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22화 (122/200)

# 122

흡혈귀 –1-

"진짜일까?"

"에이, 설마."

"그래도 TV마다 저렇다고 하는데......"

"흡혈귀면 뭐 어때? 우리한테 이로운 괴물이면 그만이지."

"으, 그럼 넌 흡혈귀가 피 빨겠다고 하면 대줄 거야?"

"미쳤냐? 그렇다고 그 무능한 늙은이를 대통령으로 또 뽑을 수는 없잖아."

"빌어먹을. 정말 참신하고 우리를 위해 헌신할 사람은 어디 없나?"

여태 흔들리지 않던 지지율.

김현이 흡혈귀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는 꽤 흔들리고 있었다. 어딜 가나 시민들이 두셋씩 모여 수군거렸다.

'우스운 일이야.'

지금은 누구나 김현 일행 중 셋이 인간을 벗어났다는 걸 안다. 누군가 입에 올린 탈각이라는 용어가 새롭게 정착할 정도였다.

그런데 김애경이나 이세희는 동경에 찬 눈빛을 보내지만 김현에게는 두려워하고, 꺼림칙하다는 시선으로 본다.

흡혈귀.

그 이름 때문에.

하기야 인간은 본래 편견에 영향을 많이 받는 종족이다. 이건 원 역사에서도 등장했던 문제였다. 김애경이 최초에 6성 승급을 성공했을 때는 이미 인류의 절반 이상이 사멸해서 그때는 일단 살고 보자는 기조가 강하긴 했지만.

"사브리나."

"예, 사령관님."

"간담회를 열겠다. 한스 사장과 협력해서 준비해라. 이번 간담회는 모가디슈는 물론, 전 세계로 생중계할 것이다."

"예? 예!"

사브리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김현이 흡혈귀임을 알고도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던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

간담회라고 해도 별 것 아니다. 광장에 앉은뱅이 의자와 탁자를 놓고 다과를 준비한 게 전부.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배경처럼 쌓아올린 비닐 포장 치즈 케이크가 전부. 워낙 양이 많은 탓에 시민들에게 몇 번을 나눠주고도 아직도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 앉으면 돼?"

"어. 아무 데나 앉아."

참가하는 사람은 여섯 명.

김현과 김애경, 이세희가 한쪽에 앉았고 모가디슈에 상주하고 있던 기자 셋을 선정하여 반대편에 앉혔다.

CNN, BBC, 알자지라.

사실 셋 다 김현에게 비판적인 성향을 보이는 곳이다. CNN과 BBC는 최근 김현이 보이는 독재자적 행보 때문에, 알자지라는 김현의 반이슬람적 행보 때문에.

드론이 수십 기가 떴다. 한스가 구해온 간이 방송 장비를 통해 모가디슈 전역으로 송출된다. 아울러, 광통신망을 통해서 전 세계로 인터넷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

광장 주변에 빼곡하게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여기저기 설치된 TV로 충분히 시청이 가능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스피커를 통해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김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CNN 기자가 가장 먼저 치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사령관님. 먼저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제는 최근 모가디슈에 퍼진 흡혈귀 논란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꼭 그것만 질문해야 하나요?"

"일단은 그것 위주로 하지요.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된 다음에는 어떤 질문을 하셔도 좋습니다. 만약 미흡하다 생각하시면 여기 있는 세 분께는 따로 인터뷰 기회를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질문 드릴게요. 첫 번째, 사령관님께서는 흡혈귀가 맞습니까?"

처음부터 핵심을 찌른다.

차가운 침묵이 모가디슈 전역에 내려앉았다. 소곤거리는 소리, 기침하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쏴한 바람 소리와 풀벌레 우짖는 소리 뿐.

김현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기자의 눈을 주시하면서, 자신의 모든 정보를 공개했다.

"아!"

"어?"

세 기자들의 입에서 나란히 탄성이 터진다.

요즘은 기자들도 각성자여야 하는 모양. 약속이라도 한듯이 판독 혹은 투시 계열 성혼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 방벽을 쌓아놓는 평소라면 모를까, 정보를 공개하면 김현의 그 화려한 스펙을 모조리 읽는 것이다.

"대답이 됐습니까?"

넋 나간 듯한 그들에게 묻자, 그들이 정신 연결 성혼이나 장비로 뒤의 기자들에게 김현의 능력치를 송신하며 대답했다.

"설명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령관님의 종족 말입니다...... 처음 보는 종족인데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흡혈귀 같기도 하고, 유령 같기도 한데 정확히 감이 안 옵니다."

김현이 판독하면 '혼종'이라고 바로 보인다. 이것은 22세기에 정립된 개념을 따르니까. 하지만 다른 판독 계열과 투시 계열 각성자들은 모호한 어떤 느낌만을 받는다. 따라서 흡혈귀와 유령이 뒤섞인 듯한 존재감을 읽어낸 듯했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서 핏물이 죽죽 그어지며 글자와 숫자를 만든다.

바로 김현의 상태창.

모조리 한글이라 기자들이 짧은 탄식을 흘렸다. 그러자 뒤쪽에서 대기하던 이들이 금세 번역해서는 정신 연결을 통해 띄워준다. 아울러 생중계되던 TV에도 똑같이 영어 혹은 다른 언어로 번역해 자막을 새겼다.

김현이 자신의 능력치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순간이었다.

"모든 능력치 60......"

"60이면 어느 정도야?"

"몰라."

아는 사람만 안다. 60이면 흔히 말하는 신화 속 영웅조차 압도한다는 사실을. 다이아몬드도 맨 손으로 깨뜨리고, 땅을 박차는 것만으로 초음속에 진입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김현의 능력 창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다 두 가지 항목, 종족과 진영에 눈길이 갔다.

"혼종?"

"진영이 지구? 이거 외계종은 자기들 세계 이름 뜨는 거 아니었어?"

"일단은 지구 소속이라는 뜻이겠지."

"그나저나 혼종이 뭐야?"

다들 갖는 의문.

김현은 다리를 꼬며 입을 열었다.

"제 종족은 혼종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흡혈귀와 유령의 혼종이지요."

"앗!"

"그, 그럼 사령관님도 피를 빠십니까?"

"피를 빠느냐......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질문이네요. 따라서 제 대답도 이렇습니다. 그렇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합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대답이냐는 시선이 쏟아진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보충해주었다.

"흡혈귀들은 피에 포함된 타인의 생명을 갈취하여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종족이지요? 그런데 그것도 신화적 영역, 즉 6성으로 가면 조금 달라집니다."

"어떤 식으로요?"

"피를 빨 필요가 없어집니다. 다른 것에서도 충분히 힘을 보충할 수 있거든요. 진귀한 음식, 순수한 성혼, 혹은 혼력을 함유한 보석이나 대지...... 대부분의 신화 영역 흡혈귀는 단지 자신의 도락을 위해 흡혈하곤 합니다."

"그럼 사령관님께서도 본인의 쾌락을 위해 흡혈하실 수는 있겠네요."

"저는 조금 경유가 다르죠. 전 흡혈귀이되 흡혈귀가 아니니까."

"흡혈귀가 아니라고요?"

"전 혼종입니다. 흡혈귀의 본능은 유령의 본능이 억제하고, 유령의 본능은 흡혈귀의 본능이 억제하지요. 실제로, 전 혼종이 되고 1달이 넘게 지났습니다만 그동안 한 차례도 흡혈을 하지 않았습니다."

흡혈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많은 이들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는 한스는 물론 사브리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현이 짓궂은 웃음을 날렸다.

"사브리나, 태연한 척 하더니 걱정했나 봐? 왜, 네 피라도 빨 것 같았어?"

"아, 아닙니다!"

갑자기 카메라가 돌아오자 사브리나가 울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 얼굴이 귀여워 곳곳에서 얕은 웃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BBC의 기자가 물어온다.

"혼종이라는 것에 대해 더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제가 견문이 얕기는 합니다만 처음 듣는 종족입니다."

"그럴 겁니다. 몇 가지 지독한 우연이 겹쳐서 탄생한 종족이니까요."

김현은 담담하게 당시 상황에 대해 늘어놓았다.

최초의 유명계 원정. 함정. 그리고 도박......

외계 원정이 이뤄졌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놀랐다. 아직도 듣지 못한 이들이 많았던 것. 그리고 육왕의 출현에 몸서리를 치고, 대담한 도박으로 지구에 잔류했다는 사실에 경이를 금치 못했다.

듣기만 해서는 완전히 한 영웅의 일대기. 모가디슈 시민들의 눈에 어떤 일렁임이 일었다. 김현이라는 사람의 일면을 비로소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

하지만 BBC 기자는 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어...... 아주 멋진 이야기네요. 그런데 그게 진실이라는 보장은 있나요?"

[있지.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김현이니까.]

갑자기 말에 힘을 담아 말했다. 그러자 천둥치듯 목소리가 사방에서 웅웅거린다. 말에 담긴 힘이 BBC 기자를 두드리자 BBC 기자가 왈칵, 피를 뿜어냈다.

"의심하지 마시죠. 탈각한 각성자는 신화 영역, 혹은 영혼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에 힘이 실리고, 언령의 힘을 얻지요. 거짓말을 늘어놓는 자, 헛된 말로 감언이설 하는 자는 이 힘을 조금씩 잃게 됩니다."

말은 선량하지만 눈에는 차가운 칼날이 넘실거렸다. BBC 기자는 속으로 된통 걸렸구나, 하면서도 일단은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기자면 기자답게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같잖은 정치적 의도 따위 집어치우고."

"그, 그것이......"

"질문 있습니다."

알자지라 기자가 시기적절하게 손을 들었다.

"사령관님께서 본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도박을 했고, 그 도박이 성공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유명계와 불사계는 비슷한 죽음의 영역에 속했으되 그 방향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순이라고 하지요? 대한민국의 속담으로요."

"대한민국의 속담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의미는 통합니다. 그래서요?"

"엇, 그렇습니까? 음,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창과 방패처럼 완전히 다른 두 종족이 합쳐질 수가 있냐는 겁니다. 혼종이라니......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종족인데요. 안정성에 문제는 없습니까?"

과연 날카롭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저는 지금 기름과 물을 명천의 우물이라는 세제로 한데 뒤섞은 것과 비슷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기름과 물은 계속해서 커져 가는 중이고, 그걸 중화할 세제는 더 이상 공급되지 않고 있지요. 언젠가 균열이 커지고 파탄 날 때가 올 겁니다."

혼종, 즉 뒤섞인 존재.

이걸 완전히 합일한다면 영원을 손에 넣겠지만 어디 쉬운 일이라야지. 김현은 순순히 동의했다.

"음...... 그렇다면 사령관님의 존재가 지구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을까요? 아, 이건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게 아닙니다. 기자로서 질문 드리는 겁니다."

"기자님의 진심이 보이니 저도 답변을 하지요. 저는 이미 대비책을 세워 두었습니다. 만에 하나 그 대비책이 통하지 않아서, 제가 폭주하거나 한쪽 세계로 넘어갈 것 같으면 그 즉시 저 스스로 제 존재를 지우겠습니다."

"혀, 현아!"

자살하겠다는 폭탄선언.

김애경이 급히 김현의 손을 붙잡는다.

"미쳤어?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그렇게 하기로 했잖아."

"그, 그래도, 그건......"

"걱정하지 마.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니까. 내 계산으로는 0.01%도 가능성이 없어. 두고 봐. 내가 준비한 대로 될 테니."

김현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김애경의 얼굴은 어두워진다. 이상하게 김현이 이번 일에 대해 언급할 때면 항상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겠지? 잘 되겠지?'

지금까지 있었던 위기의 순간 모두, 김현이 구상한 대로 다 이루어졌으니까.

희생한 것은 조금씩 있었지.

왼팔, 외모, 종족......

과연 이번에는 무엇을 희생해야 할까?

사실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이때, 카메라가 김현과 김애경을 동시에 비추었다.

태연자약한 김현, 그리고 수심에 가득 찬 김애경. 둘을 보면 김현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본인의 육체도, 영혼조차 버리면서까지 지구에 남고자 한 남자!

그 사람은 과연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했을까.

뻔하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겠지.

너무 규모가 크다.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배짱이고 그릇이다.

짝짝짝!

누군가 박수를 친다.

짝짝짝짝!

박수가 전염된다. 이제는 너 나 할 것 없이 두 손을 부르터라 때려댄다. 50만 시민들 모두가 일어서서, 목이 터져라 김현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그만."

아주 낮은 음성.

귀 바로 옆에서 외친 것처럼 뇌리에 박혀들었다. 손뼉 치는 소리가 썰물처럼 잦아들고 열기 가득한 침묵만이 모가디슈에 남았다.

"저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위대한 영웅이 아닙니다."

진솔한 고백.

"많은 분들께서 저를 철 지난 독재자, 시대의 찬탈자라고 부르시지요? 사실 그 말도 맞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하늘 너머까지 뻗어나간 백혈탑의 불길한 거체가 망막에 박힌다.

"저는 정의의 수호자도 아니고,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을 보살필 정도로 세심한 사람도 못 됩니다. 하지만 단 하나,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있습니다."

손가락을 뻗는다. 사람들의 시선이 김현의 손가락 끝에 모인다. 그들이 달을, 아니, 달을 창처럼 찌른 백혈탑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 괴물들로부터 인류를 지킬 겁니다. 그걸 위해선 무슨 짓이든 다 합니다. 정의를 내팽개치고, 평등을 무시하고, 자유를 억압해서라도 인류를 지킵니다. 제가 여러분께 보장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뿐입니다."

카메라를 주시한다. 그리하여 모가디슈의 시민 전원과 눈을 맞춘다.

입을 열어 딱 한 마디만을 외쳤다.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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