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07화 (107/200)

# 107

백혈탑 –2-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글쎄......"

"우리 앞으로는 거래 못 해?"

탑 안의 각성자들은 어리둥절한 기색. 그나마 소수 김현의 선언을 알아들은 이들도 긴가민가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백혈탑이 김현에게 귀속되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기 힘드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해야 할 일을 했다.

손을 내밀어 백혈탑 내에 도도히 흐르는 혼력의 흐름에 접속했다. 유명계 특유의 음침한 기운이 김현의 두뇌, 아니 영혼석에 쏘아진다.

밀려드는 혼력이 영혼석 내부에 맺혀 특정한 정보로 변환된다. 김현은 그 정보를 천천히 음미햇다.

백혈탑.

유명계의 현혼 탐사대 전용 건축물.

상주하는 인원은 5성 유령 하나, 4성 유령 다섯, 3성 유령 1백, 2성 유령 1천......

상점, 성혼 거래소, 성혼 공방, 각성소, 훈련소, 성혼로, 변환로, 성혼 우물, 영혼소, 그리고 승천의 문 등 시설을 갖추고 있다.

김현은 이 중 상주하는 유령들을 모두 확인했다. 그들을 마음 속에 품은 다음, 힘을 담아 언령을 터뜨렸다.

"너희들은 해고다."

[어엇?]

[으아아!]

곳곳에서 비명과 함께 유령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녹아들듯 사라져 총알처럼 위쪽으로 상승한다.

10층 이상에 위치한 승천의 문을 통해 유명계로 귀환한 것.

이어, 각성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백혈탑은 당분간 폐쇄합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길."

"어, 잠깐만요!"

"슈퍼 김! 이건 대체......"

단지 말뿐인 축객령이 아니다.

백혈탑주로서 김현의 말은 그 자체로 강력한 구속력을 지닌다.

각성자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약간 떠올랐다. 이어 백혈탑의 모든 문이 열리고, 각성자들이 누군가 던진 것처럼 빠르게 외부로 날아간다.

아스라한 비명이 울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백혈탑 외부로 나가는 순간, 던져지는 힘이 약해져 사뿐히 지면에 착지하게 될 테니.

쿵! 쿵! 쿵!

문이 닫혔다.

이제 백혈탑 내부에 남은 것은 음습한 적막 뿐.

그리고 연하게 흔들리는 흐릿한 조명 정도.

"후우."

김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혈탑을 얻었다.

비록 완전히 소유한 것은 아니지만 향후 백년 동안 백혈탑에 대한 권리를 배타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은 정말로 큰 의미를 가졌다.

김현이 가진 시설은 질적으로는 우수해도 양적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성혼 공방만 해도 그렇다. 4성, 5성 각성자가 쓰기 좋은 물건을 수십 개는 만들지언정 하위 각성자가 쓸 물건의 생산은 수백 개에도 못 미쳤다.

'다 죽었어.'

인류의 자강 독립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충분히 이뤄내지 싶었다.

"할 일이 있지."

조용히 뇌까렸다.

손에 든 성혼들을 한 번 힐끗 보고는 공중에 던져 버렸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그것들을 저장고로 운반했다.

이것으로 백흔혼과의 인연은 완전히 종료.

머릿속으로 그 이름을 생각할 일도 없을 것이다.

끼이익.

문을 열고 나왔다.

예전, 대한민국에서 외계종의 위협을 경고하던 때 그 모습. 추방되었던 각성자들이 모여들었다.

"저기요!"

"슈퍼 김!"

부름에 답할 의무는 없다. 가볍게 땅을 박찼다. 간단한 그 동작에 몸이 한없이 가벼워지며 도약한다. 엇 하는 순간 이미 뉴욕의 고층 건물들을 굽어보는 위치까지 날아오른 다음이었다.

비행 성혼? 혹은 도약의 힘을 가진 보물?

그런 건 다 필요 없었다. 6성 성혼과 6성 보물의 힘, 특히 이들의 조화가 일으키는 상승효과는 김현을 새로운 경지로 인도하고 있었다.

'응?'

새처럼 비행하던 김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집에 없네?'

가족들이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인근 대형 병원에서 그들의 영혼이 느껴졌다. 비단 그들만 아니라 이세희와 서경태, 피터와 에일리도 함께.

아차 싶었다. 그들도 암신종의 공격으로 크나큰 타격을 입었으니까.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히 병원에 입원해 있겠지.

몸을 틀었다. 기껏해야 3 킬로미터, 단숨에 좁힌다. 병원 정문 앞에 쾅 하고 내리꽂히자 길 가던 시민들이 놀란 눈빛을 보냈다.

"깜짝이야!"

"오 마이 갓! 각성자다!"

"슈퍼 김이야!"

"슈퍼 김! 여길 봐줘요!"

아직 김현에 대한 인상이 좋은 모양이다. 시민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몇몇은 악수를 청하고, 몇몇은 사진을 같이 찍자고 요청했다. 김현은 의식적으로 미소 지으며 일일이 그들이 인사하는 걸 받아주었다.

하지만 마음속은 조금 복잡했다.

'누나, 선생님......'

다른 셋은 괜찮다. 단지 정신에 타격을 입은 것뿐이니 조금 요양을 취하면 나을 것이다. 문제는 김애경과 이세희, 이 둘이었다.

둘 다 영혼 자체에 타격을 입었다. 김애경은 김현이 희생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세희는 6성에 올라서다가 강제로 끌어내려진 타격 때문에.

그 충격이 어느 정도였냐면 성혼이 자리잡은 영혼과 무의식, 중간 지점이 흔들렸을 정도.

자력으로 극복하면 다행이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성혼을 잃고 무능력자가 되거나 폭주하여 미치광이가 될 수도 있었다.

복잡한 마음 탓에 발걸음이 바빠졌다. 빠르게 병원 복도를 가로질러 병실로 들어갔다.

"아, 글쎄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했잖아요!"

문을 열자마자 누군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새되고 날카로운 목소리.

김현은 놀라 소리를 지른 사람을 보았다.

산발한 머리, 핏발 선 눈.

어머니였다. 평생 남매에게 소리 한 번 지른 적 없는 사람이 분노하여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김현을 보고는 얼어붙는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봤다가 다리를 한 번 내려다보고, 다시 시선을 올려 얼굴을 응시한다.

목이 멘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이...... 현이니?"

"뭐라고?"

침대맡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던 아버지가 머리를 들었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십년은 늙은 듯하다.

머리는 하얗게 새었고 두 눈은 퀭했다. 깎지 않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턱과 입 주위에 나 있었다.

"현이냐?"

깊은 동굴 속에서 울리는 듯한 음성.

어둑한 절망과 탄식 사이에서, 비로소 옅은 불꽃이 지펴지고 있었다.

그리고 엿보았다.

얼마나 많은 고통과 회한이 부모님의 마음에 쌓여 있었는지.

'그랬구나......'

하루, 딱 하루.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김현의 부모님은 지옥과도 같은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의기양양하게 원정 나갔던 아들은 죽었다고 하고, 항상 든든하던 맏딸도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으니.

"현아!"

"이놈!"

부모님이 울부짖으며 김현에게 달려들었다. 김현은 우두커니 서서 둘을 껴안았다.

흐느껴 우는 둘.

촉촉한 눈물이 강물처럼 김현의 마음을 적셨다.

이미 죽어버린 육체, 역시 죽어버린 영혼......

그러나 그 자아만큼은 인간을 유지하는 김현. 어느새 흡혈귀의 육체에서도 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괜찮아요."

가볍게 속삭인다.

"이렇게 돌아왔잖아요."

"삼촌......"

하은이도 있었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복잡한 눈으로 김현을 보다가 다리 한쪽을 껴안는다. 그리고 부모님처럼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한 팔로 하은이를 들어올려 부모님과 같이 품에 안는다.

"엄마도 곧 좋아질 거야."

"진짜?"

"그럼. 삼촌이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어?"

"응. 놀이공원 같이 간다고 해놓고 가지도 않고!"

"하하하."

이제야 실감한다.

유명계에서 겪었던 일들이 이토록 큰일이었구나, 하고.

22세기의 지식, 아론의 담대함, 엄청난 운, 이 세 박자가 맞아떨어지지 않았으면 자신은 유령이 되어 이미 죽었겠구나, 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울음이 그쳤다. 부모님도 진정하여 병실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어머니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내와서 내밀었다.

"먹어라, 힘들었지?"

"힘들기는요. 두 분이 고생하셨죠. 그런데 누가 귀찮게 했나요?"

"아니. 귀찮게 하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

"삼촌, 삼촌. 큰 카메라 든 사람들이 막 들어와서 할머니가 화내고 그랬다?"

어머니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하은이가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통에 다 들통이 났다.

"그랬어?"

하여간 기자들이란......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더 과민하게 반응했겠지. 아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어머니가 소리를 지른 이유를 알겠다.

김현은 침대에 누운 김애경을 확인했다.

초췌한 얼굴.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흐른다. 그 땀이 순간적으로 기화하여 흰 수증기로 변하는가 하면, 어떨 때는 얼음 조각이 되어 땡그랑하고 떨어졌다.

김애경이 익힌 두 종류 성혼이 저런 형태로 나타나는 것. 지금은 단지 땀이 증발하거나 얼어붙는 수준이지만 내버려두면 계속 악화된다. 종래에는 이런 시설에서는 돌볼 수도 없게 되겠지.

"네 누나, 꽤 심각한 것 같은데 치료할 수는 있는 거냐?"

"당연하죠. 제가 있으니 며칠 뒤면 좋아질 거예요. 치료 방법을 알고 있거든요."

"휴우, 다행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니? 경태 말로는 네가 유령들한테 잡히는 대신 애경이랑 다른 사람들을 탈출시켰다는데......"

"비슷해요."

망설이다가 진실을 알려주었다. 여기 있는 가족들은 진실을 알아야 할 자격이 있으니까. 비록 핵심적인 진실은 여전히 감춰두고 있긴 해도.

"앞으로 다시는 나가지 마라, 알았지?"

유령들이 김현을 귀의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자 내뱉은 어머니의 첫 발언이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아니, 왜?"

"가만히 지구에만 있으면 솥 안의 개구리 신세 밖에 안 되거든요. 언제가 외계종들에게 지구를 빼앗기게 되요."

"아무리 그래도......"

"대신 앞으로는 최대한 조심할게요. 이번에는 좀 무모했어요. 외계종을 믿은 것도 잘못이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

"그래도 안 된다."

어머니가 억지를 부리자 아버지가 가만히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여보, 현이 하라는 대로 하라고 놔둡시다."

"하지만......"

"현이가 알아서 잘 하겠지. 현아, 대신 앞으로는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너야 해. 알았지?"

아버지가 단단히 당부의 말을 남겼다.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걱정 마세요. 이번에 저도 느낀 게 많아요."

"그럼 됐다."

"현아......"

어머니의 눈빛이 애절했으나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미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고 김현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자신이 예측하는 대로라면,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하아.'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

김현도 사람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을 리가 없다. 예정된 파멸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도 마찬가지.

그러나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 22세기의 지옥에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 지옥 같은 운명을 비껴날 수 있다면, 어떤 시련과 비탄이라도 웃으며 받아들일 것이다.

"저 잠깐 옆 병실에 다녀올게요."

"그래. 이 선생님 가족이 많이 놀란 것 같더라. 이 선생님도 치료할 수 있는 거지?"

"당연하죠."

"그럼 안심시켜 드리고 와라."

"나도 갈래!"

하은이가 활짝 웃으며 김현에게 매달렸다. 아까 보였던 그늘 같은 건 다 사라진 다음이다. 그만큼 김현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겠지.

손을 잡고 옆의 병실로 들어간다. 이번에도 성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아차, 그러고 보니 아까 병실도 그렇고 여기 병실도 그렇고 문이 잠겨 있었다. 김현은 하도 마음이 급해 혼력으로 간단히 열고 들어오긴 했지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김현입니다."

이세희의 부모님과는 안면이 있었다. 식사 정도는 몇 번 같이 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처지이다 보니 김현의 부모님과 꾸준히 교류하는 것 같았고.

침대쪽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김현을 보더니 유령 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자, 자네는 죽었다고 들었는데......"

"지옥에서 살아 왔지요. 잠깐 제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 그러게!"

이세희의 부모님이 허둥지둥 자리를 비껴준다.

복잡한 상념이 시선에 맺혀 있었다.

딸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데에서 오는 원망, 생명의 은인이자 딸의 동료를 보는 고마움, 그리고 한 줄기 기대......

이세희가 김애경보다 더 심각했다. 전신이 아예 반투명했다. 금색 빛이 점점이 떠올랐다가 증발하는 것을 반복했다. 가끔은 괴로운 듯 신음을 내뱉는데, 기이하게도 그 신음이 천상의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김현의 시선이 힐끗 한쪽을 향했다.

[상태] 붕괴

가슴 한 편이 서늘해졌다.

'위험했어.'

김애경의 상태는 약화였으니 자력 구제의 가능성이 조금은 있으나, 이세희는 놔뒀으면 반드시 사망했겠지.

"괜찮겠나?"

이세희의 아버지가 걱정하는 얼굴로 묻는다.

푸근하게 웃어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저녁은 함께 드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혹시, 자리를 비껴줘야 하나?"

"아닙니다. 어차피 재료도 준비해야 합니다. 저녁쯤에 다시 오죠."

백흔혼은 이제 없다. 다른 경로를 뚫어야 한다.

그럼 블러드 공작과 얘기한 대로 흡혈귀 저택을 통해 거래해야 할까?

말도 안 되지. 분명히 수수료를 세게 부를 텐데.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다른 일행의 상태를 확인한 후 백혈탑으로 돌아갔다.

그렇다.

백혈탑주로서 외계종들과 직접 거래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비싼 수수료 물어가며 쩔쩔맨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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