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24화 (124/200)

# 124

흡혈귀 -3- [5권 끝]

남자 흡혈귀가 눈을 빛냈다.

"과연 존귀하신 분다우십니다. 질 좋은 농장을 가지고 계세요. 피의 씨앗을 품을 수 있는 자들로 술을 담그면 맛이 기가 막힐 겁니다."

씨앗을 품을 수 있는 자.

즉, 각성자.

머리에 열이 오른다. 유명석이 강제로 이성을 유지하게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흡혈귀란 이런 족속이다.

지구인을 피를 빨 대상으로 보는 자들. 대부분이 한때 인간이었으면서, 인간을 벌레만도 못하게 보는 종족.

김현의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사라져 간다.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 번은 질문을 던졌다.

"왜 그랬지?"

"예? 뭘 말입니까?"

"어제 밤에 말이야. 왜 모가디슈의 시민들을 잡아다 피를 빤 거지?"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아침에 밝혀진, 열아홉 명의 연쇄 살인은 진즉에 모가디슈 전역을 강타했기 때문에.

흡혈귀들이 음침한 웃음을 짓는다.

"아, 그것 말씀이십니까? 배가 고파서 간식 좀 챙겨 먹었습니다."

"간식이라......"

"예. 그래도 정말 맛있어 보이는 자들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존귀하신 분께서 심혈을 기울여 기르는 작물인데, 건드려서 존귀하신 분의 진노를 사고 싶진 않아서요."

이걸 잘했다는 투로 얘기하고 있다.

남자 흡혈귀가 입맛을 다시며 김현 옆의 사브리나를 보았다. 그 포식자의 눈빛에서 셋의 정체를 깨달은 사브리나가 이를 갈아 붙였다.

"네놈들! 흡혈귀구나!"

"그럼 뭐라고 생각했어? 왜, 흡혈귀를 주인으로 모셨으면 흡혈귀 손님이 찾아올 줄은 알았어야지."

흡혈귀들의 음험한 눈이 군중을 훑는다. 뱀이 혀로 핥는 듯한 느낌에 사람들이 진저리를 치며 물러났다.

묵묵히 보다가 재차 묻는다.

"왜 그랬지?"

"예? 음...... 그냥 배가 고파서 그랬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모가디슈의 시민들은 내 보호 아래에 있다. 그걸 몰랐나?"

"그건 압니다만 여기에 시민이 어디 있습니까? 제 눈에는 한 모금 핏덩이들 밖에 안 보이는데요."

남자 흡혈귀가 머리를 길게 빼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한다.

말이 더 필요 없겠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빙글빙글 웃던 흡혈귀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무시무시한 압력이 그들을 짓누르기 시작하자 신음을 흘리며 몸을 낮췄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만 두세요!"

"왜 이래요?"

앙칼진 고함.

김현은 압력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그런 김현의 등 뒤에서 유명흔이 날카롭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혼멸 성혼을 이용, 세 흡혈귀의 정신에 직접 타격을 가하는 것.

겉으로는 특별히 보이는 게 없다. 하지만 흡혈귀들의 뇌는 지금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혼멸 성혼이 망치처럼 마구 두들겨 대는 탓에.

저벅저벅.

천천히 걸어간다. 그에 따라 정신 공격의 강도가 올라갔다. 급기야 흡혈귀들의 몸이 강제로 접혔다. 허리가 가장 먼저 꺾이고, 이어 무릎이 땅에 닿고, 두 팔로 겨우 땅을 지지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오체투지 자세.

남자 흡혈귀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깟 핏물 자루들 좀 마셨기로서니 이렇게 우리를 핍박하다니, 블러드 공작 전하께서 좋아하시지 않을 겁니다!"

"상관없어."

손을 뻗는다.

분노한 마음을 대변하듯 귀신처럼 길게 뻗은 손톱이 남자 흡혈귀의 얇실한 턱 아래에 가 닿았다.

살짝 치켜든다. 남자 흡혈귀의 머리가 삐걱삐걱 위를 향했다. 자연히 김현과 남자 흡혈귀, 둘의 눈이 서늘한 고드름처럼 맞닿는다.

"난 맹세했으니까."

두 번의 맹세.

22세기의 어느 작은 저항군 기지에서, 그리고 바로 며칠 전 모가디슈의 시민들 앞에서.

인류를 지킨다. 안전을 보장한다.

그 맹세를 깨뜨리는 자라면, 블러드 공작 아니라 그 할아비, 혹은 그 근본인 피의 마신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김현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피로 진 빚, 피로 갚아라."

"아...... 안 돼!"

서걱.

김현의 손가락이 남자 흡혈귀의 목을 훑었다. 길어진 손톱이 얄쌍한 목을 단번에 잘라낸다. 겉의 피부와 살은 물론 그 안의 강철보다 단단한 척추까지 전부.

기이한 점은 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 머리통이 땅을 구르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뻥 뚫린 목구멍을 통해 바람 새는 소리만 색색거렸다.

"엄마야!"

"에그머니나!"

"알라시어!"

"오 마이 갓!"

지켜 보던 사람들이 놀라 소리를 지른다. 몇몇은 비위가 상하는지 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엎드려 있던 두 여자 흡혈귀가 소리쳤다.

"너, 너! 원주민 주제에 카엘 님을 살해해? 비천한 놈! 네놈은 피의 마신께 저주받을 것이다!"

"블러드 공작 전하께서 네놈을 처형하실 것이다. 영세토록 피 주머니가 되어 혈정이나 생산하는 신세가 되겠지! 영원의 절망을 맛보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자살해라!"

"내가 왜?"

웃으며 쪼그려 앉는다.

이번에는 두 손을 동시에 내밀었다. 집게손가락만 이용해 여자 흡혈귀들의 고개를 들게 한다. 여자 흡혈귀들이 저항하려 했으나 손가락을 통해 전해지는 혼멸 성혼은 상상을 초월하도록 강력했다.

모든 반항이 무효. 심지어 불사계에 있을 혈주에게 도움을 청해 보지만 죄다 막혀 있다. 이를 갈며 침이라도 뱉어보려 하나, 뱉기는커녕 추하게 뚝뚝 떨어지는 것에서 그쳤다.

"그리고 살해했다고 하면 섭섭하지. 카엘이라고? 저 놈 아직 안 죽었어."

"흥, 네놈 눈은 옹이구멍인가 보구나. 이 도시의 작물들은 참으로 불쌍하군! 눈 먼 자를 주인으로 모셨다니!"

"후후, 말을 참 잘하는데? 흡혈귀들은 다 그래? 어디, 목이 잘리고도 이러는지 한 번 보자."

서걱.

또다시 목을 도려내는 김현.

기세 좋게 떠들던 여자 흡혈귀는 남자 흡혈귀와 같이 사이좋게 땅을 구르는 신세가 되었다.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흐른다.

그 와중에도 목에서는 피 한 방울 안 흐르는 게 참으로 기괴했다. 이제는 지켜보던 사람들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세요!"

마지막 남은 흡혈귀가 애처롭게 소리친다.

"뭐, 뭐든지 할게요! 종속 계약을 맺으라면 맺겠어요! 혈정을 달라고 하셔도 드릴게요! 제발, 제발 살려만 주세요!"

불사계의 종족들은 아닌 척 연기를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가 크다. 애초에 죽음을 피해 흡혈귀가 된 자들이 대부분이니 오죽할까.

김현은 여자 흡혈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살려달라고?"

"예! 뭐든지 할게요! 전 뭐든지 잘해요!"

이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유혹어린 눈웃음을 치는 흡혈귀.

따로 성혼이나 능력을 쓴 것도 아닌데 폭발적인 염기가 쏟아져 나온다. 평범한 남자라면 대번에 욕정이 들끓어 흡혈귀를 덮쳤겠지.

그러나 김현은 이런 것에 흔들릴 남자가 아니다.

"좋아, 살려주지."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제 모든 것을 바쳐 주인님을 섬길게요!"

따로 혈주가 있을 텐데 주인님이란 말이 쉽게도 나온다.

흡혈귀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표정.

금세,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서걱.

김현이 다른 흡혈귀와 마찬가지로 목을 도려낸 까닭.

"왜......"

흡혈귀가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성혈 등급이나 되면서, 어째서 거짓말을 했느냐는 태도.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살려는 준다."

속삭였다고는 해도, 힘을 실어 말한 까닭에 근처 사람들에게 모두 들렸다.

"대신 너희가 말하는 피 주머니 비슷한 의식을 흉내 내 볼 생각이다."

안 그래도 하얗던 얼굴이 아주 새하얗게 질린다.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뻐끔거리지만 무소용. 전언을 보낼 수도 없었다. 혈정과의 연결이 차단된 까닭에 모든 힘을 잃었으니.

머리통을 한 곳에 모았다. 근처 건물 폐허에 손을 뻗는다. 녹슨 철근 셋이 휙 하고 날아왔다.

퍽! 퍽! 퍽!

철근을 잘린 목구멍에다가 거칠게 쑤셔 넣었다. 흡혈귀들이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린다. 그들의 얼굴이 처절한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어 쓰러진 몸뚱이에 왼손을 박았다. 심장을, 정확히 말하면 심장을 대체한 혈정을 뽑아냈다.

울컥, 울컥.

혈정은 심장과 비슷하게 생겼다. 다른 점이라면 순수한 액체이며, 강력한 성혼과 힘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점.

"저, 저건......"

"으으......"

흡혈귀의 혈정은 존재만으로도 인간에게 본능적인 혐오감과 불쾌함을 갖게 한다.

김현은 혈정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혈정 셋이 부르르 떨며 기이한 진동을 퍼뜨린다. 그것을 느낀 세 흡혈귀가 통곡하며 애원했다.

"흐으으......"

"으흐......"

무시하고 정신을 집중한다.

혈정으로 파고드는 영력.

회색의 기운이 송곳이 되었다. 혈정 셋에 머리를 박고는 울컥울컥 뽑아낸다. 막대한 힘이, 성혼이 김현의 의지를 따라 흘러나왔다.

"아아아......"

비탄에 잠긴 신음.

혈정 속에서 성혼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모두 5성 등급 불사계 성혼.

그리고 힘의 중심을 잃은 혈정이 자연스럽게 폭주하기 시작했다.

"후우우."

그때 김현이 입김을 불어넣었다.

피의 안개가 섞여 기괴하게 보이는 핏빛 입김.

그 피가 혈정에 뒤섞였다. 그러자 폭주하던 혈정이 빠르게 안정되기 시작한다. 종래에는 처음의 구슬 형태가 아니라, 찐득한 고름처럼 늘어지며 주머니 형상으로 변했다.

피 주머니 처형.

불사계에서 가장 잔인한 처벌 방식.

모든 성혼을 추출하고 혈정만 남긴다. 상위 흡혈귀가 피의 지배를 활용하면 얼마 동안은 그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그 상태에서 새로운 흡혈귀 생산에 쓰는 것.

당사자는 멀쩡한 정신을 유지한다. 그러나 외부에서 피를 공급하지 않으니 영원토록 피의 갈증에 시달린다. 그 와중에 새로운 흡혈귀가 탄생하며 산고보다 더욱 고통을 겪어야 한다.

여기에 확정된 죽음까지. 불사계의 모든 흡혈귀는 깨끗이 죽으면 죽었지 피 주머니 처형의 당사자가 되는 걸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푸욱, 푹푹.

김현은 철근을 뺐다가 주머니처럼 변한 혈정을 각자의 목구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철근을 찔렀다.

흡혈귀들의 말문이 트인다.

"제발! 살려주세요!"

"존귀하신 분이어, 제발!"

성혼을 추출당한 이상 이들은 어떤 초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 그저 혈정에 기대어 살아 있을 뿐. 김현이 철근에 부여한 피의 지배를 거두고 철근을 뺀 다음 몸통을 연결시켜 주면 통상적인 흡혈귀보다는 강한 힘을 발휘하겠지만 김현이 어디 그걸 보고만 있을 위인인가.

사브리나를 향해 턱짓을 했다.

"저것들, 모두 가져가서 불태워라."

"예! 예!"

"심장에다가 나무 말뚝...... 아, 그것으로는 약하지. 순은 말뚝 박는 거 잊지 말고. 다 불태운 다음에는 천상계 축복 같은 거 듬뿍 뿌려줘라. 그래야 부활하지 못해."

"예! 알겠습니다!"

"하룻밤 만에 시민 열아홉 명의 피를 빨아 죽인 괴물들이다. 이놈들이 뭐라고 하든 절대 사정 봐주지 마라. 물도 주지 말고 밥도 주지 마. 그랬다가 누가 물리면 골치 아프다."

"예!"

"그리고 유족들에게 말해서 범인들 잡았다고 해라. 사소한 복수 정도는 해도 좋다고 하고. 인분을 퍼붓거나, 나무망치로 대가리를 깨고, 마늘 가루나 은 가루를 퍼먹이는 것도 괜찮은 복수가 될 거다."

"예, 사령관님!"

김현이 흡혈귀들을 처리한 것이 충격적이었는지 사브리나는 예, 예, 만 반복했다. 김현은 손을 저어 사브리나를 가보게 했다.

사브리나는 철근에 꿰인 머리통을 높이 들고 물러갔다. 자경단이 그 뒤를 따르자 시민들 여럿이 따라갔다. 그 잔혹한 광경이 야만의 시대로 접어드는 2018년을 상징하는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아팠다.

'이번만큼은 너희들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겠다.'

새삼 다짐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그때, 서늘한 음색이 귓가를 두드렸다.

[깜찍한 짓을 했군.]

블러드 공작의 목소리.

[네 시민들이 네 보호 아래에 있다고? 말은 맞는 말이야. 그래, 너는 지구 진영이니 카엘이 좀 경솔하긴 했지. 하지만 너도 한 가지 잊은 게 있다.]

분노를 억누르는 듯, 지독히 낮고 차가웠다.

[멍청한 그놈들이 내 보호 아래에 있다는 거지. 건방진 놈. 감히 네 멋대로 저것들을 피 주머니로 만들어? 대가는 짐작했겠지?]

기이한 열기가 느껴진다.

심장 어린에서, 양쪽 팔과 다리에서, 피부 아래에서.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끓는다.

전신의 살이 벌겋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혈정이 맹렬한 진동을 잔뜩 뿜어내고, 그 열기가 육체는 물론 머리까지 침습하기 시작했다.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다. 전신이 마비되었다. 눈알을 굴리는 것조차, 혀를 달싹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머릿속에서 사이한 웃음이 울려 퍼진다.

[영원? 가능성도 거의 없는 그딴 것 때문에 내가 언제까지 네의 뒤를 닦아줄 거라고 생각했느냐? 감히 내 기휘를 범해? 완전히 끝장을 내주마! 영혼까지 불태우겠다!]

열기가 머리까지 파고들었다.

단지 머리만 아닌 이마에 박힌 유명석도, 공간에 일렁이는 유명흔까지도.

불탄다.

타오른다.

핏빛 불꽃이 모든 것을 살라먹고 있었다.

정신이 흐려진다.

세상이 아득히 멀어진다.

'여기서 끝인가.'

그럴 리가.

블러드 공작이 이렇게 나올 거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예상했다. 그리고 어떻게 블러드 공작을 구슬릴지도 생각해두었고.

한 장면을 떠올린다.

22세기.

그 지옥과도 같은 세계를.

한 가지 더.

다나카가 배신하고 시공의 문이 폭주하여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던 때도.

얼마나 지났을까.

불길이 그치고 열기가 잦아들었다.

격렬하게 폭주하던 혈류가 본래 흐름을 되찾고, 몸의 감각이 돌아오며 김현의 의식을 일깨웠다.

그리고 침묵.

김현도 블러드 공작도 침묵을 지켰다.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믿기지 않는다는 음성이 김현의 의식에 파고든다.

[네놈...... 설마 시간을 거스른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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