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흡혈귀 –2-
부오오오!
긴 뱃고동이 대지를 울린다. 하늘에 깔린 파란 안개가 뱃고동을 따라 흔들렸다. 그와 함께 육중한 화물선이 안개 위를 미끄러졌다.
"우와!"
"또 한 척 들어온다!"
허공에 펼쳐진 무한한 푸른 안개 공간.
거기서부터 이 배들이 달려 나온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푸른 안개는 흡사 아치형 다리처럼 미려한 곡선을 그린다. 그 끝에는 콘크리트를 쌓아 만든 탑 같은 게 있었다. 탑마다 대형 크레인이 자리를 잡고 화물선 위의 컨테이너를 빠르게 하역했다.
참으로 기이한 광경.
이곳 모가디슈는 내륙도시다. 바다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허공에서 배가 튀어나오고, 푸른 안개를 바다처럼 써서 선착장을 재현해 놓았으니 신기하기도 했다.
지금도 모가디슈 시민들은 가끔씩 이곳, 관공서 앞 광장을 한 번씩 쳐다보곤 했다. 이계의 바다를 따다가 옮겨놓은 듯한 이 광경이 희한하고 낯설어서.
'잘 돌아가네.'
김현은 벤치에 앉아 잠깐의 휴식을 즐기며 생각했다.
모가디슈에 자재와 소모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은 후로 대한민국의 목포항이 때 아닌 호황기를 맞았다고 들었다. 수십 년 내내 쇠퇴하기만 하다가 아주 신바람이 났다나?
덩달아 대한민국의 주식 시장이 들썩이고 있었다. 미국 발 찬바람에 급속 냉각되었다가, 김현과의 관계가 좋아질 듯하니 투자 심리가 조금씩 녹는 것이다.
"야! 김현!"
김애경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쫓아왔다.
"바빠 죽겠는데 여기서 뭐해!"
"아, 왜. 누나가 알아서 하지."
"시민들이 뽑은 건 너지 내가 아니거든? 이거 비선 실세야, 비선 실세!"
"에이, 그래도 나보다는 누나가 낫겠지. 누나는 공무원 출신이잖아. 그것도 4급 공무원!"
"누가 들으면 내가 어디 군수라도 하다 온 줄 알겠다? 야, 4급이나 하던 사람보고 인구 50만짜리 시장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 그리고 난 입법 공무원이었지 행정 공무원도 아니었어!"
"어차피 공부는 똑같이 했잖아."
"이게?"
김애경의 눈이 날카로워지자 별 수 없이 일어났다.
얼마 전 있었던 시민 투표.
누구나 예상했듯이 김현이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찬성에만 무려 82%. 흡혈귀 논란에서 되레 반사 이익을 받은 듯했다.
대한민국에서 보급을 제대로 받기 위해 하늘에 안개 바다를 설치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김애경에게 모가디슈 시장직을 떠맡기듯이 임명하고 훌쩍 떠났다.
어디로?
세계 각지를 도는 중이다.
이번에 김현을 찾아왔던 각성자들. 그들이 부동산을 양도하는대로 안개 공간을 설치하고 성혼 농장을 만들었기 때문.
도합 1천 곳.
최초 연차도에 설치했던 성혼 농장 수준은 된다. 가만히 놔두어도 하루에 5성 성혼 1개를 생산한다. 일단 이것들 설치만 끝나면 1달에 1번씩 순회하기만 하면 되지.
1달이면 3만 개, 1년이면 36만 개!
5성 각성자 대군의 육성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어휴, 그럼 누나가 나 대신 성혼 농장 만들던가."
"그게 되니? 어쨌든 최종 결정권자는 너잖아. 네가 결재해야 할 게 엄청나게 많아."
"으으, 휴가 좀 다녀오고 싶다."
"휴가? 너 죽기 전까지는 휴가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젠장...... 다른 사람들은 뭐하고 있어?"
"다들 바빠. 세희는 병원 담당 중이고 경태는 훈련소에 쳐박혀 있어. 피터나 에일리도 그렇고."
"경태? 아, 곧 승급하기로 했지."
"별 일 없겠지?"
"응. 영육 개변은 어렵지 않으니까."
"세희가 그 말 들으려면 널 죽이려고 할 걸?"
"그래도 그게 사실이야."
환골탈태가 가장 어렵고 종족 변환이 가장 쉽다. 영육 개변은 탈각 방법 중에서는 쉬운 축에 속했다.
집무실에 들어선다. 서류 지옥이 김현을 맞이했다. 전생에서 360개의 홀로그램을 띄우고 동시에 처리하던 김현이다. 비록 전자두뇌도 곤충 겹눈도 없지만, 김현은 여전히 두뇌 회전이 빨랐다. 그 과정에서 혼력의 보조가 있음은 당연지사.
'어, 이거 잘하면......'
문득 드는 생각에 손을 멈춘다.
"누나, 거기 놔두고 잠깐 뒤로 가봐."
"응? 어, 알았어."
"다른 사람들도 서류는 책상 위에다 둬요. 아, 서로 섞지는 말고."
중국인, 아랍인, 백인, 흑인......
다양한 인종의 비서들이 조심스레 서류를 책상에 올려둔다. 네모 반듯하게 맞춘 것이 흡사 종이로 만든 아파트 단지를 보는 성 싶다.
그걸 몽땅 혼멸 성혼으로 투시.
글자가 보인다. 무수히 겹쳐 있다. 머리가 혼탁해지려는 그 순간 유명석이 짜르르하게 울리며 차가운 냉정을 강요한다.
가볍게 미소 짓는 김현.
유명흔이 흐물거리며 움직여 서류 더미를 감쌌다. 그 안의 내용, 비서들이 작성할 때의 상념까지 모조리 읽어낸다. 무수한 정보가 김현의 머리에 주입되었다.
"흠, 흠......"
김현은 자신이 흥얼거리듯 콧김을 부는 것도 몰랐다. 어느새 피의 손이 무수히 자라난다. 그것들이 서류를 집어서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서류 위에 사인을 휘갈겨 적는다.
검붉은, 조금 불길해 보이는 색채의 사인.
통과한 것은 오른쪽에 쌓고 보류는 왼쪽에 쌓았다. 거부할 것은 갈가리 찢은 다음 던져 버린다.
수천 장의 서류를 처리하는데 걸린 시간, 단 3분.
비서들이 혀를 내둘렀다.
"와...... 역시 인류 최강의 각성자는 다릅니다."
"존경합니다, 사령관님!"
"존경은 무슨. 그리고 이거 너무 비효율적이야. 내부 결재는 김 시장님한테 결재 맡으라고 했잖아."
"야, 아무리 그래도 네가 마지막으로 점검은 해야지."
"난 누나 믿어. 외부 일은 내가 하겠지만 내부 일은 누나한테 맡길게."
"이게, 지가 하기 귀찮으니까."
"하하하하!"
김애경만은 김현의 본심을 꿰뚫어 보았다. 비서들이 설마 그러겠느냐는 얼굴로 둘을 본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그만 크게 웃고 말았다.
쉴 시간은 없었다. 대신 새롭게 만든 욕탕에서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수욕을 즐겼다. 뜨듯한 기운이 전신을 데우지만, 그저 '온도가 높구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인간이었을 때처럼 몸이 나른해지면서 피로가 쫙 풀리는 느낌을 받기 힘들었다.
'포기한 게 많기는 많아......'
그래도 조금은 흉내 낼 수 있다. 눈을 감고 한참 물의 온도를 즐기던 때였다.
휘이이잉.
괴이한 바람이 한 줄기 벽을 뚫고 들어와 김현을 스쳤다.
이상하다.
김현의 감각에 따르면 이런 바람이 들어올 공간은 이곳 욕탕 어디에도 없는데......
이때, 한 줄기 달콤한 향내가 코를 찔렀다.
언젠가 맡아본 적이 있는 냄새.
아니, 최근에도 미국의 아홉 원흉을 단죄할 때 맡아보았던 그 향기.
"누구냐?"
눈을 뜨지도 않고 차갑게 묻자 코앞에서 메아리처럼 희미한 기운이 일렁였다.
[건방진 놈, 말뽄새는 여전하군.]
워낙 심하게 울려 알아듣기는 어렵지만, 메아리에 실린 존재감만큼은 익숙한 자의 것이었다.
"블러드 공작?"
[그래, 나다.]
스스스스.
욕탕에서 피어오르던 수증기가 한데 뭉친다. 희끗희끗 또렷해지다가 다시 희끄무레해져 흩어진다. 그걸 반복하는 가운데, 어딘가에서 한 줄기 혈기가 스며들어와 수증기 뭉치에 윤곽을 덧칠했다.
세련된 턱시도를 입고 코를 높이 든 남자. 바로 블러드 공작이었다.
김현은 몸을 일으켰다.
"대단한데? 차원의 벽을 뚫고 여기까지 환영을 보낼 정도라니......"
[흥.]
"하긴 시초 뱀파이어시니 어련하시겠어."
[쯧, 무례하기는. 적당히 해라, 응? 영원이고 뭐고 네놈의 피를 다 뽑아다 박제하는 수가 있어.]
김현은 잠자코 어깨를 으쓱였다.
흡혈귀들의 변덕은 블러드 공작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럴 때는 괜히 성격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저번 유명계 공격은 잘 봤어. 역시 내 사도답더라고.]
"먼저 뒤통수를 맞았으니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지."
[그래, 그래. 잘하고 있어. 하지만 유명계를 배제하는 게 모든 조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성혼 거래가 있었지.
김현이 뭐라고 말하기 전, 벌써 수증기 뭉치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벌써 끝이야? 할 수 없지. 내 대리자를 보낼 예정이다. 비록 저급한 녀석이지만 잘들 얘기해 봐. 네가 가진 성혼이 엄......]
여기서 끝이었다.
수증기 뭉치가 흩어지고 감돌던 혈기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블러드 공작의 대리자라......
와서 문제만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바쁜 몸, 흡혈귀 나부랭이의 뒤치다꺼리를 할 마음은 없었다.
[사브리나.]
혹시 몰라 예방 조치를 해놓기로 했다.
[예, 사령관님.]
자경단은 두 개의 조직으로 재편하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경비대와 치안대.
사브리나는 경비대를 맡는다. 나중에는 군대로 진화하겠지.
[5성 흡혈귀가 조만간 모가디슈에 들어올 거다. 혹시 모르니 순찰을 강화해라. 행방불명 되는 사람 있으면 확실하게 확인하고.]
[5성 흡혈귀입니까?]
[그래. 싸울 생각은 하지 말고 발견 즉시 내게 알려라. 정신 연결을 유지해 놓겠다.]
[예, 알겠습니다.]
대리자라고 했으니 정중하게 찾아와 실무 협상을 하는, 밀고 당기는 가운데 챙길 건 다 챙기는 협상의 달인 같은 흡혈귀를 상상했다.
하지만 블러드 공작의 대리자는 김현이 상상했던 형태 중 가장 최악의 형태로 다가왔다.
시체들이 발견되었다.
목에 두 개의 송곳니 자국이 남고, 전신의 체액이 빠져나가 미라처럼 변한 상태로.
"에그머니나!"
"흡혈귀다, 흡혈귀!"
"세상에, 우리를 지켜주겠다고 하더니 그게 다 거짓말이었어?"
"쉿! 저기 온다!"
발견된 시체는 무려 19구.
그것도 어제 하루 사이에 모두 당했다고 했다.
김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날 도발하는 거지?'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죽을 때까지 피를 빠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체 처리하는 걸 보면 특히 그렇지. 무너진 건물 뒤에 대충 던져 놓은 게 다이니, 시체를 숨기기보다는 제발 발견해달라고 외치는 것 같다.
"면목이 없습니다, 사령관님."
"아냐. 애초에 너희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어. 내가 모가디슈를 비우지 않길 그랬다."
팔짱을 낀 채 주위를 둘러본다.
시민들이 김현을 보고는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공포가 진하게 깃들었다. 아마도 그들은 김현이 저들의 피를 빨았다고 생각한 모양.
하늘을 올려다본다.
'네 뜻이냐, 블러드 공작?'
길들이기일까?
블러드 공작의 기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처음 만났을 때도, 환영을 통해 잠깐 마주했던 어제도 블러드 공작은 김현을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했으니까. 단지 이득이 되니 놔두고 있을 뿐.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게 만약 블러드 공작의 수작이라면? 조용히 자신의 뜻에 따르라고 하는 경고라면?
블러드 공작은 엄연히 김현의 혈주. 그리고 김현은 블러드 공작의 사도.
피를 통한 지배는 무섭도록 강력하다. 블러드 공작이 진심으로 화를 내면 전신의 피를 끓여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 그러고 나면 김현은 영혼만 남아 유명계에 귀속되겠지.
이런저런 것을 생각하면 몸을 사리는 게 마땅한 처사.
하지만......
김현의 눈썹이 재차 꿈틀거린다.
맹세했다.
지킨다고, 인류를, 22세기에서, 목숨을 걸고.
비슷한 맹세를 불과 며칠 전에 다시 했다. 맹세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깨뜨릴 수는 없다.
와드득.
이를 갈았다.
'날 죽일 수는 있어도 조종할 수는 없다. 블러드 공작.'
두 눈에서 가만히 불꽃을 피워낸다.
동시에 유명흔이 폭발하듯 확장되었다. 넓은 모가디슈 시내, 그곳을 단번에 작은 머리에 담았다.
모든 것이 파악된다.
수풀에 숨어 노래하는 작은 풀벌레, 명랑하게 떠들며 뛰노는 아이들의 심장 고동, 바람에 날려 휙 치솟은 먼지 한 톨까지도.
그리고 유독 차갑게 느껴지는 기운 셋.
법칙을 조롱하는 역천의 힘이 그곳에 있었다. 탁하고 불순한, 기름 찌꺼기 같은 악취에 코가 떨어져 나갈 것 같다.
"따라와라."
천천히 걷는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바로 인근, 자원봉사자 숙소로 향했으니까.
"어어?"
"빌런 김......"
흡혈귀 소식이 여기까지 전해진 건지 다들 시선을 피하며 물러난다. 김현은 자경단과 함께 그들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원봉사자 숙소라고 해봐야 천막촌. 그 안쪽에 김현이 찾는 이들이 있었다.
백인 셋.
여자가 둘에 남자가 하나.
셋 다 얼굴이 창백하지만 이상한 정도는 아니다. 눈이 파란색이라 아주 어여뻤다. 누구든 이들을 보면 호수 같은 눈이라고 기억하겠지.
김현은 그들을 보며 웃었다.
정지한 심장, 반면 소용돌이치며 혈류를 순환시키는 혈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도 따라 웃는다.
"반갑습니다, 성혈의 세례를 받으신 분. 블러드 공작 전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그래, 나도 반가워."
김현의 입술이 그려내는 호선이 더욱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