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불사계 –1-
시간을 거스름은 곧 역천.
또한, 시간은 영원과 관련이 있는 법.
블러드 공작 입장에서 보면 이 또한 연구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이지 싶다.
22세기에서 세 총독이 외쳤듯, 시공의 문은 천상계와 혼돈계 등 강력한 차원계에서도 쉽게 손대지 못하는 영역이니까.
[놈......]
블러드 공작이 신음하듯 연결을 흐트러뜨렸다.
재차 정신의 벽을 닫는다. 성벽을 쌓아 스스로를 지킨다. 블러드 공작에게 풀어놓았던 기억을 고스란히 거두어들였다.
[나와 장난하자는 거냐?]
육체는 블러드 공작에게 귀속된다. 그러나 영혼만큼은 김현의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라도 유령으로 변한 영혼은 건질 수 있었다.
툭, 연결된 피를 통해 내뱉는다.
"관람하고 싶으시면 관람료를 내셔야지."
[흥. 누가 하급 잡것의 기억을 보려고 하겠냐?]
"싫으면 말던가."
김현은 심장에 깃든 혈정의 운행을 강제로 정지시켰다.
이것은 혈주와의 인연을 끊는 행위.
완전히 이뤄지면 흡혈귀로서의 김현은 죽는다. 블러드 공작이 피를 증발시키는 것과 비슷한 행위라고 보면 되겠다.
[무, 무슨 짓을!]
"아, 이대로 있으면 하급 잡것 흡혈귀들이 기어 들어와서 내 사람들 피를 빨아먹을 것 같아서. 차라리 포기하지 뭐. 몸은 폭주시켜서 해체하고, 적당히 어디 유물 같은 곳에 기어들어가려고. 어차피 성혈 등급 각성자도 몇 명 더 탄생했겠다, 그 정도면 지구도 날 튕겨내려고 하지는 않을 걸?"
[으드득.]
본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친 논리에 블러드 공작이 이를 간다.
죽음을 각오했다는데 뭘?
피를 끓려 영혼까지 소멸시키는 것도 실은 쉽지 않다. 지구처럼 차원의 벽이 두꺼운 별에서는 특히 더.
차원 너머, 블러드 공작의 머릿속에서 번갯불처럼 상념이 몇 번이나 교차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녀석.
그냥 죽게 놔둬?
하지만 그러기에는 시공 회귀자라는 또 하나의 사실이 블러드 공작의 발목을 잡았다.
시공 회귀.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자신도 존재한다고 말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니까.
영원에 대해서는 알 수 없게 되어도 좋다. 시공 회귀의 비밀에 대해서 그 편린만 한 조각 얻어내더라도......
[후우, 좋다.]
"뭐가?"
[내가 졌어. 영광으로 알라고. 차원계 어떤 존재를 뒤져봐도 내 뜻을 뒤집게 한 이는 한 손에 꼽으니까.]
조금은 맥이 빠진 말투.
김현은 쓸데없이 밀고 당기기를 하지 않았다. 혈정을 안정시킨다. 긴 한숨이 허깨비처럼 김현의 뇌리에 머물렀다.
[피곤하군. 선지자, 아니 그건 거짓말이었지? 조만간 내 영지로 넘어와라. 거기서 얘기하도록 하자. 내 잡것들이 실수한 것도 있고 하니, 이번만은 네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겠다.]
블러드 공작은 힘을 실어 말했다. 마지막 문장이 유형으로 구체화되어 김현의 앞을 떠돌다가 사라졌다.
언령.
최소 한 번은 안전하게 블러드 공작과 대면하게 된 것이다.
연결이 끊기고 적막이 감돌았다.
'뭐, 잘 됐네.'
안 그래도 넘쳐나는 성혼을 팔 곳이 필요했다. 하루에 생산되는 5성 성혼이 1천 개이니 지구 내에서 소화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첫 외계 진출 거점으로 블러드 공작의 영지를 선택하면 되겠다.
"현아! 괜찮아?"
문이 거칠게 열리며 김애경과 이세희가 돌격하듯 들어온다. 김현은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손을 흔들었다.
"어, 뭔 일 있어?"
"아까 여기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던데......"
"김현 님 죽는 줄 알았어요."
아닌 게 아니라 근방에서 사브리나와 자경단의 존재도 느껴진다. 블러드 공작과의 공방이 힘을 많이 흘린 모양.
"블러드 공작이랑 한바탕 했어."
"블러드 공작? 네 혈주라는 그 흡혈귀?"
"응. 왜 자기 부하들 죽였냐고 화내더라."
"그래서?"
"잘 달랬지. 조만간에 한 번 찾아가야 할 것 같아. 내가 주기로 한 게 조금 있어서."
"원정은 아니지?"
"비슷해. 이번에 가서 지점 내려고."
"너......"
"어휴, 그만 좀 해라. 벌써 몇 번째야? 이번에는 안 싸워. 괜히 거점 마련한다고 외계종 안 때려잡는다고. 블러드 공작이랑 교섭해서 상점만 하나 낼 거야."
"좋아, 나도 갈게."
"안 가려고 그랬어?"
사실 김현 입장에서는 김애경을 떼어놓고 오는 게 마음이 편하다. 블러드 공작이 시공 회귀에 대해 언급하면 큰일이니까. 자신이 김현이 아니라 22세기의 아론이라는 사실은 숨기고 싶은 김현이었다.
이세희도 원정에 합류하기로 결정. 이외에는 한스와 한철군만 따라오기로 했다.
한스가 침을 꼴깍 삼켰다.
"제, 제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그래도 최소한 5성까지는 올라왔으면 좋겠네요. 앞으로 차원 무역을 할 일이 많은데 5성은 되어야 외계종들이 무시하지 않습니다. 한 사장님은 언제 그렇게 수련을 열심히 했어요?"
"흐흐. 3성 가지고는 한계가 느껴져서요. 틈틈이 훈련소에 들어가서 단련했지요."
한철군은 4성에 올라섰다. 능력치도 충실한 것을 보니 곧 5성 성혼을 줘도 되겠다.
'지금 4성 각성자가 10명은 되는구나......'
4성에서 5성 되기는 쉬우니 곧 5성 10명을 확보한다는 뜻.
훈련소에 더 신경을 써야겠다. 인류가 강해지는 것은 좋은데, 김현의 세력은 이제 겨우 걸음마하는 단계이니.
외계 원정은 착착 준비되었다.
처음에는 단출하게 커다란 보스턴 가방 몇 개만 챙겼다. 거기에 5성 성혼이 그득그득 들어 있었다. 도합 1만 개. 이 정도면 처음 거래하는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실적이다.
블러드 공작에게 줄 선물?
그건 김현의 머릿속에 있다. 5성이든 6성이든 지금의 블러드 공작에게는 성에 차지 않을 터. 시공 회귀에 대한 정보가 블러드 공작가 지불할 관람료를 결정지을 것이다.
"그럼 다녀오지요. 케말, 잘 부탁합니다."
"예, 사령관님. 조심히 다녀오시길."
케말 압둘라히.
소말리아에서 흔치 않은 지식인이다. 독일 유학까지 했고 박사 출신이라나? 난민으로 떠돌던 것을 김애경이 운 좋게 발굴했다. 지금은 시장 제 1 비서로서 많은 부분을 덜어주고 있다고.
"형, 갔다 와서 봐."
서경태가 흐릿한 형상을 하고 손을 흔들었다.
김현이 불사계 원정을 준비하는 사이 서경태는 6성 탈각에 도전했다. 방법은 영육 개변. 이세희와 비슷하게 6성 성혼 다섯 개와 5성 외계종 세 마리가 들었다.
지금은 반투명한 어둠 육체를 얻었다. 입이 약간 찢어지고, 눈 꼬리도 사납게 치켜 올라갔지만 어쨌든 인간의 외모이긴 했다. 정신만 집중하면.
그게 아니면 물질적 형체가 사라지고 어둠으로 변해 버리니 당분간 적응 훈련이 필요했다.
"너도 적응 잘 하고. 2주 뒤에나 방에서 나와. 알았지?"
"알았어."
백혈탑 안으로 들어간다. 가뿐히 헤엄쳐 위층으로 올라갔다. 꼭대기 쪽에 차원문 발생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가동.
무지갯빛 소용돌이가 회전하다가 천천히 핏빛으로 물든다.
그리고 압력.
일행을 쭉 밀어낸다. 아차 싶은 순간 세상이 하얗게 물들고, 우주가 탄생하고 멸망하는 시간의 왜곡을 거쳐 차원의 저편으로 날아갔다.
짹짹짹.
새소리가 일행을 환영했다.
청량한 공기가 코끝을 맴돈다. 적당히 서늘한 기온에 벌써부터 기온이 나는 듯하다. 태양은 쨍쨍하고 발 밑 땅은 보드랍기 그지없었다. 곳곳에 포도나무가 보이고, 탐스럽게 영근 포도가 보랏빛 농익은 육체로 유혹한다.
"여긴......"
이세희가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저 앞을 보라.
여성의 유방처럼 봉긋 솟은 언덕 위에 성 하나가 웅장하게 서 있다. 말 그대로 중세 판타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성이.
"여기, 불사계 아니었어?"
"대체......"
여전히 사태 파악이 안 된 일행.
이때 불퉁한 한 마디가 일행의 귀를 찔렀다.
"늦었어."
고개를 돌아본다.
까만 연미복을 입은 잘생긴 미남자가 떡갈나무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유령 같은, 전혀 존재감을 느낄 수 없는 기이한 감각에 김애경이 침을 삼켰다.
"넌 뭐야?"
두 손이 푸르고 벌겋게 빛난다.
당장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만 둬. 어차피 못 이겨. 블러드 공작이야."
"뭐? 블러드 공작?"
김애경이 눈을 크게 뜨고 블러드 공작을 본다.
시초 뱀파이어. 8성 등급 외계종.
그 능력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다. 가히 마왕이자 반신, 행성을 두 조각내지는 못해도 표면의 문명 정도는 간단히 파괴한다고 했지.
"흠, 싱싱한 인간이네."
블러드 공작이 김애경을 일별하고는 김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환골탈태한 6성 각성자의 피는 확실히 별미이지만, 워낙 긴 세월 동안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쾌락을 즐긴 탓에 별로 흥미를 못 느끼는 듯했다.
"가지."
"좋아."
김현은 들고 있던 보스턴 가방을 김애경에게 넘겨주고 영음을 남겼다.
[적당히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어. 이야기 끝나면 얘기할게.]
[알았어.]
6성이 되어서 반은 신선이 되어서일까? 김애경이 비슷한 재주로 대답을 했다. 물론 블러드 공작은 다 듣고 있겠지만.
조금 거리가 멀어지자 불쑥 묻는다.
"100년의 시간을 거슬렀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간단해. 우연이었지."
"우연이라......"
"난 애초에 시공 회귀할 생각이 없었어. 시공의 문을 폭주시켜 세 총독과 죽을 작정이었지. 도저히 미래가 안 보였거든. 그래서 시공의 문을 폭주시켰는데, 세 총독이 쓴 성혼과 뒤섞이면서 시공 회귀가 벌어진 거야."
"그 세 총독이 쓴 성혼이 뭐였지?"
"잠깐만...... 아, 그래. 기억난다. 천공성, 절대소멸광, 탄생의 벽이었지."
천상계 총독은 일반적인 방어막을 써서 폭주하는 힘을 가두려고 했다. 기갑계 총독은 힘 자체를 소멸시키려고 시도했고, 충왕계 총독은 힘을 생명으로 바꾸어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을 썼다.
잠깐, 블러드 공작이 발을 멈추었다.
"원혈의 위에 이른 성혼을 썼다는 말이냐?"
7성 등급이었냐고 물어보는 것.
세 성혼 모두 7성과 8성에 동일한 이름으로 존재하니 그리 생각한 모양이다.
단호히 머리를 흔들었다.
"천만에! 혈조(血祖)의 위에 닿아 있었다."
"혈조라고? 말도 안 되는! 나와 동급인 이는 피의 마신 휘하에서도 여덟에 불과하고, 불사계를 다 찾아도 서른을 겨우 넘는다! 그런데 그 따위 변방 차원계에 혈조 등급의 무위를 갖춘 자가 넷이나 있다고? 허튼 소리!"
"믿기 싫으면 믿지 마. 그런데 말이야, 너도 내 기억 속에서 비슷한 걸 보지 않았어? 단편적으로 흘러들어간 것 같은데."
"흠......"
"어쨌든 폭주하는 시공의 힘이 그 세 성혼과 섞이면서 내 영혼을 빨아들인 것 같아. 그리고 100년을 뛰어넘어 지금의 몸에 들어온 거지."
"그 몸은 죽은 상태였나?"
"아니. 하반신 마비이긴 했는데 건강했어."
사실 이건 김현에게도 의문점이긴 하다. 영혼만 들어갈 거면 막 죽은 시체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데 왜 김현의 몸에 들어온 걸까?
"재현할 수는 있어?"
"아니. 시공의 문을 제작하는 것도 문제고 혈조의 위계자 넷을 구하는 것도 문제야."
"당시에 네가 무슨 성혼을 쓰고 있었지?"
"난 그냥 다 포기하고 엎어져 있었어. 세 총독들과 싸우느라 힘을 모두 소진했거든. 그냥 죽으려고 했지."
"좋다. 시공의 문 설계도만 알려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전생에 8성 각성자임을 밝혀서일까? 블러드 공작이 김현을 다시 본 느낌이다.
"그냥 달라고?"
"그걸로 이번 일을 잊지."
"정말? 내 기억을 들여다보지는 않을 거야?"
"흠, 글쎄."
정신 방벽이 두꺼운 까닭에 블러드 공작이라도 김현 모르게 기억을 읽을 수는 없다. 김현이 협조하던가, 김현을 죽일 생각으로 제압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블러드 공작은 확답하지 않고 딴청을 피웠다. 여차하면 적당히 이것저것 핑계를 대고 추가로 더 파헤칠 생각이었나 보다.
"확실하게 거래하지. 난 당시 상황에 대해 모든 것을 공유할 용의가 있어."
"호오, 화통한데?"
"대신 나도 얻는 게 있어야지. 안 그래? 난 네 사도지만 부하는 아니라는 걸 명심해."
"쯧, 좋다. 그래서 요구 조건은 뭐지?"
블러드 공작이 걸음을 멈춘다. 몸을 돌려서는 김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심드렁한 척하는 태도. 그러나 속으로는 안달이 나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안다.
영원.
그 단어와 관련만 있어 보이면 그게 무엇이든 이성을 잃기로 유명한 것이 바로 블러드 공작이니까.
웃음이 나오지만 참았다.
대신 블러드 공작을 마주 본다.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
턱만 까딱이는 블러드 공작.
두 눈을 쏘아 보며 요구했다.
"지구의 독립을 불사계가 지지할 것. 그게 전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