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11화 (111/200)

# 111

천상체 –1-

부드러운 황금빛이 작은 육체를 어루만진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파리한 두피. 고통에 지친 눈동자.

빛이 간지럽히자 까르르 웃는다. 뇌종양에 걸리고 투병 생활을 시작한 이래, 실로 오랜만에 터뜨리는 웃음이었다.

"아......"

지켜보던 아이의 아버지가 탄성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벌써 눈물짓고 있었다.

생명이 회복되는 것이 보인다.

항상 창백하던 얼굴에 혈색이 돌고, 찡그렸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엄마! 머리가 안 아파!"

"오, 우리 사라! 하느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이가 활짝 웃으며 부모에게 안겼다. 부모가 성호를 그으며 감사 인사를 연발했다.

"아니에요. 혹시 모르니까 PET 한 번 찍어보세요. 어쩌면 조금 남아 있을지 모르니까."

"감사합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기적."

부모는 가운 입은 어떤 동양인 여성에게 연신 감사를 표했다. 동양인 여성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아담한 체구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이곳 소아 전문 병원의 사람들은 그녀를 미라클이라고 불렀다.

의학이 발달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사망률이 높은 소아암 환아(患兒)들. 수개월 전부터 찾아오기 시작한 그녀는 말 그대로 기적의 존재였다. 손만 대면 누구든 건강을 되찾아 집으로 달려갔으니.

'이상해.'

쏟아지는 찬사 속에서 그녀, 이세희는 한 가닥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기적이라고 불렀지만 이세희 스스로는 그게 아니라는 점을 잘 안다. 애초에 자신이 가진 성혼, 빛의 치유 자체가 그랬다. 질병 치료보다는 외상 치료에 집중되어서, 환아들을 조금 도와주는 게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현대 의학과 결부되면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낼 수 있긴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손만 대면 회복되는 기적을 보여주진 못했다.

이런 기적이 나타난 것은 며칠 전, 유명계에서 돌아온 다음부터의 일. 그 뒤로 수백 명이나 되는 환아를 치료했다. 경악스러운 것은 힘을 조금만 써도 환아의 암 병변이 PET 상에서 깨끗이 지워진다는 사실.

"고생하셨습니다, 미라클 리."

원장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똥똥한 체격에 대머리. 사재를 털어 이 작은 소아 전문 병원을 운영하는 남자였다. 하도 선량한 인간이라 가끔 이 남자를 볼 때면 영혼 자체에서 빛이 난다고 느낄 지경이었다.

"고생은요. 다음 환아는요?"

"하하, 대기하고 있던 환아는 모두 치료하셨습니다. 이제 퇴원시킬 일만 남았어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어휴, 다행은요. 이러다 저 파산하게 생겼습니다. 미라클 리께서 제 고객들을 다 내쫓으시고 있다고요."

원장이 괜히 너스레를 떤다. 환아의 상태가 악화될 때마다, 그래서 사망 선고를 할 때마다 남몰래 원장실에서 눈물짓던 자가 저러니 유쾌한 기분이 든다.

"호호."

"아직 시간도 이른데, 커피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커피요? 음......"

이 남자, 설마 추파를 던지는 건가?

이세희는 빤히 원장을 쳐다보았다. 원장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이 되레 마음에 들었다.

그래, 커피 한 잔 정도야.

올해 꽃다운 27살. 언제까지 괴물들과 싸우기만 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외모도 별로고 나이도 많은 사람이지만 뭐......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였다. 이질적이고 서늘한 기운이 뒤통수를 콕콕 쑤셨다.

자연히 얼굴이 굳어진다.

"죄송해요. 커피는 다음에 마셔야 할 것 같아요."

"어?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지요."

"에이, 주제넘기는요. 다음에 얘기해요."

가운을 벗고 짐을 챙긴 다음 병원을 나섰다. 건강해진 아이들이 뛰어놀다가 이세희에게 손을 흔든다. 이세희는 따스하게 웃으며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주차장.

한 남자가 어떤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스산하게 피어오른다. 남자가 기댄 나무가, 흡사 고목이 되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아 이세희는 꼴깍, 하고 침을 삼켰다.

"여기엔 어쩐 일이세요?"

"그냥요. 보기 좋네요."

"뭐......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일 같아서요."

그 바쁜 와중에도 이리 시간을 내어 자원 봉사를 하는 걸 보면 이세희도 범상한 사람은 아니다.

김현은 병원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커피 한 잔 정도는 하고 오셨어도 괜찮습니다만."

"바쁜 사람 시간을 빼앗을 순 없잖아요.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세요? 그냥 전화하시지."

"한 가지 어려운 제안을 하게 되서요."

"뭔데 그래요?"

"이 선생님. 선생님도 요즘 본인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자각하고 계시죠?"

당연히 알지.

오늘도 뼈저리게 실감하고 왔으니.

"안 좋은 일이에요?"

"아뇨. 좋은 일이죠. 인류 전체를 위해서는. 선생님 개인에게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무슨......"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동할까요?"

"그래요. 따라오세요."

이세희가 당차게 몸을 돌렸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누르자 인근의 자동차 하나가 삑삑거린다.

김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세희의 차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김현은 남이 보거나 말거나 하늘을 날아 이동하곤 했는데, 이세희는 보다 상식적인 이동을 추구했던 것이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고속도로를 타면서 이세희가 묻는다.

"이제 말해 보세요. 저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유명계에서 있었던 일은 기억합니까?"

"당연하죠."

"암신종이 우릴 정신 공격할 때, 선생님의 성혼이 하나로 합쳐지려고 했던 거는요?"

"어렴풋이 기억나요. 그런데 그때 김현 님이 절......"

이세희가 살포시 미간을 찡그렸다. 당시 맞았던 명치가 다시 아프기라도 하는 것처럼.

"예, 때렸죠."

"왜 그랬어요? 전 그때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놔두면 선생님이 6성으로 올라설 거였거든요."

"그게 왜요?"

짐작했던,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되는 일. 설마 정말로 그랬을까 싶어서 묻어두었지만 언젠가는 묻고 싶었다.

이세희가 혼란스러운 시선을 던진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단단한 신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김현이 그랬던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육체로는 6성의 힘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만약 거기서 가만히 놔두었으면, 그래서 선생님이 정말 6성으로 승급했으면 암신종은 쓰러뜨렸을지 몰라도 선생님이 거기서 죽었을 겁니다."

"죽는다고요?"

"네. 정확히 말하면 육체가 소멸됩니다. 완전히, 천상계의 빛으로 변해서."

이세희가 입을 벌렸다.

설마 죽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 그러더니 이내 따지듯 묻는다.

"하지만 김현 님은 6성 되고도 안 죽었잖아요."

"아니죠, 저도 죽었어요. 육체가 죽어 유령이 되었고 영혼이 죽어 흡혈귀가 되었죠. 전 김현이지만, 이미 죽은 김현입니다."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 아닙니다. 누나 앞에서는 종족이 바뀌었다, 라고만 말했지만 전 사실 이미 죽었다고 봐야 해요. 그게 진실입니다."

확인시켜주겠다고 이세희의 손을 잡아 가슴에 가져왔다.

너무나 차가운 감촉에 이세희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심장이......"

"예, 제 심장은 뛰지 않습니다."

담담한 말투.

말하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데 되레 이세희가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이미 죽었다고?

비록 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뿜고, 마주할 때마다 불길한 공기가 넘실거리지만 말하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예전의 그 김현이 맞는데?

김현이 어울리지 않게 경쾌한 웃음을 지었다.

"제 가족들에게는 비밀입니다."

"그거...... 그거 정말이에요? 이미 죽었다는 게?"

"흡혈귀의 육체, 유령의 혼...... 이걸 살았다고 할 수는 없죠. 하하."

"웃음이 나와요?"

"그럼요. 웃어야죠. 한낱 유령이 되어서 지구 침략의 첨병이 되는 것보다야 백 번은 낫지 않습니까? 저 자신은 지켰으니까."

그제야 김현이 희생한 것의 무게를 깨닫는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또 얼마나 버려야 하나.

처음에는 왼팔을, 다음에는 사지와 외모를, 이제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눈물이 차오른다.

격한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김현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제가 선택한 겁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래도 그렇지......"

"이 선생님. 이렇게라도 해야 합니다. 제가 본 22세기는 그야말로 지옥이었어요. 여기서 우리가 외계종들을 제지하지 못하면 22세기의 모든 인류가 저처럼 변합니다."

"김현 님처럼......"

"네, 인간을 벗어나게 됩니다. 유전 조작을 당해 태어날 때부터 곤충 인간으로 태어나고, 운이 좋아야 생체 배터리 취급을 당하는 정도에요. 우리 인류가 인류로서 남기 위해선 약간의 희생은 불가피해요."

"그게 꼭 김현 님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아니죠. 제가 타인에게 희생을 강제하면 그건 살인 아닙니까? 제가 희생할 수 있는 건 저 자신 밖에 없습니다. 저 하나 희생해서 그 지옥 같은 22세기를 막을 수 있다면 이깟 육신, 이깟 영혼 정도는 간단히 던질 수 있어요."

이세희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김현을 본다.

그럴 만도 하다. 예지 능력으로 본 미래가 아무리 참혹하다 한들 이토록 헌신하는 게 이해되지 않을 테니.

김현이 실은 22세기의 아론이라는 사실은 오로지 김현 혼자만이 간직한 사실. 그 누구에게든 밝힐 수가 없었다.

감정이 잦아들길 기다렸다가 담담히 요청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선생님께 어려운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뭔데요? 아, 설마......"

"네. 6성 각성자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거...... 지금까지와는 다르겠죠?"

"많이 다르죠. 6성은 인간으로서는 도달하기 불가능합니다. 다른 방법을 써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요?"

"환골탈태, 인체 개조, 영육 개변, 종족 변환......"

"그만! 됐어요."

이세희가 몸서리를 쳤다.

듣기만 해도 끔찍해지는 단어들.

그나마 환골탈태가 정상적이지, 인체 개조는 뭐고, 영육 개변은 또 뭐냐?

"그냥 정상적으로 6성으로는 못 올라가요? 성혼을 먹어서요."

"그 즉시 과부하가 걸려서 몸이 소멸합니다."

"하아...... 그럼 환골탈태가 그나마 낫겠네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 김현.

"환골탈태도 힘들어요. 우리 일행 중에 그게 되는 사람은 우리 누나 밖에 없습니다."

"왜요?"

"환골탈태 하려면 극대파멸력 정도는 다뤄야 하거든요."

"하아...... 그럼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뭐에요?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고 싶은데."

"인체 개조나 영육 개변이 좋죠. 종족 변환은 저도 비추천합니다. 인간은 육체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어서, 잘못하면 거기 휘둘릴 수 있어서요."

"안 하면 안 돼요? 죄송하지만 지금도 전 많이 강한 것 같은데......"

"그게, 힘듭니다."

이세희가 거부감을 보일 거라는 건 진즉부터 예측하고 있었다. 다급하게 몰아치는 대신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우선 차원의 벽이 엷어져 5성 외계종의 진입이 시작되었다는 점. 자연히 경매 등 여러 사업에도 암초가 생겼지만 그보다 중요한 점은 조만간 외계종들의 침공이 시작된다는 의미가 컸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세희 개인에 대한 일이었다.

"지금 선생님은 갈림길에 서 있어요. 인간으로 남느냐, 초월종이 되느냐의 갈림길이죠. 선택하지 않으면, 그래서 진화하지 못하면 퇴보하여 완전히 인간으로 남습니다."

"인간으로 남는다...... 5성 각성자가 된다는 말이에요?"

"예. 그리고 합일되던 성혼은 원래대로 돌아갈 겁니다."

김현이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으로 이세희를 보며 말했다.

이세희의 가슴이 덜커덕, 내려앉는다.

기적이란 이름에 걸맞는 사람이 된 것은 고작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 전까지는 환아들을 치료하고도 그들의 예후를 살피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가끔은 괴물들과 싸우러 갔을 때에도 그들을 생각하느라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기적이 인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떠나간다니, 너무나 잔혹한 일이 아닌가?

"그건 너무해요."

"자원 봉사하시는 일 때문입니까? 그건 염려하지 마세요. 정 부족하면 5성 등급 성혼을 더 각성하셔도 되니까요."

"아......"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여유분이 꽤 있어요. 그 중에 황금 요람이나 고결한 회복 같은 성혼은 질병 치료에도 효과가 크죠. 원하시면 선생님 배당으로 그 성혼들을 드릴게요."

"정말, 정말 제가 인간으로 남아도 괜찮아요? 6성에 도전하지 않아도?"

때마침 차가 지독하게 막혔다.

완전히 정지한 차 속에서 이세희가 김현의 눈을 직시하며 묻는다.

잠시 침묵.

괜찮겠냐고?

그럴 리가. 김현의 계획에 막대한 차질이 생긴다. 최소한 김현 자신을 포함한 일행 6인은 모두 6성이 아니라 7성, 8성까지는 가줘야 했으니까.

하지만 신념을 담아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22세기.

그 지옥과도 같은 전생.

김현은, 아론은 장난감이었다. 운명이 희롱하여 흔드는 인형이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춤추고 뛰고 웃음지어야 했다. 그나마 자신의 인생을 찾은 것은 장갑기사로서 낙오한 다음, 세계의 진실을 깨닫고 인류 저항군에 투신한 다음이었다.

그래서 김현은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자신을 제멋대로 이용하거나 조종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차라리 죽이고 박살내고 모욕할망정, 다른 이의 자유의지를 억압하고 강제하고 싶지는 않았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

그 명확하고 또렷한 시선이 이세희의 영혼에 낙인처럼 박혔다.

어째서였을까?

데이트를 신청하던 대머리 원장의 눈동자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그리고 머리카락 빠진 환아들이 보이던 밝은 웃음도 함께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할게요."

단호한 목소리가 운명을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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