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군대 육성 –1-
"분위기가 이상한데요?"
5성 각성자가 되어 김애경과 함께 킬리아 섬을 방문한 이세희의 첫 반응이었다.
"그러게. 어제는 안 그랬잖아?"
"그럴 일이 있었어."
"뭔데?"
김현은 낮은 목소리로 새벽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둘이 얼굴을 찌푸린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죽인 건 너무했어."
"아니지, 언니! 그런 놈들은 다 잡아 죽여야 해. 김현 님, 잘 하셨어요. 그런 놈은 앞으로도 살려두지 마세요."
"그래도......"
"누나. 누나가 피해 당사자였어도 그런 말을 할 거야? 아니면, 우리 하은이가 10년쯤 뒤에 그런 일을 당해도?"
"야, 그거랑은 다르지."
"똑같아. 피해자 보니까 나이가 14살밖에 안 됐더라. 우리로 치면 중 2나 중 3이야. 어린애라고."
나이를 듣고는 김애경도 말을 잊고 말았다. 설마하니 그 지경일 거라곤 생각을 못 했나 보다.
"저런......"
"그래서 선생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요?"
"피해자 잠깐만 봐주세요. 아침에 보니 다친 것 같던데 제가 나서기는 조금 그렇잖아요?"
"알았어요. 당연히 도와줘야죠."
이세희가 두 팔을 걷어붙였다. 김애경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걱정 어린 어투로 말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면 군인들을 고용하는 게 낫지 않아? 미군은 못 쓰겠지만 용병들은 많잖아. 아니면 각성자들이라도."
"자경단을 만들 거야."
"자경단? 그걸로 될까?"
"되지. 나도 당분간은 계속 여기 있을 거고."
"그럼 뭐......"
현인의 목걸이는 진작에 나눠주었다. 무한의 들판을 걷자 난민들이 보고 화들짝 놀란다. 나눠준 천막으로 들어가 지퍼 문을 내렸다.
새벽 일 때문에 다들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김애경이 우려하는 얼굴을 했으나 김현은 태평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당시의 감정은 묽어지기 마련이니.
목표 천막에 도착.
유독 다른 천막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흡사 따돌림당하는 아이 같아 보였다. 묵직한 공기를 헤치고, 이세희가 천막을 살짝 흔들었다.
"안에 있니?"
아무 대답이 없다.
하지만 이세희 또한 5성의 각성자. 귀를 기울이면 사람의 호흡 소리나 심장 소리도 쉽게 듣는다.
"난 간호사야. 환자가 있다며? 들어갈게. 놀라지 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천막 문을 젖혔다.
자기들끼리 웅크려 있던 세 자매가 눈에 들어온다.
꼬마 둘이 자기 언니를 양쪽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소녀의 얼굴에 열꽃이 가득 피었다. 눈을 떠 이쪽을 보려고 했으나 눈이 제대로 떠지질 않았다.
"어머, 몸이 불덩이잖니! 말을 했어야지!"
"누, 누구세요?"
"저희 가만히 놔두세요!"
"으으, 으으으......"
꼬마들이 무서운 듯 자기 언니의 품에 파고들었다. 언니가 나가라는 듯 손을 휘저으나 힘이 하나도 없다. 이세희가 그냥 보아 넘기지를 못하고 얼른 소녀에게 다가갔다.
"무서워하지 마. 치료해줄게."
이세희가 가진 빛의 치유는 원래 외상 쪽에 특화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이세희는 5성으로 승급한 상태. 당연히 질병에도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한다.
황금빛이 강물처럼 내렸다.
꼬마 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보았다. 소녀의 눈에도 비로소 빛이 돌아온다. 경탄하는 기색으로 이세희의 손에서 빛나는 금색 물결과 이세희의 얼굴을 몇 번이나 쳐다보더니 앵두 같은 입술을 달싹였다.
"다, 당신은 천사인가요?"
"어머,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한데 나도 너랑 똑같은 인간이야."
이세희가 눈을 찡긋했다.
소녀, 사브리나는 이세희의 손을 홀린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치료가 다 끝나자 이세희가 사브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몸이 잠깐 놀라서 열이 난 거야. 크게 걱정하진 말고, 밥 잘 먹고 잘 자. 뭐든 열중해도 좋겠지. 공부해도 좋고, 운동해도 좋고...... 그러다 보면 금방 나아."
다정한 목소리.
포격에 맞아 죽은 어머니가 생각 난다.
사브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세희가 깜짝 놀라 사브리나를 끌어안았다.
"왜 그래? 어디 아프니?"
"아뇨,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저 눈물을 흘리는 사브리나.
울음은 전염되는 법. 꼬마들까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이세희가 말없이 그들을 안아주자 아예 대성통곡이 터졌다.
자리를 비켜주었다.
김애경도 망설이다가 김현을 따라왔다.
"세희한테 저런 면이 있었네......"
"간호사잖아."
"얘는. 간호사라고 다 사명감이 있는 줄 알아?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 걸."
"이 선생님이 우리 팀이어서 다행이야."
"그건 그래. 옛날 생각난다. 처음 만났을 때는 완전 햇병아리였는데. 네 발목도 좀 잡았잖아."
"누구나 그럴 때가 있는 법이지. 나도 다치고 나서 누나한테 의지 많이 했어."
"그랬지. 그러다 네가 갑자기 변하고 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솔직히 나 그때 네가 다른 사람이 된 줄 알았어."
"하하, 그랬어?"
김애경은 가끔 면도날처럼 예리할 때가 있다. 김현은 적당히 웃어 넘겼다.
울음은 한참이 지나고서야 그쳤다.
이세희가 묘한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김현 님. 쟤가 김현 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데요?"
"뭐래요?"
"각성자가 되고 싶다는데......"
사실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없지.
김현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사브리나가 흠칫, 놀라고 꼬마들은 아예 사브리나 뒤로 몸을 숨긴다. 그나마 이세희가 뒤에서 손을 흔들자 다소 안심하는 기색.
"할 말이 있다고?"
"네, 그게......"
사브리나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두 꼬마가 더욱 파고들자 그걸 느끼고는 다부지게 아랫입술을 깨문다. 이내 김현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어제, 슈퍼 김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랬지."
"원한다면 각성자로 만들어주신다고요."
"맞아. 하지만 조건이 있다. 그것도 들었나?"
사브리나가 아랫 입술을 짓씹다시피 했다. 꼬마들을 안은 두 팔에 힘을 주더니 눈에 힘을 주었다.
"들었습니다. 예,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각성자만 된다면, 그래서 리야와 무나를 지킬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설령 그게 제 육체나 생명, 영혼이라고 해도요."
두 눈에 강렬한 의지가 맴돈다. 낮은 목소리가 계약서에 찍힌 피의 인장을 보는 듯했다.
저절로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첫 병사구나.'
나이가 어려서 아쉽지만 언제까지나 소녀이지는 않을 테니까.
진중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좋다. 내가 널 각성자로 만들어 주지. 대신 내 명령에 철저히 따라야 한다.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아야 한다. 알겠나?"
"예, 슈퍼 김."
"좋아. 그럼 첫번째 명령을 내리지."
사브리나가 긴장한 얼굴을 했다.
과연 어떤 명령일까?
설마......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들처럼 더러운 짓을 시키지는 않겠지? 그것도 동생들 앞에서?
슬며시 드는 생각에 얼굴이 어두워진다.
하지만 김현의 첫번째 명령은 사브리나가 생각지도 못했던 거였다.
"앞으로 날 슈퍼 김이라고 부르지 마라."
"네?"
"두 번 말해야 하나?"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자 사브리나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그럼 뭐라고 부르지요?"
"그냥 사령관님이라고 불러라."
"네, 사령관님."
사브리나가 다소곳하게 인사를 했다.
김애경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미국에서 안 좋아할걸."
"그렇겠지."
연차도를 할양받고 성혼 농장을 건설할 때까지는 우호적으로 나왔던 미국이다. 일종의 사업을 보다 큰 규모로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언제까지 지금 같은 관계를 지속하기는 힘들다. 본격적으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면 김현을 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지니까.
미국의 수호자에서, 3세계의 군벌로.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 수는 없지."
"너......"
씩씩하게 말하자 김애경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사브리나, 여기에 손 올려봐라."
일부러 챙겨온 수정구를 꺼내 내밀었다. 에일리와 피터를 뽑을 때도 썼던 측정의 수정. 사브리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얹자 글자들이 꼬물꼬물 나타났다.
<잠재>
[성향] 충왕 [자질] 상급
[계열] 변형, 강화
[합치] 칼날 팔뚝
나쁘지 않다.
게다가 칼날 팔뚝이라면 기왕에 보유한 성혼 중 하나였다. 성능이 꽤 괜찮으니 이걸로 각성시켜도 되겠다.
가만히 손을 뻗었다. 손이 허공에서 녹아 없어지자 사브리나가 헉하고 신음을 토했다. 작은 은빛 젤리 같은 것을 꺼내며 손이 원상 복구되자 바로 진정했지만.
"먹어라."
"네, 사령관님."
사브리나가 정중히 성혼을 받아 꿀꺽 삼켰다.
각성 시작.
몸을 활처럼 누인 채 부르르 떤다. 그래도 합치 성혼인만큼 반응이 심하게 격렬하지는 않았다. 다만 상당한 쾌감을 느끼는 듯 비음을 토하며 몸을 베베 꼬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나고 사브리나가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저, 정숙하지 못하게......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성혼 발현해 봐."
"어, 어떻게요?"
"네 팔에 정신을 집중해. 그곳에서 칼이 나온다고 생각하면 돼. 어렵지 않아. 지금도 팔이 근질근질하지?"
"잘 모르...... 엄마야!"
별안간 사브리나의 오른쪽 팔뚝에서 칼날이 튀어나왔다.
낫처럼 굽은 형태의, 사마귀의 앞발을 닮은 칼날.
아직 어설프고 연약하지만, 매우 날카롭다. 연약한 사람의 피부는 가볍게 갈라버릴 것 같다. 사브리나가 신기한 듯 칼날에 손을 가져갔다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무턱대고 만지다가 손가락을 베인 것.
"조심해야지."
이세희가 주의를 주며 치료해주었다. 사브리나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다.
"잘했다. 앞으로 최대한 성혼을 발현한 상태로 다녀라."
"야, 그건 너무 위험해."
"그래도 계속 써야 익숙해지지. 강해지고. 그리고 굳이 칼날을 날카롭게 할 것 없어. 변형 계열이니까 둔하게 변화시키면 돼. 사브리나, 내 말뜻을 알겠나?"
"네! 알겠어요!"
"많이 쓰고, 여러 형태로 바꿔보고, 그래서 네 성혼을 쓰는 게 숨쉬 듯 자연스러워져야 한다. 그러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해. 여기 이세희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많이 먹고 많이 자야 하고. 네 몸 상태가 좋아지면 내 훈련소에도 데려가겠다."
"훈련소요?"
"그래. 세계 제일의 훈련소지. 거길 졸업하면 너는 지구에서도 손꼽히는 각성자가 되어 있을 거다."
"할게요! 하겠어요!"
사브리나가 미친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는 두 꼬마가 칭얼거린다.
"언니, 나두나두."
"나두 할래."
뭔지는 몰라도 자기들 언니가 한다니 끼어들려는 모양.
사브리나의 시선이 향하자 단호히 머리를 저었다.
"넌 여러 특수한 상황 때문에 네게 자기 결정권이 있다고 볼 만하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너무 어려. 나중에,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자기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때가 오면 그때 이야기하도록 하지."
"예, 사령관님.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빨리 강해지기나 해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침 식사 시간.
그 전에 이 작은 세계를 한 번 돌아볼 생각이었다.
사브리나가 천막 밖으로 쫓아 나와 배웅을 한다. 그것을 보고 난민들이 멀리서 입방아를 찧었다.
"세상에, 저 팔 좀 봐."
"악마의 팔이야, 악마의 팔!"
"징그럽기도 해라."
"각성자가 된 걸까?"
"흥, 이교도 따위에게 영혼을 팔다니......"
그러나 모두 질색하지만은 않았다. 각성자가 될 기회가 눈앞에 왔는데 헛되이 놓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이 시대의 대세는 각성자들에게 있으니.
은밀하게, 혹은 대놓고 난민들이 찾아왔다.
대개는 젊은이. 혹은 어리다 싶은 소년 소녀들도 있었다. 김현은 나름대로 그들을 시험하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
"왜 동생은 되고 저는 안 됩니까?"
가끔 거부당하고 따지는 이들이 있었다.
김현은 투명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각오가 약해."
"네?"
"최소한 내 시험을 통과할 정도는 되어야지. 정신력을 기르든, 체력을 기르든 해서 다시 와라. 통과하면 받아들이지."
"저, 정말이지요?"
"당연하다."
시험이라고 해봐야 별 것 없다. 존재감을 미약하게 드러내어 압박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난민들은 혼비백산하여 졸도하곤 했으니......
비슷한 일이 네 거점 모두에서 벌어졌다. 소문이 퍼지며 더욱 난민들이 몰리고, 그들 중 수백 명을 휘하로 받아들였다. 이들이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자 훈련소에도 보내 능력치를 올리게 했다.
체력이 붙어서일까?
난민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자연스럽게 사건 사고가 벌어진다.
가벼운 시비, 혹은 폭행, 심지어 강력 범죄까지.
치안을 담당할 병력이 필요했다. 당연히 난민 출신 각성자들을 자경단으로 고용하고 병사로 세웠다.
여기서 엉뚱한 일이 불거졌다.
남자 각성자들이 여자와는 같이 일할 수 없다며 들고 나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