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10화 (110/200)

# 110

역습 –2-

"그래서 어쩌라고?"

김현의 반응이었다.

김애경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자 김현은 싸늘하게 말했다.

"유명계에 후원을 받아서 이득 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냥 가래? 나는 저 사람들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그래도 죽게 놔두면 꿈자리가 사나울 걸?"

"글쎄......"

죽은 영혼은 꿈꾸지 않는다. 김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저들을 학살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 문제. 시대의 우상으로서 어느 정도 대의명분을 따질 필요가 있다. 김현은 차가운 눈으로 각성자들을 노려보았다.

모두가 4성 등급 각성자. 유명계에서 밀어주던 각성자는 모조리 긁어모은 것 같다.

혼멸 성혼이 그들의 모든 것을 읽어냈다. 세포 한 점 한 점, 심지어 그들의 과거와 미래, 운명까지도.

'이상한데.'

공격하면 죽는다고 해서 특별한 금제를 해놓은 줄 알았더니 그런 건 없다.

있다면 오직 하나. 강력한 자기 암시 뿐. 누가 걸었는지 몰라도 굉장히 복잡하게 걸어놓았다. 각자의 정신에 복잡한 자물쇠를 걸었다고 할까.

'시간끌기구나.'

김현이 이들을 공격하거나 무시하고 지나치면 그 즉시 이들은 자살하게 된다. 그렇다고 암시를 풀 수 없냐면 그런 것은 아니다. 하도 복잡하고 섬세한 암시라 시간이 걸릴 뿐이지.

'뭘 하려는 거냐, 흑정혼?'

뭔가 노리는 것이 있다.

하지만 뭘 어떻게?

김현은 6성 각성자. 그것도 유령들 때려잡기 딱 좋은 혼왕과 혼멸 성혼을 보유하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흑영탑의 전력으로 김현을 어쩌지 못한다.

5성 유령이 수십 마리 정도 쏟아져 나온다면 모르겠으나......

'설마?'

차원의 벽이 거기까지 얇아진 것일까?

확인해보자. 설령 우려하는 사태가 발생해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으니.

"가자."

"어, 응."

"언니, 걱정하지 마요. 김현 님이 언제 실수한 적 있었어요?"

"많은데. 저번에 혼광 악어 때도 그렇고, 이번에 암신종 때도 그렇고."

"아......"

"에이, 그만 좀 해라. 어쨌든 살아왔잖아."

여섯 명이 흑영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시선과 카메라가 집중된다. 각성자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무기를 휘둘렀다.

"오, 오지 말라니까!"

"우릴 죽일 셈이야?"

"생각 같아서는 그러고 싶다, 이 멍청한 것들아."

"뭐, 뭐라고?"

슬며시 정신을 집중했다.

혼멸 성혼을 뻗는다.

투명한 손이 수십 개도 넘게 있어 그것을 각성자들에게 내미는 것과 같은 형상.

김애경이 몸을 움찔했다. 무엇을 느꼈는지 김현의 머리 위를 응시한다. 이세희도 비슷하게 김현을 훔쳐보고 있었다.

천천히 정지.

"왜요?"

다른 일행은 아직 그 경지까지는 못 닿았나 보다. 에일리가 왜 여기 서냐는 눈으로 김현을 보았다.

"이 선생님."

"네?"

"저기 각성자들한테 성혼 써주세요. 그리고 잘 보세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성혼을 발휘한다. 유령의 촉수가 각성자들의 머리 안으로 들어갔다. 각성자들이 눈을 끔뻑거리다가 이내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들 위로 내리꽂히는 황금빛 물결. 축복이며 보호이고, 또한 치유이자 장막이었다. 이세희는 의식하지 못했으나 이미 성혼 사이의 통합이 시작된 것.

느리게, 아주 느리게 그들의 정신을 살폈다. 각성자들에게 걸린 암시는 거대하고 복잡한 미궁과도 같았다. 미로를 헤매고 헤매다가 황금 사과를 꺼내 와야 비로소 그 암시가 풀린다.

당연히 지난하기 짝이 없는 작업. 범상한 정신 계열 각성자 같으면 한 명을 해제하려고 해도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은 보내야 했다.

흑정혼의 착각이라면 김현이 범상치 않다는 점. 그것도 범상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초월적이라고 봐야겠지.

다시 걷기 시작.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다. 거의 백 명은 될 각성자들의 정신을 치유하면서 움직이는 것 아닌가. 여기 있는 자 중 누구도 김현이 벌인 일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지만 딱 하나, 단편적으로나마 김현의 위업을 체감한 이가 있었다.

"맙소사......"

이세희가 탄성을 질렀다.

이 고위 각성자, 어쩌면 6성에 들지도 모르는 각성자에게만은 보였다.

공중으로 뻗은 촉수. 그것들이 각성자들의 정신을 어루만지자 짙은 혼몽이 점차 사라지는 것이. 그리고 김현이 움직일 때마다 혼몽이 따라가며 현실 속으로 녹아드는 것도 함께.

"누나, 왜 그래요?"

"그, 그게......"

동화 속에서 보는 듯한 몽환적인 광경이다. 아니, 광경이라고 할 수가 없겠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전신으로 느끼는 상태이니.

초월적이며 기이한 광경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째서인지 심장이 들뜬 것 같다. 이세희는 자신도 모르게 길고 뜨거운 한숨을 불어냈다.

저벅저벅.

김현의 발소리가 유독 길게 울린다.

각성자들이 멍한 눈을 하고 양 옆으로 비켜섰다. 무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말았다가를 반복하더니 끝내 놓쳐 버렸다.

"어떻게 된 거야?"

"정신 금제를 당했더라. 푸는 중이야."

"결국 도와줄 거면서 까칠하기는......"

방어막은 없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

마법적인 어둠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김현조차 잠깐 시야가 차단되었을 정도. 하지만 혼멸 성혼을 끌어올리며 주위를 파악하고, 그 정보를 일행 모두의 정신에 직접 전달했다.

고즈넉한 침묵만이 존재했다. 원래 같았으면 빼곡히 쌓여 있을 보물과 성혼이 모조리 사라졌다.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저 탑 중심에 둥둥 떠 있는 거무튀튀한 유령 하나가 전부.

아니, 아니다.

누군가 더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등허리를 쿡쿡 찌르는 듯한 불쾌한 어떤 시선이 감각의 지평선 너머에서 부유하는 중이었다.

"겁먹었냐? 얼른 나와!"

일행 모두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게 이상했다. 다른 이는 몰라도 김현은 6성 각성자인 만큼 5성 유령의 위치 정도는 단박에 알아내야 하는 것 아닌가?

탑 내부를 살피다가 갑작스레 드는 생각에 고개를 가파르게 젖혔다.

까맣게 얼룩진 허공이 눈에 들어온다.

승천의 문이 열린 상태.

음험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반역자여, 소멸되어라!]

웅웅거리며 중첩되는 웃음.

검은 얼룩이 불안하게 흔들리더니 강제로 벌리는 것처럼 점차 크기를 더한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격렬한 파장이 흑영탑을 강하게 뒤흔들었다.

쿠구구궁.

불안한 진동이 일행을 때린다. 머리 위에서 먼지가 폴폴 휘날렸다. 동시에 날카로운 기파가 사방을 날아다녔다.

"이런, 뛰어!"

상황을 파악하고 지시를 내렸다. 몸을 돌려 뒤로 뛰자 일행이 영문도 모르고 쫓아온다.

"형, 왜 이래요?"

"미친 것들이 흑영탑을 붕괴시켰어!"

"네?"

"설마, 자폭?"

"설명은 나중에!"

문이 잠겨 있었으나 간단히 돌파. 널찍한 평원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목청껏 소리쳤다.

"도망쳐요! 탑이 무너집니다!"

어안이 벙벙해서는 이쪽을 보는 사람들.

그들까지 어떻게 해줄 수는 없다. 대신 자기 암시를 푸는 각성자들만 챙겼다. 몸을 피로 변환시킨 다음, 피의 촉수를 뻗어 모조리 낚아챈 것. 그들을 꽁지 깃털처럼 휘날리며 탑 반대편으로 뛰었다.

그때쯤 구경꾼들과 기자들도 상황을 알아차렸다.

50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탑. 그것이 저 위쪽부터 붕괴되고 있었으니까. 쩍쩍 금이 가면서 먼지가 떨어지고, 벽돌이 불에 휩싸여 낙하했다.

거대한 탑이 붕괴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채 3분도 안 되어 완전히 무너진 것 같았다.

기이한 점은 그 와중에도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 낙하하던 벽돌도, 무너지던 벽면도 도중에 푸르스름한 불에 타 완전히 소실된 까닭이다.

"준비하세요. 곧 옵니다."

[끼아아악!]

동시에, 섬뜩한 귀곡성이 고막으로 파고들었다.

아직도 잔향이 남은 곳에서 유령들이 하나둘 솟구친다.

시커먼 거적떼기를 입고 낫을 든 사신, 푸른 불길에 휩싸인 하얀 유령, 회색 음울한 파장을 뿌리는 자, 흉측하기 짝이 없어 징그럽기만 한 귀신......

도합 서른.

까드득 이를 갈아붙였다.

'이중함정이었구나!'

이번에도 유명계는 김현의 생각을 한 단계 앞질러 갔다.

각성자들에 대한 자기 암시는 그저 속임수. 김현이 해제하면서 들어올 줄 알고 함정을 미리 만들어둔 것이다. 이번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차라리 해제를 완료하고 들어갔으면 나았겠지. 하지만 김현은 유령들의 의표를 찌르겠다고 달고 들어갔고, 그게 화근이 되었다.

[으흐흐......]

유령들이 웃었다.

[반역자여, 감히 영존께 반기를 들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네게는 오직 소멸만이 기다린다!]

[그 더러운 몸뚱이를 제거하고, 네 성혼을 추출한 후 완전한 소멸을 안겨주마!]

유령들의 무장 상태도 충실하다. 무기와 방어구 모두 5성 등급이었고 성혼과 능력치 또한 5성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 만큼 승리를 확신하는 모양. 한 등급 차이일 경우 1대 10의 교환비라는 것은 이들도 잘 알고 있으니.

"이거 재밌네."

김애경이 주먹을 쥐고 전의를 불태웠다.

"수가 조금 많기는 하네요."

이세희도 한마디 거들었다.

"다 죽여 버려!"

"어, 이상하게 우리가 질 것 같은 기분은 안 드는데요?"

"제가 셋은 잡을게요."

일행이 김현을 둘러쌌다. 지금 김현이 최대한의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

김현은 싱긋 웃었다.

5성 유령 서른이면 막강한 전력이지만 그냥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이리 와라."

그 말에 일백 명의 각성자들이 비척비척 모여든다.

"크륵, 크르륵."

다들 괴상하게 변해 있었다. 전신이 피칠갑을 한 듯 붉게 물들고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것.

혈기 주입.

불사계에서도 고위 흡혈귀만이 부릴 수 있는 재주였다. 김애경이 얼굴을 찌푸리고 김현을 돌아보자 대답했다.

"목숨 값이야."

명쾌한 해답.

이번 일로 각성자들은 유명계에 진 책무도 정산하고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다. 목숨도 구해주고 구속도 풀어주는데 잠깐 몸을 부리면 어때? 싫으면 돈으로 내던가.

"살고 봐야지."

"에휴, 알았어."

[감히 잔재주를!]

혈기 주입된 각성자들은 평소의 배에 해당하는 힘을 낸다. 모두 유명 성향 4성 각성자이니 큰 도움이 되겠지.

유령들이 돌진해온다. 각양각색의 성혼이 원거리에서 일행을 두드렸다. 모조리 5성 등급이라 산이 무너질 정도의 위력이지만 일행은 차분하게 대처했다.

가장 압권은 이세희의 방어막.

일행은 물론 1백 각성자들까지 동시에 감싸는 반구 형태의 방어막을 설치했는데, 유령들의 공격이 도무지 반구를 뚫질 못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산 자 주제에 음신지경에 발을 들여놓다니!]

[이깟 변방 차원에 어떻게 이런 자들이 나타났지?]

[반드시 여기서 씨를 말려야 한다!]

이세희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잠깐 6성의 경지를 엿본 것과 6성에 온전히 들어선 것의 차이는 크다. 그것만으로도 무력이 한 단계 상승하긴 했으나 이 모든 공격을 다 받아내기란 어려웠다.

"제가 돕죠."

김현은 각성자들의 암시를 풀고, 그들에게 혈기를 주입하는 와중에도 더 손을 썼다.

영력을 이세희에게 주입했다.

유명계의 힘은 음습하고 침울하다. 하지만 유명계 특유의 속성으로 가공되기 전의 영력은 지극히 순수하고 강력했다. 이걸 그대로 다른 각성자에게 전해줄 수가 있었다.

"고마워요."

이세희가 한층 힘을 썼다.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김현은 핏덩이를 뿜어 열 개나 되는 핏빛 손을 불러냈다. 권역 방어막이 막기 힘들어 보이는 공격만 쏙쏙 골라 쳐냈다.

도합 네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것.

아니, 네 가지 일도 아니지. 종류가 네 가지이지 실제로는 수백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것 아닌가.

상상을 초월하는 멀티태스킹 능력.

인간들은 몰랐다. 김현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르는 것인지. 유령들만 경악에 차 흐릿한 영언을 남길 뿐.

[놀랍구나, 놀라워......]

[아무리 6성 각성자라 한들 이토록 초월적인 수법을 부리다니......]

[너는 정녕 위대한 존재가 될 수도 있었다. 선택을 잘못한 네 어리석음을 탓하라.]

김현은 콧방귀도 껴주지 않았다.

유령들의 공세는 막강했으나 거기까지였으니까.

각성자 백여 명.

이들로 속임수를 쓴 것은 확실히 훌륭했다. 다른 일반적인 각성자 같았으면 그들을 치료하는 것에만 매달려야 했을 테니. 만약에 포기했다면? 죽어버린 그들의 영혼을 이용하여 2차 공격이 들어왔을 것이다.

유령들이 간과한 것은 단 하나.

김현의 능력이었다. 김현은 전생에 8성 각성자로서 혼력 제어 능력이 어느 누구에 비해서도 월등했다. 그 초월적인 능력으로 유령들의 기교를 깨부쉈다고 하겠다.

유령 서른의 성혼을 모조리 추출하고 다음 탑을 향해 갔다.

"없어졌대."

"그렇겠지."

유명계의 대처도 빨랐다. 지구에 남아 있던 네 개의 거점을 모두 철수했다. 어차피 김현에게 털릴 거, 최소한이라도 아껴보자는 심산이었다.

가만히 지구본을 응시하는 김현. 백혈탑을 포함해도 103개로 줄어든 외계종 거점이 기꺼웠다.

[제법이군. 벌써 유명계를 다 축출할 줄이야.]

차원 저 편에서 블러드 공작이 말을 걸어온다.

"쉽다고 했잖아."

[후후, 방심하지는 않는 게 좋을 거다. 이번 일로 차원의 벽에 꽤 크게 금이 갔거든. 벌써 내 휘하의 흡혈귀들이 진혈 흡혈귀들을 파견한다고 난리더군.]

진혈 흡혈귀, 즉 5성 등급.

빠르다, 너무 빠르다.

원 역사보다 거의 1년 반은 당겨진 셈. 이런 추세라면 4년이 아니라 1년만 지나도 6성 외계종이 도래할 터.

'그럼 난 더 빨리 움직여주지.'

김현의 눈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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