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어둠의 종주 –2-
김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선지자라니?
그건 몇몇 사람들 말고는 백흔혼 밖에 모르는 사실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단숨에 사고가 비약하며 어떻게 된 일인지 간파하게 된다.
벌써 그렇게 됐나.
김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애초에 거래 계약을 할 때부터 이날이 올 줄은 알았다. 유명계 유령이란 결국 고도로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자들이니까.
백흔혼은 최악의 시점에 최악의 공격을 가했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
"그게 무슨 소리지?"
오리발을 내밀자 암신종이 껄껄 웃는다.
[발뺌할 셈인가? 그렇다면 산 자여, 네 가방에 성혼 허수아비와 고대 흡혈귀의 핏방울은 왜 들어 있는 거지?]
"알 것 없지. 안 그래?"
[후후. 그도 그렇군. 좋다. 명을 받들어 널 죽여놓고 생각해 보도록 하지. 오라, 산 자여! 나 어둠의 종주이자 그림자 궁전의 지배자, 암신종이 유명(幽冥)의 위대함과 영원함을 네 영혼에 새겨주겠다!]
"각오해라!"
김현이 가장 앞서서 뛰어들었다. 두 팔이 채찍처럼 길어진다. 혼돈의 불꽃을 휘감은 채 현란하게 암신종을 공격했다.
암신종의 눈이 번뜩이면서 장기가 발현된다.
영혼 메아리.
구름 같던 암신종의 몸이 꿈틀거렸다. 스멀스멀 촉수가 기어 나온다. 촉수가 회색으로 물들더니 혼돈의 색채를 뿜어냈다.
그리고 발현.
똑같이 혼돈의 채찍이 생긴다. 불꽃에 휩싸인 금속 채찍이다. 그것이 김현과 똑같이 행동하며 일일이 채찍 공격을 받아냈다.
김현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맺혔다.
손을 한 번 휘젓는다.
팔 전체가 팡 하고 터졌다. 저마다 족히 수천 개의 금속 조각으로 분열한다. 그 조각조각마다 힘을 잔뜩 머금은 채 암신종을 폭격했다.
아니, 폭격이라고 하면 정확하지 않다. 인공지능 비행체처럼 현란하게 날며 암신종을 난도질했다. 그 화려한 군무에 암신종도 대처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얻어맞았다.
[크윽, 이건 대체!]
극에 이른 성혼 제어 능력이 보여주는 기예. 전생에 8성 등급 각성자였던 김현이라 가능한 거였다.
이건 성혼이 아니라 개인의 기술이고 기법이다. 따라서 암신종은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영혼 메아리는 어디까지나 성혼을 복사하지, 개인의 경험까지 복사할 수는 없으니까.
이때 김애경이 파고들었다.
어지럽게 날아드는 김현의 공격 탓에 아주 잠깐 김애경을 놓친 상황. 치명적인 공격이 날아왔다.
"후으읍."
김현을 믿고 한계의 한계까지 성혼을 끌어올린 것.
모든 것이 합일된다.
불과 얼음이, 시작과 끝이, 안과 밖이, 순과 역이, 몽땅 다.
거대한 힘이 내려앉았다. 음습하기만 하던 공기조차 바뀐다. 정신없이 당하던 암신종이 그걸 느끼고 김애경을 주시했다.
[이, 이건!]
김애경이 엄숙한 얼굴로 눈을 떴다.
전신이 투명하게 변했다.
4성으로 승급할 때 보여주었던 극대파멸의 형상. 그것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이다.
[이 정도 파멸력이라니, 말도 안 돼!]
인지와 동시에 김애경이 암신종을 꿰뚫는다.
공간을 관통하는 일격.
세계가 흔들렸다. 극렬한 파동이 첩첩이 번진다. 너절하고 탁한 암흑이 핏물처럼 점점이 떨어졌다.
[크으으, 이놈들!]
격렬한 분노가 일행의 정신을 짓누른다.
[내게서 자비를 구하지 마라!]
"으읍."
뇌가 불타는 느낌.
전신을 쥐어짜는 듯하다. 모든 근육이 오그라들며 격렬한 통증을 유발했다. 아울러 공포가, 절망이, 슬픔이 몰려온다.
정신 공격.
김현은 떨리는 손으로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일행 모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똑같이 행동하는 게 보였다.
번쩍!
철모에 달아놓은 장식에서 영롱한 빛이 번쩍인다. 빛이 모여 기묘한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이 빛나며 김현의 뇌로 침투하던 어두운 기운을 몰아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팍하고 깨져 버리고 만다.
명금과 성혼을 처발라 만든 방어식도 6성 성혼 앞에서는 무력했던 것.
"으으으."
"아흑."
동료들이 신음을 흘린다.
김애경은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워낙 큰 기술을 쓴 탓.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꿈틀거린다.
"언니, 어니......"
이세희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김애경에게 기어가고 있다. 총을 쏘아 성혼을 뿌려 보지만 무소용. 날아가다 말고 이슬처럼 스러진다.
에일리가 제 얼굴을 박박 긁는다. 피터는 어느새 대성통곡하는 중이다. 서경태는 강퍅한 눈으로 투명마검을 허공에 마구 질러댔다.
언뜻 보아도 전멸 직전.
암신종이 통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크하하하! 보기 좋구나!]
김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다.
암신종은 거만한 성격. 처음에는 적당한 정신 공격을 할 것이다. 그걸 아등바등 견뎌내면서 회심의 일격을 날려야 했다. 그러면 암신종이 영혼 메아리로 대응했을 테고, 허수아비로 교란하며 김현과 김애경의 동시 공격이 들어갔어야 한다.
김애경이 파멸력을 다룬다는 점만 모른다면 이 시점에서 일행은 반쯤 승리를 거둔다. 이 일격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받을 테니.
하지만 현재 암신종은 그리 큰 피해를 받지 않았다. 모종의 수를 써서 김애경의 공격을 일부 흘렸거나 방어한 모양. 김현의 계획이 완벽히 어긋나고 말았다.
'방법은......'
아직 있다.
비록 큰 희생을 담보하는 것이기는 해도.
뭐 어때?
신촌 병원에서 혈귀를 잡을 때는 왼팔을 희생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혼광 악어를 쓰러뜨릴 때는 사지와 외모를 포기했다.
'내 사명을 완수할 수만 있다면......'
김현의 눈가가 실룩였다.
최후의 수단을 쓰기 위해 전신을 이완시킬 때였다.
"아아아아!"
높은 음색이 울려 퍼졌다.
곱고 맑은 미성. 김현이 여태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 천사의 노래 같은 울음이 이 적막하고 차가운 세계를 뚫고서 저 하늘까지 가 닿았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게 된다.
몸을 활처럼 누인 채 우는 이세희가 보였다.
"서, 선생님?"
이세희가 비명을 지른다.
아니, 노래다.
어쩌면 악기의 공명인지도 모르겠다.
몸 전체가 진동하며 기이한 파장을 세계로 퍼뜨린다. 그것이 인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실은 성대가 진동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뭐, 뭐냐, 이건!]
반면 유명계의 음(陰)에 속한 존재들에게는 강력한 정신 공격.
김현은 똑똑히 보았다.
이세희의 상태창이 흔들리며 모든 성혼이 통합되고, 어떤 글자가 꼬물거리며 나타나는 것을.
[구원(?★, 천상)]
'6성이다!'
유명계라는 특이한 환경, 전멸의 위기에 처한 일행, 정신을 직접 공격하는 암신종. 이 모든 조건이 한데 어우러져 이세희의 영혼을 한 차원 높은 곳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러나 부족하다.
이것만으로 6성에 오른다면 5성을 종의 한계라고 이름 지을 필요도 없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했다. 이대로 놔두면 6성으로 승급하기는커녕 폭주하는 힘이 이세희를 집어삼킬 것이다.
흔히 말하는 자기희생 주문.
다른 일행은 살아남겠지만 이세희는 여기서 종막을 맞이한다.
'그렇게는 안 돼.'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전력을 다해 이세희에게 뛰어든다.
심장을 후려치자 이세희가 답답한 신음을 내뱉었다.
"켁!"
지대한 충격에 순간 정지하고 마는 심장.
이세희가 눈을 크게 뜬다. 왜? 하는 눈으로 김현을 보더니 스르륵 기절했다.
자연히 합일되던 성혼이 원래대로 흩어진다. 6성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강제로 내려온 것.
[이거 걸작이군!]
암신종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유일한 탈출구를 제 손을 없앨 줄이야! 좋다. 끝장을 보자!]
모든 압박이 김현에게 집중된다.
코에서 주르륵 핏물이 흘렀다. 고막이 터지며 앵앵대는 이명이 울린다. 시신경에 문제가 생겼는지 언젠가부터 세상이 지독한 어둠에 휩싸여 버렸다.
'아직......'
기다린다.
어둠이 자신을 좀먹도록, 이 차가운 세상이 자신의 육체를 완전히 차지하도록......
감각이 멀어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다. 촉각마저 사라졌다. 내 육체마저 느낄 수가 없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조차 잊는다. 세상 모든 것에서 유리된 것만 같다.
[으흐흐흐......]
정신으로 직접 전달되는 득의에 찬 웃음.
무시했다.
침잠해 들어간다.
자신의 내부로, 무의식의 끝없는 바다로......
자아를 유지하는 근원마저 잊으려는 그 순간, 힘차게 표면으로 부상했다.
푸확!
한 가지 장면을 떠올린다.
작은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장면을.
평소에 돌던 시계 방향이 아닌 시계 반대 방향으로, 즉 순행이 아닌 역행으로.
육체가 기화되며 혼돈의 불꽃이 지펴진다.
아니, 하늘 끝까지 솟구친다.
당연히 김현을 감싸고 있던 검은 구름이 정통으로 불꽃에 휩싸였다.
[무, 무슨!]
당혹해하는 암신종의 감정이 전해진다.
당연한 일. 99륜에 대해서는 암신종도 들었다. 그러나 조금 전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 이리 변할 줄은 꿈도 못 꿨다. 정신 공격을 넘어 포식 중에 이런 반격을 당했으니 당할 도리가 없지.
활활 타오른다.
침식된다.
암신종의 전신이 검은 구름 대신 회색 불꽃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심지어 혼돈계 특유의 보광이 암신종을 잠식했다.
[이놈, 이노옴!]
분노를 터뜨리는 암신종.
그러나 방법이 없다. 자신의 내부에서 혼돈의 불꽃이 타오르는 바에야.
결국, 비장의 수를 꺼냈다.
육체나 다름없는 검은 구름을 모조리 벗어버리는 암신종. 대신 그 중심에서 붉은 핏덩이가 솟구친다.
무채색의 세상에서 홀로 붉게 일렁이는, 지독히 이질적인 힘.
[나를 여기까지 몰아넣다니......]
핏덩이가 꿈틀거렸다. 그것이 분열하며 검은 구름을 밀어낸다. 본체에서 떨어진 검은 구름이 소멸하며 태울 재료를 잃은 혼돈의 불꽃 또한 똑같이 사멸했다.
대신 핏덩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운무처럼 흩어져 핏빛의 구름을 형상한 것. 핏빛 구름 중심에 거대한 눈동자가 벌어져 김현을 주시했다.
[내 비밀을 드러내게 하다니. 선지자여, 그 대가로 네게 영원의 고통을 선사하마.]
사실 이 시점에서 김현의 승리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고대 흡혈귀의 핏방울 때문이지.
하지만 김현은 거만하게 승리 선언을 하는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끝났어."
[맞아, 다 끝났지. 네놈은 지금부터......]
"아니, 나만 아니라 너도 좆 됐다는 거다."
[그게 무슨......]
"멍청한 거냐, 일부러 생각하지 않는 거냐? 함정에 빠진 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소리다."
[뭐, 뭐라고? 설마!]
암신종이 눈을 굴렸다.
무엇을 보았는지 두 눈에 절망이 깃든다.
[이럴 수가......]
언제부터였을까.
일그러진 공간 너머로 거대한 존재의 그림자 둘이 비치고 있었다.
하나는 벌거벗은 여인. 대리석 질감의 허연 피부가 섬뜩하다. 피부를 달리는 검은 핏줄이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른 하나는 꼽추 노인. 전신이 검은데 돌기처럼 까만 칼날이 돋아 있었다. 칼날마다 얼룩이 묻어있어 가슴이 서늘해진다.
백라왕과 흑인왕.
그들이 처음부터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하하핫."
김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래서야 도전 자체가 의미 없다. 그림자 궁전이 하나의 거대한 함정이었으니.
[왕이시어!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암신종이 울부짖었으나 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흑인왕이 손을 들어 올렸다
[죽어라, 반역자.]
단 일격.
죽음의 칼날이 핏빛 구름을 갈랐다.
비명도 없었다. 존재 자체가 소멸하며 불길한 핏빛과 회색 별 몇 개, 그리고 찐득한 핏덩이 하나가 떨어진다.
반사적으로 그걸 챙겼으나 백라왕과 흑인왕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정도 물건은 하사 하겠다는 듯 투명한 눈으로 김현을 주시할 뿐.
"보내주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조심스레 묻자 즉시 답이 돌아온다.
아아......
이들은 김현에게 한 가지 선택만을 강요하고 있었다.
처음에 함정을 간파하지 못하고 유명계에 진입했을 때부터 지금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의심했어야 했다.
백라왕이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백흔혼이 살갑게 굴며 정보를 건네주던 것도. 교활하고 음침한 유령들이 아무 속셈 없이 자기네 땅뙈기를 떼어줄 리 없잖은가?
'빌어먹을.'
뒤늦은 후회가 김현을 때렸다.
일행을 돌아본다.
훗날 인류 각성자의 6성 진출을 여는 김애경, 그리고 6성에 반쯤 발을 걸친 이세희가 보인다. 미지의 가능성을 가진 서경태도, 미래에 최소 미국의 랭커는 되는 피터와 에일리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그 결단이 모든 이야기의 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보라.]
"제 동료들을 몸 성히 보내주십시오. 그렇게만,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침을 삼키고, 두 주먹을 불끈 쥔 다음에야 겨우 최후의 숨결을 토해낸다.
"입망 의식을 받고, 유명계의 일원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