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두 번째 거래 –2-
모두 눈치만 본다.
실은 서로 안면이 있었다. 김현에게 산 5성 성혼으로 각자의 국가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였으니 모를 리가 없지. 비공식적으로 만난 적도 몇 번 있고.
가장 큰 세력을 일군 차오웨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기에 앞서, 김 사령관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회장이라고 부르더니 이곳에 와서는 호칭을 정정한 모양이다.
"말씀하세요."
"벌써 몇 달 전이지요? 5성 등급 성혼을 팔아주셔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한 단계 위로 올라서는 방법도 가르쳐주셨고요."
가볍게 성혼을 발현한다.
주작의 불, 주작의 하늘, 주작의 칼.
오른손에는 홍옥 같은 보석 검이, 왼손에는 시뻘건 불꽃이, 등에는 화려한 날개가 자라난다. 그러다 세 개의 성혼이 서로 반응하며 기이한 음색을 토해냈다.
[고오오오.]
창공을 노니는 신수의 울부짖음.
차오웨이가 성혼을 거두고는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여기까지였습니다. 성혼의 조합...... 쉽지 않았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 세 성혼을 폭주하듯 공명시켜 힘을 한 차례 뿌리는 게 전부였지요."
김현은 짧게 감탄을 토했다.
"그러셨습니까? 잘 하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는데도 그게 고작이었습니다."
"세 성혼이 결합되면 최상급 성혼, 주작이 됩니다. 주작은 5성 등급으로는 제대로 발현하기 힘들지요. 그것을 온전히 깨닫는다면 6성이 됩니다."
"그, 그렇습니까?"
차오웨이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본인이 짐작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사실이다. 차오웨이는 6성이 되어 인간을 벗어나야만 주작 성혼을 온전히 깨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현을 찾아왔는데, 김현의 말을 듣고 보니 선후가 뒤바뀐 것 아닌가.
사실은 차오웨이의 짐작이 맞다. 그걸 일깨우기 전, 김현은 다른 각성자들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다들 성혼 통합 직전이네요."
"그게 보입니까?"
"예. 제 눈에는요."
다들 야심가이자 능력자였다. 그러니 경매로 얻은 성혼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것. 조합식에서 모자란 성혼은 김현이 슬쩍 언질을 주었다. 최상급 성혼의 재료가 아닌 성혼을 원해도 비슷했고.
사실 뒷거래도 몇 번 했다. 이들 중 몇몇은 아직도 외상을 갚는 중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빨리 쫓아온 것이기도 했다. 김현과의 거래는 운명을 바꾼다는 사실을 아니까.
"최상급 성혼을 통합하면 강력한 힘이 발생합니다. 그 힘이 영혼과 육체를 자극하고, 그걸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면 6성 각성자가 되지요."
담담히 털어놓는 비밀.
미국의 각성자가 침을 삼키고는 물었다.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힘을 견디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소멸합니다, 완전히. 뭐, 인간의 영혼은 보기보다 굳센 편이라 영혼까지 소멸되는 경우는 드뭅니다만."
"죽는단 말 아닙니까!"
"그렇지요."
싸늘한 바람이 한 차례 천막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현은 미국의 각성자, IT 업계의 신성이었고 지금은 5성 각성자로 이름을 날리는 제임스 브루거에게 물었다.
"그런데 브루거 씨는 저와 거래해도 되는 겁니까? 지금 미국에선 절 인류의 적이라고 부르던데요."
"주위에서 말리기는 했습니다만 뭐, 어떻습니까? 그 인간들이 제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까짓 거 욕 좀 먹지요."
20대 중반에 이미 수조 원의 부자가 된 사람답게 화통하기 그지없었다. 김현은 적당히 머리를 끄덕이고 계속 설명했다.
"성공해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영혼은 견디는데 육체가 견디질 못하거든요. 따라서 영격은 높아지되 육체는 소멸하여, 죽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가 됩니다."
"허, 이런......"
"맙소사."
"여기 계시는 분들. 제가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확실한 대비책이 없이는 성혼 조합과 각성을 시도하지 마세요. 성공해도 실패해도 육체가 소멸하는 건 똑같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자, 무함마드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눈치를 보니 곧 시도하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물음에 김현은 빙긋이 웃었다.
지금 풀어놓는 얘기도 가치가 엄청나다. 원 역사에서는 인류가 수많은 희생을 치러가며 알아냈으니.
하지만 정보를 풀 때 푸는 것도 중요하다. 역사의 흐름이 가속하여 훨씬 빠르게 흐르는 지금은 더더욱 그렇지.
"4가지 방법 중 하나를 써야 합니다."
일행에게 했던 설명을 똑같이 반복.
각성자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설명을 들었다.
"거기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면, 저희에게 6성 성혼을 판매하실 의향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있지요, 가격만 맞으면."
"얼마면 되겠습니까?"
"글쎄요. 다들 생각하신 게 있을 테니 제시해 보시지요. 아, 6성은 5성처럼 달랑 성혼만 판매하진 않을 겁니다."
"그러면......"
"최소한 6성 성혼 다섯 개, 그리고 육체의 재료로 삼을 살아 있는 5성 외계종 네댓 마리를 함께 판매하고 승급 장소도 함께 제공하지요."
"헙!"
"단, 반드시 승급한다는 보장은 못 합니다. 6성 승급은 완전히 인간을 벗어나는 거예요. 차오 씨는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우화등선이라는 말, 압니까?"
"들어 봤습니다. 인간이 육체를 벗고 신선이 되는 거지요."
"6성 승급도 비슷합니다. 그만큼 어려워요. 반반 가능성도 높이 잡은 겁니다. 도전하시겠다면 각오를 하고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잠시 아무도 말이 없었다.
차오웨이가 주먹을 꾹 쥐고는 묻는다.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네."
"김 사령관님 동료 중에서는 지금 몇 분이나 6성에 도전하셨습니까?"
"이미 둘은 됐지요. 한 명은 준비 중이고, 둘은 미정입니다."
"역시...... 또, 시간이 지나면 계약자 중에서도 6성 각성자가 나오겠지요?"
계약자.
외계종의 후원 계약을 받아들인 자를 뜻하는 명칭이, 지금은 지구 전체에 정착된 다음이었다.
"당연하지요."
"후우, 그럼 저도 도전하겠습니다. 기호지세이니 어쩔 수 없지요. 최후의 승리를 따낼 때까지, 전 멈추지 않을 겁니다."
차오웨이가 불똥 같은 눈동자를 빛냈다.
과연 차오 박사의 아버지.
노회한 차오 회장과는 다르게, 조금은 순수하면서 승부사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무함마드 왕자가 입맛을 다셨다.
"듣고 보니 맞는 말입니다. 나 또한 왕위가 코앞에 있는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요. 도전하겠습니다."
"저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도전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김현이 그들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래서, 가격은 어떻게 지불할 생각입니까?"
그게 가장 난감했다.
차오웨이가 망설이다가 먼저 말했다.
"본래 저희는 티베트의 절반을 떼어드리려고 했습니다만......"
"티베트 절반이요? 설마, 반으로 뚝 잘라서 서쪽 절반?"
"그게 아니면 위구르에서도 일부를 떼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거긴 빈 쭉정이 아닙니까. 인구도 거의 없는 곳을 6성 승급 대가로 내놓는 건 너무하지요. 6성 성혼 하나만 파는 것도 아니고 최소 다섯 개에 장소, 지식까지 나눠드리는 겁니다!"
차오웨이가 쩔쩔매며 머리를 숙였다. 6성 성혼 하나만 있으면 될 줄 알았지, 이렇게 많이 필요한 줄은 몰랐다.
무함마드 왕자도 머리를 저었다.
"이것 참, 나도 아람코의 내 지분을 양도하려고 했지만 그것으로는 택도 없겠습니다."
아람코.
사우디 아라비아의 석유 회사.
현재는 상장되었고, 성혼 사냥에도 손을 대어 기업 가치가 당초보다 더 올라갔다. 대략 2.5조 달러로 평가를 받는다.
"그러게 말입니다......"
제임스도 준비해 온 걸 말도 못 꺼냈다.
"이렇게 하시죠."
김현은 깍지를 끼고는 턱을 그 위에 괴었다. 각성자들을 찬찬히 보다가 미리 생각해둔 조건을 꺼낸다.
"아시다시피, 소말리아는 거의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
"알지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다들 눈치 채신 것처럼, 제가 한 나라를 경영하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습니다."
인류 저항군 사령관 시절에는 아무래도 좋았다. 저항군에 남은 최후의 8성 각성자라는 것만으로도 제 몫을 다했으니까. 저항군 운영이나 보급은 부사령관과 각 담당 부장들에게 맡겼다.
그러던 사람이 22세기보다 훨씬 복잡한 21세기의 국가를 운영한다? 아무리 괴물들에게 짓밟혀 원시 시대로 회귀했다고 해도?
어불성설.
반면 눈앞의 사람들은 대부분 한 국가 혹은 대기업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힘을 빌리면 도시 국가 수준으로 전락한 소말리아를 통치하는 건 쉽겠지.
"그 정도는 쉽습니다. 제 아래 있는 인재들을 빌려드리지요."
"저도 기꺼이 보내드리겠습니다."
"설마, 이게 다는 아니겠지요?"
"당연한 말씀을."
두 번째 조건.
연차도나 킬리 섬처럼, 각자 100개씩 섬 혹은 산 하나를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제임스가 눈을 반짝였다.
"할양이 아니라 양도입니까?"
"예. 대신 소유권이 불안정해서는 안 되겠지요. 각국 정부에 의해 몰수되는 일이 생기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그 정도는 간단하죠."
러시아의 변호사 출신 젊은 정치인, 엘레나 바라노프도 짧게 한숨을 쉬었다.
"휴, 요즘 우리 차르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은데......"
"그래도 방사능 홍차 드시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요."
현재 야당 정치인 중에서는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인물. 방사능이 든 홍차를 마셨다가 감추고 있던 재생 계열 성혼으로 극복한 이야기는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그녀가 열띤 눈으로 김현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마련해 볼게요. 서로 떨어져 있는 편이 좋지요?"
"맞습니다."
"흠, 꼭 우리 사우디아라비아 안이 아니어도 됩니까?"
"예. 거리가 멀면 멀수록 좋으니까요."
그리고 마지막 조건.
개인 당 5성 성혼 100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빈민 출신 각성자, 볼드 마이어가 기함을 했다.
"5성 성혼 100개라고요?"
"싼 겁니다. 사실 지금 경매를 하면 그걸 주고도 6성 성혼 하나를 사려는 사람이 있을 걸요? 그건 사기나 다름이 없어서 그렇게 못 하는 거죠."
"아무리 그래도 100개는......"
"대신 4성 성혼으로도, 3성 성혼으로도 받지요."
환율은 20대 1을 적용하겠지만.
각성자들의 눈이 빙그르르 돌아간다.
1성 성혼으로 따지면 무려 1600만 개다. 하지만 1성부터 5성까지 잘 섞으면 되지 싶다. 최근에는 4성 떠돌이가 자주 출현하고, 5성 떠돌이도 곧잘 나오는 편이니.
"언제까지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1주일 뒤로 하지요. 저도 준비해야 하니."
"알겠습니다. 휴우, 1600만 개, 1600만 개라......"
이 사람들은 비싸다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6성 등급으로의 안정적인 승급 기회란, 영혼을 파는 것으로도 모자라 영원토록 노예가 되어 봉사해도 상환이 불가능했으니.
김현은 속으로 그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열심히 해줘. 인류의 희망들.'
인류의 희망이 이러한 야심가들이라는 게 조금은 안타깝지만, 역사의 많은 부분이 이런 이들에 의해 발전한 것도 사실이니까.
"손님 왔다며?"
김애경이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시선이 온통 집중된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위압감을 풍기는 존재. 키도 다른 사람들보다 훌쩍 크고 골격 자체가 두껍다. 그런데 일반적인 키 큰 거인들처럼 우락부락하진 않고 오밀조밀한 인상을 풍기니 참 이율배반적이었다.
'저것이 환골탈태.'
'특이한 미녀로구나. 내 손에 넣어야겠다.'
각성자들의 머리에 스친 생각이었다.
"얘기 다 끝났어요? 저도 말씀 좀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이세희도 따라 들어왔다.
엘레나의 눈동자가 급격히 확장되었다.
"천사?"
"아하하, 그래 보여도 실은 아니에요."
어쩌면 동료, 혹은 그에 준하는 관계가 될 것 같으니 미리 경고를 해주고 싶었나 보다.
김현은 일부러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걸 보고 서경태와 피터, 에일리도 슬쩍 끼어들었다. 그들도 속으로는 고민이 많았던 모양.
한가로이 산책하며 저녁을 보냈다.
선거 관리 위원회 또한 이들에게 부탁했다. 다들 흔쾌히 받아들이고는 준비를 해주었다. 다국적 선거 관리 위원회가 설립되고, 채 며칠 만에 시민 투표 준비가 끝났다.
시민 투표는 각성자들의 승급 전날로 예정되었다.
승리는 김현의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예상 외로 막판까지 치열한 여론전이 벌어졌다.
"인류의 적, 김현은 흡혈귀요! 시민 여러분은 흡혈귀에게 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맡길 작정이오? 그랬다가는 매일 아침 한 명씩, 그 목덜미를 흡혈귀들에게 헌납하는 처지에 빠질 거요! 그때가 되어서나 후회하지 마시오!"
이것이 소말리아 대통령의 주장.
더구나 CNN, BBC 등 세계 유수의 언론이 모두 김현은 인류의 적 이론을 설파하고 있었다.
아침과 저녁에 한데 모여 TV를 보는 것이 모가디슈 이재민들의 유일한 낙.
TV를 보던 그들의 눈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