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불사계 –2-
지구의 역사를 돌이켜보자.
강력한 제국주의 앞에서 약소국들은 여러 생존 방법을 모색했다. 그 중 하나가 외교력을 발휘해 강대국의 지지를 업어 독립을 유지하는 길이었다.
물론 대개는 끝이 안 좋았다. 실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덧없이 식민지가 되고 말았으니.
하지만 실력이 있다면?
최소한 한 세계의 공세 정도는 막아내는 게 가능하다면?
그때는 우방이 큰 도움이 되겠지. 그저 견제만, 아니 중립만 지켜줘도 남는 장사다.
"뭐, 나쁘지 않은데?"
블러드 공작이 쾌활하게 웃는다.
"불사 의회에서 한 표 정도는 던져주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야."
"불사 의회는 총 32명의 의원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맞아. 사대 마신께서는 이런 조그만 변방 차원계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으시니까 불사 의회에서 통과되면 지지 선언 정도는 해줄 거야."
"나머지 31명은 어쩌라고?"
"뭘 어쩌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아, 시공 회귀에 대해서는 알리면 안 돼. 그건 내 거니까."
욕심 한 번 많다.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아무리 시공 회귀에 대한 정보를 얻었어도 블러드 공작이 발 벗고 나서서 김현을 도와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입맛을 한 번 다시고 다른 것을 요구했다.
"그럼 몇 가지 편의만 더 봐주지."
"뭘?"
"네 저택을 통해 성혼을 거래하기로 했지? 그러지 말고, 불사계에서 직접 성혼을 거래할 권리를 줬으면 한다. 기왕이면 네 영지 내에서 상점 건물도 하나 내주고."
"흐음."
"시공 회귀에 대한 정보와 거래하는 것으로 의회에서의 1표는 너무 박하지 않아? 나도 네가 내 혈주라서 이 정도 조건을 제시하는 거지, 그냥 거래하는 거였으면 택도 없었어."
"흐흐흐, 그건 그렇지. 좋아, 기분이다. 네 조건을 모두 들어주지. 그래도 지구에 있는 내 저택을 통해서도 성혼 거래는 이뤄져야 한다. 요즘 실적이 많이 안 좋아서 별로 기분이 안 좋거든."
"그 실적, 내가 채워주지."
이야기는 잘 되었다. 남은 것은 불사계의 다른 의원들을 찾아가 1표씩을 얻어내는 건데......
'한 20표 정도만 확보해도 되긴 해.'
불사계의 세력은 크게 네 갈래로 나뉜다.
흡혈귀, 늑대인간, 시체, 해골.
먼저 흡혈귀부터 시작하자. 늑대인간은 흡혈귀와는 앙숙이니 피해가는 것이 좋고, 시체와 해골의 지지를 적당히 얻어내면 가능할 것이다.
어떻게?
성혼을 써서.
외계종들은 하나 같이 성혼에 사족을 못 쓴다. 그만큼 좋아하는 것이 산 자의 피와 살이지만 그것까지 쓸 생각은 없었다. 인류를 지키고자 시작한 일,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운운하며 쉬운 길을 찾다보면 타락은 한 순간이다.
"좋아, 거래 성립이다."
"좋다. 자, 여기!"
블러드 공작이 작은 보석 하나를 던졌다.
김현도 전생에 몇 번 본 적이 있다. 흔히 기억석이라고 부르는 물건으로, 특정 기간의 기억을 완벽하게 담는 게 가능했다.
굉장히 고급품. 김현이 8성 각성자였다는 사실을 감안한 성 싶다.
"당시 상황을 빠짐없이 기록해서 내게 줘, 아, 그리고 받고 나서는 봉인 좀 하자."
"내 기억을? 철저하기는."
"난 엄한 놈이 내 연구를 채가는 꼴을 볼 생각이 없어서."
"좋을 대로 해. 아, 대신 이번 일처럼 잡것들이 내 나라에 들어오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그 정도는 해주지."
바라는 건 많으면서 해주는 건 적다.
김현이 노골적으로 투덜거리자 블러드 공작이 깔깔대며 웃었다. 김현의 어깨를 어루만지더니 경고하듯 읊조린다.
"그리고 너도 내 기휘를 너무 범하진 말라고. 지금도 많이 참아주고 있으니까."
"명심하지."
"그럼 됐어."
휙 하고 사라지는 블러드 공작.
저절로 짤막한 한숨이 새어나온다. 블러드 공작이 여태 눈앞에 서 있었음에도 그 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6성과 8성의 차이지.'
자신이 8성이었기 때문에 잘 안다. 6성과 어느 정도 차이나 나는지.
뭐, 한 번은 올라갔던 길. 당시 어떤 길을 올라갔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다. 인류가 쌓아올렸던 지식과 시행착오에 대한 경험 역시 마찬가지다. 그걸 더듬어 올라가면 8성은 예상보다 빠르게 도달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블러드 공작의 얼굴이 형편없이 찌그러지겠지.
그걸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린다.
김현이 향하는 방향 끝에서, 일행이 나무 그늘에 앉아 김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현아!"
"김현 님!"
"회장님, 일은 잘되셨습니까?"
"아, 잘 됐어요. 블러드 공작과 타협을 했습니다. 좀 많이 뜯기기는 했는데요, 이번 일은 불문에 붙이고 상점도 하나 내어 주겠답니다."
"그냥 쉽게 넘어갈 자는 아닌 것 같았는데......"
"누가 쉽게 넘어갔대? 비싸게 값을 치렀어."
"비싸게?"
김애경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더니 바짝 다가와 김현의 후드티 목 부분을 확 젖혔다.
"왜 그래?"
"너 혹시 피 빨린 거 아냐? 자국은 없네."
"아 진짜, 누나!"
김현이 소리를 빽 지르자 김애경이 머쓱한 얼굴을 했다.
이세희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진짜 뭘로 거래하신 거예요?"
"미래 정보요."
"아......"
"제가 본 것 중에 블러드 공작이 탐낼 게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걸 탈탈 털어 넘겨주기로 했죠."
"휴, 다행이다."
"그렇지? 그러니까 내 목 좀 그만 봐."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시공 회귀에 대한 지식 또한 미래 정보에 속하니까.
김현은 손을 주머니에 넣어 기억석을 매만졌다. 그때마다 2118년의 기억이 물방울처럼 기억석에 스며들었다.
영화처럼 시각과 청각 정보만 넣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블러드 공작은 8성 수준의 완벽한 정보를 요구했다. 당시 김현이 흘려 감지했던 성혼의 흐름을 모두 기록해야 한다는 뜻.
'으, 이거 시간 꽤 걸리겠네.'
압도적인 처리 능력을 자랑하는 김현도 이걸 끝내려면 몇 시간은 걸리지 싶다. 그래서 블러드 공작이 김현을 내버려두고 먼저 떠난 것이겠지.
블러드 공작의 성 쪽을 향해 걷는다.
이곳은 정말이지 중세 유럽을 몹시도 빼닮아 있었다. 언덕 아래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쪽에 다가갈수록 떠들썩한 소음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갓 채취한 따끈따끈한 피 팝니다! 순결한 처녀의 피, 총각의 피, 텁텁한 부자의 피도 있어요!"
"귀부인의 것은 없습니까?"
"없기는요, 있지요!"
"순혈 인간의 것이죠?"
"예. 요즘 변방 차원 한 곳이 개방되어서 물량이 늘었어요. 혈은화 세 닢만 주세요."
"많이 파쇼."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자, 모두들 와보세요! 싱싱한 순혈 인간의 피에요, 피! 갓 차원의 벽 건너 온 거라 아주 싱싱합니다! 마법 창고에 수십 년씩 묵혀든 피 주머니와는 비교가 안 돼요! 어어, 거기 가는 여행자 분들! 어디서 오셨는지는 모르지만 상품 좀 보고 가시죠!"
뚱뚱한 흡혈귀가 일행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김애경이 걷다가 장승처럼 멈추어 선다.
흡혈귀가 진열해 놓은 피 주머니......
지구의 병원에서 흔히 보이는 혈액 팩이다. 개중에는 적십자 문양을 찍은 것도 많이 보였다. 어떤 경로인지 모르지만 지구에 있는 거점을 통해 불사계로 유입된 것.
으드득.
이를 가는 김애경.
꽉 쥔 오른손이 불그죽죽하게 변했다.
사고를 치기 직전 김현이 김애경의 손을 붙잡았다. 김애경이 핏발 선 눈으로 김현을 돌아본다. 불같은 눈을 마주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냥 보고 지나치자고?"
"이 정도는 약과야. 나중에는 아예 노예 거래가 일어나."
"너......"
"그러니까 유통 경로를 파악해서 거길 일망타진해야지. 불사계 상인들을 건드려서 뭐하게? 저 자만 족친다고 끝이 아니야. 여기 있는 자들을 다 죽이기 전까진 안 끝나."
"이익!"
김애경이 발을 쿵 하고 굴렸다.
대지가 울리며 괴로운 신음을 흘린다. 그 서슬에 주위의 흡혈귀들이 일제히 비틀거렸다.
"아, 뭐야!"
"쉿, 조용해. 이 정도면 성혈의 위계를 가진 분이 틀림없어."
"아니, 그런 분이 왜 여기까지 내려왔대. 성에서나 노시지."
엄격한 계급 사회.
흡혈귀들은 일행을 인간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환골탈태하여 강렬한 육향을 흘리는 김애경도, 천사를 반쯤 섞은 듯한 모습을 한 이세희를 보고도 그랬다. 흡혈귀 중에는 워낙 기괴한 족속이 많으니 그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 모양.
마을 중앙 광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흡혈귀 하나가 박쥐 날개를 펼치고 날아왔다. 마을 상공을 두어 바퀴 선회하자 흡혈귀들이 웅성대다가 소리쳤다.
"미네엘 님이다!"
"오오, 미네엘 님!"
"아름답고 강인한 분!"
김현과 비슷한 6성 등급 흡혈귀.
화려한 금발에 매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김현을 발견하더니 한 마리 독수리처럼 내리꽂힌다.
"으헉!"
"웃!"
놀란 것은 한스와 한철군 뿐.
김현과 김애경, 이세희는 빤히 미네엘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네엘이 일행 앞에 내려와 날개를 접더니 날카로운 눈빛을 보낸다.
"너희들인가? 놀랍군. 블러드 공작 전하는 절대 관대하신 분이 아닌데 그 분의 자비를 이끌어 내다니."
"능력이 있으니까."
"능력...... 훗, 변방 차원계의 미개한 원주민들 주제에 무슨?"
노골적으로 까내리는 말투.
김현은 슬쩍 존재감을 개방했다. 6성 혈왕 성혼이 왕관처럼 펼쳐지자 미네엘의 얼굴이 딱딱해진다.
"이건, 설마?"
당연한 소리지만 성혼마다 격차가 있다. 미네엘이 같은 6성이라고는 하나 실은 김현과 비빌 수도 없었다. 만약 둘이 맞붙으면 김현이 유령의 힘을 쓰지 않아도 금세 결판이 날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자존심을 챙기고 싶은 모양이다. 미네엘이 이를 박박 갈았다.
"미개한 원주민 주제에......"
"이봐, 심부름꾼."
"뭐, 뭐라고?"
"심부름을 왔으면 심부름이나 하고 가지 무슨 잔말이 많아."
미네엘이 노골적으로 김현을 쏘아본다.
그러나 시비를 걸지 못하는 건 김현이나 미네엘이나 마찬가지.
미네엘은 던지듯이 앙증맞은 장난감 집을 내밀었다.
"큭, 좋다. 이거나 받아라."
유치하게도 김현이 손을 내밀기 전 바닥에 떨어뜨리기까지.
김현은 피의 손을 생성하여 그걸 받았다. 미네엘이 날개를 펼치더니 김현을 흘겨보고는 성으로 돌아간다.
"재수 없는 흡혈귀네요."
"사실 흡혈귀들이 대부분 그렇죠."
"이거 귀엽긴 한데 뭐하는 거예요?"
머리를 갸웃하는 이세희. 그러더니 뭔가 눈치 챈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혹시, 이거?"
"예, 그런 겁니다."
대충 눈치를 챘나 보다.
손에 쥐니 장난감 집의 크기가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자리를 꽤 차지하는 물건이라 공터를 좀 비워야겠다.
김현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흡혈귀들이 조금은 호기심에 차서, 조금은 경계심에 차서 김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유독 시야에 들어온다.
광장 중앙에 가깝고, 지대가 살짝 높아서 눈에 잘 띄는 자리. 그리고 아까 호객 행위를 했던, 지구의 혈액 팩을 파는 상인이기도 했다.
텁, 텁, 텁.
상인을 향해 걸어간다. 두 손으로는 미네엘에게 받은 장난감 집을 농구공 굴리듯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저, 저기 성혈의 위계자님......"
"비켜."
"예? 예?"
"비키라고."
거만하게 턱만 까딱이는 김현.
상인이 억울하다는 눈빛을 보내지만 계급 앞에서 장사 없다. 김현이 슬쩍 피의 기운을 퍼뜨리자 기겁을 해서는 좌판을 걷고 도망쳤다.
김현이 흘린 피의 기운에서, 혈왕이라는 최상급 6성 성혼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아이쿠, 갑자기 허리가 쑤시네."
"흠, 피 저장고 문을 열어놓고 나온 것 같어......"
"중요한 약속이 있는 걸 깜빡했네!"
더불어 주위의 상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김현이 장난감처럼 굴리는 집 모형을 보아하니 자기들 자리도 차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충분한 자리를 확보하고 장난감 집을 휙 하고 던졌다.
커진다.
확대된다.
장난감 집은 삽시간에 2층 양옥으로 변했다. 붉은 벽돌로 만든, 성 아래 마을의 알록달록한 건물들과 잘 어울리면서도 눈에 확 띄는 건물이었다.
"좋아, 시작하지요."
"하루 만에 다 팔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요. 성혼은 어느 세계에서든 최고의 인기 상품이니까요."
"그런 것치고는 상인들이 많이 안 팔고 있어서 그게 마음에 걸립니다."
"성혼이 그렇게 흔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성혼 산지에 사니까 많게 느끼는 거지요, 여기에선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혈은화를 산처럼 쌓아둬도 못 구할 때가 많아요. 간판 걸고 시작하지요. 장사는 전적으로 한스 사장님한테 맡깁니다."
"예! 기필코 매진시키고 말겠습니다!"
간판을 걸었다.
내용은 단출했다.
[진혈 위계 성혼 팝니다 : 1개당 혈은화 1만 닢]
블러드 공작의 저택을 통하면 이 가격은 못 받는다. 그들이 받는 수수료가 있으니까.
자리를 빼앗겼던 상인들이 주춤주춤 모여들었다. 그들이 가장 먼저 관심을 가졌다.
"진혈 위계 성혼이 고작 혈은화 1만 닢이라고?"
"싼데!"
"사기는 아니겠지?"
"그럼 판독하면 그만이지. 어험, 손님 받아라!"
한스는 능숙하게 흡혈귀들을 응대했다.
흡혈귀들은 한스를 보고 괴상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저 뒤에 있는 셋은 아니지만, 앞에 나온 한스와 한철군은 아무리 봐도 인간임에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사다 팔기만 해도 배는 남을 장사가 코앞에 있다. 이때 점원이 흡혈귀든 인간이든 무슨 상관이냐?
"여기 진혈 위계 성혼 하나 주시오!"
"예, 손님. 여기 있습니다."
"응? 천상계 것이네? 불사계 것은 없소?"
"죄송하지만 손님, 저희도 떨이 판매 중이라 무작위로 섞어 드리고 있습니다. 불사계 성혼을 사시려면 한 번 더 사보시지요."
"제길, 자본이 부족한데...... 좋소, 여기 10개 더 주시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성혼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나중에는 마을 흡혈귀들이 모두 몰려나오고, 성에서 날개를 펼친 미네엘이 급히 김현을 찾을 정도.
"비켜라, 비켜!"
김현이 그러했듯 흡혈귀들을 내치고 급히 머리를 들이민다.
"100개, 당장!"
"여기 있습니다!"
한스가 흥겹게 성혼 100개를 꺼내어 미네엘에게 주었다.
성혼을 본 미네엘의 눈에서 탐욕의 빛이 반짝였다. 당장 그걸 받아서는 소중히 품에 안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첫날 장사는 그야말로 대성황.
가져온 5성 성혼 1만 개가 채 10시간도 안 되어 동이 났다.
그리고 혈은화......
"우와."
"세상에."
한스와 한철군이 입을 쩍 벌렸다.
혈은화 1억개.
그걸로 이루어진 산이 일행 앞에서 찬란한 빛을 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