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난민 –2-
"화려하게 저질렀더라?"
"봤어?"
"그럼, 봤지."
"그 거리에서?"
김애경이 뭔 소리냐는 듯 보다가 망원경을 흔들었다.
흔한 망원경도 아니고 천상계에서 생산되는 빛의 눈을 가공해서 만든 망원경. 수십 킬로미터 거리도 가뿐히 넘겨볼 수 있었다.
"한철군 아저씨 솜씨가 많이 좋아졌더라. 소리도 다 들리던데?"
"받는 연봉이 얼만데, 그 정도는 해야지."
"그나저나 너 괜찮겠어? 거의 선전포고한 수준이잖아."
"그렇다고 그냥 당하고만 있어?"
"그건 그렇지만......"
"미국 같은 초강대국도 아니고, 소말리아 정도 약한 나라한테 접어주고 들어갈 필요는 없지. 누나만 해도 어지간한 나라는 혼자서 털어버릴 걸?"
"난 네가 괜히 욕을 먹을까봐 그게 걱정이지."
"괜찮아. 욕 좀 먹고 지구 구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어?"
"난민들이랑 지구 구하는 게 무슨 상관인데?"
"간단해. 난 군대를 만들 거야."
군대......
불과 수십 분 전 이야기했던 천만의 난민과 그 단어를 결부지어 생각하면 단 한 가지 결론이 나온다.
김애경이 급히 물었다.
"왕이라도 되려고?"
"안 될 건 없지."
"21세기에 무슨 왕이야?"
"이름을 살짝 바꾸면 되지. 종신 통령이라고 해도 되고, 대원수라고 해도 되잖아? 겉으로 봐서는 민주주의여도, 사실 독재 국가인 곳이 진짜 민주주의 국가보다 더 많아. 왜, 누나도 여왕님 되고 싶어? 생각 있으면 어디 하나 떼어줄게."
"이게. 됐거든."
김애경이 김현의 볼을 꼬집었다. 어린아이 다루는 듯한 태도에 웃음만 나온다.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어떤 직위에 올라가든 가족이라는 걸 새겨주는 것 같아서.
사실 원 역사에서도 2030년대에 왕정이 부활했다. 각성자들의 손에 의해, 명목뿐만이 아닌 옛 시대의 절대왕정이.
어쨌든 그건 나중 일.
김애경이 난민들을 눈여겨보며 질문했다.
"저 사람들, 농장으로 바로 들일 건 아니지? 성혼 농도가 너무 높아서 위험할 것 같아."
"확장해서 격리해야지."
과도하게 높은 성혼 농도는 인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벼운 질환이 생기거나 정신에 탈이 생기는 것은 애교고, 괴물에 가깝게 변형될 수도 있었다.
즉석에서 손을 휘저었다. 무진의 표를 또다시 조작하여 안개 공간을 확장시키는 것. 성혼 농장과는 별개인, 널따란 거주지를 만들어 냈다.
푸른 들판이 끝없이 펼쳐진, 노란 태양과 하얀 구름이 평화로운그곳.
'오래는 못 버텨.'
무진의 표는 어디까지나 용왕계의 기술이고, 성혼을 품지 않은 이들은 오래 들어와 있으면 문제가 생기니까.
저항군 기지를 만들 때 썼던 지구형 차원 왜곡 기술이라면 또 모르겠다. 그건 지구인에게 최적화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건강 상태도 안 좋은 난민들이라면 3달만 안개 공간에 들어와 있어도 위태로웠다.
'진짜 영토가 필요해.'
단순히 성혼 농장이나 만들고 거점 역할이나 할 섬이 아니라 드넓은 육지가.
뭐, 얻을 방법은 있으니까.
김애경을 뒤에 남겨두고 안개 공간을 헤치고 나갔다. 쪽배에 옹기종기 앉아 있던 난민들이 두려운 눈으로 김현을 응시했다.
"들어와라."
난민들에게 손짓을 했다.
잔뜩 주눅든 시선만 보낼 뿐 움직임이 없다. 재차 소리쳐도 마찬가지였다. 고민을 하다가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콰콰콰콰.
약간의 시각적 효과.
안개가 둘로 갈라지는 듯한 연출을 보여준다. 난민들이 탄성을 지를 때, 안개 속에서 무한한 지평선이 나타났다. 조금 전 만든 거주지를 안개 너머로 보여준 것.
김현은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그 안으로 날아가 사라졌다. 그제야 난민들이 노를 저어 다가온다. 한편으로는 웃음을,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품고서.
'필요한 게 많아.'
김애경에게 잠시 맡겨두고 뉴욕의 각성소로 공간 이동했다. 우선 백혈탑을 들러 한 가지 물건을 주문했다.
현인의 목걸이.
정신 계열 성혼을 응용한 보물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상대와 의사 소통이 되게 해주는 물건이었다. 등급은 3성인데 3성 등급 성혼을 다섯 개나 주고 사야 했다.
'역시 비싸.'
시간만 충분하면 직접 만들 텐데.
김애경과 다른 일행의 몫까지 넉넉하게 10개를 샀다. 그 다음 각성소의 소장을 호출했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예. 각성소, 아니 성혼 거래소는 잘 되고 있지요?"
경매 이후 각성소에 조금 변화를 주었다. 사람들의 각성보다 성혼 거래에 주안점을 둔 것.
이제 성혼이라면 넘칠 정도로 있다. 1성과 2성 등 하위 성혼은 물론 3성 등급도 마찬가지다. 4성 성혼을 구할 수 있는 곳도 이곳 뿐이다. 돈만 있으면, 그게 지구의 달러든 외계의 명금이나 지옥돌이든 자신이 원하는 성혼을 뭐든지 구입할 수 있었다.
"예,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입니다."
소장이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제가 필요한 게 있는데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뭔데 그러십니까?"
"군입이 늘어서요. 1만 명이 넉넉히 먹을 곡물이랑 물, 부식, 식기, 입을 옷, 잠을 잘 천막이 필요합니다."
"네? 그게 무슨......"
난 데 없는 말에 소장이 눈을 굴렸다.
처음 각성소의 직원으로 고용되어 성혼의 감정에만 주력했던 인물이다. 그러다 타고난 성실함이 김현의 눈에 띄어 점차 승진했지. 김현이 성혼 농장을 가동하느라 사라졌을 때는 김애경의 결정으로 소장 직위에 올랐고.
조금 전 김현의 요구는 명백히 업무 권한 밖. 소장이 눈만 굴리고 있자 김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힘듭니까? 힘들면 다른 분을 알아보지요."
"아니, 아닙니다!"
그 순간 소장은 이것이 일생 일대의 기회라는 것을 눈치 챘다.
단지 성혼 거래소 각성자들의 상급자가 아닌, 하나의 사업체를 온전히 맡을 기회.
성혼 공방의 한철군이 얼마나 되는 연봉을 받아가던가?
두 눈을 빛내며 자신도 모르게 차렷 자세를 취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곡물이요? 옷? 천막? 맡겨만 주십쇼. 허락만 하시면 성혼 거래소의 여유 자본으로 얼마든지 끌어오겠습니다."
"하하, 든든합니다. 한스 베커 씨라고 하셨지요?"
"예. 할아버지께서 2차 대전 끝나고 미국으로 넘어오셨습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수배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혼 거래소로만...... 아니, 이 근방은 교통이 안 좋지요? 훈련소가 낫겠네요. 거기로 배달시켜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음, 회장님. 그게......"
할 말이 있는 걸까?
한스가 말꼬리를 흐리기에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왜 그러십니까?"
"제게 이동 권한을 주시면 제가 직접 배달하겠습니다."
"오호, 그래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법을 제대로 아는 인간이다.
김현은 이런 사람이 싫지 않았다. 그 동안 관찰한 바에 의하면 어디서 첩자로 집어넣은 것도 아니고, 성실하면서 나름 능력도 있었다.
그렇다면 써먹어 줘야지.
"좋습니다. 권한을 드리죠. 단, 제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소장직은 조만간에 적당한 후임에게 인계하도록 하세요. 자, 권한을 설정해 드리겠습니다."
묶여 있던 이동 권한을 풀어준다. 이것으로 한스 또한 전 세계 여덟 곳에 달하는 김현의 거점을 공간 이동하게 된 것. 여기에 자신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물건도 이동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한스가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황홀할 만도 하지.
시야의 너머, 인식의 저 편에 다른 일곱 곳의 거점이 비쳐 보일 테니.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한스가 코를 씰룩였다.
"난민 1만 명이요? 이거 골치 아프겠는데요. 유럽에서 매년 받아주는 난민이 100만 명도 안 되는데 그 난리 아닙니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리를 찾아가야죠. 대신, 확실한 보호자를 둔 상태로."
"회장님......"
뭔가를 감지했는지 한스가 묘한 눈길을 던졌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맡기기로 한 이상 어느 정도 정보는 풀어야 했으니까.
이건 일종의 시험이기도 했다. 일개 직원이었던 한스를 크게 쓰려면 그 됨됨이를 봐야 할 것 아닌가.
확실히 눈치가 빨랐다. 한스가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으, 식량 확보가 가장 문제가 되겠습니다. 그 사람들 다 할랄 푸드 먹을 것 아닙니까?"
"글쎄요. 거기까지 신경 써야 할까요?"
"아휴, 그럼요. 당연하죠. 그 사람들한테는 그게 삶의 방식인데요. 없으면 모를까 뉴욕에는 할랄 푸드가 넘쳐납니다. 저한테 맡겨만 주세요."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종교가 사라진 시대, 22세기를 살던 김현이 보기에는 다 헛짓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이 정도는 감안해야겠지.
"그럼, 맡기겠습니다."
킬리아 섬으로 돌아왔다.
난민들이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몇몇이 일어나 인사를 표하지만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김애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밥부터 먹여야 하는 거 아니야? 물도 필요한 것 같은데."
"다 주문해 놨어."
"차라리 화수분이나 물의 정령 같은 거 사오자. 내가 낼게."
"아냐. 저항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한테 외계 식량 먹이면 안 좋아. 최대한 지구 식품을 먹이는 게 좋아."
"어, 그래?"
"현실 공간에서는 상관 없지. 음식에 함유된 소량의 성혼은 다 방출되거든. 그런데 여기서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젓자 김애경이 비로소 머리를 끄덕인다. 인공적인 성혼으로 가득 찬 공간이니 결국 건강에 안 좋다는 뜻 아닌가.
다행히 한스가 일을 빠르게 처리해 주었다. 안개 공간 한쪽이 열리며 트럭 수십 대가 쏟아졌다.
"어어?"
"우와아!"
트럭에 실린 생수통과 인스턴스 감자 수프를 본 난민들이 환호했다.
어디서 힘이 난 걸까.
오뚜기처럼 일어서서 돌격해 온다.
쿵!
그때 둔중한 진동이 울렸다.
김현이 가볍게 땅을 구른 것.
그런데 그 진동이 세계 전체에 퍼져 나갔다. 천둥 치듯 뼛속까지 파고드는 울림에 난민들이 못박힌 듯 정지했다. 웃고 있던 트럭 운전수들도 얼굴을 굳혔다.
"조용."
낮은 한 마디.
한국어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김애경 말고 이해할 사람이 없다.
이상했다. 분명히 모르는 언어인데 고막을 뚫고 대뇌에 직통으로 꽂힌 까닭. 미국인 운전수들도, 소말리아인 난민들도 김현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트럭들 다음으로 힘 꽤나 쓸 법한 장정들이 수십 명은 넘게 들어왔다. 한스가 제법 술수를 부릴 노먕이다. 일단 그들부터 집결하게 했다.
"수프랑 생수통 이쪽에 내려주세요."
"어?"
"영어가 아니네?"
"내버려둬. 뭐든 수를 썼겠지."
이제는 김현과 관련해 기이한 일이 벌어지면 그냥 대범하게 넘기는 미국인들이다.
장정들이 트럭에서 감자 수프와 생수통을 내렸다. 여기저기 그득하니 산이 쌓이자 여태 우두커니 서 있던 난민들을 불렀다.
"열 줄로 서라."
김현의 기이한 능력을 실감한 탓인지, 근육 떡대들이 수십 명도 넘게 들어와서인지 난민들이 순순히 통제에 따랐다.
물론 기민하게 움직이지는 못했다. 어디까지나 굼벵이 수준이었다. 식료품이 쌓인 곳마다 줄을 서라고 했는데 긴 덩어리로 뭉쳐 있다시피 했다.
교육 수준도 낮고 체력도 바닥인 사람들에게 뭘 바라겠나.
"사람 한 명 당 수프 하나, 생수통 하나씩 나눠주세요."
감자 수프는 미국 편의점과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였다. 어른 주먹 크기. 한 끼 식사로 충분했다. 여기에 생수통은 모조리 1L 짜리이니 하루는 버티겠지.
장정들이 난민들에게 수프와 생수통을 배급했다. 살았다는 얼굴로 감사히 받아든다.
이어 옷가지도 나눠주었다. 크기만 다른, 뉴욕 티셔츠 한 벌과 청바지 한 벌이다. 소아용도 있어 난민들이 입기에 무리가 없었다.
김애경이 다가와 속삭인다.
"재주도 좋다.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어?"
"내가 한 건 아니고 한스 그 사람이 한 거야."
"한스? 아, 각성소장?"
"이젠 아냐. 유통 업체 하나 만들어서 맡기려고."
"그 사람 괜찮아 보이긴 하더라. 너무 괴롭히진 말고."
"내가 뭘 괴롭힌다고 그래."
트럭이 추가로 더 도착했다. 이번에는 소형 천막과 침낭이 가득 실려 있었다. 4인 단위로 천막 하나씩, 1인마다 침낭을 나눠주자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원래는 낮과 밤의 구별이 없는 공간. 김현은 외부 시간을 보고 안개 공간 내부를 어둡게 조절했다. 그러자 난민들이 어설프게나마 천막을 치고 침낭을 깔고 누웠다.
딱 한 가지만 경고했다.
"사고치지 마라. 범죄자는 추방한다."
소용 없었다.
꼭두새벽. 만물이 다 잠든 때에 새된 비명이 허공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