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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헌터사-103화 (103/200)

# 103

입망 의식 –1-

백라왕과 흑인왕이 동시에 웃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이 때문에 각자의 분신을 보내어 김현과 암신종의 전투를 참관했고, 암신종이 마각을 보인 순간 존재감을 드러내 김현의 항복을 받았다.

그만큼 백흔혼을 통해 들은 김현의 미래 지식은 놀라웠다.

[좋다.]

[승낙하지.]

[백혈존께서도 기꺼워하실 것이다.]

[흑영존께서 너를 크게 쓰실 터.]

벌써 영입 경쟁을 벌이는 둘.

둘이 서로를 노려본다. 여태 무감정하던 둘의 눈에서 하얀 전광이 튀는 것 같았다.

"현아, 안 돼......"

모두 기절했는데 의식이 있었던 걸까.

김애경이 엎드린 채 웅얼거린다.

김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제 일행을 데려다주고 와도 되겠습니까?"

[안 될 말.]

[너는 당장 입망(入亡) 의식을 치러야 한다.]

[네 동료는 내 부하들에게 맡기마.]

[차후 네가 직접 상태를 확인하면 될 터.]

입망, 즉 육체를 벗고 유명계에 귀의한다 해도 자아는 유지된다. 예전 백흔귀와 백영귀가 카일린 행성 시절 기억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여줬듯이.

김현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백라왕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차원문이 열리며 희끄무레한 유령들이 튀어나온다. 유령들이 일행을 붙잡고 아래로 하강했다. 아마도 일행이 처음 도착한 절벽으로 데려가겠지.

그때 김애경이 김현에게 손을 뻗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김애경이 유령에게 들려 사라지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만 보았다.

[바로 시작하지.]

흑인왕이 몸을 튕겼다.

그림자가 옅어지며 회색의 하늘로 솟구친다. 백라왕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공간 너머에서 흑색의 단검들이 마구 뛰쳐 나와 김현을 찔렀다.

"크윽!"

단검은 김현의 전신에 꽂혔다. 흡사 고슴도치 같은 형상으로 변해 버린다. 그 상태 그대로 단검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자연히 김현도 상승하게 되었다.

피가 방울지며 흩어진다. 김현은 혼몽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죽어가고 있어.'

이 또한 입망 의식의 한 과정. 본격적으로 의식이 시작되기 전에 육체를 죽음에 가까운 상태로 유도하는 것이다.

입을 비틀며 웃었다.

'그냥 당할 것 같아?'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다. 김현은 그렇게 꿈틀하는 방법을 세상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었다. 유령들은 김현을 자기들 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최후의 순간에는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다.

어느덧 김현이 회색 하늘 높이 접어들었다. 유명계의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네모나고 세모난 구름 안으로 접어들자 주위의 광경이 모두 가려진다.

백라왕과 흑인왕도 보이지 않는다. 김현을 완전히 제압했다고 생각하고 앞질러 간 모양.

지금 김현에게 달라붙어 있는 건 하급 유령인 단검이 전부.

그렇다면......

주머니를 더듬었다. 물컹한 무엇이 수도 없이 느껴진다. 손을 잠깐 떨다가 결심을 굳히고 그것을 힘껏 움켜쥐었다.

빨아들인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그나마 단검이 꽂히지 않은 왼쪽 손바닥을 통하여.

붉고 붉은 핏물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유명계 안이라 검게 물든 핏물이다. 그것이 모세 혈관으로, 정맥으로, 심장으로, 동맥을 장악하며 전신을 자극했다.

'끄으으윽.'

신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제한다.

고대 흡혈귀의 핏방울.

일반인이라면 한 방울만 복용해도 흡혈귀로 만드는 극악한 물건이다. 이 정도 분량이라면 5성 각성자가 아니라 6성 각성자도 위험하겠지. 혼원수와 혼원각 등 보물로 보호받고 있어도 마찬가지.

원래는 이걸로 암신종을 폭주시키려 했던 건데,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이야.

'흐흐흐......'

김현은 속으로 웃었다.

극독에는 극약 처방.

지금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김현은 인간이 아니게 된다. 99륜으로 혼돈인을 이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저 하나의 괴물로 변모하는 것이니.

김현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어디 두고 보자.'

어느새 구름을 벗어났다. 그 사이 김현은 고대 흡혈귀의 핏방울을 모두 흡수했다. 인간의 피는 이미 다 빠져나갔고, 흡혈귀의 피가 김현의 육체를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 끝은 결국에는 죽음. 인간으로서의 김현은 죽고 흡혈귀 김현이 새로 태어난다. 최소한 중간까지는 유령들이 원하는 것처럼 진행되겠지.

휘이익!

단검이 속도를 높인다. 구름이 휙휙 지나갔다. 아래로 유명계의 기이한 정경이 보인다.

세계 전체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검은 강. 허공을 맴도는 유령들. 피라미드처럼 비죽비죽 솟은 산. 칼날 같은 나무들. 어둠을 흩뿌리는 바위와 별빛 사막.

그 끝에 그것이 있었다.

거대한 우물.

영혼의 바다를 품고 태초의 어둠을 간직한 그곳.

지금도 음울한 소리를 옅게 지르고 있다. 그때마다 유령들이 가득 태어난다. 대부분은 위대한 순환으로 돌아가지만, 일부는 이 무채색 세상에 남아 새로운 생을 시작한다.

[왔는가.]

기이한 시선이 김현을 훑더니 언짢은 기색을 흘렸다.

[재액(災厄)을 달고 왔군.]

백라왕이 김현을 확인하고는 변명하듯 대답했다.

[배신자를 상대하려고 역겨운 액체를 가져왔더군. 그것이 주입된 모양이오.]

[상관없지 않나? 입멸 후에는 모든 것이 지워지니.]

[그건 그렇지.]

[회훈왕(灰熏王), 어서 시작이나 하지. 할 일이 많아.]

[허, 고작 외곽 차원의 하찮은 원주민 하나 때문에 왕이 여섯이나 모이다니......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일세.]

[그리고 그 원주민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이익도 전례가 없지. 시작하세. 위대하신 육존께서도 관심 가지신 일이네.]

육존?

아닌 게 아니라 우물 주위에 거대한 그림자 여섯이 일렁인다. 비록 분신이긴 해도 왕급 유령 여섯이 참석했다는 뜻.

단검은 김현을 우물 위로 인도했다. 검은 기운이 미친 듯이 방출되는 곳이자, 유령들이 마구 태어나는 곳이다. 그것들이 김현의 육체를 인식하고 달려들었다.

[몸을 내놔!]

[내 거야, 내 거!]

[저리 비켜!]

"크으으......"

안 그래도 몸이 죽어가는 참이다. 유령들은 김현의 몸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체온이 차갑게 식고, 심장이 점차 느려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꼈다.

여섯 왕이 두 팔을 치켜든다. 막대한, 분신이라고는 믿기 힘든 힘이 빙글빙글 돈다. 그 힘이 유령들을 쥐어짜며 어떤 힘을 추출했다.

[아파! 아파!]

[싫어!]

[살고 싶어!]

투명하기 그지없는,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되 한없이 가벼우면서 무거운 무엇.

소용돌이치는 어둠의 기운을 따라 한데 뭉친다. 그리하여 백팔면체로 이뤄진 보석을 빚어냈다. 보석이 스스로 떠올라 김현에게 다가왔다.

덜그럭, 덜걱.

김현의 주머니에 잠들어 있던 성혼들이 반응하며 깨어났다. 아까 암신종을 잡고 얻었던 것들이다.

[영혼 메아리(6★, 유명)]

[저승 구름(6★, 유명)]

[자아 파괴자(6★, 유명)]

[염라안(6★, 유명)]

이것들이 하나하나 보석에 흡수되었다. 그때마다 보석이 기이한 파장을 뿌리며 흔들렸다.

속으로 생각한다.

이러려고 가져가게 한 거였구나. 새로이 탄생할 신급 유령, 김현의 영체로 삼으려고.

후아앙.

마침내 보석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잘 먹었다는 듯이, 마치 트림하는 것처럼.

그걸 멍하니 보고만 있는 김현.

머리가 어지러웠다. 두개골 안에 솜이 꽉 찬 것처럼 무겁고 둔중하기 짝이 없었다. 몸이 거의 다 죽어서인지, 아니면 저 보석에 의지를 다 빼앗겨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

웅웅거리는 소음이 울렸다.

[지고하신 영존의 명을 받들어, 현혼 행성 지구의 원주민, 김현의 입망을 허하노라!]

시선이 쏟아진다.

하나하나가 지극히 거대하고 거룩하여 일개 인간으로서는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는 존재.

단지 그림자일 뿐이지만 존재를 느끼는 순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처박게 된다. 김현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자각하며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준엄한 음성이 떨어진다.

[묻노니, 원주민 김현이여, 그대는 이제 육체의 감옥에서 떠나 순수한 영혼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는가?]

"그......"

[묻노니, 원주민 김현이여, 그대는 무한한 고통의 굴레를 벗고 새로운 여정을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

"으으......"

[묻노니, 원주민 김현이여, 그대는 위대한 영존의 가르침을 따라 누구보다도 고독한 길을 걸을 준비가 되었는가?]

"크윽......"

김현은 신음만 뱉을 뿐 대답이 없었다.

여섯 왕은 동요하지 않았다. 입망 의식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인물은 거의 없으니까.

죽음 직전에 달한 육체, 요사하게 진동하는 보석, 주위에 가득 찬 이질적인 힘...... 이성을 차리고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래서 소리친다.

[되었는가!]

단 하나의 대답만을 강요하는 어떤 외침을.

질문이 김현의 두뇌를 강하게 때렸다. 비로소 눈이 번쩍 뜨인다. 압박하듯이 둘러선 여섯 왕을 보고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못 하겠는데, 시발 것들아."

[무, 무엇이?]

생각지도 못한 폭언에 왕들의 눈이 흔들린다.

김현이 별안간 손을 높이 든다. 왕들이 어떻게 대처하기도 전, 손날을 세워 그대로 심장에 찔러넣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슴 속에 숨겨둔 핏덩이와 자신의 심장을 동시에.

[혈정......]

흑인왕이 낮은 신음을 터뜨린다.

암신종이 최후에 토해낸 핏덩이. 그것이야말로 불사계와의 계약을 증거 하는 물건이자 흡혈 군주의 혈정(血精)이었다.

지금 김현의 육체는 인간으로서는 거의 죽었고 흡혈귀로 태어나기 일보 직전이다. 여기에 흡혈 군주의 혈정을 꽂으면 어떻게 될까?

[감히 언약을 어길 셈이냐?]

백라왕이 성내며 소리를 질렀다.

계약은 신성한 것. 감히 이런 얄팍한 수를 쓰고자 한다면 자신도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김현이 살리고자 했던 다섯 동료. 김현은 그들의 죽음을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현은 일그러진 얼굴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약속은 지킨다. 백라왕."

[감히 누구를 기만하려고......]

노호하며 손을 휘두르려 할 때 김현이 전혀 뜻밖의 일을 저질렀다. 몸을 날려 보석을 이마에다가 박아버린 것.

쩌정, 쩡쩡.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아니, 실제로 김현이 있는 곳 주위가 깨져나가고 있었다. 조각난 공간 사이로 언뜻 공허와 광명이 엿보였다.

[저게 무슨......]

[어떻게 된 거지?]

까마득히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여섯 왕조차 처음 보는 광경.

김현은 두 팔을 한껏 벌렸다.

두 힘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영혼도, 육체도 새로운 종족이 되어가며 김현이라는 자아를 온전히 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육체를 버리고 완전한 영체를 이루는 유명계.

영혼의 영속성을 포기한 대신 불사의 육체를 추구하는 불사계.

둘은 죽음이라는 비슷한 힘을 다루면서도 그 방향이 사뭇 달랐다. 그래서 흔히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육체가 죽은 유명계.

영혼이 죽은 불사계.

그렇다면 묻자.

지금 김현처럼 유명계가 육체를 죽이려 하고, 불사계가 영혼을 죽이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육체와 영혼이 같이 죽는 걸까?

아니면......

유명계나 불사계처럼 불완전한 수명이 아닌, 참된 영원을 손에 얻는 걸까?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그 둘이 상쇄되어 원래 상태를 비슷하게 유지할지도 모른다.

김현의 입가에서 긴 송곳니가 자란다. 얼굴이 유독 창백해져, 매부리코에서는 물론 홀쭉한 뺨에서도 푸른 핏줄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기이한 휘광이 김현의 전신을 휘어 감았다. 무채색의 무지개 같은 광채다. 더욱이 두 눈에서 동공이 사라져 투명하게 번들거렸다.

유명계와 불사계의 혼종이 있다면 그럴까.

그 와중에도 우물의 기운을 마구잡이로 퍼 올리고 있다. 막대한 힘이 울컥울컥 김현의 몸에 퍼부어진다. 그 힘이 날뛰는 두 이질적인 힘을 정돈하여 종래에는 두 개의 커다란 흐름으로 다독였다.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로다.]

회훈왕이 손짓했다.

도깨비불이 일어나 김현에게 날아온다. 김현은 입을 앙다문 채 공격을 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우물 저편에서 음침한 웃음이 울렸다.

[안 되지, 안 돼.]

우물의 어둠을 타고 핏빛 손이 솟구쳤다.

핏빛 손이 김현을 감쌌다. 거칠게 밀려오던 회색 도깨비불도 핏빛 손에 막히고 만다.

회훈왕이 짧게 부르짖었다.

[블러드 공작? 네가 어떻게 여기에!]

핏빛 손이 갈라지며 한 미남자가 나타난다.

여섯 왕만큼 흐릿한 형상. 그러나 그 기세만큼은 여섯 왕을 압도하는 부분이 있었다.

미남자가 흥미롭다는 눈길을 김현에게 던진 후 여섯 왕을 향해 씩 웃어 보인다.

[내 사도가 날 불렀거든. 그래서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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