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96화 (96/200)

# 96

군대 육성 –2-

김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뭐라고 했지?"

서늘한 기운이 심장을 잡아챈다.

하지만 눈앞의 각성자들은 쉽사리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여자는 보호해야 할 대상이고, 남자에게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 여자가 자경단에 들어온다니요. 아무리 각성자라 해도, 현숙한 어미가 되기 위해선 배워야 할 게 많습니다."

"여자들에겐 여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경단 대신, 그들에게 취사와 청소, 빨래를 맡기십시오. 자경단에 여자를 들인다니, 사령관님의 위명이 퇴색될까 두렵습니다."

"심지어 자경단장을 맡긴다니,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저희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반대할 겁니다."

모두 남자들.

나이가 많고 적고에 관계없었다. 수십 명이 몰려와 한꺼번에 빼액빼액 힘을 모아 합창했다.

어조는 부드럽고 정중하나 어떻게 보면 김현의 권위에 대한 도전. 이들을 각성자로 만들 때 이미 말한 내용이 있으니.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들을 노려본다. 남자들은 몸을 움츠리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개중 나이 지긋한 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령관님. 저희는 사령관님의 뜻에 반하려는 게 아닙니다. 너무 과하신 것 같아 한 말씀을 올리는 것뿐입니다."

"여자를 굳이 자경단에 들이겠다면, 자경단장만이라도 명망 있는 이맘에게 맡기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사령관님 같은 강한 분을 섬기는 것에는 이의가 없으나 여자, 그것도 어린 계집에게 명령을 들을 수만은 없습니다."

"부디 영명하신 판단을 내려주십사 부탁드립니다."

이들이 이토록 몰려와 시위하는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사브리나.

그 어린 소녀를 자경단장으로 임명하겠다고 공표한 까닭.

성인 여성, 그것도 오래 활약하면서 인망을 쌓은 이를 자경단장으로 뽑았어도 구설에 오를 판이다. 그런데 자기들이 보기에는 약하기만 한 소녀를 자경단장에 올린다고 했으니 반발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김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어이가 없군."

"죄,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용서해 주십시오!"

남자들이 겁을 집어먹고 일제히 엎드린다. 비록 제법 시일이 흘렀으나, 사브리나를 강간한 남자들을 처리하고 식구들을 추방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 김현의 티끌만 한 분노라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그걸 보고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사브리나를 자경단장으로 세운 이유는 따로 있다."

"어, 어떤......"

"강하니까. 그게 전부다."

실은 한 가지 더 있다.

이들의 공고한 사회를 흔들고자 한 것. 김현은 자신에게만 충성할 군대가 필요하지 신의 전사가 필요한 게 아니니까.

남자들이 엎드린 채 불신 어린 눈빛을 보낸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여자가 남자보다 강하다니, 말도 안 됩니다!"

"말이 안 되긴. 그게 사실인데.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몸을 튕기듯 일어났다. 남자들의 앞을 산책하듯 걸으며 말을 이어나간다.

"누구든 좋다. 정정당당하게 사브리나와 싸워 이기면 자경단장 자리를 내리지. 사브리나를 이긴 게 여럿이라면 그들 중에서 자경단장을 뽑고 나머지에도 간부직을 내리겠다. 어떠냐?"

남자들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그들이 보는 사브리나는 어리고 가녀린 소녀. 아무리 각성자라 해도 충분히 이기지 싶었다.

자기들도 각성자이고, 김현의 훈련소에서 훈련받고 있으니까.

"하겠습니다!"

"제 가치를 증명하겠습니다!"

"관대하신 처분에 감사를!"

"물러가라. 대전은 내일 아침, 오전 9시에 시작하겠다."

"예, 사령관님."

남자들이 희희낙락하며 썰물처럼 물러갔다.

서경태가 옆에서 다리를 건들거리며 보고 있다가 물었다.

"저 사람들, 정말 사브리나를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사브리나는 옛날 저보다 강해졌는데."

"못 이기지."

단호한 그 말에 에일리가 입을 삐죽였다.

"흥, 사브리나가 전부 다 쥐어 패줬으면 좋겠네요. 뭐? 여자가 어쩌고 저째? 무슨 19세기를 살다 왔나......"

"저 사람들은 미국인이 아냐. 우리처럼 생각하면 곤란하지."

"흥! 피터, 너도 실은 저 사람들처럼 생각하는 거 아냐? 나도 여자 주제에 나대는 것 같아?"

"말도 안 돼! 난 차별주의자가 아냐!"

"그건 그렇고, 저 사람들은 왜 자기들이 사브리나를 이긴다고 생각했을까요? 제가 봐도 사브리나가 여기 난민 중에서는 제일 센데."

이세희의 물음에 김애경이 명쾌하게 대답했다.

"외면했으니까."

"응? 외면했어?"

"어. 넌 난민들 치료하느라 못 본 것 같은데 내가 훈련소 담당할 때 보면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모여서 훈련하더라. 처음에는 장막까지 치고 훈련하길래 그런 건 못하게 했지. 남자들은 그때도 불만 많았어."

"세상에......"

"사브리나가 어려서 걱정스럽긴 한데, 현이가 사브리나를 자경단장으로 만드는 것 자체는 잘했다고 봐."

김애경이 김현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사브리나를 자경단장으로 세우는 이유가 단지 강해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다.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어쨌든 내일이면 결판나겠지. 내일 보자고. 그리고 경태 너, 게으름 부릴 때가 아닌데?"

"윽, 알았어요."

서경태가 움찔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머리를 젓고는 15층 성혼로로 올라갔다.

피터가 나른한 표정을 짓는다.

"저는 뭘 할까요?"

"심심하면 집에나 다녀와."

"쳇......"

5성 각성자가 된 후로는 늘어진 모습이다. 긴장이 풀린 모양.

그동안 내버려 두었는데 슬슬 고삐를 당겨야 할 것 같다.

"할 거 정 없으면 에일리랑 대련이라도 해. 아니면 우리 누나한테 멸망포라도 쏴달라고 하던가. 새로 각성한 광성체는 아직 3성 밖에 안 됐잖아."

"으윽, 그건 그렇지만요."

"다른 분들도 잘 들으세요. 우리가 큰 고비를 넘긴 했지만 아직 마음 놔서는 안 됩니다. 성혼 농장이랑 자경단, 난민 문제만 조금 해결되면 우리가 외계로 진출할 거니까요."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김애경이 펄쩍 뛰었다.

"외계로 진출하다니?"

"그렇잖아. 우리 사업은 곧 한계에 부딪혀. 지구에 출몰하는 괴물에는 한계가 있거든. 성혼 농장을 짓는 것도 선을 잘 타야 하고...... 이럴 때는 외계로 직접 진출하는 게 최선이야."

"어디, 어디로 갈 건데?"

"첫 목표는 유명계가 되겠지. 백흔혼에게 도움받을 수도 있으니까."

"진짜 외계 가는 거예요? 우린 우주선도 없는데?"

"우주선이 무슨 필요야. 그냥 차원문 뚫어서 가면 돼. 어쨌든 내가 준비할 테니까 모두 수련 열심히 해요. 능력치 올리라고요, 최대한. 켄트 양도 대해벽 등급 올리고. 지금은 누나 빼고는 다들 얼치기 수준이니까."

갑작스러운 외계 공략 선언.

다들 놀라워하면서도 반기는 눈치였다.

사실 지금 지구에는 이들의 전력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차원문을 넘어오는 4성 떠돌이들도, 범람으로 출현하는 하급 괴물들도 다른 각성자들이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경매 이후 새롭게 생긴 5성 각성자도 있고.

"다음 경매가 며칠 앞이죠? 다음다음 경매 전에 시작할 겁니다. 그렇게 알고 계세요."

"기대되네요!"

"외계로 나갈 줄이야......"

"별로 황홀한 경험은 아닐 겁니다. 유명계는 저승이라, 우리가 가기에 썩 좋은 곳은 아니거든요."

"그래도요."

일행이 고무된 얼굴로 흩어졌다. 에일리와 피터가 14층에서 맞붙기 시작했다. 김애경도 함께 어우러졌다. 굉음과 충격이 훈련소를 뒤흔들자 훈련 중이던 인원이 놀라 위를 올려다본다.

김현은 은밀히 전언 하나를 보냈다. 9층에서 훈련하던 사브리나가 움찔 놀란다. 그러더니 조용히 몸을 낮춰 김현에게 날아왔다.

"부르셨어요?"

"그래. 이야기는 들었겠지?"

그 말에 꾸욱 아랫입술을 깨문다.

사브리나를 주시하는 김현.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 사브리나가 싫다고 하면 억지로 시킬 생각까진 없었다.

하지만 그렇진 않은 모양이다.

사브리나가 살짝, 아주 살짝 머리를 끄덕였다. 그 조그마한 몸짓과는 별개로, 두 눈에는 어떤 결의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일부러 떠보았다.

"네가 하지 않겠다면 백지화할 수도 있다. 사브리나,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사브리나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더니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해보고 싶어요."

"오호, 그래?"

"네."

머리를 드는 사브리나.

조금은 주눅 든 얼굴이지만 두 눈만큼은 결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최소한 맥없이 져서 자빠지지는 않겠다.

김현은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좋아. 잘해봐라. 객관적으로 볼 때 네가 킬리아 섬의 각성자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 방심하지만 않으면 네가 모두 이길 거다."

"감사합니다. 모두 사령관님 덕분입니다."

"지금까지 네가 여자라서 당했던 모든 부조리한 일들, 내일 모조리 갚아주어라. 거기부터 시작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사령관님."

하루는 금방 갔다.

오전 9시, 김현이 공표한 대련 시간이 훌쩍 다가왔다.

어느새 소문이 다 난 모양이다. 킬리아 섬의 난민들이 호기심에 찬 기색으로 몰려나왔다. 단지 킬리아 섬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이 넘어왔다.

김현의 휘하 각성자들.

한시적으로 그들에게도 이동 권한을 준 것이다.

"어떻게 될까요?"

한스가 옆에 앉은 한철군에게 물었다.

한철군이 제법 능숙해진 영어로 대답했다.

"사브리나가 이길 거라는데?"

"누가요?"

"회장님이지, 누군 누구겠어."

사브리나는 거주지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기이하게도 작은 몸에서 하얀 수증기가 연신 피어오른다.

혼력을 체내에서 극도로 순환시킬 때 보이는 현상 중 하나. 가르친 적도 없는데 초기의 혼력 기법을 깨달은 것이다.

김현은 새삼 사브리나를 눈여겨 보았다.

자질로만 따지면 에일리와 피터에게 뒤지지만 다른 유형의 천재라고 할까. 워낙 세상에 의해 억눌려 있던 탓에 그 능력이 활짝 개화하는 것이다.

"크음, 어린 여자아이를 상대하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군."

사브리나에게 맞서는 자는 수염을 길게 기른 중노년의 남성.

어제 김현에게 따지러 왔던 자들 중 대표 격이었다. 나름대로 배우기도 배웠고 재산도 많았는지 다른 이들이 이맘이라고 불렀지. 난민이 된 지금은 다 헛것이지만.

남자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이야. 길을 잃고 헤매는구나. 아비도 오래비도 없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꼬? 네가 원한다면 내가 지아비가 되어주겠다. 이제는 든든한 울타리로 들어오는 게 어떠냐?"

사브리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위 난민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맘께서는 관대하고 자비롭기도 하시지."

"제 몸을 더럽힌 창녀를 맞이하겠다고? 말이 돼?"

"저 계집이 이맘을 홀린 게 분명해. 제 어미를 닮아 얼굴 하나는 반반하잖아."

"그때 쫓아냈어야 하는 건데."

"쉿! 사령관님께서 들으실라."

사브리나도 듣고 있을 것이다. 최근 능력치가 크게 향상되었으니.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귀기가 감도는 두 눈동자.

그걸 들어 주위를 돌아보더니 크게 소리쳤다.

"닥쳐!"

폭발하는 혼력.

강렬한 파동이 거주지를 강타한다.

그 압도적인 위세에 난민들이 말을 잊었다.

집중되는 시선 속에서, 사브리나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크게 폈다.

"옹알옹알, 정말 시끄럽네! 내 길은 내가 정해! 울타리가 되어준다고? 헛소리! 그러던 사람이 내가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어디에 있었지? 내 울타리는 내가 직접 만든다! 흰소리 하지 말고 덤벼라, 무스타파 크알르하!"

"저, 저런!"

"감히 이맘께 무슨 말버릇을!"

듣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술렁였다. 수염 남자 또한 얼굴을 굳혔다. 그러더니 두 손을 들어 불꽃을 피운다.

"버릇없는 아이로구나. 어쩔 수 없지. 알라의 뜻을 받들어 따끔한 교훈을 내려주마."

드디어 시작.

사브리나가 몸을 낮추고 돌진했다. 두 팔에서 돋은 칼날이 섬뜩한 빛을 뿌렸다. 수염 남자가 침착하니 서서 불을 뿌렸다.

수염 남자 또한 3성 각성자. 능력치가 상당했다. 집중하여 발사하는 불길은 군용 화염 방사기에 육박할 정도.

같이 훈련하는 남자 각성자 중 누구도 이 화염 분출에 대항하지 못했다. 일단 피해야 했다. 그러면 화염구를 뿌려 항복을 받아내곤 했지.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완벽한 오산.

사브리나가 폭풍처럼 혼력을 방출했다. 희뿌연 수증기에 예리한 빛을 뿜더니 스스로 방어막을 형성한다.

김현의 일행 또한 최근에 깨달은, 혼력 방어막!

에일리가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어엇!"

"우와아!"

사브리나가 불줄기를 거침없이 갈랐다. 그 장면을 본 자들이 저마다 탄성과 탄식을 터뜨렸다.

그리고 수염 남자, 무스타마 크알르하.

눈이 커졌다.

불을 모아 방어막을 치지만 뭐가 되겠나. 사브리나가 팔뚝을 길게 휘둘러 무언가를 잘라내고는 스쳐 지나가 뒤쪽에서 자리를 잡고 선다.

"크윽!"

뒤늦게 터지는 신음.

무스타파가 아니라, 다른 남자 각성자가 내뱉은 신음이었다.

불길이 걷히고 드러난 무스타파의 상태를 보라.

자랑거리이던 수염이 싹둑 잘렸다.

턱밑에서, 볼품없게도.

"감히, 감히!"

무스타파가 노호성을 질렀다. 이어 두 손 가득 불꽃을 끌어올리는 것을 김현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만. 승패는 이미 났다."

"날 막지 마시오!"

이성이 날아간 뒤.

무스타파는 고함을 지르며 화염구를 날렸다.

화염구가 여럿 날아간다.

보기에는 위압적이지만 사브리나의 눈은 차갑기만 했다.

훈련소 9층에서 경험한 공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짧게 팔뚝을 날린다.

칼날을, 낫 모양의 예리한 칼날을. 심지어 즉석에서 변형시켜 채찍 형태로 길게 휘두르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화염구를 모조리 베어냈다. 화염구가 공중에서 터져 열기를 흩뿌리지만 견뎌낸다. 머리카락만 조금 그을린 채, 귀신처럼 눈을 빛내며 무스타파를 노려보고 있었다.

흡사 호랑이 같은 기세, 그 위압감.

무스타파마저 조금은 위축된다.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사브리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위압된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걸까.

곧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이 사악한 마녀가......"

분노를 터뜨리려고 하나, 그 전에 맞닥뜨려야 할 재앙이 있었다.

"무스타파 크알르하."

얼음장처럼 찬 목소리가 고막으로 파고들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모양이지?"

김현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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