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불사계 –3-
김현의 마음도 덩달아 푸근해진다.
이걸로 뭘 하면 좋을까?
불사계의 보물을 사서 지구에 팔면 안 되냐고?
그건 기본. 그렇게만 해서는 정말로 돈을 벌 수 없다. 이 자본으로 더 불릴 생각을 해야 한다.
"한스 사장님. 상인들한테 피의 정수랑 죽음의 정수를 있는 대로 구입하세요."
"예,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지구에서 그런 게 팔릴까요?"
"지구에서 팔 게 아닙니다. 악마계에서 팔 생각입니다."
"헛, 악마계에서요?"
악마계에는 언제 판로를 뚫었냐는 얼굴.
블러드 공작에게 소개장이라도 받아 가면 될 일이다. 기억석에 기억을 모두 주입하고 갖다 주면서 부탁하면 되겠지.
안 그래도 한스가 성혼을 파는 동안 기억석에 기억 주입을 끝냈다. 아직 귀환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이걸 갖다 주고 오는 것이 좋겠다.
"그럼 다 사들이고 있어. 사기 안 당하게 조심하고."
"으, 제가 시세를 잘 모릅니다만......"
"거래 이번만 하고 말 거면 사기 치라고 당당하게 말해. 이곳 시간으로 1주기 뒤에 또 찾아올 건데 그때 거래하기 싫으면 이득 많이 보라고 일러두란 말이야."
"아하, 알겠습니다."
"1주기라는 게 뭐야?"
"혼력이 크게 한 번 요동쳤다가 가라앉는 걸 1주기라고 불러. 우리 식으로 치면 1달이라고 할까? 지구 시간으로는 열흘 정도 돼. 왜, 열흘마다 한 번씩 대침식이 일어나잖아."
"아......"
"다른 세계에서도 주기로 시간의 흐름을 따지니까 얼른 익숙해지는 게 좋아."
"알았어."
"나 성에 다녀올게."
상점 밖으로 나와 가만히 땅을 박찼다.
김현의 몸이 하늘 높이 솟구친다. 항상 가지고 다니던 천 자락이 펼쳐지며 망토처럼 늘어졌다. 이어 종이비행기가 되어 김현을 태우고는 새처럼 날아갔다.
그 괴악한 모습에 흡혈귀들이 과연 성혈이 어쩌고 하며 감탄해 한다. 김현은 코웃음을 치고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원체 거리가 가까운 탓에 몇 분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덜컹, 덜컹.
성에 날아들자 문 수십 개가 일제히 열린다.
참 기이한 구조였다. 문을 모두 통과하면 성 외부에서 성 가장 깊은 곳, 블러드 공작의 거처로 바로 이어지는 것이다.
천 자락을 거두고 걸어가자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누구지?"
"성혈의 위계를 가진 분이시네."
"공작 전하의 손님인가 봐."
"직선의 문을 모두 개방하시다니...... 백작님들 오실 때나 그러시던 거잖아."
직선으로 뚫린 저 안에, 블러드 공작이 먼저 앉아 포도주 잔을 희롱하고 있었다.
김현이 들어서자마자 시녀가 은 쟁반에 은 술잔을 바친다.
하여간 악취미.
저릿한 감촉을 음미하며 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글거리는 쾌감이 태양처럼 올라오다가 유명석의 차가운 제지에 흩어졌다.
"다 됐나 보지?"
"맞아."
기억석을 주머니에서 꺼내 밀어주었다. 블러드 공작이 그걸 받더니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실이었군."
"그럼 거짓말이었겠어? 나도 언령의 무거움을 아는 사람이야."
"큼......"
블러드 공작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김현을 본다.
왜 그러는 줄 알 것 같았다.
김현이 전생에 8성 각성자라는 사실 때문이겠지.
이미 간 길이다. 간 길을 다시 오르는 것은 쉽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렵지만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김현을 현재의 6성 각성자로 대접해야 하는가, 아니면 미래의 8성 각성자로 대접해야 하는가?
단순한 불사계 각성자라면 피의 지배를 강화해서 대자쯤으로 만드는 것도 좋다. 그러나 김현의 성혼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
모르는 척 용건을 꺼냈다.
"블러드 공작. 내가 악마계에 가볼 생각인데 소개장을 써줄 수 있어?"
"소개장을? 악마계에는 왜?"
"나도 차원 무역을 해보려고."
"차원 무역이라......
블러드 공작도 휘하 흡혈귀들을 통해 쏠쏠한 이득을 보고 있다. 판매하는 것은 피의 정수나 불사계 특산의 여러 보물들. 거기에 숟가락 하나 올리겠다는 건데 썩 나쁘게 들리진 않았다.
'굳이 막을 필요는 없겠지.'
경쟁자가 느는 건 좋지 않으나, 이 시공 회귀자를 통해 얻을 게 많이 있으니까.
그래, 조금은 밀어줘도 좋겠다. 이 자가 정말로 미래의 무력을 회복한다면 거기서 얻는 영원에 대한 단초도 무척 많을 테니까.
"좋아. 써주지."
블러드 공작이 손짓을 한다.
시녀 둘이 저마다 근처 책상에서 핏빛 두루마리와 하얀 만년필을 꺼내왔다. 블러드 공작이 만년필을 쥐고는 두루마리에다가 뭐라고 팍팍 갈겨쓴다. 이어 오른손 엄지를 두루마리에다가 꾹 눌렀다.
구어어어.
괴상한 소리가 들리며 두루마리에 빛나는 인장이 찍혔다.
블러드 공작을 상징하는 문장.
"이걸 가져가. 어디 가든 이걸 보여주면 박대하는 자들은 없을 거다. 아, 그렇다고 재수 없는 족속들에게 가진 말고. 무슨 소린지 알지?"
"당연하지."
불사계는 그 속성 상 악마계와 친숙하고 유명계와 서로 경원시하면서도 곧잘 발을 맞추는 편이다. 그리고 거신계나 시원계와도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다.
혼돈계? 거긴 모든 세계의 적이니 예외. 이밖에 천상계, 용왕계, 환수계, 요정계 같은 곳은 아예 봉인해놓고 꺼내지 않는 게 좋다.
'악마계로 가서 피의 정수와 죽음의 정수를 팔자. 그리고 고통의 정수와 절망의 정수를 사야지.'
죽음의 정수는 유명계에서도 인기가 높다. 하지만 김현은 거기서 현상 수배 당하는 처지이니 섣불리 방문하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사실 김현이 악마계에 가려고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차오 박사가 악마계의 암상인과 거래해서 무법성으로 가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했지.'
무법성.
떠돌이들의 성지.
모든 방랑자들이 머물고, 탐욕과 광기에 찬 연회를 벌이며, 한 줄기 정보에 목을 매며 약탈할 세계로 떠나기 전 잠시 머무는 틈새 차원.
차오 박사는 이곳에서 많은 지식을 수집했다. 그 지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신기술을 고안했지. 그 중 하나가 김현이 한동안 신세를 졌던 99륜이었다.
"그럼 다음에 보지."
"흠, 슬슬 때가 농익은 것 같은데 등좌하는 게 어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서."
등좌, 즉 승급을 말하는 거다.
"잘 해 보라고. 성공하면 기억석에 담아오는 것 잊지 말고."
"그러지."
손을 흔들며 블러드 공작의 응접실에서 빠져나왔다.
블러드 공작은 이번에도 직선의 문을 모두 개방하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 길을 따라 걷다가, 우연히 한 흡혈귀와 마주쳤다.
"흐응......"
미네엘.
블러드 공작이 선물한 상점을 가져왔던 흡혈귀.
푸른 눈동자로 김현의 위아래를 샅샅이 훑었다. 그러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톡 쏘아붙인다.
"공작 전하께 피라도 헌상 하셨나 봐? 변방 차원 원주민 주제에 직선의 문도 이용하고, 아주 팔자가 피셨네, 피셨어."
"글쎄, 그런 사람에게 성혼 100개나 사간 주제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뭐야?"
"비켜라. 문도 제대로 못 지나가는 흡혈귀에게 쓸 시간은 없다."
"이익! 이 잡종 주제에......"
"그래? 그럼 그 잡종보다 못한 흡혈귀는 그냥 내다 버려야겠네. 피 주머니로도 못 쓰겠어."
"가, 감히!"
미네엘이 눈을 부릅떴다. 자제력을 잃었는지 송곳니가 순간적으로 튀어나오고 눈꼬리가 길게 찢어진다.
하지만 거기까지.
직선의 문을 두 차례나 개방할 정도로 관심이 쏠린 김현을 어쩌지는 못했다. 그저 뒤에서 으득으득 이만 가는 게 전부.
"쯧."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혀를 차주었다. 턱을 들고는 위풍당당하게 미네엘의 앞을 지나간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성격 같아서는 목을 잡아다 벽에 쳐 박고 싶지만 참았다. 시공 회귀를 밝히고 블러드 공작과의 관계가 잘 풀리고 있는데 거기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으니까.
'오래 참을 필요는 없겠지.'
미네엘의 시선을 느끼며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흡혈귀들은 태생적으로 잔인하고 인내심이 없는 자들. 미네엘은 분명 조만간에 사악한 마수를 뻗어올 것이다.
상점으로 돌아와서는 느긋하게 휴식을 즐겼다. 나머지 시간은 한스의 독무대였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피의 정수와 죽음의 정수를 수집했다.
"아, 피의 정수는 싼데 죽음의 정수는 왜 이리 비쌉니까?"
"비싸다니! 부정(不淨)의 마신 휘하 제일 귀족인 운트 공작 전하의 영지에서 생산된 걸 직접 가져온 거요. 모르면 말을 말아야지, 에잉!"
"이게 더 예뻐 보이는데요."
"하! 보는 눈 정말 없군. 그건 역천의 마신 휘하 귀족 분의 영지에서 생산된 거니 당연한 거 아니요? 밖이 아니라 안을 봐야지, 안을!"
부정의 마신은 좀비와 듀라한 같은 시체 계열 언데드를 지배한다. 역천의 마신은 스켈레톤과 리치 같은 해골 계열 언데드를 지배하고.
김현이 슬쩍 보니 운트 공작의 영지에서 생산됐다는 죽음의 정수가 더 많은 힘을 품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한스가 배에 힘을 주고는 말했다.
"그래서 얼마요?"
"아니, 진작 말했잖수. 이거는 혈은화......"
"그래서 지금 갖고 있는 죽음의 정수 다 해서 얼마냐고요."
"어허?"
"물량 다 털 테니, 조금 깎아주시지?"
흡혈귀 상인이 뒤를 보고는 침을 꼴깍 삼켰다.
여전히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하는 혈은화의 산이 그곳에 있었다.
흡혈귀 상인이 정신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좋아! 다 가져가시오! 나도 이문은 최소한만 남길 테니까."
"흐흐, 잘 생각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합니다."
"그야 이를 말이요?"
인간과 흡혈귀가 손을 강하게 붙잡는다.
돈, 이득이라는 것이 두 종족을 결속시키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윽고 혈은화 1억 개를 모두 소모했다. 대신 얻은 피의 정수와 죽음의 정수도 엄청났다. 성혼을 가져왔던 보스턴 가방으로는 안 되어서 김현이 임시로 천 자락을 변형시켜 커다란 트럭을 만들었어야 했을 정도였다.
"1시간 전이야."
김애경이 경고하듯 말했다.
"가자."
트럭이 덜컹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중세 유럽을 연상시키는 주위 광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지만 신기해하는 흡혈귀는 없다. 이 모습은 단지 블러드 공작의 취향일 뿐, 여기 있는 흡혈귀들 모두 지구를 뛰어넘는 과학 기술에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한스가 트럭 뒤에 걸터앉아 뒤를 쳐다 보았다.
"조금 이상합니다."
"뭐가 말이죠?"
"흡혈귀들이요. 그저 괴물일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그 말에 서늘하게 웃는 김현.
"착각입니다."
"그, 그럴까요?"
"그럼요. 블러드 공작의 영지가 아름다운 것은 블러드 공작의 취향이 그쪽이라 그런 거지, 절대 그들의 내면이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당장 시장에서 혈액 팩도 돼지고기 팩처럼 걸어놓고 팔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블러드 공작이 아니라 다른 귀족 흡혈귀의 영지에 갔으면 못 볼꼴을 많이 봤을 겁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갈고리에 꿰어서 걸어놓고 파는 곳도 있어요."
"헉, 서, 설마요."
"사실입니다. 저들이 피 주머니 창고 운운하는 건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그건 우리 관점으로 보면 감옥이에요. 우리와 비슷한 인간종, 혹은 여러 아인종들이 묶여서 살아 있는 혈액 공급처 역할을 하고 있지요."
"그럴 수가......"
한스가 몸을 부르르 떤다.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며 거래하던 상인들이 뒤로는 그리 잔혹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한 모양.
따끔하게 일러주었다.
"조만간에 확인할 일이 있을 겁니다. 거래하되, 신뢰를 주고받되 흡혈귀들과 우정을 나누지는 마세요. 그들은 어디까지나 흡혈귀이고, 우리와는 친해질 수 없는 사이니까."
거래는 해도 우정은 맺지 못한다. 그것이 인류와 외계종의 좁힐 수 없는 간극.
듣고 있던 이세희가 푸념을 늘어놓는다.
"옛날이야기처럼 다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은 힘들까요?"
"불가능합니다. 외계종과 우리는 완전히 다른 종족이니까요."
"그래요......"
예정된 시간, 차원문이 열릴 곳에 도착했다.
차원문을 통해 지구로 돌아왔다.
제법 적응 훈련을 마친 서경태가 김현을 맞이했다. 그리고 둘, 피터와 에일리도 그 옆에 서 있었다.
"탈각에 도전한다고?"
"네."
긴 고민을 거쳐, 둘도 6성 승급을 마음먹은 것이다.
덕택에 김현만 바빠졌다.
둘의 영육 개변 재료가 될 외계종도 잡아오고, 사냥을 해서 6성 성혼도 마련하고......
탈각은 성공적이었다.
이로써 지구에 6성 각성자가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동맹 각성자들도 탈각시키면 두 자리 수가 되겠지.
김현은 흐릿하게 웃었다.
'잘 되고 있어.'
그리고 오늘, 또다시 차원문을 넘는다.
목적지는 악마계.
그 광대한 세계에서도 가장 화려하다 알려진, 태초의 요부 릴리스가 다스리는 타락과 환락의 도시 흰금 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