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06화 (106/200)

# 106

백혈탑 –1-

백흔혼이 눈을 굴렸다.

'어떻게 된 일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눈앞의 원주민이 유명계 원정을 시도했고, 함정에 걸렸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했다. 당장 이 자의 일행이 인근 병원에 입원했으니까.

당연히 유명계의 일원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흉흉한 기세를 풍기는 것이지?

'아하.'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자연히 한 시름 놓게 된다.

조금 전 김현은 분명 백혈탑의 방어막을 통과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저지선 하나 넘어가는 것처럼.

이것은 백흔혼의 계략이 통했다는 뜻이다. 유명계의 유령이 아니고서야 방어막을 통과하기란 불가능하니.

처음에 보여주었던 불길한 핏빛 액체?

새로운 성혼이겠지. 유명계는 넓고 넓어서 백흔혼 자신이 모르는 성혼쯤은 무수히 많았다.

[축하하네, 선지자. 아니, 이제는 선지혼이라고 불러야 할까? 어떤 이름을 받았지?]

이쪽을 보는 김현의 눈동자는 옅은 비웃음을 담고 있다. 뒤통수를 맞은 게 기껍지는 않은 모양.

'아니, 왕들께서는 왜 그냥 보내신 거지? 신참자는 모두 교육 받는 거 아니었어? 빌어먹을, 이것도 차별인가.'

현혼 탐사대에 속하면서 받았던 판독 계열 성혼, 유령의 눈으로 훑어보지만 읽히는 게 없다. 최소한 자신과 동급, 즉 혼급이며 요즘 지구 말로는 5성 등급 이상이라는 뜻.

6성일 리는 없다. 차원의 벽 때문에 넘어올 수가 없으니.

속으로 투덜대며 손짓을 했다. 백혈탑 위쪽에서 작은 물방울 같은 게 날아온다. 유명계에서 한 차례 보았던 물건이다.

망자의 통곡.

그것도 최상급. 어딘가의 행성에서 각성자의 성혼을 송두리째 뽑아내어 만들었다는 뜻.

김현의 미간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백흔혼이 손을 내밀어 망자의 통곡을 권했다.

[어때? 유명계에서 이미 맛을 봤겠지? 하나 들게. 아주 농밀한 맛이야.]

말없이 백흔혼을 보는 김현.

입이 천천히 열렸다.

"백흔혼."

[왜 그러나?]

"지금까지 내 덕을 본 게 꽤 많지?"

[그랬지. 매우 고맙게 생각하네. 그래서 백라왕께 진언하여 네가 입망 의식을 받게 주선했지. 원래 내 상관이신 백명신께서는 자넬 죽이자고 주장했다네.]

백흔혼이 으스대듯 말했다. 지금 김현이 고위 유령이 된 것은 순전히 자신의 덕이라는 듯이.

[물론 육체의 속박에서 막 풀려난 지금, 혼란스럽고 두려워하는 것은 나도 이해하네. 과거의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한 순간 뿐이야! 조금만 시간이 지나고 받은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되면 그때는 나에게 고마워하게 될 걸세. 그때 가서 보답하는 걸 잊지 말라고!]

처음 보였던 당황하던 기색은 없다. 뻔뻔스럽게 허리를 펴고 웃는 포대기 유령 하나만 남아 있었다.

김현은 입술을 씰룩였다.

배신자 주제에 저리 당당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혼력을 움직여 살짝 한 가지 정보를 내비췄다.

[진영] 지구

바로 이것을.

웃던 백흔혼이 김현을 본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더니 몸이 못 박힌 듯 멈춰 선다. 생전의 습관이 떠오른 듯 눈을 비비고는, 입을 쩍 벌리며 시선을 던졌다.

[서, 설마?]

안광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탓.

김현이 주먹을 꽉 쥐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바로 그 순간 백흔혼이 두 팔을 펼쳤다.

[죽어라!]

두 팔 끝에서 하얗고 투명한 고드름이 맺힌다. 그것을 합장하듯이 팔을 모아 김현에게 날렸다.

여기서 끝이면 서운하지. 몸 전체가 퍼렇게 타오르더니 옷자락을 펼쳐 김현에게 날아든다. 불은 불인데 기이하도록 서늘한 냉기가 김현의 영혼을 덮쳤다.

'제법.'

예전이라면 고생을 했겠지. 백흔혼도 오래 묵은 영혼이라 제법 세니까.

[성혼] 저승 불꽃(5★, 유명), 저승 고드름(5★, 유명), 빙의(5★, 유명), 유령자락(5★, 유명), 유령의 눈(5★, 유명)

성혼만 봐도 이 정도.

그러나 6성에 오른 지금 백흔혼은 손가락 까딱하지도 않고 이길 수 있다. 김현은 냉엄한 시선을 던졌다.

세상이 멈춘다.

사위에 정적이 내려앉는다.

백혈탑 안이 일순 진공으로 변했다.

모든 영혼이, 모든 유령이 압도적인 존재감에 전율하며 경배와 찬탄을 바쳤다.

백흔혼이 무언가를 느낀다.

거대한 무엇, 강력한 무엇, 까마득한 무엇.

몰려온다.

단번에, 해일처럼, 혹은 산사태처럼.

무너져 덮친다.

[으아아아!]

비명조차 그 기세에 놀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모든 힘이 강제로 분쇄되었다. 차갑게 날아가던 저승 고드름도, 타오르던 저승 불꽃도, 영혼에 영혼을 돌진하여 공격할 수 있는 빙의 성혼마저도.

백흔혼의 몸이 덜컥 붙들렸다. 김현의 눈앞에, 허공에 못이 박힌 것처럼 정지하여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크, 크다!'

지금까지도 선지자로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원주민.

그래도 한 줄기 우월감은 있었다. 육체를 벗은 자신은 육체에 감금된 변방 차원 원주민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고대의 유령왕 앞에 불려간 것처럼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

느껴지느니 차가운 어둠 뿐.

보이느니 지독히 날카로운 눈빛 뿐.

두려움에 전율하면서도, 하필 육체가 없는 까닭에 기절조차 할 수가 없었다.

[크악!]

어느 순간 백흔혼이 홱 내팽개쳐졌다. 영혼을 뒤흔드는 충격에 새된 소리를 지르는 백흔혼. 주위 유령들도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대체, 도대체......]

백흔혼이 바닥에 달라붙은 채 고개만 겨우 들었다. 짙은 의구심이 후드 아래 푸른 안광에서 배어나왔다.

이것이 혼멸.

대단위 영혼 공격 성혼. 굳이 따지자면 정신 계열 정도 될까.

"세상에......"

"저, 저 사람 대체 누구야? 어떻게 백흔혼을 이렇게 쉽게 때려잡지?"

"바보냐? 슈퍼 김이잖아."

"맞네, 맞아!"

"사진! 사진 찍자!"

각성자들이 숨을 죽인 채 김현을 찍는다고 바빴다. 그들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허공을 날아 백흔혼에게 다가갔다.

[놈!]

이번에는 유령자락.

차원을 넘나드는 이동 계열 성혼이다. 백흔혼이 흐릿해졌다가 김현의 바로 뒤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김현은 다 보고 있었다. 막 등을 찌르려던 백흔혼이 덜커덕 멈췄다. 이번에는 허공으로 수직 상승하여 백혈탑의 위쪽 어둠 너머로 사라진다.

[으아아아!]

오직 비명만 남아 아스라이 메아리를 울려댔다.

직후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백흔혼. 있을 수 없는 물리적 충격이 백혈탑 전체를 뒤흔들었다. 무너질 듯 거세게 흔들리는 한편 먼지 같은 영혼 가루가 마구 떨어졌다.

[위대한 영혼이여, 분노를 거두소서!]

[분노를 거두소서!]

백혈탑의 고용인쯤 되는 유령들이 울부짖는다.

모조리 무시.

김현은 팔짱을 낀 채 허공에 떠 있기만 했다. 그런 김현을 배경으로 백흔혼이 몇 번이나 바닥에 꽂혔다가 천장으로 솟구치고, 다시 내리꽂히는 것을 반복했다.

[으아아! 으아아! 으아아!]

아무리 유령이라도 영체에 직접 타격을 입으면 견딜 수 없다. 김현은 단지 염동력을 쓰는 게 아니라 백흔혼의 영체에 직접 간섭하고 있었다. 자연히 이 짓을 몇 번 반복하자 백흔혼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예복은 모조리 찢어졌다. 맨살, 아니 투명한 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후드도 어디론가 사라졌고, 백골 같은 예전의 모습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아울러 이마에 박힌 작은 영혼석도 함께.

[으으으......]

백흔혼이 바닥을 벅벅 기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김현에게서 물러나고 싶은 모양이다.

저벅, 저벅.

가까이 다가가 머리를 오른발로 짓밟았다. 아무 타격도 가하지 않았건만 백흔혼이 자지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백흔혼, 백흔혼."

자못 다정하게 부르자 백흔혼이 앓는 소리로 빌었다.

[사, 살려주게. 나는 그래도 선지자에게 쓸모 있는 존재 아닌가? 살려만 주면 앞으로 수수료 따윈 물지 않겠네. 다 내가 감당하겠어.]

"필요 없어."

[어, 어째서? 설마 다른 유령과 새로 계약을 맺은 건가? 이보게, 선지자! 내가 잘못했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하네. 한 번만 용서해주게. 배상, 아니 보상은 곱절로 하겠네!]

"필요 없다니까. 유명계를 지구에서 배제할 건데, 거래가 무슨 필요야?"

백흔혼이 경악한 눈빛을 보낸다.

유명계를 배제한다?

지구에서 완전히 축출하겠다는 뜻인데, 지금의 김현이 과연 가능할까?

충분히 가능하다.

조금 전 일격을 맞고 깨달았다. 김현은 이미 5성을 넘어 6성에 도달했다고. 그것도 영혼 계열로. 그게 아니면 아무 낌새 없이 이렇듯 자신을 제압할 수가 없다.

성혼 출현 후 1년도 안 되어 나타난 6성 등급 각성자......

[자, 잠깐! 협상하자! 협상하자, 선지자!]

"협상 좋지."

그대로 끝장을 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온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영음을 보내려는 찰나, 김현이 가만히 왼손을 내미는 것이 시야에 돌아왔다.

분명히 치료했을 텐데 다시 금속으로 변해버린, 그 묵직하면서 거무튀튀한 의수를.

[서, 선지자?]

백흔혼이 몸이 빨려갔다. 자연스럽게 목 줄기가 김현에게 잡힌다. 육체가 없으니 숨이 막힐 일도 없어서, 대체 왜 이러나 하고 김현을 볼 때였다.

기이한 감각이 영체를 자극했다.

뭔가,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이 새어나가고 있다......

처음에는 물 몇 방울이.

잠시 후에는 작은 시내가 되어서. 이내 콸콸 쏟아진다. 종국에는 격류가 되어 빠져나간다.

익숙한 이 감각.

직접 겪어본 것은 처음이지만 많이 보았다.

유명계에서, 혹은 변방 차원에서, 쓸모를 다 한 원주민들에게서 성혼을 뽑아내었을 때마다.

불현듯 깨닫는다.

지금 김현이 자신의 성혼을, 정수를 영체에서 뽑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아, 안 돼!'

소리쳐 보지만 무소용.

넝마를 입은 백흔혼의 영체에서 허연 얼룩 같은 게 점점이 이동하여 김현의 손으로 들어가고 있으니까.

힘도 지혜도 영혼도 모두 흩어진다.

어느새 의식이 아득해졌다. 뿌옇게 흐려져 더는 명료한 사고가 불가능해진다.

'안 돼!'

공허한 외침이 영체 내부를 맴돌다 사라진다.

살아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의식 한 편을 스쳤다.

이젠 제대로 기억도 안 나는 카일린 행성에서의 나날. 유명계에 귀의하고 살아남고자 아득바득 투쟁했던 기억. 그리고 이곳 지구에 도착하여 선지자와 마주한 것......

'아아.'

마지막으로 작은 한숨을 토한다.

'깜냥도 안 되면서 과욕을 부린 게 잘못이었어.'

소멸되기 직전, 극히 찰나의 순간 가지 못한 운명을 깨닫는다.

원 역사 22세기.

그곳에서도 자신은 어차피 소멸될 운명이었다는 사실을.

통곡하고 절망하며, 마지막 순간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남은 것은 아주 작고 하찮은 귀신 한 마리.

[성혼] 빙의(1★, 유명)

오직 이 성혼만을 가진 채, 빙의할 육체를 찾아 일만 세상을 헤매고 헤매겠지. 김현이 처음 신촌 병원에서 만났던 빙의귀들이 그러했듯이.

"흥."

김현은 가만히 콧방귀를 뀌어주었다.

왼손에 탱글탱글한 감촉이 몇 느껴졌다. 백흔혼이 소멸하면서 남긴 5성 성혼들이었다.

'내가 세긴 세구나.'

새삼 깨닫는다.

사실 암신종만 해도 김현 일행을 거의 전멸 직전으로 몰아넣었으니까. 정신 계열이 그래서 무섭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설령 대비를 했어도 정신 방어를 뚫고 짓뭉개버리기 때문이다.

[위대한 영혼이시어!]

[위대한 영혼이시어!]

유령들이 물색 모르고 찬탄을 퍼붓는다.

다만 가까이 다가오며 걱정을 늘어놓는 유령도 있었다.

[죄송하지만 위대한 영혼이시어, 이곳은 거룩하신 백혈존의 소유로 그 관리 권한이 방금 소멸하신 백흔혼에게 이양되어 있습니다만......]

4성 등급 유령.

이 탑의 부관리자 정도 되나 보다.

김현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됐다. 이 탑은 이제 내 거니까."

[예? 그게 무슨? 이 탑은 엄연히 백혈존의 소유입니다만.]

"그런 게 있어."

굳이 입씨름할 필요가 없지.

김현은 백흔혼이 남긴 성혼을 들고 그대로 솟구쳤다. 굳이 높이 올라가진 않고 적당히 올라간 후 성혼을 허공에 내밀고 선언했다.

"투쟁의 법칙에 따라, 전임자 백흔혼의 백혈탑에 대한 권리를 나 김현이 이어받겠다."

투쟁의 법칙.

승자가 패자의 모든 것을 갖는 유명계의 결투 규칙이다. 유명계 유령들은 영력이 풍부한 곳을 차지하고 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원래는 뒷배를 봐줄 고위 유령을 알현하고 어쩌고 하는 절차가 필요하지만 백혈탑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다.

선언을 들은 각성자들이 웅성거렸다.

"어어? 뭐야?"

"잘못된 거 아냐?"

"슈퍼 김이 백혈탑주를 죽였어!"

"뭐? 그 친절한 유령을? 왜?"

위이이잉......

김현의 선언이 메아리치고, 그 메아리가 돌아오며 기이한 진동을 만들었다.

백혈탑이 흔들린다.

탑 안 공간이 몇 번이나 거뭇하게 변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힘의 파동이 수색하듯 김현 주위를 뒤덮었다. 그에 따라 공간이 물결치는 것을, 김현은 느긋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종래에는 파동이 모여들어 딱 두 글자를 만들었다.

유명계 글자. 마침 김현이 아는 단어.

[승인]

높이 약 50 킬로미터.

정사각형 형태 바닥면 한 변의 길이가 약 1 킬로미터.

그 거대한 구조물이, 경이로울 정도로 커다란 탑이 김현의 소유로 넘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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