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난민 –3-
김현은 벌떡 일어났다.
김애경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김현은 킬리아 섬을 지키고 있던 참이다. 자연히 비명 소리를 누구보다도 먼저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소리지?'
분명히 잘못 들은 건 아니다.
벌떡 일어났다. 비명이 터진 곳을 향해 몸을 날린다. 단숨에 공간을 접어 도착했다.
작은 천막 앞.
어린 여자아이 둘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그리고 안쪽 천막에서 흐느껴 우는 울음과 숨넘어가는 신음이 동시에 들렸다. 헉헉대며 용을 쓰는 소리와 함께, 위협하듯 을러대는 목소리도.
부욱!
당장 상황을 눈치채고 천막을 잡아 뜯었다. 천이 모조리 뜯어지며 안의 광경이 훤히 드러난다.
한 어린 여성을, 남자 서넛이 찍어누르고 있었다.
남자들이 놀라 김현을 돌아본다.
세상이 어두워서일까. 남자들은 김현을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대신 시답지 않은 농담을 건넨다.
"왜? 끼워 줄까?"
"우리 패거리 아니면 안 돼. 날 밝은 다음에 압둘라하를 찾아오라고."
한바탕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깔려 있는 여성과 눈이 마주친다.
이미 절망으로 얼룩진 얼굴. 고통스러운지 잔뜩 일그러져 있다. 저항해 볼 법도 하건만, 어째서인지 이미 놓아버린 모양새다.
우드드득.
대신 이를 갈았다.
전생, 외계종들에게 처참히 당하던 자신과 눈앞의 여성이 겹쳐 보인 까닭.
끼기긱, 끼긱.
어느새 두 주먹이 강철로 바뀌었다. 으스러져라 쥐자 금속음이 거푸 울린다.
"어어?"
그제야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나 보다.
남자들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특히, 여성의 두 손을 붙잡고 이쪽을 보던 남자가 입을 벌렸다.
"다, 당신?"
퍼억!
주먹을 날렸다.
어디까지나 살살, 죽지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도 않도록.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일반인에게는 무시무시했다. 남자가 붕 나가 떨어진다. 시끈덕대며 힘을 쓰던 자가 놀라 일어섰다.
"뭐, 뭐야!"
이번에는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잡아챈다.
탈모인지 보슬보슬한 머리채가 잡혔다. 그걸 확 끌었다. 모근 수백 다발이 뽑히며 남자가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인정사정 보지 않고 발밑에다가 처박았다.
"무, 무슨 짓이요!"
다른 남자 하나가 항의하고, 제법 덩치 큰 남자가 김현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헛수고.
김현은 사이 좋게 둘의 뒷덜미를 잡아 바닥에 쳐 박아 주었다. 그런 다음 저 멀리 날렸던 남자를 잡아 같은 곳에 메다 꽂았다.
"크어억!"
"크윽, 크으윽."
이제 작은 천막 앞에 흐르는 것은 남자들의 신음소리 뿐이다.
당하던 여성이 멍한 눈으로 김현을 보고 있었다. 김현은 뜯어낸 천막을 여성에게 덮어주었다.
비로소 여성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아까부터 울고 있던 여자아이들을 손짓하여 부른다.
"리야, 무나, 이리 와."
"언니!"
여자아이들이 여성에게 안겨 든다. 여성이 두 아이를 끌어안았다. 본인도 중학생 정도, 어려보이는데 꽤 어른스러운 태도였다.
그것을 보니 더욱 분노가 솟구친다. 김현은 냉엄한 눈으로 남자들을 내려다보았다. 마음 속에서 부는 격랑도 모르고, 막 일을 치르다 머리카락을 뽑힌 자가 큰 소리로 불평을 했다.
"이보시오! 지금 뭐하는 거요?"
"뭘 하냐니?"
"우리가 아비도 오래비도 없는 저 불쌍한 소녀를 보호하는 것도 몰랐소? 아무리 그대가 이 기이한 곳의 주인이라고는 하나, 우리 마을의 일은 우리 마을에게 맡겨둬야 하오!"
들어보니 저 소녀와 이 남자들은 같은 마을 출신인가 보다. 정부군에 의해 마을이 초토화된 이후 쭉 같이 있었다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계속 소녀의 희생을 강요한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공허한 소녀의 눈을 보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네 아버지와 오빠는?"
더욱 흐릿해지는 소녀의 눈동자.
알 만 했다.
최근에 죽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보호자가 없어졌고, 그 틈을 노려 이 작자들이 덤벼든 것이다.
"이미 마을이 없어졌다며. 그런데 왜 없어진 마을을 들먹여?"
"마을은 없어졌어도 공동체는 유지되고 있소이다!"
"시끄럽고. 난 분명히 경고했다."
손가락을 튕겼다.
그 간단한 동작에 세상이 돌변한다.
아직 꼭두새벽이지만 대낮처럼 밝아졌다. 사람들이 놀라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들을 둘러보며 허공에다가 앉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흙이 솟아 차가운 철제 의자를 만든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들에게는 수갑과 족쇄가 채워졌다. 여기에 더하여 김현 주위의 공간만 뚝 떼어낸 듯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으아악!"
"아, 악마다!"
남자들이 버둥거렸다.
두려울 만도 하지. 몸이 결박된 채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으니. 마치 무중력 공간에 내던져진 듯한 느낌을 받고 있을 것이다.
"저기 좀 봐!"
"세상에, 뭐야?"
"압둘라하네 패거리잖아?"
"낮에 보니까 사브리나 천막에 들어가자고 작당을 하던데......"
"쉿! 누가 들을라."
깰 사람은 깼고 볼 사람은 보고 있다.
김현을 그들을 보며 말했다.
"조금 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여기 있는 네 남자가 집단으로 한 여성을 성폭행했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인 바, 지금부터 판결을 내리겠다."
"자, 잠깐! 그대가 무슨 권리로?"
"이곳의 주인이니 그럴 권리가 있지. 그럼, 네놈들은 내게서 보호만 받고 음식과 물만 얻어먹으면 되는 줄 알았나?"
김현은 독사 같은 눈으로 범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또 택도 없는 변명을 한다.
"아비도 오래비도 없는 여자요! 그런 여자를 보호해 주었으니 우리에겐 그럴 권리가 있소!"
"아니, 없어. 지금 그녀의 보호자는 나니까."
"무, 무슨......"
"그녀만이 아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보호 아래에 있다. 내 피보호자에게 상해를 입히는 자, 억압하는 자, 살해하는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그것이 내 다른 피보호자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김현의 시선이 짙어진다. 또한 드높아진다. 그리하여 세상 너머의 것처럼 아득해져 범인들의 마음을 짚어낸다.
'거짓말이구나.'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범인들은 애초에 소녀를 보호한 적이 없었다. 보호 어쩌고 운운한 건 그저 자기 합리화일 뿐.
대머리가 재차 소리쳤다.
"이건 우리 부족의 전통이요! 상관하지 마시오!"
"아주 편하네. 아쉬울 때는 보호를 요청하고, 음식과 물은 잘 받아 쳐먹고, 내 옷을 입고 천막에서 자던 주제에 이제 와서 상관하지 말라고? 그럴 거면 내 영토에 들어오지 말았어야지."
"그, 그럼 다시 가져가시오! 그러면 될 거 아니오!"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김현의 입이 벌어지며 송곳니가 살짝 비쳤다. 싸늘하고도 날카로운 비소를 머금은 채 난민들 전체를 향해 물었다.
"묻겠다.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나?"
침묵.
아무도 대답이 없다.
"너희는 이미 내게 의탁했다. 그런데 너희들 사이의 일에 대해선 개입하지 말라?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나?"
몇 번을 더 재촉했다.
다들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남자가 소리를 높여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랬으면 하오!"
"어째서?"
"당신은 이방인이며, 이교도이며, 외국인이기 때문이오. 우리에게는 우리의 방식이 있으니 그냥 놔뒀으면 좋겠소."
옳소! 하고 외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결박된 남자들이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게 느껴졌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나?"
"그렇소. 정말이오."
여기저기서 고개를 많이 끄덕였다.
다시 한 번 이들의 폐쇄성을 실감한다.
마냥 끌려다닐 수는 없는 노릇.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가라."
"어......"
"이곳의 주인은 나고, 나는 내 방식을 따르지 않을 자들을 들여놓을 생각이 없다. 너희의 방식? 그건 너희 땅에서 찾아라."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는다.
숨 막히는 정적.
모두 말을 잊고 말았다.
당연하다. 자기 고향에 돌아갔다간 운이 좋아야 비참한 삶을 연명할 거고, 운이 나쁘면 다른 적대적인 부족이나 괴물들에게 살해당하고 말 테니.
"우선, 너부터."
아까 나섰던 남자를 가리켰다. 안개가 갈라지며 푸른 바다가 드러나자 남자가 발버둥을 쳤다.
"어어? 자, 잠시만!"
"꺼져라, 이방인. 너희가 나를 이방인으로 대한다면 나도 그렇게 하지."
"으아아아!"
남자가 빠르게 바다로 사라졌다. 안개 공간이 되돌아오며 남자를 삼켜 버렸다. 쪽배가 근처에 있으니 죽지는 않겠으나,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걸 보고 모두들 어깨를 움추린다. 누군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외쳤다.
"너무 하십니다! 저러면 저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당신 같은 강자라면 아량을 베풀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량? 베풀었지, 넘치도록. 하지만 단물만 빨면 그만이라는 이방인에게 베풀 아량은 더는 없다. 내게 자비를 기대하고 싶으면 그만한 가치를 보여."
약자라고 꼭 선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독하고 사악한 마음을 보일 때가 있다.
"내 땅에서는 내가 법이다. 싫으면 나가라. 너도 나가고 싶나 보지?"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냥 한마디 한 겁니다."
제법 용기 있게 나섰으나 김현의 눈을 보고는 찌그러진다. 김현은 난민들을 둘러보며 선언했다.
"다시 한번 말한다. 여기 있는 자는 모두 내 보호 아래에 있다. 다. 내 피보호자에게 상해를 입히는 자, 억압하는 자, 살해하는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이 자들에 대해 판결한다."
"잠시만! 잠시만!"
도도하게 이어지는 흐름에서 뭘 감지한 걸까. 묶인 남자들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자들의 죄는 집단 미성년자 성폭행이다. 나는 너희의 관습을 모른다. 하지만 내 피보호자를, 특히 미성년자를 강간한 만큼 그 죄질이 아주 극악하다. 따라서 너희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겠다."
"안 돼요!"
범인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들이 달려나왔다.
"저희 남편을 살려주세요!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에요! 분명히 저 요악한 마녀가 꼬리를 쳤을 거예요!"
"그럼요! 차라리 저 마녀를 목매다세요. 아니, 투석형에 처하세요! 저희가 때려죽일게요!"
그 수가 많았다.
나중에는 어린아이와 친척들까지 다 몰려와 탄원하기 시작.
김현은 수가 충분히 불어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자 아주 가관. 거의 수백 명 정도까지 불어났다.
범인들이 힐끔힐끔 김현을 본다.
설마 이 지경까지 왔는데 정말로 끝장을 보진 않겠지 하고.
그러나 이런 생각은 김현을 띄엄띄엄 본 거였다.
"좋다, 판결하겠다."
섬뜩하도록 차가운 목소리.
"범인들은 사형. 소극적 가담자들은 모두 추방이다."
"네?"
"헉!"
"아, 안 돼!"
김현은 손을 들었다. 손이 크게 벌어지며 범죄자 넷을 단번에 휘어 감는다. 그 상태에서 들어 올리자 경악에 찬 비명이 울렸다.
탄원자들이 빌고 울부짖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혼돈의 불꽃을 피워 범죄자들을 불태웠다. 한 줄기 처절한 소리와 함께 범죄자들이 재가 되어 흩어진다.
이어서 손을 내밀자 안개 공간이 아까처럼 갈라졌다. 버텨 보지만 세계 자체를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 노인부터 아이까지 모조리 바다로 방출되는 신세가 되었다.
적막,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들 두려움에 차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언제 또 김현이 손을 뻗을지 몰라 땅만 내려다본다.
"나는 너희를 보호할 용의가 있다."
여전히 차갑지만,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온기가 느껴지는 어조.
"그렇다고 해서 너희의 관습과 종교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범죄로 이어진다면, 관습과 종교라는 명목으로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한다면 절대 두고만 보지 않겠다. 주동자는 죽일 것이고 소극적 가담자는 모조리 추방하겠다. 뭐, 목숨을 걸 정도로 남을 억압하고 폭행하는 게 중요하다면 마음대로 해라. 그건 나도 감안을 해주마."
하이얀 웃음이 터졌다.
그걸 보고 난민들이 몸서리를 쳤다.
알고도 행한다면 더욱 처절한 형벌이 가해질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언제든 가고 싶을 때 가도 좋다. 단, 내 땅에 있을 때는 내 법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단순한 내 보호와는 별개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너희에게 제안할 것이 있다."
잠시 뜸을 들였다.
난민들이 지겨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릴 때가 되어서야 본론을 꺼냈다.
"강해지고 싶은 자, 삶의 목적을 찾고 싶은 자에게 묻는다. 각성자가 되고 싶나?"
각성자!
그 단어가 난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각성자였다면, 내가 각성자였다면......
지금처럼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진 않았겠지. 흉악한 족속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가족들을 지켜냈을 것이다.
직접 목격한 김현의 모습이 그 상상을 부채질했다. 김현은 줄곧 신 혹은 악마에 가까운 무력을 뽐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말에 선뜻 결정하지 못하게 된다.
"대신 모든 것을 내게 바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