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98화 (98/200)

# 98

첫 원정 –1-

한 가지 준비할 게 있다.

비자.

입국 허가서라고 할까? 그게 있어야 유명계에 들어갈 수 있다. 아니, 그냥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러면 외계 침략자로 인식한다. 유명계 전체와 맞서 싸울 게 아니라면 입국 허가서가 꼭 필요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

[유현(幽現)의 인(印)을 달라고?]

산 자가 유명계에 들어갈 때 몸에 새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유령에게 공격을 받을지니.

"그래. 유현의 인 여섯 개가 필요해."

[음......]

백흔혼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유현의 인은 왜? 아니지, 질문을 잘못했군. 우리 세계에 가보려는 건가?]

"그래. 언제까지나 이 외곽 행성에 있을 수는 없잖아."

[과연...... 역시 거래자다워. 하지만 굳이 우리 세계를 갈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거래자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잖은가. 지금 능력으로도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며 먹고 살지 싶다.]

"백흔혼. 나를 잘 알면서 왜 그래? 내가 여기서 안주하면 어떤 미래를 맞이하는지 알고 있으면?"

[그건 그렇지.]

백흔혼도 처음부터 유명계 소속은 아니다. 카일린 행성이 멸망하면서 인연이 있던 유명계로 도피했고, 외곽 행성에서 출현하는 성혼을 수집하는 임무를 맡았지.

지금 김현이 안주한다면 지구는 카일린 행성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백흔혼이 생전에 그리했듯이 머리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좋다. 하지만 수수료는 받아야겠어.]

"정말 그럴 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승천의 문을 열려면 막대한 힘이 필요하다. 내가 그간 거래자에게 많은 것을 받았지만 이것만큼은 간단히 열어주고 말고 할 게 아니야.]

어이구, 음흉한 녀석 같으니.

승천의 문은 백혈탑 최상층에 있었다. 그곳을 통해 유명계와 직통으로 연결된다. 거길 지나가면 김현 일행의 성혼 속성이 유명계에 가까워지고, 훗날 유명계와의 차원 통로를 열기 더 쉬워진다.

"승천의 문은 필요 없어. 유현의 인만 있으면 돼."

[유현의 인만?]

"그래."

[정말인가?]

"그렇다니까."

[허......]

백흔혼이 훑듯이 김현을 아래위로 살펴본다.

유현의 인만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차원문은 없어도 된다는 뜻 아닌가.

[크흠, 좋다. 그럼 5성 성혼 1개만 받고 찍어주지.]

"뭐? 정말 그럴 거야?"

[거래자여. 유현의 인을 찍는 것은 이 행성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나도 상관이 있는데 해야 할 말이 있어야지. 아니면 5성 성혼의 거래를 늘려주었으면 한다. 요즘 많이 벌고 있다며?]

"그래도 고작 유현의 인 하나에 5성 성혼 하나는 너무한데."

[따로 원하는 게 있나?]

"편지라도 써주던가. 소개장 말이야."

소개장!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 굉장히 중요하다. 당장 지구의 식민지 시대에만 해도 그랬으니까. 아무리 신분 높고 돈 많은 동양인이라도 소개장 없으면 불청객이자 이방인, 잠재적 노예에 불과했지.

백흔혼이 잠깐 침묵하더니 동의를 표했다.

[좋다. 평소에도 거래자에게 관심 있는 분이 많았으니 소개장을 써주지. 알현을 청한다면 백라왕은 몰라도 백염공께서는 받아주실 것이다.]

"오호, 백흔혼 너 출세했구나. 신도 아니고 공까지 영향력이 미친다고?"

[크흠! 어쩌면 백라왕을 뵐지도 모른다. 최근에 내 성과가 커서 백혈존께서도 내 이름을 알고 계신다고 들었거든.]

"대단하네. 곧 백흔신이 되겠어. 천주가 눈앞이야, 눈앞. 미리 축하한다."

[흐흐, 다 거래자 덕분이지.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원 역사에서도 두각을 못 드러냈던 인물이라 그런지 은근히 허당기가 있다. 김현은 적당히 백흔혼의 가려운 부위를 긁어주며 정보를 캐냈다.

'유명계라......'

사실 김현도 전생에서 유명계에는 가보지 못했다. 아론이 태어났을 때는 유명계가 지구에서 퇴각한 다음이었으니까. 저항군 내의 자료만 열심히 열람했지.

백흔혼이 즉석에서 안광을 빛냈다. 안광이 허공에다가 기묘한 글자를 그린다. 그것이 뭉쳐 팔찌처럼 변하여 김현의 손목에 달라붙었다.

[내 소개장이다. 유명계의 누구에게든 제시하면 알아볼 것이다.]

"고마워. 유현의 인은?"

[수수료를 가지고, 인을 받을 자들과 함께 찾아와라. 흠...... 이 행성에 성혼이 출현한 게 11개월 전의 일이지? 차원문이 열린 건 반년 전이었고. 반년 만에 5성 원정대가 차원을 넘다니,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야.]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근처에 대기하던 중이라 금방 도착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삼촌 안녕!"

하은이가 통통한 손을 흔들었던 것.

웃으며 안아주고 나서, 하은이가 못 보는 틈을 타 김애경을 한 번 흘겨보았다.

김애경이 변명하듯 말했다.

"하은이가 꼭 따라온다고 해서......"

"해골 아저씨도 안녕!"

[흐흐, 잘 있었느냐.]

그냥 놀러 온 거면 좋겠는데, 김현 일행이 유현의 인을 받는 걸 보고 떼를 쓰는 게 문제.

"나도, 나도!"

[어허허, 거래자. 귀여운 조카가 인장을 받고 싶은 모양인데?]

신기하기도 하겠지.

백흔혼이 손가락을 쿡 찍자 거기서 옅은 회색빛 문신이 빛나다가 사라지는 걸 보면.

김현은 꿈쩍도 안 했다.

"안 돼."

"으아아앙!"

"안 된다면 안 돼."

유현의 인은 4성 이하, 하위 각성자가 받으면 그 성혼에 영향을 미치니까. 안 그래도 백흔혼이 명마도 성혼을 준 것 때문에 균형을 맞춰주려고 벽력심 성혼을 주었다. 여기에 유현의 인까지 더해지면 감당이 안 된다.

김현이 단호한 표정을 짓자 하은이도 울음을 그쳤다. 항상 원하는 건 다 들어주는 삼촌이지만 이럴 때만큼은 안 통한다는 걸 아는 것이다.

대신 백흔혼이 은밀한 눈짓을 보냈다. 유령 주제에 그러는 것도 신기하지만, 김현의 예리한 눈은 백흔혼의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백흔혼."

[으음?]

"내 조카에게 섣불리 인장을 찍었다간 우리 관계는 끝이다.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할 줄 알아라."

위협하는 듯한 어투에 백흔혼이 순간적으로 욱했다.

[흥, 내 행동은 내가 결정한다. 누가 무서워할 줄 아느냐?]

"그럼 여기서 아주 끝을 볼까?"

김현의 눈에서 혼돈의 불길이 일어난다.

철컥, 철컥.

아울러 쇠로 변신하는 몸.

혼돈의 기세가 백혈탑의 내부를 사정없이 짓이기기 시작한다. 공간 전체가 일렁였다. 백혈탑 안을 돌아다니던 유령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백흔혼의 안광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백혈탑의 내부는 유명계를 닮았다. 특유의 음침한 기운이 가득 채우고 있다.

이런 곳을 단순히 기세를 끌어올려서 흔들어 버린다고?

5성 등급으로서는 절정에 처해 있다고 봐야 했다. 아직 수련 중인 자신이 상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싸워서 죽지는 않겠으나 막상 싸우면 백혈탑에 손상이 가겠지.

백혈탑은 백혈존의 보물 중 하나. 티끌만큼이라도 손상을 입으면 시말서를 써야 한다. 또 김현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기껏 얻은 탑주 자리를 내놓아야 할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절로 한 발짝 물러나게 된다.

[쯧, 알았다. 아이가 귀여워서 그냥 찍어주려고 했는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잘 생각했어."

이쯤에서 김현도 기세를 풀었다.

백혈탑 안의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위압만으로 백혈탑을 흔든 게 인상 깊었던 모양. 과연 슈퍼 김, 과연 5성 각성자 하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하은이를 데려다주고 성혼 공방으로 향했다. 그곳에 차원문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이거에요?"

"네. 맞아요."

"생각보다 크네요."

작은 체육관 크기.

하나의 통로라고 할까? 원통을 옆으로 길게 누운 형체를 하고 있었다. 벽은 거무튀튀했고 흐린 회색 광채를 점점이 뿌렸다. 군데군데 박힌 무지갯빛 보석이 탁한 어둠을 공간에 흘렸다.

"혼돈철......"

서경태가 벽을 매만졌다.

비철룡에게 박았던 혼돈의 독이 생각난 것일까.

"맞아. 혼돈철이야. 혼광석을 박아서 혼돈의 힘을 증폭시켰지."

"그럼 혼돈계로 가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혼돈계에서 비롯된 기술은 맞는데 열여덟 세계 어디든 갈 수 있어요."

한철군이 위에서 소리쳤다.

"회장님! 준비 다 됐습니다!"

장인의 고집인지 뭔지 한동안 반말을 했으나 요즘에는 존대로 바꾸었다. 가족들이 오고 나서 마누라가 옆구리를 꼬집었다나 뭐라나.

"시작하죠."

"예, 회장님!"

한철군이 제어기를 조작했다. 통로 전체가 무지갯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더니 한쪽 끝에 놓인 보석으로 집중되며 음울한 회색빛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차원문의 촉매가 될 유명석.

쭈앙!

빛줄기가 뻗어 나간다.

일직선으로, 곧게, 하나의 창처럼.

그리하여 공간을 꿰뚫었다. 차원의 벽을 뛰어넘어 차원과 차원을 잇는 문을 만든다.

우물 표면처럼 빛나는 원반이 펼쳐졌다.

"저게 차원문......"

피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돌아올 때는 어떻게 돌아와요?"

"24시간 뒤에 같은 장소에 1분간 차원문이 열립니다. 유명계 시간은 지구보다 세 배 느리니까 사흘 후에는 돌아와야 하죠. 늦으면 낙오됩니다."

"낙오......"

피터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동 귀환 같은 방법은 없어?"

"있지. 영혼만 가면 되니까. 대신 그만큼 위험해."

"왜?"

"영혼이 유명계에 물들 수 있어서. 육체를 가지고 가야 안전해. 그래서 이렇게 크게 설비를 만든 거야."

차원 이동 방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마법진, 영혼 이탈, 세계 전이, 차원문......

김현이 택한 것은 차원문 방식. 비록 비용이 가장 많이 들지만 부작용이 가장 적다.

"혹시, 이거 자꾸 쓰면 차원의 벽 얇아지는 거 아니에요?"

이세희가 핵심을 짚었다.

"사실 그건 무슨 방법이든 마찬가지예요. 그나마 차원문이 송곳처럼 압축해서 구멍을 뚫는 방식이라 낫죠. 영혼 이탈도 좋은데 아무리 축복받고 해도 잘못하면 오염될 수 있고......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얻을 걸 빨리 얻어서 보충합시다."

"알았어요."

"다들 준비됐습니까?"

"오케이."

"네, 가요!"

"가요, 가! 유명계가 궁금하네요."

"으,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너드 새끼, 그만 징징거려. 넌 어째 5성이 돼서도 변하는 게 없냐?"

천천히 걸어간다.

회색빛의 원반이 일행을 맞이했다.

수은을 넓게 펴서 허공에다가 뿌려놓으면 이럴까?

금속 같기도, 토사물 같기도 한 묘한 질감이 눈앞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크게 발을 내디뎌 단번에 지나간다.

쏴한 울렁임이 김현의 전신을 훑었다.

시야가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세상이 제멋대로 일그러져 보인다. 회색과 백색의 선이 뉘엿뉘엿 길어졌다가 짧아졌다가를 반복했다. 쨍한 이명이 고막 끝에서 맴돌았다.

[혀어언아아아.]

김애경의 목소리인가?

김현을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단말마의 비명 같기도 한 음색이 뇌리를 간지럽혔다.

어지럽다.

속이 비비 꼬이는 것 같다.

손발이 차가워지는데 얼굴은 도리어 뜨겁다. 갑작스레 핏물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그러나 무시.

전생에 지겹도록 느껴본 감각이었다. 평정을 유지한 채 눈을 반개했다. 환상이 나타나든 말든, 시공간 감각이 왜곡되든 말든 차분히 기다렸다.

그 끝에서 현실감이 갑자기 돌아왔다.

흑백의 공간.

일그러졌으나 정돈되었고, 중력이 있되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어 기이하게 펼쳐진 세계에 김현이 도착해 있었다.

"우웩!"

"으우욱!"

차원 이동은 반드시 격렬한 후폭풍을 동반한다.

다른 일행들은 아주 토하고 난리가 났다. 김애경조차 허리를 구부리고 회색 액체를 게워내고 있었다.

"혼력으로 몸을 다스리세요."

"으으, 이 상황에서 뭘......"

"어렵지 않아. 샤워한다고 생각해. 머리로 끌어올려서 발끝까지 씻어내린다는 기분으로."

굳이 이름 붙이면 혼력 샤워라고 할까?

혼력 방어막 때 그랬듯 일행 모두 금방 익숙해졌다. 이세희가 축복과 보호를 걸어주니 한결 낫다는 얼굴을 한다. 여유를 찾은 다음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식 세계랑 비슷하네요."

"그렇죠? 유명계 침식 세계가 이곳을 닮아가니까 그래요. 미숙 세계라면 모를까 성숙 세계만 되어도 굉장히 비슷하죠."

지금 일행이 있는 곳은 한 절벽 위였다. 절벽 아래에는 창백한 바다가 얼어붙어 있고, 절벽을 따라 뾰족한 칼날 바위가 잔뜩 돋았다.

기이한 점은 칼날 바위에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점. 한두 개도 아니고 전부 다, 그것도 모두 다른 음색으로.

"형, 이거......"

"맞아. 칼날 귀신이야."

칼날 귀신.

김현 일행이 지금껏 수도 없이 마주쳤던 2성 등급 괴물.

이세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권총에 힘을 부여할 때, 칼날 바위가 흔들리며 귀신들이 뛰쳐 나왔다.

"이익!"

당장 공격을 하려는 찰나 귀신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달려들 줄 알았다.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칼날 귀신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유명계의 칼날 귀신은 달랐다.

"맙소사! 세상 귀신들, 여기 보소! 산 자요, 산 자!"

"뭐, 산 자라고?"

"산 자다!"

"히이익! 이상하게 생겼어!"

"어쩜 저리 못생겼을 수가 있지?"

공격하는 대신, 세상 다시 없을 구경거리를 본 시골 촌노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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