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05화 (105/200)

# 105

혼종

"이런 말도 안 되는......"

블러드 공작이 벌떡 일어났다.

이번만큼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입을 쩍 벌린 채 김현을 쳐다본다. 뭐 이런 물건이 있느냐는 표정.

김현은 느긋하게 몸을 소파에 묻었다. 찻잔을 들어 조금 남아 있던 핏물을 천천히 들이킨다.

'하아......'

몸이 이완되는 이 느낌.

쾌락의 불이 타오르다가도 이내 머리가 차가워진다. 그 대치되는 감각을 즐기며, 또 한 번 피를 마셨다.

"허, 그렇군......"

블러드 공작이 불타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단순히 유령과 흡혈귀의 결합이 아니라 이거지? 혼종, 혼종이라...... 이거 조사해 볼 가치가 있겠어."

입가에 걸린 웃음이 짙어졌다. 이어 기이한 울림을 품은 명령을 불어냈다.

"일어나라, 나의 사도여."

"어엇?"

몸이 삐걱거린다.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김현의 몸이 덜커덕 덜커덕 일어나려고 했다.

남의 의지에 따라 내 육체가 움직이는, 전생에서 그토록 당하여 김현이 지독히도 싫어하는 상황.

항상 정신 방벽을 쌓아놓은 까닭에 감지할 수 있었다. 김현은 혼력을 끌어올리며 블러드 공작을 주시했다. 블러드 공작이 빙글빙글 웃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시험하는 거냐?'

불사계, 특히 흡혈귀 종족은 상위 존재에게 절대 거역할 수 없다. 지금처럼 혈주와 사도로 이어진 관계라면 더더욱. 그러나 김현은 머리가 더욱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두뇌에 박힌 영혼석이 반항하는 것. 그 힘을 읽고 차분히 성혼을 발동했다.

혼왕.

유명계에서 비롯된 그 힘을.

우웅......

기묘한 파장이 퍼진다.

그 힘이 김현의 전신을 장악했다. 진동하던 혈관이 차츰 가라앉는다. 더불어 찐득하고 요사한 기운이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호오."

블러드 공작이 눈을 빛냈다. 단순한 말 한 마디의 구속력은 가뿐히 뿌리친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그럼, 힘을 집중하면 어떨까?'

과연 피를 끓여가며 발하는 명령까지 거부할 수 있을까?

막 눈의 모세혈관을 터뜨리려는 찰나 김현이 선수를 쳤다.

"그만하시지."

"뭘?"

"괜히 그랬다간 네 중립 진영 사도가 죽고 말 거다."

"음...... 그렇겠지."

블러드 공작은 8성 등급 흡혈귀. 김현에게 힘을 집중하면 김현은 반드시 죽는다. 죽지 않더라도 최소한 힘의 균형이 무너진다. 그러면 혼종에서 일개 흡혈귀로 격하되고, 진영도 지구가 아닌 불사계로 옮겨오겠지.

"네 상태가 신기하긴 한데, 내가 널 지구로 보내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차라리 영육 실험이나 하는 게 낫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고 싶다면 그렇게 해."

"으흠."

"너도 알잖아? 지금 날 연구해도 얻을 건 별로 없어. 사실, 당장이라도 명천의 우물 같은 곳에서 상위 영혼석과 당신의 혈정을 조합하면 나 같은 경우가 만에 한 번은 발생할걸? 과연 이게 언제까지 지속되느냐가 문제지."

"그건 그렇지."

블러드 공작이 김현처럼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러더니 짧은 곰방대에다가 정체모를 가루를 넣어 불을 붙인다.

후우우.

푸르스름한 연기를 내뿜는 김현. 그 독한 냄새에 김현은 자신도 모르게 기침을 했다.

히죽 웃는 블러드 공작.

"쑥 가루에 마늘과 진은 가루를 섞었지. 어때?"

쑥은 그렇다 치고 마늘에 진은?

흡혈귀가 싫어하는 것들 아냐?

김현이 얼굴을 찡그리자 블러드 공작이 깔깔 웃었다.

"그 포커페이스가 무너지는 걸 보고 싶었거든! 하하하! 그래서 너는 내게 무슨 이득을 줄 수 있지? 영육 실험 말고?"

"아까 말했던 것처럼 네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지. 그건 내가 앞으로 성장하는 걸 보기만 해도 충분할 거다. 지금 단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기만 해도 그렇겠지."

"현재는 진혈인데, 성혈로 올라간다라......"

"성혈인 동시에 혼공지경이지. 나는 두 세계에 걸쳐 있으니까."

"성혈이자 혼공지경......"

불사계와 유명계에서 말하는 7성 각성자.

블러드 공작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참을 성 있게 기다리자, 블러드 공작이 고개를 들어 김현을 보았다.

"내가 얻을 게 그거 하나만은 아닌 것 같은데?"

"당연하지. 우선, 지구에서 유명계의 영향력을 배제해주겠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당장은 힘들어도 충분하지. 어차피 나도 교활한 유령들과는 더 이상 같이 갈 수가 없게 됐거든."

주먹을 꾸욱 쥐어본다.

혼돈의 힘은 더 이상 없다. 대신 핏빛의 기류 같은 게 소용돌이쳤다. 그것이 손가락에서 뻗어 나와 긴 손톱처럼 변하는 것을, 블러드 공작이 흡족한 얼굴로 보았다.

"그리고?"

"지구에 당신 소유의 저택이 있다고 들었다. 그곳을 통해 내가 얻는 성혼을 거래하도록 하지."

"거래? 겨우?"

"당신 입장에서는 겨우겠지만 장담하건대 그 덕을 꽤 볼 거다. 지구에 대한 당신의 영향력도 커지고, 저택의 차원문도 확장되니까. 최근에 5성 등급, 아니 진혈 등급 성혼이 거래된다는 소문은 못 들었어?"

"들었지. 유명계에서 원주민 중 가장 전도유망한 자를 물었다고 했는데...... 잠깐, 그게 너냐?"

"맞아. 나야."

블러드 공작이 역시, 하는 눈빛을 보냈다. 유령과 흡혈귀의 합일이라는,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자가 No. 1이 아니라면 그 누가 선두에 설 수 있을까?

"흐흠, 그런 자가 내 사도라......"

두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해득실을 따져 보는 것 같다.

"좋아, 좋아!"

그러더니 박수를 땅땅 쳤다.

"나쁠 거 없군! 좋아, 보내주지! 단, 네가 내 사도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뭐지?"

"내 자손을 널리 퍼뜨려라!"

자손이라니......

김현은 그 의미를 안다. 많은 자들을 흡혈귀로 만들라는 거다. 블러드 공작 같은 상위 흡혈귀는 많은 권속을 거느릴수록 힘이 강해지니까.

"불가."

바로 거절.

미쳤나? 지구를 흡혈귀 천국으로 만들 일 있게. 그랬다간 원 역사 22세기가 재현될 뿐이다.

"호오, 거절? 내 사도가 내 말을 거절한다고?"

블러드 공작이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찬 기운이 등골을 스쳤으나 의식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나는 지구와 인류를 위해 일한다. 내 육체는 네 사도이지만, 내 영혼은 지구에 있어."

"푸하하!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네 영혼? 네 영혼은 이미 유명계의 것이야. 네 자아는 비록 인간이다만, 과연 그게 얼마까지 유지가 될까?"

통렬한 일침에 말문이 턱 막혔다. 지금의 불안한 균형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김현 스스로도 장담할 수가 없으니까.

블러드 공작의 눈가에 잔인한 웃음이 떠올랐다. 개구리를 앞에 둔 뱀의 눈이 김현의 전신을 샅샅이 훑었다.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손가락 하나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뭐, 좋다. 이것도 재미있겠군. 좋은 여흥이 되겠어...... 네가 육체의 욕망에 굴복할지, 어둑한 저승으로 도망칠지, 정말로 영원을 획득할 것인지 두고 봐야겠구나. 내 개인적으로는 네가 성공해서 세 번째를 이뤘으면 좋겠다.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만...... 축복을 내려주마."

"흡혈귀의 축복?"

"흐흐. 너 또한 이미 피의 세례를 받은 바, 내 축복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것이니라."

블러드 공작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끝에서 붉은 핏방울이 튀어나온다. 김현이 앉아 있던 소파에 닿자, 소파가 녹아내리며 진득한 피웅덩이로 화했다.

김현이 거기에 잠겨든다. 아울러 기이한 감촉이 김현의 전신을 감쌌다. 몸이 낱낱이 해체되면서, 또한 설탕처럼 물에 풀어 녹아드는 듯한 감각.

정신이 가물거린다. 애써 영혼을 일깨워 보지만 소용없다. 무한하게 느려지는 시간 속에 의식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또 보자고, 재간둥이."

착각이었을까.

유독 선명한 블러드 공작의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보인다......

세계가 탄생하는 것이. 멸망하고 먼지가 되고, 그마저도 흩어져 완전히 무로 돌아가는 것이.

삶과 죽음을 보았고 즐거운 웃음소리와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들었다. 온갖 생명이 명멸하는 가운데 운명을 거역한 자들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고 그들이 결국 우주의 순환에 휘말리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잠시 후, 어쩌면 억겁의 시간 뒤에는 이 모든 것을 잊게 된다.

이제 보이는 것은 단 하나.

밤바다와 같은 어둠 속에 떠 있는 푸른 별 뿐.

"아......"

지구.

태양광을 받아 영롱이며 반짝이는 그 별이, 김현의 바로 앞에 펼쳐져 있었다.

눈을 비볐다.

이것이 현실인가, 아니면 단순히 환각인가 하고.

곧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돌아왔구나.'

물리적으로는 그리 길지 않았던 시간.

킹스 포인트 성혼 공방 지하, 차원문에 진입하여 그림자 궁전을 뚫고 암신종과 상대했을 때로부터......

길어봤자 하루 정도 지났을까? 그런데 노곤하기만 하다.

너무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백흔혼의 배신, 함정. 육왕의 강림과 대타협. 명천의 우물과 종족 변화. 블러드 공작의 난입, 불사계에서의 담판까지.

평생 하나만 겪어도 많을 일이다. 그것을 다 겪었으니 지금 김현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냥 있을 수는 없지.'

김현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가장 시급한 것은 백흔혼 문제다. 처음부터 이리 될 것을 예견했고, 서로 암묵적인 이해가 있었다고 한들 배신은 배신 아닌가. 배신한 이상 그 값을 치러야지.

게다가 이때를 대비해 손도 써놓았다. 유명계는 백혈탑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다. 김현이 백흔혼을 처리하면 백혈탑은 자연히 김현에게 넘어오게 된다.

'전쟁이다.'

손을 천천히 말아 쥐어 본다. 이전에도 강력했지만,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막강한 힘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심장이 미친듯이 폭증하는 지금에도 머리는 지독하게 차가웠다. 아니, 저 지구에서 환히 타오르는 영력 탓에 극렬한 허기가 느껴진다. 어서 영력을 포식하라는 것 같다.

'바로 간다.'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 성혼 농장의 난민 문제?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김현이 잠깐 없다고 어떻게 될 그들도 아니다. 지금은, 지금은 그저 빚을 갚아주는데 집중하도록 하자.

몸을 날렸다.

전신이 폭발적으로 부푼다. 혈왕 성혼에 의해 전신이 기화, 아니 액화된다. 붉은 핏덩이, 어쩌면 안개에 가깝게 변하여 지구를 향해 내리꽂힌다.

이것은 거대한 붉은 송곳.

신의 지팡이가 이럴까?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운석이 이럴까?

한 줄기의 창이 되어 낙하했다.

미국 동부.

뉴욕 맨하탄 섬.

그 북쪽에 있는 센트럴 파크를 향해.

푸화하학!

불이 붙는다.

피의 힘이 대기와 마찰하여 새빨간 불이 김현을 불태운다.

뜨겁다.

아프다.

그러나 견뎠다. 혼력을 양껏 끌어올린 채 재생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다. 실시간으로 피가 증발하고 몸이 깎여나가나, 결손된 만큼 바로 재생되고 있었다.

"어어?"

"저게 뭐야?"

액체가 강하하는 것이라 생각보다 느렸다.

지구 상공에 나타난, 뉴욕을 향해 낙하하는 거대한 불의 창은 미국 전역에서 보였다. 심지어 캐나다와 멕시코에서도 그랬다. 자연히 길 가던 시민들이 하늘을 보며 웅성거렸다.

"별똥별이다!"

"아냐, 저건 별똥별이 아냐!"

"그, 그럼?"

"미사일이다! 미사일 공격이다!"

별똥별이라면 수 초 만에 사라져야 하지만 지금 이건 몇분째 낙하하는 중 아닌가. 자연히 난리가 났다.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현은 그런 것까지는 몰랐다. 지구 표면의 영력이 기이하게 꿈틀거리고 있으나 신경도 안 썼다. 오로지 자신의 몸을 유지하는 것에 골몰할 뿐.

그리고 드디어......

백혈탑을 강타했다.

콰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충격.

화염이 들불처럼 번진다. 그것이 백혈탑 표면의 방어막을 뒤흔들었다. 순간, 회색 반투명한 방어막이 길게 흔들리는 것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드러났다.

[누, 누구냐!]

익숙한 영음(靈音)이 김현의 뇌에 전달된다.

히죽 웃는 김현.

핏물 그대로 백혈탑의 표면을 타고 미끄러졌다. 백혈탑이 차갑게 얼어붙으며 방어막을 강화한다. 지금 상태로는 침입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득의한 웃음이 재차 들려왔다.

[불사계의 잡졸이냐? 감히 존귀하신 백혈존의 사유지를 침범하다니 간도 크구나. 이는 존귀하신 백혈존께서 불사계에 직접 따지실 터! 현혼 행성 협정을 위반한 책임을 엄히 따질 것이다!]

그러던가.

어느새 지표면까지 도달. 백혈탑 앞을 오가던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괴물이야!"

"사람 살려!"

"협회에 연락해, 협회에!"

두려워 할 만도 하다.

지금 김현은 질척한 핏물 덩어리에 불과하니까. 그것도 대기권 돌파의 영향으로 불에 활활 타오르는.

"멈춰라, 괴물!"

"내가 상대해주마!"

김현의 성혼 공방이 잘 나가는 지금도 백혈탑은 최고의 거래 장소 중 하나.

각성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무기를 빼어들고 몰려든다. 어디론가 다급히 전화를 하는 이도 보였다.

[흐흐흐, 원주민들에게 토벌 당하게 생겼구나.]

다시 울리는 백흔혼의 전언.

백혈탑의 방어막이 크게 확장된다. 아예 돌출되어 나오더니 김현과 각성자들을 구형으로 감싸 버렸다. 여기 안에서 싸우라는 듯이, 도망칠 수는 없다는 경고를 담아서.

김현은 웃었다.

몸을 되돌린다. 핏물이 빠르게 모여들더니 사람의 형상을 취한다. 몸은 물론 옷까지 만들어 청바지에 후드티를 입은 한 남자가 각성자들 앞에 나타났다.

여기에 한 가지 장난도 쳤다.

왼쪽 팔을 금속성으로 재현한 것. 세계 역사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바로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엇?"

"슈퍼 김?"

자연히 모두 알아보았다. 현재는 모든 팔과 다리를 원래대로 되돌린 김현이지만 지금 이 모습은 워낙에 유명했으니.

가볍게 경례를 해주었다. 그리고 몸을 돌린다.

[네, 네놈은......]

그제야 김현을 알아본 백흔혼.

김현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파앙!

땅을 박찼다.

대포알처럼 쏘아져 백혈탑을 향해 돌진한다.

[들여보낼 줄 아느냐?]

첩첩이 발현되는 방어막.

소용없다.

김현은 혼왕 성혼을 극도로 발휘했으니까.

육체가 희끗해지며 투명하게 변했다. 완벽한 투명은 아니고 흐릿한 윤곽만 보인다. 흡사 영화나 게임에서 표현하는 유령들처럼.

그 결과.

방어막은 김현을 막지 못했다. 존재하지 않는 벽인 듯 가뿐히 통과해버린다.

[이게 무슨!]

경호성을 지르는 백흔혼.

김현은 어느새 그 앞에 섰다.

쉬시시......

물 끓는 소리와 함께 영체가 육체로 변화했다.

김현이 팔짱을 낀 채 차게 웃었다.

"우리, 정산할 게 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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