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첫 원정 –2-
자연히 어안이 벙벙해진다.
힘을 끌어올렸던 이세희도 부지불식간에 손을 놓아버릴 지경.
"말을 했어?"
"산 자가 유명어를 하다니, 세상에!"
더구나 둘이 똑같은 말을 하고는 똑같이 놀란다.
서로를 마주 보는 둘.
이세희의 놀란 눈만큼이나, 칼날 귀신의 째진 눈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날카롭게 찢어져 있었다.
김현이 느긋하게 한 발짝 나섰다.
"잠깐, 여길 봐주시겠습니까?"
왼쪽 팔을 내민다.
의지에 소개장이 반응했다. 저절로 회색의 기운이 뭉클뭉클 일어난다. 이 흑백의 세상에서도 유난히 도드라지는 글자에 칼날 귀신들이 웅성거렸다.
"뭐지? 뭐지?"
"편지다!"
"힘이 느껴져......"
"뉘신지는 몰라도 귀한 분의 편지를 운반하고 있구먼."
칼날 귀신 중 하나가 다가왔다.
제법 덩치가 컸다. 그리고 칼날 귀신 대부분은 네 개의 팔을 가지고 있으나 이 귀신은 혼자서 여섯 개의 팔을 가졌다. 아마도 이 중에서는 대장 격이라고 봐야겠다.
소개장이 저절로 너울너울 날아갔다. 칼날 귀신이 그걸 훑어보더니 뾰족한 칼날로 자기 뺨을 끼르륵 긁었다.
"백흔혼이라...... 처음 듣는 분이지만 힘의 잔향만 봐도 보통 분은 아닌 줄 알겠소. 그런데 여기에 적힌 여섯 분이 모두 구세지경의 영웅이시라 쓰여 있는데, 혹시 그게......"
"저희입니다."
"허억, 이럴 수가! 구세지경의 영웅이라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칼날 귀신들은 모두 2성 수준이었다. 대장 칼날 귀신만 3성에 이르렀고.
자연히 모두 놀랐다. 심지어 대장 칼날 귀신, 케이메할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기까지 했다. 김현은 흔쾌히 초대를 받아들였다.
"산 자에겐 무엇을 대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신 저희의 최고 진미를 대령했으니 박대한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케이메할이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무척이나 공손한 기색이지만 서경태나 피터 등 다른 일행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앞에 나온 음식이 무척이나 기괴했기 때문에.
아니, 저걸 음식이라고 할 수나 있을까?
작은 물방울.
통곡하고 있다. 엉엉 울부짖고, 사금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사람의 얼굴 같은 형체가 갇힌 채 일그러진 게 고통을 호소하는 듯하다.
"망자의 통곡......"
"뭔지 알아?"
"영혼에 고통을 가해서 그걸 뽑아낸 거야. 각성자에게서 성혼을 추출할 때 나오는 고통이 최상급이라던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네. 자식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는 고통 정도 될까?"
"뭐?"
김애경이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망자의 통곡과 카이메할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카이메할이 쩔쩔맨다.
"가난한 마을이라 그게 가장 좋은 음식입니다. 입맛에 맞지 않으시면 다른 음식을 대령할까요?"
"아, 됐어요. 애초에 유령들 음식을 먹는다는 게 말이 안 되지."
"그, 그럼 치우겠습니다."
다들 의식적으로 눈을 돌렸다. 다른 세상이라더니, 음식도 참 다르구나 싶어서.
사실 음식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영혼의 힘이라고 할까, 유령들은 그런 걸 먹고산다. 사실 먹는다기보다는 흡수한다고 봐야지. 매일 먹을 필요도 없이, 수개월에 한 번 섭취하면 충분하고.
지금 일행이 들어와 있는 곳은 널찍한 지하 공동이었다. 칼날 같은 바위들이 곳곳에 떠 있는 게 특이했다. 칼날 귀신들은 그걸 세심하게 보살폈다. 이것들이 나중에 영성을 가지면 칼날 귀신으로 태어난다나.
동굴 바닥에는 칼날처럼 얇고 가느다란 틈이 무수히 많았다. 칼날 귀신들은 때때로 그 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승에 살짝 발을 담가 영혼의 힘을 채취해 오는 것이다. 이것이 이 마을의 주 수익원이라고 했다.
"생각과는 다르네요."
"뭐가?"
"유명계요. 괴물들만 득실거리는 곳일 줄 알았는데......"
"이곳도 하나의 세계야. 노동이 있고 주민이 있지. 이들은 주민이야. 괴물이 아니라."
뭐, 그 개념이 지구나 이승과는 전혀 다르긴 하지만.
김현은 케이메할이 말하지 않은 진실을 눈치챘다.
이 마을에 있는 칼날 귀신만 100개체를 넘는다. 어린 개체는 기이할 정도로 많아서 500개체에 가까웠다.
비율상으로 말이 안 되는 숫자.
대부분의 어른 칼날 귀신은 멀리 원정을 갔을 것이다. 아마도 유명계의 영향력이 끼치는 외곽 행성이겠지. 그곳에서 영혼의 힘을 약탈해 오는 게 분명했다.
'내가 알 바는 아니지.'
김현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어쨌든 호의적으로 나오니 좋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도 괜찮지 않은가.
슬며시 운을 뗐다.
"우리가 처음 도착한 곳이 이 마을이라는 것도 인연인데, 혹시 요즘 힘든 일은 없습니까? 가능하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오오, 정말입니까?"
케이메할이 눈에 띄게 좋아했다.
"실은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기생충 같은 놈들이 저희가 모아 놓은 영혼의 힘을 자꾸 빼앗아가서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빼앗아간다고요?"
"예. 유감스럽게도 놈들의 전력이 저희보다 강해서 속절없이 당하고만 있는 형편입니다."
"나쁜 놈들이네요! 도대체 어떤 놈들인데요?"
"완전히 나쁜 놈들입니다. 사악한 놈들이죠. 흉악하기도 어찌나 흉악하고 징그러운지...... 벌건 물컹이라는 놈들입니다."
벌건 물컹이?
일행의 눈에 일제히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멸칭인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괴물을 말하는 거지?
이어지는 설명에 의문이 풀린다.
"물고기같이 생긴 것들입니다. 빨갛고요. 여러분과도 조금은 비슷하게 생겼네요. 아! 그래도 여러분은 그놈들보단 조금 더 잘생겼습니다. 물컹물컹해가지고, 썩은 핏물 같은 것들이 변신을 아주 잘합니다. 칼로도 변하고 낫으로도 변하고 막 그래요."
아, 혈귀구나!
처음 김현과 김애경이 사냥했던 3성 등급 괴물. 등급에서 차이가 있다 보니 칼날 귀신들이 맥을 못 추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놈들을 잡아 족치면 되는 거지요?"
"예, 예. 그러기만 하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만약에 놈들을, 놈들을 제거해주신다면...... 그렇지, 저희 마을의 보물을 드리겠습니다."
"보물을?"
"예. 이겁니다."
케이메할이 마을 중심으로 가 뭘 꺼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공동 바닥이 막히며 뭔가 길고 긴 꼬챙이 같은 게 뽑혀 나왔다.
칼날 귀신들이 일제히 동요했다.
"대장님, 그건!"
"안 됩니다. 그걸 산 자들에게 주신다뇨!"
"에잇, 시끄럽다! 벌건 물컹이들만 없어지면 이까짓 게 대수냐?"
[차원 난마의 칼(5★)]
5성 등급 칼!
단 한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차원의 벽을 얇게 하는 것. 아마 이 칼로 공동 바닥을 난도질한 모양이다. 그러니 하잘것없는 칼날 귀신들도 이승에 간섭했겠지.
이건 완전 횡재.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벌건 물컹이들은 절벽 아래로 내려가면 보이는 듬성 바다에 삽니다. 정확히 52마리가 사니까 조심하세요. 놈들은 괴상한 족속이라 한 마리만 남겨도 증식해서 불어나거든요."
"듬성 바다라...... 알겠습니다."
"으흐흐, 건투를 빕니다!"
공동을 구경하며 밖으로 나왔다. 칼날 귀신들이 바깥까지 쫓아나왔다.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한 다음에야 자취를 감췄다.
피터가 투덜거렸다.
"느낌이 안 좋아요."
"왜?"
"그냥요.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냥 그래요."
"저도 조금 걱정되네요. 아까 그 유령들 음흉해 보이던데......"
서경태도 걱정 어린 말을 뱉었다.
이제 실력이 제법 쌓여서일까. 어느 정도 영감이 개발된 것 같다.
"사실 그래. 놈들이 분명 말하지 않은 게 있을 거야. 아마 손 안 대고 코 풀려는 속셈이겠지."
"어떻게요?"
"혈귀 마을에 보물이 있다거나, 실은 자기네들이 혈귀를 압박하는 관계거나, 뭐 그런 거? 그리고 어차피 우리는 혈귀들을 공격하면 안 돼."
"네? 왜요?"
"왜긴. 혈귀는 백혈존의 족속이거든. 그것도 직계야. 백혈존이 별로 신경 쓰진 않겠지만, 정착지 하나를 없애버리면 썩 좋게 여기진 않을 걸."
"잠깐. 백혈존이 백흔혼의 상관 아니야? 백혈탑도 백혈존이 내린 거라며."
"그렇지. 바로 봤어."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하자.
절벽을 빨리 내려갔다. 김현 먼저 몸을 날렸다. 거의 수직으로 낙하하며 바다를 향해 떨어진다. 그 뒤를 김애경이, 에일리가, 서경태가 따라 왔다. 이세희와 피터도 곧잘 발을 맞추었다.
바다에 도달하는 것은 순식간. 김현이 얼음 위에 착지하고 다른 일행들도 저마다의 수법으로 내려앉았다.
"우읏."
"차갑다!"
얼어붙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어마어마했다.
김현은 냉기에게서 다른 것을 읽었다.
비탄, 슬픔, 절망, 분노......
다른 차원계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어쩌면 행성 하나를 봉인하여 바다 아래에 깔아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김현은 전신의 솜털이 올올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저기가 듬성 바다인가 봐요!"
일행의 바로 뒤. 절벽이 크게 물러나면서 못 같은 것이 사방에 형성되었다. 그래서 듬성 바다인 모양. 못이 이곳저곳에 듬성듬성 보였으니까.
그 수가 정확히 52개.
카이메할이 말한 수와 일치하지만 그래서 더욱 꺼림칙해진다. 다수로 정착할 때 보이는 혈귀의 습성을 익히 알기 때문.
천천히 다가간다.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자 못 52개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일행을 세워놓고 잠시 기다렸다.
푸확!
가장 가까운 못에서 물보라가 솟구치며 혈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구에서 보던 것과 똑같다.
미끄덩한 질감에 물고기 같은 몸체. 역겨운 팔다리. 놈이 김현을 보며 길게 포효했다.
"감히 신성한 곳에 발을 들이...... 으잉? 산 자? 산 자인가?"
"뭐라고? 산 자라고?"
"흐어어어어! 산 자라니! 산 자를 얼마 만에 보는 거냐!"
"뾰족이들이 영력을 강탈하고는 구경도 못 했어! 산 자다, 산 자!"
"먹자! 잡아먹자! 영력을 뽑아내자!"
"멍청아. 그러다 네가 잡아먹힌다. 우리 세상에 올 정도면 엄청나게 센 영웅일걸?"
천지를 무너뜨릴 듯 쇄도해오던 위압감은 없다. 그저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며 이쪽을 힐끔힐끔 살피는 시골 노인들만 있을 뿐.
저절로 헛웃음이 나온다. 굳이 칼날 귀신 얘기는 할 것 없이 왼쪽 팔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어허!"
"으흠!"
"백흔혼이라......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희미하게 하얀 피의 잔향이 느껴지는군. 상당히 정묘로운 솜씨야. 환영하오, 외곽 차원의 산 자여. 굳이 따지자면 우리와 같은 계파이니 친구로서 맞아드리리다."
"감사합니다."
칼날 귀신 마을도 신기했지만 혈귀 마을은 한술 더 떴다.
못 아래에 마을이 위치했다. 못을 통해 들어가자 커다란 호수가 나왔던 것. 못은 호수의 송송 난 구멍에 불과했다.
완벽한 흑색의 지저 호수.
시야가 차단되어야 정상인데 도리어 더 예민해진다. 호수 안의 사물 윤곽이 기이할 정도로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호수 아래, 투명한 보석 같은 게 지척으로 깔린 게 보였다.
"영혼석 아닙니까?"
"응? 아냐. 유령석이라고 불러. 우리의 후세를 남기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지. 다른 유령들도 마찬가지고."
김현은 타는 듯한 눈으로 유령석을 노려 보았다.
진짜 이름은 후세의 씨앗.
불임에 특효약이다. 어느 종족이든 저걸 쓰면 후세를 잉태할 수 있다. 물론 출산까지는 지난한 과정이 기다리지만.
"이거 한 잔씩 들게."
혈귀들이 대접한 것은 한 잔의 증류수.
지구에서는 많고 많은 물건이지만 혈귀들은 자랑스러운 기색이었다.
"시원하게 쭉 들이키시게. 유명계에서 이걸 대접할 수 있는 족속은 우리밖에 없을 거야. 아, 백혈궁은 제외하고. 거긴 천외천이니까."
물 한 잔이 유명계에서는 가치 높을 줄이야......
거절하지 않고 쭉 들이켰다. 혈귀들이 제 손을 변형시켜 박수를 쳐가며 좋아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 그러게."
"절벽 위의 칼날 귀신들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여러분을 벌건 물컹이라고 부르며 절멸시켜 달라고 하던데."
"뭐라고? 이런 요악 뾰족이들을 봤나! 사정사정하길래 거기 사는 걸 허락해주었더니 뭐가 어쩌고 저째?"
혈귀들이 길길이 날뛰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이랬다.
선주 주민은 혈귀들. 까마득한 세월 전부터 듬성 바다에 살고 있었다. 그러다 칼날 귀신들이 떠돌다가 이곳을 찾아왔더란다. 차원 난마의 칼을 보여주면서 정착을 허락하면 캐는 영혼의 힘 중 일부를 바치겠다고.
처음에는 잘 지냈다. 세금을 잘 냈으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온갖 핑계를 대며 세금 내기를 거부한다고. 심지어 유령석을 훔쳐 자기네 새끼를 까는 정황까지 포착되어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나.
"어린 칼날 귀신이 많긴 하더라고요."
"그렇지? 5백이야, 5백! 영혼의 힘을 채취하는 정도로 그게 가능하겠어? 유령석 없이 제깟 놈들이 뭘 어쩐다고! 분명히 우리 걸 훔쳐간 게 분명해. 다 소멸시켜 버리겠어! 참, 그렇지!"
혈귀들이 특유의 번들거리는 눈으로 일행을 보았다.
"자네들이 해주게. 우린 어쨌든 같은 계파 아닌가! 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차원 난마의 칼인지 뭔지를 가져다 줘! 우리도 그 칼에 못지않은 보상을 주겠네!"
완벽히 상충 되는 두 의뢰.
"어쩌지?"
김애경이 눈살을 찌푸린 채 묻는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 그나마 혈귀 쪽이 더 나아 보이나, 무턱대고 수락하기는 조금 꺼림칙한 듯했다.
김현은 한 번 싱긋 웃었다.
"좋습니다. 처리해드리죠."
의아함에 찬 눈길이 쏟아졌다. 두 의뢰를 동시에 처리하기란 불가능했으니까.
김현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짙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