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19화 (119/200)

# 119

처단 –3-

"왜 그랬지?"

"뭐, 뭘 말이오?"

"하은이."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참모총장이 생각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머릿속에서 명멸하는 여러 상념들도 함께.

당혹감, 체념, 분노......

다양한 감정이 읽혔다.

끝내 참모총장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만다.

"벌써 몇 달이나 지났건만,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나 봅니다."

"당신 같았으면 어땠을까? 당신 손녀가 하은이랑 또래로 아는데."

"우리, 가족은 건드리지 맙시다."

"아, 생각해 보니 좋은 처벌이네. 내 조카를 건드렸으니 당신도 당신 가족을 잃어야 마땅하지. 어떻게 생각해?"

가소롭다는 듯 웃자 참모총장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그때 찬성하는 게 아니었는데.'

말을 잇지 못하는 걸 보면 최소한 양심의 가책은 느끼는 모양.

옆에 있던 부관이 권총을 빼어들었다.

"슈퍼 김, 돌아가시오. 여긴 당신이 올 곳이 아니......"

그러나 곧 합죽이가 된다.

권총을 제 자리로 돌리고는 자기 자리에 앉아 가만히 잠이 든 것. 참모총장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죽인 거요?"

"아니. 당사자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잠깐 재워뒀어. 누구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푹 자게 해줄게."

김현은 참모총장을 직시했다.

"그건 그렇고, 혼자냐?"

그 말에 참모총장의 눈이 흔들린다.

혼자냐는 물음에서 자신만 희생양 삼아 사태를 끝내려고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 다 죽일 수는 없겠지.'

자신도 중요한 인물이지만, 납치 사건에 관여했던 인물들 모두 미국의 중추를 지탱하고 있으니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 혼자요. 내가 모든 일을 기획했고 실행했소. 부디 나 하나로 끝내주시오."

"그걸 묻는 게 아닌데. 아홉 명 명단은 이미 확보했어."

"그럼 왜 굳이 묻는 거요?"

"하나하나 찾아가기 귀찮아서. 당신이 여기로 다 불러주면 어떨까 했지."

"하! 내가 그런 짓을 할 것 같소? 원한다면 내 정신을 지배해서 한 번 해보시오. 어차피 그 작자들은 내가 Mr. 김, 당신과 대면한 순간 날 죽었다고 생각할 테니."

하긴 머리가 있는 자들이라면 그렇겠지.

대화는 여기서 끝.

천천히 금속 의수를 들어올렸다.

참모총장이 눈을 부릅뜬다. 죽을 때 죽더라도 무릎 꿇지는 않겠다는 태도.

"슈퍼 김."

한 장교가 나직이 김현을 불렀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사적 제제는 옳지 않습니다. 슈퍼 김도 미국의 시민이니, 연방 법원에 고소하여 법적인 절차를 밟는 게 어떻겠습니까?"

상황을 모르는, 지극히 미국 장교다운 지적.

무시하려다가 간단히 알려주었다.

"예전에 내 조카가 납치당했던 건 알고 있겠지? 그 수뇌 중 하나가 바로 저 자다."

"하......"

당시의 사건은 유명했다. 막 미국인이 된, 펜타곤을 비롯해 침식 사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김현에게 벌어진 일이었으니.

장교의 눈에 경멸의 빛이 스쳤다. 참모총장이 우울한 얼굴이 되어 머리를 떨어뜨린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사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잘못 되었습니다. 증거를 확보하고 법원에 고소하십시오. 미국의 법은 범죄자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완벽한 정론.

그러나 김현은 머리를 흔들었다.

"너무 오래 걸려."

"네?"

"너무 오래 걸린다고. 1심에 2심, 3심까지 가면 몇 년이나 걸릴까? 2년? 3년?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다. 나는 즉각적이고 빠른 복수를 원해."

복수......

장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복수라니요, 슈퍼 김. 슈퍼 김은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법치와 인권의 가치를 무시하는 겁니까?"

"그래."

"어떻게, 미국의 영웅이라는 자가!"

"미국의 영웅이라...... 허울 좋은 소리지."

화장하듯 덧칠하고 있던 껍데기를 벗을 때가 왔다.

"난 영웅이 아니야. 그냥 저항자이고, 투사일 뿐이지. 이제는 날 미국의 영웅이라느니, 슈퍼 김이라느니 하면서 부르지 마라."

손을 들어올린다. 핏빛 손에 유명흔이 깃들며 투명한 혈광을 줄기줄기 뿌려댔다.

"정말로 인류의 적이 되려는 겁니까!"

장교가 피를 토하듯 소리친다.

동경하던 첫사랑의 민낯을 본, 그래서 좌절하고 실망한 남자의 표상이 그곳에 서 있었다.

"지구를 정복하고 새 시대의 왕이라도 되어야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우리의 영웅으로 돌아오세요!"

새 시대의 왕?

불가능한 소리.

김현은 입술을 비틀며 왼손을 뻗었다. 수정처럼 번들거리는 손가락이 심장을 관통하자 참모총장이 순간 비틀거리며 피를 토했다.

눈동자가 급격히 수축했다. 거의 일점으로 변했다가 재차 확장된다. 그리고 몸을 꼿꼿이 세워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흠......"

김현은 손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몸을 영체로 바꾸어 지하 벙커에서 벗어났다.

"참모총장님!"

"괜찮으십니까!"

살려두었냐고?

천만에.

참모총장은 스스로 자신의 제복에 주렁주렁 달린 훈장과 계급장을 모조리 떼어냈다. 지하 벙커의 잠금 장치를 해제하고는 밖으로 나와서 펜타곤 밖을 향해 걸어가며 외치기 시작했다.

"나는 스물한 살 때 첫 살인을 했다! 테러범이 상대였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단, 테러범이 안고 있던 갓난아기가 함께 폭사한 것만은 잊지 못한다!"

"사단장일 때 부대 내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다. 나는 그걸 묻었다! 진급하기 직전이었으니까!"

"몇 달 전, 나는 친우들과 공모하여 한 어린아이를 납치하게 했다. 그 보호자가 너무 뻣뻣해서 조금 경고를 해야 되지 싶었거든! 그 보호자의 이름은 김현, 흔히 말하는 슈퍼 김이다!"

평생을 두고 간직한 비밀들.

동시에 참모총장의 몸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답답했는지 제복을 모두 벗어던진 다음이다. 피부와 털이 엉겨 붙고, 살과 뼈가 녹으며 흉측한 형상을 자아낸다.

"참모총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비상이다! 비상! 911 불러!"

힘은 어찌나 센지 몰랐다.

장정들이 달라붙어도, 각성자들이 제지하려고 해도 무소용. 펜타곤 앞의 대로까지 걸어 나가 쩌렁쩌렁 자기 죄를 외쳐댔다.

거기에는 참모총장의 개인사만 아니라 미국의 비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암살, 폭파, 공작......

일국의 참모총장이다. 거기다 미국이라면 누가 뭐래도 지구 유일의 초강대국. 그곳의 참모총장이 아는 비밀이 얼마나 많을까?

시민들이 놀라 몸을 떨고, 두려워 입을 다물면서도 한편으로는 분노했다.

어느새 김현이 천 자락을 펼치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조금은 상황을 파악한 시민들이 복잡한 눈빛을 보낸다.

"슈퍼 김......"

김현은 전광석화와 같았다.

다음 목표, CIA 본부에 도착했다.

어느 정도 방비 태세는 되어 있었지만 펜타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가볍게 제압하여 CIA 국장과 대면했다.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놓아버린 듯한 CIA 국장.

담배를 뻐끔뻐끔 피더니 힘 빠진 목소리로 묻는다.

"어째서 지금입니까?"

"무슨 소리지?"

"슈퍼 김이라면 절 언제든 끝장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까지 미룬 거지요? 또, 왜 하필 지금 미국을 떠나는 겁니까? 미국은 지금도 슈퍼 김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내 조카를 납치했어?"

"실수였지요, 명백한 판단 실수. 참모총장의 의견을 따랐어야 했는데......"

힘없이 웃는 국장.

국장이야말로 주범이었다. 미국 내 강경파 중에서도 초강경파. 다른 이들을 충동질하여 납치 사건을 연출하자고 한 것도 그였다.

김현이 그 자리에서 공항 셧다운을 요구해가며 쫓은 까닭에 실패했지만 성공했다면 김현의 운신 폭이 줄고, 미국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을 것이다.

"몰랐거든."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변.

"몰랐다니요?"

"내가 정신 계열 성혼을 얻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래서 누가 내 조카를 납치했는지 정확히는 몰랐지."

"핫, 허허...... 전 슈퍼 김이 모든 걸 다 아는지 알았습니다."

"나라고 신은 아니라서."

"하하하! 하긴 슈퍼 김도 인간이지요. 그럼, 왜 하필 지금입니까?"

"기회가 왔고, 미국도 충분히 강해졌으니까."

"강해졌다?"

"이번에 5성 각성자를 열다섯이나 동원했잖아. 정신 계열 방어 설비 수준도 제법이었고...... 지금처럼만 해. 그러면 돼."

격려하는 듯한 말투.

국장이 이해가 안 된다는 눈으로 김현을 본다.

뭐, 김현도 굳이 이해시킬 생각은 없었다. 백혈탑이라는 거점을 얻은 순간, 굳이 국가에 메여 있을 이유가 없어졌으니.

천천히 다가간다.

국장이 양 팔을 좌우로 벌렸다.

"난 그냥 끝내주시오. 난 미국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 참모총장처럼 되어서는 안 되오."

"싫어."

단 칼에 거절.

심장을 찌르기 전 몸을 한 번 훑어 내린다.

어금니 사이에 숨겨든 청산가리 캡슐, 심장에 설치한 자동 심장 정지 장치, 발바닥에 삽입된 신경 독 패치가 모조리 제거된다.

국장의 얼굴이 거무튀튀한 빛으로 변했다.

"자살하지 마. 죽을 때까지 네 죄를 고하고 죽어."

"빌어먹을! 이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그런 거요?"

"난 은혜를 입은 기억이 없는데? 특히 너한테는. 넌 미국이 아냐, 이 망상병 환자야."

손가락을 쿡, 하고 찌른다.

국장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참모총장이 그러했듯 옷을 벗어 던지며 건물 밖으로 나아갔다.

CIA 본부를 벗어나기 직전, 김현은 절묘하게 숨겨진 비밀 공간에다가 유명흔을 흘려 넣었다.

"시간 됐...... 으흠."

안에 숨어 있던 5성 각성자가 비틀거리다가 쓰러진다.

과연 CIA 국장이라고 할까.

자살 장치를 훼손할 것을 예측하고 여기 각성자를 숨겨둔 것이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자신을 죽이라고.

제법 담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현에게는 관심 밖. 고위 각성자라면 살려두는 걸 고려해 보겠으나 그것도 아니니 치워버리는 게 옳다.

CIA 국장 말고도 일곱 명이 더 있었다. 김현은 바쁘게 미국 전역을 누볐다.

세 명은 미국 밖으로 도망갔다.

남아메리카, 유럽, 중앙아시아......

'멀기도 멀다.'

비행기를 타고 가도 몇 시간씩 걸리는 거리.

그걸 온전히 혼력만으로 움직이는 천 자락 비행기를 타니 꽤 고되었다. 지치지 않는 혼종인 김현으로서도 조금은 피로를 느낄 정도.

"슈퍼 김께서 원하신다면 특급 비행기를 이용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놈의 위치는 아십니까? 제가 최신 정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접근해 온다.

미국과 대치 중인, 사이가 썩 좋지 못한 국가들.

개중에는 무장 강경 테러 단체도 있었다. 김현의 정책이 썩 마음에 들진 않을 텐데 그러는 걸 보면 성혼과 무력이 좋긴 좋다.

"됐어. 내가 알아서 하지. 아, 그리고 슈퍼 김이라고 부르지 마. 그 별명 안 좋아하니까."

"그럼 뭐라고 부르지요?"

"인류의 적이라고 하던가. 아니면 빌런 김이라고 하던가."

"그......"

둘 다 좋지는 않은 별명.

접촉해 온 자들이 기이하다는 눈으로 김현을 보다가 사라졌다.

그리하여 약 1주일 후.

김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도망쳤던 여자를 따라잡았다.

"나도 죽이려고? 너는 여자에 대한 배려도 없어?"

"그런 거 없어."

투명한 손으로 여자의 가슴을 찔렀다.

여자의 눈에서 급격히 빛이 사라진다. 다른 이들과 똑같이 옷을 벗어던지며 생각나는 것들을 외치기 시작했다.

여자 또한 미국 정보기관 요원. 블랙 요원에게 접근하여 접촉했고 회유한 당사자였다. 지위는 떨어져도 젊음과 미모를 미끼로 일선에서 행동했던 것.

기자들이 다가와 사진을 찍는다. 거의 대부분 여자가 외치는 말을 녹음하고 있었다.

눈부신 나신?

그건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살이 녹아내리며 흉측하게 변했다. 남자든 여자든 썩고 나면 고깃덩이에 불과한 법.

'끝났다.'

김현은 피로감을 느끼며 물러났다.

기자들이 몰려온다.

"슈퍼 김! 미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번 일을 계기로 미국이 그 동안 벌였던 추악한 일이 모두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미국이야말로 악의 축이라고 할 만 합니다. 슈퍼 김!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슈퍼 김께서 미국에 저항하는 게릴라를 육성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하여간에......

아프가니스탄이 미국에 당한 게 많아서일까? 온갖 유언비어가 떠돌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 말 없이 천 자락을 펼쳐 돌아간다.

곧 시민 투표가 있을 모가디슈로.

모가디슈에 도착한 다음에야 새삼 깨달았다. 이번에 자신이 벌인 일의 여파를.

폭풍이 되어 세상을 휩쓸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