해적들은 쪽배에 오르지도 못하고 발이 묶였다.

바다에서 나오는 괴물과, 마을 중심에 버티고 선 김현을 번갈아 보더니 저마다 총을 움켜쥔다.

"죽여! 죽여!"

"다 죽어라!"

총을 쏴대는 해적들.

RPG-7도 곳곳에서 날아간다. 막 파도를 헤치고 상륙하던 괴물들이 구슬픈 울음을 터뜨리며 숨통이 끊어졌다.

그러나 해적들의 화력에도 한계는 있었다.

1성 괴물은 권총만 있어도 잡는다. 2성 괴물은 중기관총이나 수류탄 정도는 있어야 한다. 3성? 슬슬 재래식 병기로는 어렵다. 대구경 포나 중기관포 정도는 쏘아야지.

더구나 제대로 된 군사 훈련도 받지 못해 산발적으로 쏟아내는 바에야.

"크르륵, 크륵."

거대한 게가 기어나왔다.

집게발이 네 개에, 바위처럼 표면이 우둘투둘하고 갈고리 같은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3성 등급 괴물로 갑각 문어와 비슷한 방어력을 가진 놈이다.

탕! 타타탕!

위협을 감지한 해적들이 총알을 쏘지만 의미 없다.

게가 별안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피웅! 피웅!

갈고리가 사방으로 쏘아진다.

낚시꾼이 낚시대를 던지는 모습이 그럴까? 갈고리가 수십 미터를 날아와 해적들을 걸었다. 발버둥치는 해적들을 그대로 끌어당긴다.

"살려줘!"

"안 돼!"

게가 집게발을 내밀어 해적들을 움켜쥐었다.

사뿐, 달걀 쥐듯이.

금세 처참한 광경이 연출된다.

천천히 자기 입으로 가져가서는 발 끝부터 씹어먹기 시작한 것. 해적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지만 구원의 손은 내려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보다 못한 해적 두목이 달려든다.

허리춤에서 빼어 휘두른 칼에서 휘황한 빛이 일어났다.

기세는 거셌으나 그 뿐.

너무 느렸다. 움직임도 정직했다. 자연히 게가 휘두른 다리에 맞아 나가떨어진다.

엎드린 채 기침을 토하는 해적 두목.

게가 해적 두목에게 다리를 내리찍었다. 뾰족한 다리 끝이 해적 두목의 등을 관통한다. 일반인인 해적보다는 각성자인 해적 두목이 맛있어 보였는지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으아악! 으아아악!"

괴물이 인간을 잡아먹는 것, 언제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장면이다.

그러나 김현은 독심을 품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끝까지 개입하지 않았다.

김현이 보기에는 킬리아 섬의 해적들도 괴물과 마찬가지로 죽여 없애야 하는 종자에 불과했으니까.

"아악!"

"으아악!"

괴물들은 피의 축제를 벌였다.

김현의 힘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인지 김현에게만큼은 접근하지 않는다. 자연히 작은 공터가 생겨났다. 해적들이 악을 쓰며 접근하려 했으나 보이지 않는 장벽이 그들을 밀어냈다.

결국 모두 죽었다.

해적도, 해적의 가족도.

이제 킬리아 섬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김현과 기절한 일본인 꼬마들, 그리고 수천 마리의 괴물들이 전부.

"크아앙!"

"크어엉!"

아니, 지금도 괴물이 늘고 있다. 남쪽의 마을은 물론 섬 전체가 괴물들로 바글거렸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더 가까이 오지는 못하나 저마다 흉측한 아가리를 벌려 김현을 위협했다.

'시작할까.'

주먹을 꽉 쥐는 김현.

이내 두 팔을 늘어뜨린다. 거친 쇳소리와 함께 김현의 두 팔이 금속으로 변했다. 더 나아가 조각조각 분절되며 길어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흔히 써먹었던 기술.

그런데 조금 다르다. 끝도 없이 늘어난다. 김현의 발 밑에서 뱀처럼 똬리를 트는데 그 길이가 언뜻 보기에도 엄청났다.

이윽고 팔을 들어올렸다.

풍차처럼 두 팔을 길게 회전하는 김현.

이 간단한 동작이 죽음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무려 백 미터나 뻗어나간 강철 채찍이 혼돈의 불꽃을 머금고 사방을 휩쓸어버린 것. 김현을 둘러싼 괴물들은 물론 마을 건물들, 그리고 부두와 거기 정박한 쪽배까지도.

스거걱, 스걱.

과도로 과일 자르는 듯한 소리가 거푸 울린다.

무엇도 막지 못했다.

3성 등급 괴물의 단단한 외골격으로도, 용맹스레 들이댄 두툼한 집게발로도. 콘크리트 벽도, 지상에 노출되어 있던 단단한 바위도 마찬가지였다.

모조리 잘렸다.

피를 뿌렸다.

단 한 번의 동작으로 괴물 수백 마리를 격살하고 만 것.

괴물들이 아우성을 질렀다.

"크아악!"

"커헝!"

그러나 놈들에게 이성 따위는 없다. 오히려 더욱 기세를 올리며 전진해 온다. 열여덟 세계의 괴물들이 지르는 합창이 김현의 고막을 때렸다.

주먹을 쥐었다.

채찍처럼 늘어났던 팔이 저절로 합쳐진다. 땅을 박차 공중으로 날아오른 다음 킬리아 섬을 굽어본다.

괴물들이 김현을 올려다보았다.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채 주먹을 떨쳤다.

회색 광채가 첩첩이 일어난다. 두 팔이 또다시 분열한다. 이번에는 잔뜩 산개하여 빛의 파편이 되어 섬 전체를 폭격했다.

하나하나가 혼돈의 힘을 담은 일격이다. 파편 하나가 때릴 때마다 혼돈의 불이 가득 피어났다. 당연히 어떤 괴물도 당해내지 못했다.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찢어져 중상을 입었다.

섬 전체가 들썩였다. 땅거죽을 모두 엎어버리는 것 같다. 그 강렬한 충격에 일본 여자 아이가 눈을 떴다가 다시 끼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온전한 곳이라고는 꼬마 셋이 있는 곳이 전부.

김현은 한 차례 폭격을 마친 다음 지상으로 내려왔다.

상당히 많은 혼력을 쓴 까닭에 약간은 허탈한 감각이 김현의 뱃속에서 기어 올라왔다.

'봤냐?'

그렇게 묻고 싶었다.

이것이 5성 각성자의 진면목이라고.

조만간 외계종들의 앞을 막아설 자들의 면모라고.

오래 쉬지는 못할 운명인가 보다.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하늘 저편에서, 바다 너머에서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봤자 김현을 어쩔 수는 없다.

느긋하게 킬리아 섬에 머물면서 괴물들을 쓰러뜨렸다. 대부분이 1성, 2성이고 가끔 3성이 섞여 있었지만 우연찮게 반가운 손님 하나를 맞이했다.

[말도 안 돼. 이 변방에 저런 강자가 있다니?]

아주 희미한 울림.

김현은 그쪽을 보고는 희게 웃었다.

거대한 체구. 무지갯빛으로 물든 눈. 전신에 꾸물꾸물 솟은 가시. 그리고 지느러미.

혼광 악어.

한때 김현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괴수가 바다 저쪽에서 김현을 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똑똑한 녀석이니 놔두면 도망가겠지.

주먹을 날렸다.

팔꿈치 아래부터 똑 떨어져 일직선으로 날아간다. 혼광 악어가 기겁하여 몸을 돌렸으나 금속 팔이 도달하는 것이 더 빨랐다. 바다를 단숨에 관통하고 혼광 악어를 직격했다.

번쩍!

빛이 일었다.

혼돈의 빛.

그것이 하늘 끝까지 번져 나간다. 인근 바다가 송두리째 증발하며 훅 하고 수증기가 일어났다.

쌔액.

금속 팔이 돌아왔다. 그것을 팔에 끼우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혼광 악어를 격살한 것으로 모자라 4성 성혼 4개까지 챙겨온 터. 개고생을 했던 수개월 전과 비교하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또 어디 눈 먼 4성 괴물 없나.'

아마 다 도망쳤겠지.

혼광 악어가 최후에 내지른 단말마는 다 들었을 테니까.

쫓아가려면 쫓아갈 수 있겠으나 지금은 킬리아 섬을 확보하는 것에 집중하도록 하자.

김현은 하루 꼬박 킬리아 섬에 머물렀다. 그렇게 수만 마리를 쳐죽이자 비로소 괴물들의 발걸음이 잦아든다.

'이 근처가 막장이긴 했구나.'

아프리카 북동부만이 아니라 꽤 많은 곳이 그렇다. 시리아나 예멘도 그렇고, 카리브 해의 아이티도 그렇고......

어쨌든 청소를 한 번 해줬으니 조금은 숨통이 트일 것이다. 가만히 놔두면 다시 이 상태로 돌아가겠지만 거기까지 김현이 다 해줄 수는 없지.

"아이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상."

"운이 좋았지요."

중간에 일본에서 각성자들이 찾아왔다.

모두 3성 등급.

몸값을 챙겨오긴 했으나 수틀리면 해적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려는 의도였다. 아이들을 납치했을 때부터 해적들의 운명은 결정된 셈이다.

"아저씨, 안녕!"

하루 동안 보호하면서 밥도 먹여주고 했더니 정이 들었나 보다. 일본인 꼬마들이 일본어로 작별 인사를 했다. 김현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괴물들을 쓸어버린 다음에는 성혼 농장을 설치.

연차도에 설치한 것과 같다. 다만 연차도도 이곳 킬리아 섬도 한 단계 강화하여 하루에 5성 등급 성혼을 두 개씩 생산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놀고 먹어도 5성 성혼 네 개가 굴러들어온다는 뜻이다.

여기에 새로운 의뢰를 받았다.

"뇰렌 섬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괴물들을 소탕해주시기 바랍니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시리아.

뜻밖에도 예멘이나 남수단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소말리아 인접국이다 보니 불로소득을 조금 얻은 모양.

시리아를 거쳐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했다. 이어 아이티까지 들르자 더 이상은 괴물 소탕 요청이 없었다. 나머지는 굳이 김현의 손을 빌리지 않더라도 감당할 수 있었던 것.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보았다.

초토화된 대지, 넘쳐나는 괴물, 그리고 난민......

'이건 인재(人災)다.'

왜냐하면 이곳은 괴물이 덮치기 전에도 이미 지옥이었으니까.

네 개의 거점을 새롭게 마련한 김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김현을 마지막 희망으로 여긴 난민들이 몰려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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