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모가디슈 –1-
일행이 다 갈 필요는 없다. 김현은 안개 공간을 이용해 소말리아 킬리 섬으로 위치를 옮겼다.
한스를 통해 간다고 전언을 보낸 다음이다. 킬리 섬의 자경단장인 사브리나가 나와서 김현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무릎을 꿇고 극공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브리나.
자경단장에 임명한 뒤부터 쭉 저랬다. 가끔 훈련소에서 손을 봐주기라도 하면 더 그랬다. 김현은 힐끗 사브리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콧잔등 근처에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뭔가 날카로운 것에 긁힌 것 같다. 여자이면서 외모를 전혀 돌보지 않는 태도에 살짝 혀를 찼다.
"조심하면서 해라."
"예, 사령관님."
말은 그렇게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오늘 밤에도 성혼을 가다듬으며 수련에 골몰하겠지.
'기특하긴 하네.'
사브리나는 김현 주위 인물 중 제일가는 수련광이었다. 끝없이 노력했고, 그 결과 땀의 과실을 따냈다.
[칼날 팔뚝(4★, 충왕)]
지금이 11월 말.
성혼을 각성한지 고작 두 달 만에 4성에 올라서다니......
그것도 얼치기 4성이 아니라 능력치도 충실했다. 5성 성혼만 주면 충분히 5성에 올라서겠다.
"사령관님, 부재중이신 동안 19건의 사적 분쟁이 있었고, 그 중 15건은 지침대로 처리를 했습니다. 4건은 따로 정리해 두었으니 지침을 하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저 어린 소녀 같던 사브리나.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일까? 난민들 사이의 분쟁을 적절히 처리하고 있었다.
물론 김현의 관점에서 적절한 것이지, 21세기 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가 않다. 주먹을 써서 우격다짐으로 해결한 것에 불과하니.
이 또한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이겠지. 김현은 사브리나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내심 경계하면서도 아직은 내색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체계를 갖추어야겠으나 지금은 원초적인 폭력 말고는 대안이 없다.
"나중에 보자. 모가디슈에서는 소식이 없었어?"
"모가디슈 말입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흰 그쪽과 소식이 단절되어 있어서......"
"모르면 어쩔 수 없지. 그래, 괴물 토벌은 잘 했고? 1주 전에는 인근 해변이 침식됐다는 소식을 들었다만."
"예. 2조가 진입하여 복구했습니다. 4성 괴물이 출현하긴 했습니다만 1조가 추가 진입하여 사냥에 성공했습니다."
"잘 했다."
자경단이 아직 작다 보니 사브리나가 1조의 조장을 겸한다. 4성 괴물 출현 소식에 만사 젖혀 두고 달려간 모양.
'이젠 작지 않지.'
킬리 섬을 할양 받고 벌써 두 달.
난민은 꾸준히 늘어났다. 처음 1만으로 시작했던 난민은 이제 5만까지 불었다.
그야말로 작은 도시.
많은 것이 불편하겠지만 난민촌은 어찌어찌 유지되고 있었다. 김현으로 대변되는 강력한 무력이 치안을 유지하고, 어쨌든 생명의 위협은 없기 때문이겠지. 물자도 매일 같이 뉴욕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중이고.
"자경단을 모아라."
"예, 사령관님!"
킬리 섬의 자경단이 집결했다. 여기에 더하여 시리아와 아이티에서도 안개 공간을 통해 자경단이 건너왔다.
다 모아놓으니 수가 꽤 많다.
약 7백 명.
사실 난민들의 수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규모다. 시리아와 아이티까지 하면 거의 10만 명에 달하니까. 김현의 위명이 있어 치안이 유지되는 거지, 이들만으로는 치안 유지가 안 된다.
김현은 그들을 앉혀놓고 그들 사이를 거닐었다.
높다란 단상 위에 서는 것보다는 이게 편했다. 전생에서도 중요 전투 직전에는 이런 식으로 사기를 북돋워주곤 했으니까.
"무슨 일이지?"
"글쎄......"
"저 사람들, 저기 다른 난민촌 자경단 아냐? 처음 보는데."
"맞아. 봐, 백인들도 있잖아."
"하얀 이교도들이 여긴 뭔 일이래?"
"어이, 말조심해. 사령관님이 그런 거 싫어하는 거 몰라."
"사령관? 흥, 하찮은 이교도지."
역시나 난민들이란......
한 귀로 흘리며 자경단원 전체를 한 명 한 명 호명했다.
"알레포에서 온 바리앙 드밀르."
"헉, 네, 네!"
"도미니카 공화국의 케빈 르나엘."
"옙! 케빈입니다!"
그때마다 김현은 자경단원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700여명 전원에게 전부.
자연히 자경단원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뻣뻣하게 부동 자세를 취한다.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김현이 세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잘 안다.
명실공히 1인자.
개인의 무력이 이미 국가를 넘어선, 살아있는 힘의 화신이자 최강의 초능력자.
그런 사람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요즘, 이상한 것 못 느끼나?"
"예?"
"저흰 강건합니다! 무엇을 명하시든 해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말뜻을 오해했는지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고 난민들 말이다. 일반 난민 중에 건강 문제를 호소하는 자는 없었나? 최근에 들어온 사람들 말고, 초기 인원 중에서."
700명을 모조리 호명하며 격려하고는 처음 내뱉는 말이 이거다. 자경단원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때, 사브리나가 앗 하는 탄성을 질렀다.
"사령관님, 혹시 피부병 말씀하시는 겁니까?"
"피부병? 아, 보라색 반점이 생긴 거냐?"
"예. 실은 엊그제부터 제 동생 둘이...... 별 것 아니지 싶어서 말씀드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흔한 증상이다.
혼력 과잉으로 인한 중독 증상은 피부, 호흡기, 소화기,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었다. 개중 가장 경미한 것이 피부 반점. 자연적으로는 있기 힘든 옅은 보라색의 반점이 피부 곳곳에 번진다.
"제 어머니는 며칠 전부터 기침하면서 가래를 뱉으시는데 그게 보라색입니다. 혹시 큰 문제는 아니겠지요?"
"아들놈이 보라색 변을 보던데......"
공통점이 있다면 보라색과 관련된다는 사실.
빈민촌의 공간 왜곡이 용왕계 무진의 표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용왕계의 대표 색채가 바로 보라색이라 현실에서 구체화되면 특징적인 색채를 남기곤 했다.
"혼력 중독 증상이다."
"예? 혼력 중독이요?"
"그래. 너희 모두 알겠지만 세 곳의 빈민촌은 모두 공간 왜곡이 걸려 있다. 당연히 혼력이 가득 차 있지. 그런 만큼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은 오래 있으면 혼력이 과잉 축적되어 중독 증상을 일으킨다."
김현의 목소리는 낮고 음울했다. 칼처럼 고막을 쿡쿡 찔렀다. 자연히 자경단원들만 아니라 난민들도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뭐, 뭐야?"
"이교도 자식! 자비로우신 이맘을 죽일 때부터 알아봤어!"
"우릴 다 죽이려는 거야?"
"감히 알라의 자식들에게 음모를 꾸미다니!"
그러나 죄다 말 뿐.
앞으로 나서는 이는 없었다. 김현에 대한 적개심만 일으키는 게 전부.
사브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실을 여기서 밝히시는 건, 해결책이 있으시다는 것이지요?"
"당연하지. 치료는 간단하다. 여길 떠나서 현실의 땅에서 거주하다 보면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완벽하게 낫는다."
"하지만 사령관님, 저흰 아직 자립할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응? 자립? 누가 자립시켜 준대? 왜, 날 떠나고 싶은 거냐?"
"아닙니다, 사령관님! 전 단지 저들을 이야기한 것뿐입니다!"
사브리나가 격렬하게 반응하며 난민들을 가리켰다. 혼력이 담겨 쩌렁쩌렁한 외침에 저절로 사위가 조용해진다.
"그래. 저들이 자립하고자 한다면 난 저들을 보내줄 거다. 다만 혼력 중독 때문에 죽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과연 사령관님께서는 자비롭고 현명하십니다."
"어쨌든 저들 때문이라도 땅을 조금 얻어 볼 생각이다. 여기 있는 너희들 때문이라도 그렇지. 너희는 각성자이니 혼력 중독에서 자유롭지만 너희 가족은 그렇지 못하니까."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사령관님과의 만남이 제 일생 최고의 행운이었습니다!"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할 것을 요구하긴 했어도 노골적인 아부를 들으니 낯이 뜨겁다.
김현은 자경단원들을 보며 말했다.
"다들 알겠지만 지구를 보호하는 차원의 벽이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4성 괴물들이 지구를 공격하기 시작한 게 8월 중순이다. 그런데 딱 석 달 만에, 5성 괴물들이 지구를 노리기 시작했다."
"5성......"
"흐억......"
"그 중 한 마리가 소말리아의 모가디슈를 공격하고 있다는 정보다. 다들 알다시피 모가디슈는 이미 폐허 상태이고 관공서가 있는 중심부만 남아 있는 상태지. 가만히 놔두면 모가디슈는 완전히 파멸될 것이고, 살아 남은 시민들 모두 괴물의 먹이가 될 게 뻔하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자경단원들이 그런 눈으로 김현을 쳐다본다.
이들 또한 난민 출신. 각박하고 힘든 삶을 살았던 참이다. 모가디슈의 시민들이 어떻게 되건 말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지키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출전 준비를 해라. 우리는 지금부터 모가디슈를 구원한다. 그리하여 소말리아로부터 마땅한 대가를 얻고, 그것으로 우리가 머물 땅과 집, 식량과 옷을 얻을 것이다!"
"와아아!"
"사령관님 만세!"
이제야 김현의 의도를 파악한 자경단원들이 환성을 질렀다.
누군가 눈치 없이 옆에 있는 동료에게 묻는다.
"그냥 저번에 복구한 해안 하나 점령하면 되는 거 아니야? 왜 저렇게 복잡하게 하시지?"
"멍청하기는. 잘 모르겠으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나 눈 크게 뜨고 보고나 있어. 사령관님께서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니까."
"체엣. 큰 그림 그려봤자 사령관님만 잘 되지, 우리도 잘 되남?"
"어이쿠, 멍청한 소리 보소. 사령관님이 잘 되어야 우리도 그 콩고물을 얻어먹는 거지. 두고 봐. 깡촌 구석에서 닭이나 치던 신세를 드디어 벗어나게 생겼으니까. 이맘? 흥! 1년 뒤면 내가 이맘이다!"
"정말?"
이런 콩가루 같은 결속 같으니.
전생의 인류 저항군을 생각하면 한숨 밖에 안 나온다. 그래서 사브리나 같은 몇 안 되는 순수한 병사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 같다.
김현은 즉석에서 긴 천을 펼쳤다.
천이 허공에서 저절로 접어지며 종이배 형상을 만든다. 워낙에 커서 수백 명은 올라타지 싶었다. 김현은 그 꼭대기로 올라간 다음 자경단을 손짓하여 불렀다.
"치안을 유지할 최소 인원만 남기고 모두 타라."
"예, 사령관님!"
종이배에 탄 인원은 약 5백명.
그 상태에서 종이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경단원들이 신기해 하며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세상에, 움직인다!"
"우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난민들도 놀란 눈으로 이쪽을 올려다본다. 이 기이한 공간도 신기하고, 안개 공간을 통해 오락가락 하는 사람들도 신기하지만 눈앞에서 이러한 경이를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으니.
김현은 느긋하게 종이배를 조종했다. 6성 각성자로서의 강대한 혼력이 이 일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손을 휘저어 현실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찌이잉.
유리 긁는 듯한 소리와 함께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그곳을 질주했다.
한 마리 새처럼, 혹은 쾌속선처럼. 파도가 아닌 바람을 타고서 남서쪽을 향해 한 줄기 궤적을 그린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소말리아 영토.
처참했다.
민가는 찾아볼 수가 없다. 곳곳에 까만 잿더미만 남아 있었다. 괴물들이 끼루룩 대며 무리를 지어 쏘다니다가 다른 세계의 괴물들과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학살극을 벌이고 상대의 시체를 퍼먹었다.
"지옥이에요."
사브리나가 말하고, 다른 자경단장들이 머리를 끄덕이지만 김현은 짧게 비웃음을 날렸다.
"고작 저 정도로?"
"네?"
"이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차라리 인간이 연출한 지옥이 훨씬 더 잔인하고 무섭지."
그 말에 두 명의 자경단장이 동의를 표했다.
둘 다 나이 좀 있는 중년 남자. 아직 어린 소녀인 사브리나와는 인생의 경험부터가 달랐기 때문.
"속도를 올리지. 모두 꽉 잡아라."
김현이 손짓을 하자 종이배가 조금씩 변형되었다. 내부에 선실이 생기고, 안전띠가 달린 의자가 생성된 것이다.
종이배가 더욱 속도를 올린다. 처음에는 빠른 쾌속선 수준이던 게 갈매기처럼, 독수리처럼, 어쩌면 경비행기 수준으로 올라간다. 내구도가 썩 좋지는 못한 까닭에 자경단원들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혼력을 다스려라. 몸 전체에 퍼뜨리고 내부를 진정시켜라."
읊조리듯 흔들어놓는 몇 마디.
사브리나가 가장 빨랐다. 얼굴이 편해지며 거친 질감의 의자에 몸을 묻는 여유까지 부린다. 그리고 몇 명이 비슷하게 행동하는 것을, 김현이 뒤쪽에서 눈여겨 보았다.
종이배 덕에 모가디슈에 빠르게 도착했다.
불타고 있었다, 세상이.
솟구치는 불길 위로 적색 구름이 어지럽게 떠다닌다. 그 중심에 그 존재가 보인다. 징그러운 박쥐 날개 두 쌍을 활짝 펼치고서 시민들을 학살하는 악마, 지옥 화염이.
어느새 정지한 종이배.
김현은 갑판 위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뭐, 뭐냐?]
무엇을 느낀 것일까.
지옥 화염이 몸을 떨며 이쪽을 돌아본다. 공간을 격하고 김현과 지옥 화염의 눈이 마주쳤다.
김현의 입 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혼왕 발현.
그것으로 끝이 났다.
지옥 화염이 몸을 떨더니 훌쩍 날아와 종이배 위에 올라탄다.
"어딜!"
사브리나가 놀라 성혼을 발현하려 하나 지옥 화염의 행동이 더 빨랐다.
김현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것이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주인님?"
사브리나가 혼란에 찬 눈으로 김현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