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08화 (108/200)

# 108

백혈탑 –3-

백혈탑에 도착하는 즉시 승천의 문을 가동시켰다.

머리 위, 거뭇한 어둠만 있던 곳에서 흐릿한 안개가 뿜어진다. 둥근 차원문이 열리면서 음침한 기운이 스멀스멀 내려왔다.

김현은 가볍게 몸을 띄웠다. 유명계의 힘에 반응하여 전신의 피가 끓지만 머리는 차갑기만 하다. 이마에 박힌 영혼석이 스산한 광채를 빛내고 있었다.

[누구냐?]

당장 적대어린 물음이 날아온다.

[백혈탑주 김현이다.]

[하! 원주민 주제에 백혈탑주라고? 당치도 않은 소리를!]

그와 함께 뚝, 연결이 끊어지고 말았다.

어쭈?

김현은 서늘한 웃음을 머금었다. 의도적으로 혈왕을 잠재우고 혼왕을 일깨웠다. 그러자 백혈탑의 방어막을 통과할 때처럼 몸이 유령으로 변화했다.

그대로 돌진, 승천의 문을 통과한다.

솨아아......

기이한 소용돌이가 회오리치며 김현을 감싸 안았다. 길고도 짧은 차원 여행을 거쳐 간단히 유명계에 도착했다.

"헉?"

어두침침한 지하실 안.

수정구 앞에 떠 있던 하급 유령이 김현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김현은 영체 상태를 유지한 채 하급 유령을 노려보았다.

[혈귀]

한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3성 유령.

손을 뻗는다. 투명한 손이 혈귀를 잡아끌었다. 혈귀가 비명을 지르며 김현의 오른손에 잡혔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리 쉽게 승천의 문을 통과한 것이지? 너, 너는 음신지경에 올랐다며!"

음신지경, 즉 6성.

"알 게 뭐냐."

간단히 혈귀의 목을 비틀었다.

동시에 쏟아지는 혼멸 공격.

"끄어어어......"

혈귀가 눈을 뒤집었다. 영체가 푸르스름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압박을 가하면 영체가 깨지며 영혼 자체가 소멸하겠지.

[사, 살려주십시오!]

급했는지 영언을 통해 호소해 온다.

자, 어떻게 할까.

김현은 유리알 같은 눈으로 혈귀를 주시하다가 휙 던져 버렸다.

3성 유령이면 어차피 하급 잡졸. 이 놈 하나 죽인다고 김현에게 이득 될 게 없다. 차라리 다른 방향으로 활용해 봐야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디 작은 지하실 안이다. 앉을 곳도 없고 누울 곳도 없이 수정구 하나가 전부. 하긴 유령에게 무슨 쉴 곳이 필요하겠는가.

"내놔."

"뭐, 뭘 말씀입니까?"

"네 목숨 값."

혈귀의 물고기 닮은 얼굴이 살짝 수축했다가 수그려진다. 이어 근처 벽을 파고 망자의 통곡 하나를 내놓았다.

또 이거냐?

김현의 안광이 번들거리자 혈귀가 황급히 변명을 했다.

"사, 상급입니다. 비록 최상급은 아니지만 그건 높으신 분들이나 드시는 거여서......"

"나는 높은 분으로 안 보이나?"

"죄, 죄송합니다!"

혈귀가 몸을 구부렸다. 무채색의 세상, 까맣게 보이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모르는 척 망자의 통곡을 받아들었다.

조금은 갈등이 된다.

이것은 결국 산 자들의 영혼을 쥐어짜 만든 것 아닌가. 불사계에서 대접 받았던 핏물보다 훨씬 더 질이 나쁘다.

하지만......

영력을 흡수하지 않고 피만 마시다 보면 균형이 무너진다. 그것은 모든 것의 파멸을 초래할 수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후으읍."

영체 상태건만 담배 연기를 마신다는 느낌으로 코에다가 망자의 통곡을 가져다 댔다. 그 즉시 농밀한 영력이 풀려나와 김현에게 흡수된다.

아아, 이 법열......

유령이 가질 수 없는 열기가 영혼석으로 파고든다. 뿌듯한 충족감이 전신을 채운다. 어려운 문제를 결국 풀어냈을 때의 성취감, 사랑하는 상대가 고백을 수락한 듯한 만족감이 정신을 고양시켰다.

동시에 게걸스러운 목마름이 심장 구석을 타고 올라온다. 안타깝게도, 이 갈증이 망자의 통곡을 섭취한 쾌감을 멀리 쫓아버렸다.

새삼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이것은 축복이자 저주.

유령과 흡혈귀의 혼종인 이상, 김현은 앞으로 육체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제대로 된 희열을 얻지 못할 테니.

"성의는 있군."

"감사합니다!"

한 마디를 내뱉자 혈귀가 감격했다는 듯이 몸짓을 한다.

"그래서, 거래를 못하겠다고?"

"죄송하지만 그게, 육왕 명의로 현상 수배가 걸렸습니다. 원주...... 아니, 탑주님과 거래만 해도 추출형에 처하겠답니다."

추출형.

유명계의 유령들이 소멸형보다 더욱 두려워하는 그것.

모든 힘과 지혜를 잃고 한낱 빙의귀로 떨어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으니까.

"상관없어."

"예에?"

"나도 육존과 거래할 생각은 없거든. 그나저나, 네가 백혈탑과의 통신을 전담하는 걸 보면 꽤 능력이 있는 모양이지?"

먹음직스럽다는 눈으로 살피자 혈귀가 화들짝 놀랐다.

"그럴 리가요! 능력이 있다뇨? 전 그냥 잡졸입니다, 잡졸! 원래 백륜귀님께서 전담하셔야 하는데 잠깐 자리를 비우셔서 제가 대신 여기 있는 겁니다!"

"역시. 그럼 저놈이 그 백륜귀인가 하는 놈인가 봐?"

"예에?"

한 유령이 급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4성 유령. 예전의 백흔귀와 비슷한 기세다. 김현은 자신의 존재감을 죽이고 백륜귀가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지하실에는 통로가 없다. 백륜귀는 벽과 바닥을 사뿐히 통과해 지하실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호통부터 내지른다.

"이놈, 갑자기 왜 통신을 끊고 지랄이야? 네놈 영력을 쥐어짜서 망자의 통곡을 만들어 줄까?"

"배, 백륜귀 님. 그게......"

"뭔데 그래? 말을 똑바로 해!"

"뒤, 뒤를 보세요."

백륜귀가 그제야 뒤를 돌아본다. 자연히 김현과 눈이 마주쳤다.

김현이 씩 웃었다.

의도적으로 상태 일부를 노출하고 있었다. 성혼 항목과 진영 항목만. 당연히 백륜귀가 헛바람을 들이마시며 놀랐다.

"으헉! 저건 뭐하는 물건이야!"

"이런 물건이지."

혼멸이 쏟아지고 백륜귀가 단숨에 제압당했다. 그 모습을 혈귀가 어딘지 고소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통신소 인원은 이게 다냐?"

"제 일족 몇이 더 있습니다만......"

[데려와라.]

강력한 영혼 억압을 행사했다. 회색빛이 혈귀에게 쏘아지자 혈귀가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허리를 한 번 숙이고는 근처에 흩어진 제 동료들을 찾으러 나갔다.

"대체 무슨 일이야?"

"백륜귀가 찾는다고?"

"아, 그놈은 평소처럼 망자의 통곡이나 퍼먹을 것이지 또 뭔 소리를 하려고 그런데?"

"뻔하지. 망자의 통곡이나 내놓으라는 소릴 하지 않겠어?"

"으, 나도 얼른 홍혈귀로 승급하든지 해야지......"

"꿈 깨. 홍혈귀는 쉽게 되나?"

혈귀가 모아온 유령은 총 아홉.

이제 보니 통신소 한 곳에 4성 하나, 3성 열이 근무를 보는 모양이다.

김현은 그들에게 몽땅 혼멸을 퍼부어 세뇌를 했다.

이것은 강력한 주박이다. 같은 유명계의 일원인 이상, 그리고 김현에게 혼왕과 혼멸 성혼이 있는 이상 이걸 깨뜨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도 안전장치는 해야지.'

이번에 백흔혼에게 당한 것을 잊지 않았다. 김현은 백륜귀에게 명령해 영혼 고리라는 물건을 구해오게 했다.

정확히 11개.

1개는 백륜귀와 자신에게 걸고, 나머지 10개는 백륜귀와 혈귀들끼리 걸게 했다. 이것으로 무엇보다 강력한 맹세가 완성되었다. 하위 개체는 상위 개체에게 반드시 복종해야 하고, 배반하고자 하는 마음만 먹어도 그 즉시 소멸한다.

"탑주님을 뵙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아를 아예 소멸시킨 후 새로 만들었다.

이건 유령도 아니고 아예 유령 로봇이나 다름없다. 성혼을 쓰는 것도, 일에 대처하는 것도 어설프겠지만 최소한 마음을 놓을 수는 있었다.

"좋아. 너희들은 여기서 대기해라."

"예, 탑주님."

다소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지만 나쁘진 않았다. 최소한 백혈탑에서 일할 유령들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주위를 돌아다니며 유령들을 더 제압했다. 뜻밖에도 인근에 커다란 창고가 있었다. 백혈탑에서 거래할 성혼과 보물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거길 모조리 털었다.

창고는 5성 유령들이 지키고 있었으나 김현의 상대는 못 되었다. 모조리 성혼을 추출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생각 같아선 이들도 세뇌하여 백혈탑에서 부리고 싶었으나 5성쯤 되면 승천의 문을 넘는 게 부담스러워 포기했다.

"으으으, 백혈존께서 널 단죄하시리라!"

"백라왕의 심판이 기다린다!"

"그러라고 해. 어차피 앞으로 1년은 지구에 발도 못 딛게 만들 거니까."

원래 계획은 백혈탑만 차지하고 간을 보는 거였는데 계획을 바꿔야겠다.

지금 당장 모든 일을 처리하자.

그만큼 유명계의 원한을 사고, 그들이 재차 거점을 만들 때쯤에는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겠지만 어차피 훗날의 일이다. 그리고 이미 6성에 도달했는데 뭐가 두려울까?

즐겁게 전리품을 챙겼다. 탑 하나에 공급할 분량이다 보니 성혼과 보물이 엄청나게 많았다.

'다 못 가져가는 게 아쉽네.'

그나마 무게가 거의 안 나가는 성혼은 싸그리 긁어모았다.

그 수만 무려 10만!

4성 성혼은 없지만 3성 성혼이 5만 개나 된다. 2성 성혼이 2만 5천 개, 1성 성혼도 2만 5천 개에 달했다. 이 정도면 김현이 경매로 번 것과도 비교가 안 된다. 그때는 1번에 50만 개씩 벌었지만, 1성 성혼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역시 인생 한 방이야.'

기왕이면 흑영탑이나 다른 탑의 창고도 털고 싶지만 그게 안 되니 아쉽다. 백혈탑은 백흔혼이 배타적 권리를 받아 바로 장악할 수 있었으나 다른 탑은 공격 즉시 철수해 버릴 테니까.

그래도 그게 어디냐? 거점을 세우는 것도 철거하는 것도 모두 막대한 자원이 드는데.

"돌아가자."

"예, 탑주님."

유령들이 똑같은 어조로 합창했다.

4성 유령 다섯, 3성 유령 이백.

이 정도면 기계적으로나마 백혈탑의 관리를 맡을 수 있겠다. 완전한 노예 상태이니 뭘 공급할 필요도 없지. 망자의 통곡? 완전히 세뇌된 유령들한테 그게 왜 필요해?

창고에서 필요한 재료도 가져온 참이다. 원격으로 승천의 문을 조작하여 차원문을 열었다. 유령들도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김현의 뒤를 따라왔다.

"너희는 앞으로 이곳을 전담해라."

세세하게 역할을 지정해 준 후 백혈탑을 떴다. 백흔혼이 관리하던 시절보다는 못하겠으나, 정교하게 행동 방식을 정리해 준 까닭에 그때의 85% 효율은 나올 것이다.

어느새 해가 져 있었다. 병원에 기자들이 득실거렸다. 그들이 김현을 보고는 아귀처럼 돌진했다.

"슈퍼 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외계 원정이 실패한 게 사실입니까?"

"6성으로 승급하셨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미스 김과 미스 리가 입원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노 코멘트 하겠습니다. 바빠서요."

평소라면 적당히 응대해줬겠으나 어머니의 헝클어진 얼굴을 본 다음이라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슬쩍 영력을 풀어놓았다. 그 으스스한 기운에 기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세희의 병실로 직행.

고작 한 나절 사이에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몸이 아예 공중에 떠 있었다. 황금빛 보석 같은 게 심장에서 떨어져 나오다가 다시 스며들기를 반복한다.

"와, 왔나!"

"바로 시작하죠."

"그래 주겠나? 고맙네!"

이세희의 부모님을 뒤에 앉혀놓고 시술을 시작했다.

어렵진 않다.

천상계에서 나는 여러 약초를 용왕계와 환수계의 것으로 중화하고, 여기에 광명계와 암흑계의 광물로 격하시키면 그만이니까.

승화되려는 육체를 현실에 고정한다는 뜻.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퇴화이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치료라고 할까. 22세기의 인류 저항군은 이와 같은 일을 무수히 겪었고, 그에 대한 자료도 충실하게 가지고 있었다.

약 3시간 만에 치료가 끝났다.

"후으음, 후으으음......"

여태까지 들을 수 없었던 숨소리가 흐릿하게 울려 퍼졌다.

이세희의 아버지가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되, 된 건가?"

"예, 됐습니다. 내일 오전 정도에 깨어날 겁니다. 그때까지 곁을 지켜주세요. 혹시 이상하다 싶으면 제게 바로 연락하시고요."

"고맙네, 고마워!"

"아닙니다.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걸요."

어쨌든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다.

김현은 이세희의 상태를 확인하고 흐릿하게 미소지었다.

[혼력] 55

5성 각성자의 능력치 한계가 바로 50. 그런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그걸 돌파했다. 방향만 잘 잡아주면 6성으로 충분히 올라선다는 뜻.

쉴 틈도 없이 옆 병실로 갔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김애경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어 있었다.

[상태] 회복

아무 것도 안 했는데?

하은이가 옆에서 활짝 웃었다.

"삼촌, 삼촌! 내가 엄마한테 삼촌 왔다고 계속 말해 줬어!"

하은이도 용의 장막과 명마도, 벽력심을 가진 3성 각성자다. 말에 어느 정도 힘이 깃들어 있다. 옆에서 그 얘기를 계속 해주었다면, 상황을 안 김애경이 다시 의지를 붙잡았을 수도 있다.

'굳이 손 안 대는 게 낫겠네.'

과연 그러했다.

김애경도 이세희도 다음날 오전에 모두 정신을 차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