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두 번째 거래 –1-
미국이 1명에게 털렸다!
수십만 명에 이르는 각성자도, 세계 최고의 군대도 효과가 없었다. 김현의 혼멸 앞에 정신 제압되어 속수무책으로 꺾였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미국의 비밀이 수도 없이 폭로되었으니......
존 키리아쿠의 CIA 물고문 폭로?
존 스노든의 NSA 불법 감청 폭로?
그때와는 상대도 안 되었다. 미국은 그 강대한 힘만큼 지닌 어둠도 짙었다. 지금은 국제 사회 전체에게 호되게 비난받고 있었다.
"동쪽의 친구가 크게 한 건을 했구나."
차오 회장은 신문을 보다가 말했다.
5성 각성자, 차오웨이가 눈을 반짝였다.
"김 회장은 역시 김 회장입니다. 미국을 홀로 농락하다니...... 6성 각성자가 되면 인간을 벗어난다더니, 그게 사실인 모양입니다."
"흠, 너도 6성 각성자가 되고 싶으냐?"
"당연하지요. 아버지, 저길 보십시오. 아버지는 여기서 다 나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차오웨이가 통유리창 너머를 가리켰다. 차오 회장은 베이징의 야경을 구경하며 흐뭇한 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아름답기로 따지면 상하이나 홍콩의 야경이 훨씬 더 아름답다. 하지만 높다란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는 베이징의 정경, 특히 자금성은 중국인들에게 어떤 흥취를 불러일으킨다.
가장 원초적인 힘.
권력.
챠오웨이가 5성 각성자가 된 것도 벌써 수개월 전. 그 사이 판도를 완벽하게 뒤집어 공산당의 권력을 거의 빼앗아 온 것이다.
한때는 황제라 불리던 중국의 국가 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 그는 이미 차오 회장에게 밀려났다. 차오웨이의 은밀한 폭력 행사 앞에 모든 것이 평정되고 만 것.
"웨이."
"예, 아버지."
"이제 중화에도 5성 각성자가 꽤 많지?"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주석이 몽니를 부리는구나. 네게 상무위원회의 자리를 하나 맡기겠다고 해놓고서 뒤로는 5성 각성자들을 규합하고 있다."
"저도 들었습니다."
"내 생각이다만, 너 또한 6성에 올라야 하지 싶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불과 몇 개월.
중국의 최상층에 군림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부자는 그 달콤한 과실을 손에서 놓을 생각이 없었다.
"모가디슈로 가거라. 달라는 건 뭐든지 줘라. 아비는 베이징에서 김 회장을 돕겠다."
"예, 아버지."
비슷한 대화가 세계 곳곳에서 있었다.
유럽에서, 중동에서,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에서......
***
"오셨습니까?"
사브리나가 김현을 맞이했다. 무엇을 하다 왔는지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항상 같은 일이지요."
사브리나가 살벌하게 한 번 웃는다. 혼멸 성혼 덕에 사브리나가 겪은 일을 알 수 있었다.
명예 살인.
김현이 자리를 비운 사이 모가디슈의 시민들 사이에서 일이 벌어진 것.
구조된 시민 중 어느 젊은 여성과 뉴욕의 노동자 사이에 눈이 맞았다. 사랑이 싹트고, 장래를 약속했는데 그걸 이교도와 음탕한 시선을 나눴다고 일족들이 여자를 죽여 버린 것이다.
남자는 부당하다고 고발했고, 사브리나는 김현의 지침대로 일을 처리했다.
주모자는 사형. 관련자는 추방.
어린 계집 주제에 건방지다며 소리치는 걸 처리하고 온 것 같았다.
"잘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
"예, 사령관님."
사브리나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령관님,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뭘?"
"여기는 킬리 섬과는 많은 것이 다릅니다. 사령관님께서 부재 중이실 때 일을 하는 것이 매우 힘듭니다."
"한스나 한 사장이 도와주지 않아?"
"제가 결정해야 할 게 너무 많습니다."
"하긴 네 업무가 과중하긴 하지."
킬리 섬에서는 괜찮았다. 자경단이라는 작은 조직만으로도 난민들을 통제하는 것은 가능했으니.
반면 모가디슈는?
그 인구만 50만이다. 작은 도시 국가 수준은 되었다. 비단 모가디슈만 아니라, 소말리아라는 국가 전체를 경영해야 하니 자경단이나 사브리나만으로는 택도 없이 부족하다.
"알았다. 사브리나, 너는 앞으로 자경단의 훈련과 양성, 괴물 사냥에만 집중해라. 다른 업무는 다른 조직을 만들어서 이관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사브리나가 비로소 편한 얼굴을 한다.
이제 중학생이나 될 작은 소녀.
시장이자 경찰서장, 판사, 검사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고 있었으니 힘에 부칠 만도 하지.
김현은 천천히 광장 중심으로 걸어 나갔다. 김현을 보고 시민들이 썰물처럼 빠졌다. 환호하며 손을 흔드는 이도, 두려워하며 눈길을 피하는 이도 있었다.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네.'
구원자를 보던 시선은 옅어졌다. 대신 조금은 경계하게 되었다. 겨우 며칠뿐이지만 김현의 통치 지침을 간접적으로나마 맛보게 되면서 김현을 받아들이면 무엇을 잃어야 할지 알게 되었으니까.
"어, 왔어?"
김애경이 손을 흔든다.
"삼촌!"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하은이.
흠칫 놀라 안아 들었다. 다행히 하은이를 안기 전 몸의 온도를 36.5도까지 올리는 것에 성공했다. 흡혈귀의 육체는 인간의 육체보다는 확연히 체온이 낮았던 것.
"삼촌! 선물은?"
"이런, 삼촌이 나쁜 사람들 때려주고 오느라 선물을 못 사왔네?"
"삼촌 나빠! 미워!"
선물이 없다고 하자 쪼르르 제 엄마한테 달려가 버린다.
김애경이 김현의 뒤를 넘겨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가지고 온다지 않았어?"
"그거?"
"백혈탑 말이야."
"아...... 혹시 하은이가 말한 게 백혈탑이야?"
"그런 셈이지. 하은이는 백혈탑에서 노는 거 좋아하잖아."
"그랬지. 지금 가지고 올 생각이야."
"지금?"
의문에 찬 눈길을 받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혼왕 성혼을 발동한다.
김현의 몸이 발끝부터 천천히 사라졌다.
흡혈귀의 힘은 잠들고 유령의 힘이 극도로 발현되는 것. 희끄무레한 윤곽만 남고 증발하자 힐끔힐끔 구경하던 이들이 놀라 비명을 지른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이마에 박혀 있던 보석뿐.
아니, 더 있었다.
유령의 흔적.
일렁이는 유명흔이 허공에 박제되어 음울한 웃음소리를 메아리처럼 흘려댔다.
[으후후후.]
이 기괴한 웃음은 김현이 내는 소리일까, 아니면 차원의 벽이 흔들리며 울부짖는 비명일까?
흔적이 확장된다.
얼룩처럼 번지고 번진다.
종국에는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틈이 아가리를 벌렸다. 시커먼 공허가, 찬란한 광명이 그 사이로 엿보였다.
그리고 틈을 비집고 나오는 한 구조물.
거대한 탑.
높이만 무려 50 킬로미터. 인간의 시야로는 감히 그 규모를 측정하기조차 불가능한 탑이다. 모가디슈의 시민들이 입을 벌리고 탑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틈이 사라졌다. 차원 흔적이 한 곳으로 뭉치며 다소 지친 얼굴을 한 김현이 나타난다.
"너...... 어떻게 한 거야?"
충격 받은 듯한 김애경.
"어? 별 것 아냐. 백혈탑은 원래 지구 차원이 아니라 이차원에 존재하는 거야. 그걸 내 몸을 기준으로 재각인시킨 거지. 내가 소환한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아, 난 또 뭐라고."
"그래도 대단하네요."
조금 전 광경은 이세희는 물론 김현 일행 전원이 나와 구경했다. 다들 감탄한 표정이었다.
"탑이다!"
가장 좋아한 것은 하은이.
당장 달려가서 문을 열려고 애쓴다. 김현은 짧게 한 번 웃고는 손짓을 했다. 백혈탑의 모든 문이 개방되며 음침한 기운이 안개처럼 밀려 나왔다.
"만세!"
하은이가 안으로 사라졌으나 걱정되지는 않는다. 백혈탑주로서, 하은이에게 공급되는 유명의 힘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있으니까.
"한스 사장님."
"예, 사령관님."
"백혈탑 개조는 끝났습니다. 1층부터 10층까지 농장으로 개조했으니까 거기 관리를 맡아주세요."
"예? 예전에는 다른 구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지난 며칠, 납치범들만 쫓아다닌 게 아니어서요."
"아......"
"한 사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11층부터 20층까지 공장이에요. 성혼 공방이 아니라, 평범한 공산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곳입니다."
"공방 사장 겸 공장장이라는 거지요? 예, 기꺼이 맡겠습니다."
기존의 시설은 21층 위로 쭉 올리고 기존보다 더 넓은 공간을 할당했다. 백혈탑은 그러고도 남을 만큼 그 영역이 광대했으니까.
한스가 김현에게 따라붙더니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한다.
"저, 사령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실은 사령관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여론이 나빠졌습니다."
원래는 압도적인 찬성을 예상했으나 지금은 비등비등하다고.
김현은 짧게 비웃었다.
"원래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법이지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UN에서 선거 관리 위원회가 도착하는 대로 투표 시작합니다. 공정하게, 민주적인 절차대로 시행하세요. 반대가 많으면 미련 없이 물러납니다."
한스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김현을 본다.
소말리아를 얻으려고 한 일이 꽤 많잖아? 당장 미국의 요인들을 고해 성사시키며 죽인 것도 그렇고.
그런 상황에서 시민들이 반대하면 그냥 물러난다? 언뜻 생각하면 이해가 되질 않는다.
김현은 그저 빙긋 웃었다.
정말 아쉬운 건 모가디슈의 시민들이지 자신이 아니다. 각성자 자원을 얻을 방법은 어디에나 있다.
"꾸어어엉!"
제법 가까운 곳에서 괴물의 포효가 들렸다.
"오, 4성 괴물이네요. 몸 좀 풀고 올게요."
서경태가 잘 됐다는 듯 몸을 일으킨다.
하늘에 한 줄기 검은 선이 그어졌다.
전화가 걸려온 것은 불과 30초 정도가 지난 다음이었다. 몇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괴물 시체가 있으니 가져와서 재활용할 부위는 재활용하고, 쓸모없는 부위는 불사르라는 것이다.
"세상에......"
"끔찍하기도 하지."
초대형 트럭 하나로도 모자라서 자경단이 따라가 몇 토막을 쳤다. 괴물 시체가 트럭에 실려 줄줄이 들어오자 시민들이 멀찍이 구경했다.
그들의 눈에 고뇌가 어린다.
시민 투표. 과연 자유를 대가로 생명을 보장받아야 하는가?
"시발, 어린 계집 따위에게......"
하지만 처음부터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이들에게는 집도 재산도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비루한 몸뚱이 하나가 전부.
누군가 화답하듯이 말을 받았다.
"그럼 그쪽도 자경단 지원해서 각성자 되던가. 막말로 그 계집이 우리보다 나은 게 초능력 말고 뭐가 있어?"
"흥."
나직이 코웃음을 친다.
자경단 지원은 많으면서도 적었다. 수장이 하필이면 사브리나이기 때문이다. 만약의 일이지만 납득 할 수 있는 수준의 남성이 수장인 단체가 탄생한다면 지원자 수가 가히 폭발적일 터.
결과적으로, 한스가 제기한 민심 이반은 시민 투표에는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훗날 김현의 지지율에는 영향이 있을지 몰라도.
다음날, 한스가 찾아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뉴욕에서 물자 공급이 끊겼습니다."
"그래요? 그럼 대한민국을 통해 받도록 하죠. 연차도에서 목포항이 가까우니 거기에서 실어 나르세요. 정 힘들면 이차원 농장의 가동을 서두르겠습니다."
"그리고 미국 내의 거점을 쓰지 못하게 됐습니다."
"왜요?"
"미국 정부에서 반납 명령을 내려서요."
애초에 김현이 미국에서 쓰던 거점 모두가 미국 정부의 소유다. 일행이 거주하던 펜트하우스, 가족이 쓰던 아파트, 성혼 거래소, 성혼 공방, 훈련소, 이 모든 것들이.
"전이 공간은 제가 거두도록 하지요. 미국 정부가 양심이 있다면 그것까지 탐내진 않을 겁니다."
"예. 그래서 미국 노동자들은 돌려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처리하시고, 남아서 봉사하겠다고 하는 분은 그렇게 하라고 하세요. 나중에 제가 이집트에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끊어 드리겠습니다."
"예, 사령관님."
이때쯤 되어 UN에서 선거 관리 위원회 관련 답변이 왔다.
불가.
역사의 퇴보이며, 인류의 후퇴를 상징할 시민 투표를 도울 수는 없다는 대답이었다.
'속 좁은 것들.'
김현은 속으로 비웃었다.
누가 그랬는지 빤히 짐작이 갔다.
누구긴 누구겠나. 이번에 된통 당한 미국 짓이겠지. 김현에게 입은 손실을 거의 돈으로 따질 수도 없고, 뭐든지 김현의 발목을 붙잡고 싶은 심정일 테니.
뭐 어때?
대안은 얼마든지 있는데.
"손님들 들어오라고 하세요."
허름한 천막 문이 열리고, 각성자들이 한 명씩 입장한다.
다양한 국적.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스페인, 멕시코, 남아프리카 공화국, 미국.
과거에는 자신의 고객이었고, 미래에는 자신의 지지자가 될 그들을 푸근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래, 어째서 절 찾아오신 겁니까?"
다 알고 있으면서도 뻔한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