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군대 육성 –3-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다.
"그, 그것이......"
무스타파가 눈을 굴린다.
뭐라고 변명을 하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김현이 성큼성큼 다가와 무스타파의 목을 쥐었다.
"케헥!"
무스타파가 발버둥을 쳤으나 김현의 손은 강철 같았다.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꽝!
땅에다가 메다꽂자 무스타파가 메뚜기처럼 부르르 떨었다. 그 비참한 모습에 지켜보던 각성자들도 난민들도 오싹한 기운을 느꼈다.
"일어나라."
발로 콕콕 차 깨우자 무스타파가 눈을 떴다. 자길 발로 차는 김현을 보고는 이를 앙다문다.
"모욕할 거면 차라리 죽이시오!"
제법 뼈대 있는 태도.
그러나 김현이 바라는 모습은 아니다.
입가에 어린 웃음이 짙어졌다.
"보자 보자 하니 가관이군. 그 날의 맹세는 거짓이었나 보지?"
그 날.
무스타파가 김현의 휘하에 들 것을 청원하며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했던 그 날.
언뜻 불안감이 무스타파의 눈을 스친다. 공포에 손을 떨면서도, 옆구리를 툭툭 치는 발길질에 악이 받쳐 소리쳤다.
"그럼 무엇을 생각한 건가, 이블리스여! 내 육체와 정신, 영혼을 바칠 분을 오롯이 알라 한 분이시니, 내게서 공허한 말의 성찬을 들을지언정 내 참된 믿음을 더럽히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 그럼 왜 내게 충성을 맹세한 거지? 성혼 때문이냐?"
"그게 아니면 무엇 때문에 더러운 이교도와 말을 섞는단 말이냐! 에잇, 퉤!"
무스타파가 가래를 모아 침을 뱉었다.
물론, 김현의 눈길 때문에 뱉은 침이 되돌아가 무스타파의 두 눈을 때리고 말았지만.
무스타파가 괴로워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김현은 다시 무스타파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케헥!"
가만히 무스타파를 주시하는 김현.
손에 힘을 조절한 까닭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숨을 쉬기 힘들어 괴롭긴 해도.
무스타파를 든 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들어라."
무감정한, 흡사 기계의 것과 같은 어조.
그래서 더욱 소름 끼친다.
인간이 아닌 것이 인두겁을 쓰고 웅얼거리는 듯해서.
"나는 너희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너희의 방식을 유지하되 내 보호를 받지 않는 것이 첫 번째이고, 일정 부분 너희의 방식을 포기하되 내 보호를 받는 것이 두 번째였다. 마지막으로, 내게 모든 것을 바치는 대신 각성자가 되어 새로운 운명의 기회를 얻는 것이 세 번째였고."
김현은 자신을 보는 이들을 하나하나 주시했다.
사브리나, 여러 여성 각성자들, 남성 각성자들, 그리고 다른 섬의 각성자들과 킬리아 섬의 난민들까지.
"여기 있는 자 중에 나를 속이고자 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많이 성공했지. 여기 있는 무스타파 케알르하를 포함해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아울러 몸을 띄웠다. 이차원의 힘이 김현을 받쳐주며 족히 수 미터 넘게 상공으로 올라간다.
"솔직히 말해서, 난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성혼은 사람의 심리도 어느 정도 꿰뚫어 보거든. 하지만 용인했다. 왜? 지금부터 그 이유를 알려주마."
손에 힘을 준다. 김현의 손에서 혼탁한 회색 광채가 빛난다. 탁한 빛이 팔을 타고, 손을 타고, 손가락을 타고 무스타파의 목으로 스며들었다.
"끄억! 끄허헉!"
무스타파가 발광하며 몸부림을 쳤다.
헛되고 헛되다.
회색 발톱 자국 같은 선이 무스타파의 목에 그어졌다. 그 선이 자꾸 번진다. 그리하여 머리로, 가슴으로, 양 팔로, 양 다리로 마구 내려갔다.
군중이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무스타파의 옷이 어느새 불살라져 이 모든 광경이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적당히 근육질이던 몸이 고목처럼 비쩍 말랐다. 아울러 전신에서 회색 선을 따라 붉은 불길이 뿜어진다. 불길이 애처롭게 타올랐으나 곧 물 뿌린 화재 현장처럼 잦아들고 말았다.
대신 회색 선이 그걸 빨아들였다. 붉은 눈물이 회색 선을 타고 흡수되는 듯하다. 그리하여 김현이 무스타파를 던졌을 때, 그 손 사이에서 영롱한 불꽃이 타오르는 장면이 보였다.
김현은 냉막한 눈으로 손 사이의 불꽃을 주시했다.
곧 불꽃이 약해지며 얼어붙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은빛 젤리 모양 물체 둘. 판독 계열 성혼을 가진 자라면 이 은빛 젤리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불의 춤(염옥, 3★)]
[화염구(염옥, 3★)]
"아!"
"어어?"
성혼 추출.
지구에서는 지금까지 성혼을 품은 물체에게만 시행했지, 사람을 대상으로는 실행한 적이 없다. 실험해 본 자는 있을 수 있으나 모두 실패했지. 겉으론 간단해 보이나 상당히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니까.
"그르륵, 그르르륵! 꺼억!"
무스타파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꿈틀거렸다. 젊은 여자 여럿이 부리나케 무스타파에게 달려간다.
"이맘!"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각성자에게 있어 성혼은 영혼의 일부와 다름이 없다. 각성하는 순간 영혼과 단단히 결합하니까.
만약 이걸 강제로 쥐어뜯으면 어떻게 될까?
죽느니만 못한 신세가 된다. 지능은 퇴화하여 벌레 수준이 되고 육체 또한 무너져 온갖 장애를 떠안는다. 가만히 놔두면 한 달 내에 죽으니 세심한 보살핌이 있어야 연명할 수 있지.
'기분 더럽네.'
전생에서 외계종들이 이 방법을 통해 성혼을 벌어갔던 걸 생각하니 썩 유쾌하진 않다.
그러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지금 김현은 철혈의 독재자이자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를 연기하고 있었으니까.
"내게 거짓을 고한 자, 감히 그 마각을 드러낸다면 내가 투자한 걸 회수하면 그만이니까. 이것이 내 단죄다."
보던 이들이 일제히 술렁였다.
때마침 젊은 여자들이 무스타파를 일으켜 세워 그 모습이 만천하에 공개되었기 때문.
참으로 처참했다.
비쩍 곯은 몸.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났다. 머리카락은 어느새 다 빠져 몇 올 남지도 않았고 그나마 하얗게 새어 버렸다. 두 눈은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옴폭 파인 뺨과 버짐 핀 피부가 마약쟁이를 보는 듯했다.
꿀꺽.
누군가 마른 침을 삼켰다.
무스타파에게서 미래의 자신을 보는 걸까.
김현은 천천히 낙하하며 경고했다.
"나를 속인 것은 좋다. 내 명령에 잘 따른다면 적당히 넘어가 주마. 하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 즉시 내가 선사한 축복을 내 손으로 직접 거둘 테니까."
본래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여전히 분위기가 얼어붙어 있었다. 사브리나가 홀로 서 있을 뿐 도전자가 없다.
"더 도전할 자는 없나?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는데?"
다들 눈치만 보았다. 조금 전의 사건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까닭.
성내는 대신 조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경단장이 될 기회다. 설령 사브리나를 이기지 못한다고 해도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너희의 앞날에 도움이 될 거다. 기왕 각성자의 길을 선택했다면 나서서 너희의 가능성을 증명해라."
거기까지 하고 나자 드디어 누군가 걸어 나왔다.
30대 초반 여성.
다섯 아이의 어머니라고. 남편을 잃은 까닭에 몸을 팔며 이곳까지 도달한 여자가 눈을 성성하게 빛내고 있었다.
"도전하겠습니다."
"좋다, 건투를 빈다."
이후 수차례 대련이 벌어졌다.
결과는 사브리나의 압도적인 승리.
그래도 몇몇은 사브리나와 접전을 벌였다. 그중에는 사브리나 또래의 남자아이도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알히브가 저렇게 강했다고?"
"그럴 리가. 둘이 짠 거겠지."
"급살 맞을 놈들...... 알라의 저주를 받아라!"
김현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원래 각성자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일수록 더 강한 성혼을 발현할 가능성이 크다. 자아가 확립되는 나이이면서 아직 생각의 틀이 굳어지지 않아 발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무스타파가 그동안 남자들을 통제하고 있었던 게 이상하다. 필경 자기들끼리 훈련하면서 무언의 압박을 넣었겠지. 기존의 권력 구조를 이용해서.
이 또한 김현이 손을 거칠게 쓴 이유이기도 했다.
"헉, 헉, 허억."
십여 번을 내리 승리한 사브리나가 숨을 몰아쉬었다. 섬뜩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 이들이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비로소 사브리나의 입가에 흐린 웃음이 걸렸다.
"치료해줄게."
"괜찮아요."
이세희가 급히 다가섰으나 사브리나는 가만히 머리를 저었다. 대신 김현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제가 이겼나요?"
"그래, 네가 이겼다. 네가 자경단장이다."
"그러면...... 그러면 제게서는 사령관님의 축복을 회수하시지 않을 거지요?"
그토록 강인하게 몰아치던 여전사는 어디로 간 걸까.
사브리나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힘껏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당연하지. 이 자리에서 약속한다. 날 배신하지 않는다면, 날 거역하지 않는다면 조금 전처럼 최악의 형벌을 내리지는 않겠다. 설령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합리적인 선에서 그칠 것이다. 이것은 너, 사브리나만이 아닌 다른 각성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휴우!"
"휴!"
내심 다들 두려워하고 있었나 보다. 김현의 선언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김현은 사브리나를 올라오게 했다.
간단한 임명식과 함께 성혼 무구를 몇 점 선사했다. 사브리나에게 잘 어울리는 경장 갑옷과 팔뚝 보호대였다. 팔뚝 보호대는 특히 사브리나의 성혼을 증폭시키고 함께 변형되는 성질이 있으니 쓰기에 따라선 4성 무구 부럽지 않을 것이다.
사브리나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사령관님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조만간에 갚을 일이 있을 걸? 훈련이나 열심히 해. 그리고 자경단을 잘 이끌어보고."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한 가지 가르쳐줄까? 누가 말을 안 들으면 죽기 직전까지 패. 그걸 반복하다 보면 부하들이 네 말이라면 죽으라고 해도 죽는 시늉이라도 할 거다."
"사령관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이로써 1기 킬리아 섬 자경단의 윤곽이 드러났다.
사브리나는 단장. 알히브를 비롯한 몇몇 두각 보인 자들을 조장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정된 것은 아니다.
1달에 1번 대회를 벌이기로 했다. 굳이 따지자면 서열 쟁탈전이라고 할까? 나중에는 기간을 길게 조정하겠지만 실력이 빨리 향상될 초기에는 1달에 1번도 괜찮을 것이다.
이들이 현재 3만으로 불어난 킬리아 섬의 치안을 맡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 임무가 더 있었다.
'잘할까?'
시켜봐야 알겠지.
문득, 김현은 김애경의 시선을 눈치챘다.
"왜?"
"왜긴. 너무 강경하게 나가는 거 아냐? 이렇게 해서는 저 사람들 마음을 못 얻을 것 같은데."
"마음? 그런 거 얻을 생각 없어."
"그럼?"
"복종만 하면 돼."
"너......"
김애경이 복잡한 눈초리를 던지지만 김현은 그게 진심이었다.
사실 소말리아 난민들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21세기의 김현이든, 22세기의 아론이든 마찬가지다.
그래서 원초적인 방법으로 다루는 것.
마음에서 우러나온 충성? 필요 없다.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배신당하면 어쩔 것 같냐고?
불가능하다. 다나카와의 일을 반면교사 삼아 안전장치를 여럿 준비해두었으니까. 사람의 마음속은 모르는 일이지만 이들이 꾸미는 계획은 모두 김현의 귀에 들어온다.
"다음 주 수요일에 출발하자."
뚱딴지같은 말.
김애경과 이세희만 알아들었다.
"수요일? 알았어. 경매 끝나고 4일 뒤구나."
"드디어 가는 거예요? 후아! 기대되네요."
이쯤 되자 다른 일행들도 눈치를 챘다.
"그때 출발이에요? 으윽! 아직 어설픈데."
"그렇다고 너 완전해질 때까지 기다려줄 수는 없어. 5성 됐으면 됐지. 나머지는 실전에서 익히면 돼."
"Mr. 김, 제 무구는 언제 업그레이드해 주실 거예요?"
"주말 사이에. 어차피 경매 때문에 거래소 가 있어야 하잖아. 그때 다 만들 거야. 돈 좀 깨지겠네."
"그러려고 경매 하는 거 아냐?"
"그건 그래."
서경태를 마지막으로 모든 일행의 5성 각성이 완료되었다.
일행 전부가 5성 각성자라......
비록 김애경을 제외하고는 다들 5성 초입에 불과하지만, 지금 상태로도 4성 각성자 8, 9명은 찜쪄먹고도 남는다.
예정대로 경매를 진행했다.
5성 성혼의 가치가 떨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치솟았다. 지난 1달 동안 5성 각성자들이 지구 곳곳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까닭.
일반인이 쓸 5성 보물도 몇 내놓아서 쏠쏠하게 이득을 챙겼다. 차라리 당분간 성혼 공방에 틀어박히는 게 나을까 고민이 될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성혼 공방에서 팔리는 품목도 엄청나게 늘었고......
시리아와 아이티에서도 비슷하게 자경단을 설립했다. 죄다 비슷한 과정을 밟고 있었다. 일단 자경단장을 세운 다음에는 온전히 맡겼다. 골치 아픈 건 질색이기도 했고, 나름의 시험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그 날이 왔다.
2018년 11월 7일 수요일.
지구를 벗어나 처음으로 외계로 진출하는 역사적인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