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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헌터사-128화 (128/200)

# 128

흰금 궁전 –1-

한 번에 휙 날아가진 못했다. 흰금 궁전에 백혈탑의 차원문과 연계되는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블러드 공작에게 좌표 같은 걸 구하면 안 되냐고?

안타깝게도 김현의 차원문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건너편에서 닻 역할을 할 게 필요했다. 누군가 중계해주거나 김현이 직접 건너가서 작업을 해야 한다.

더구나 백흔혼에게 한 번 된통 당한 다음 외계종을 더욱 믿지 못하게 된 참이다. 시간이 좀 걸려도 바닥을 두드려 가며 건널 생각이었다.

"저곳이 흰금 궁전이에요?"

그리하여 몇 번의 시도 끝에야 흰금 궁전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말만 궁전이지 하나의 도시.

화려한 백금 지붕이 온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중동 지방의 둥근 지붕과 비슷하다. 지붕마다 온갖 악마가 새겨졌는데 신기하게도 추악하거나 삿되지 않고 천사 조각을 보듯 아름답고 성스럽기까지 했다.

하늘은 열띤 분홍빛이다. 이상하게도 분홍 하늘을 올려다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한스나 한철군은 벌써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정신 차려요."

"어......"

"휴, 이 분들은 뭐라도 장비를 만들어줘야겠어요."

이세희가 손을 휘저었다. 황금색 빛 무리가 일행을 한 번 감싸자 얼이 빠져 있던 둘이 화들짝 놀랐다.

"으헉!"

"뭐, 뭡니까?"

"정신 차리세요. 저긴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매혹합니다."

"어쩐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멀쩡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원 6성으로 변했으니까.

우선 피터.

서경태와 비슷했다. 어둠 대신 빛이라는 것만 달랐다. 전신이 살짝 반투명해졌고, 원래도 둥그렇던 이목구비가 더욱 동그래졌다. 키가 작아져서 가끔 투덜거리곤 했다. 여기도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몸이 에너지체로 변한다는 것까지 똑같았다.

에일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몸 이곳저곳에 물고기 비늘이 조금씩 돋았다. 귀는 뾰족뾰족 각질화 되었고, 아래쪽에는 아가미도 생겼다. 여기까지 들으면 괴물 같지만 피부는 더욱 고와지고 머리칼은 찰랑거려서, 호수 같은 눈과 어울려 특이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더 이상 인간으로는 볼 수 없는 일행. 대신 인간을 초월한 힘을 얻었으니 얻은 게 있으면 잃은 게 있다고 하겠다.

"여긴 분위기가 다르네요."

"그렇지? 그래도 안쪽으로 들어가면 마찬가지야. 여기도 악마들이 사는 곳이니까."

"으...... 악마보다는 흡혈귀들이 나은 것 같아요."

김현 일행은 불사계와 악마계를 번갈아 오가는 중이다. 자연히 두 세계를 비교하게 되었다.

흡혈귀는 피를 탐한다. 악마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힘을 먹는다. 가학적인 취미가 없는 흡혈귀라면 피만 빨면 그만이지만, 악마계는 어딜 가든지 절망과 고통이 산재해 있었다.

"가죠."

김현이 변형시킨 초대형 트레일러가 말끔하게 닦인 도로를 달렸다. 여러 차례 불사계에서 거래해서 구한 피의 정수와 죽음의 정수가 그득하니 쌓여 있었다.

"오호."

"이건 웬 떠돌이들이지?"

여지없이 날파리들이 달려든다.

날개를 활짝 편 악마들. 전형적인 생김새의 악마도 있고 털북숭이에 새의 날개를 가진 악마도 있다. 똑같은 점이라면 다들 사악한 힘을 줄기줄기 뿌리고 있다는 것.

"꺼져!"

서경태가 하늘로 솟구쳤다. 거대한 선이 하늘에 교차하며 악마들이 단숨에 썰렸다. 피처럼 쏟아지는 어둠 사이로 흩어지는 성혼을, 서경태가 잽싸게 가로채어 돌아왔다.

피터가 부러운 얼굴을 했다.

"좋겠다. 나도 힘 좀 쓰고 싶은데."

"참아. 악마들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아닌 게 아니라 이세희와 피터는 성혼 발현을 최소화하는 중이다. 조금 전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흰금 궁전으로 다가갈수록 날파리들이 덤볐다. 대부분이 3성, 4성 수준의 허접한 것들이다. 그것만으로도 한스와 한철군은 오금이 저려했지만.

"으으, 빨리 4성이 되어야겠습니다."

"불사계에서나 4성 정도면 잘 안 건드리지, 악마들은 그런 것 없습니다. 5성까지 올라오세요."

"그래도 저번까진 이 정도로 심하지 않았잖습니까?"

"흰금 궁전에 머물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거든요. 그걸 마련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환락 도시라 물가가 비싼 모양이죠? 라스베가스처럼?"

"비슷하긴 해도 저긴 훨씬 더 심합니다. 체류비가 없으면 바로 추방이에요. 그래서 인근 틈새 차원에 암흑가가 크게 형성되어 있지요."

김현의 목적지도 바로 그곳.

차오 박사가 만났다는 암상인은 아직 없을지 모르나, 비슷한 정보를 사고파는 무리는 반드시 존재하겠지.

어느덧 흰금 궁전 가까이 도착했다.

화사한 흰 대리석 성벽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도시 전체가 바닥에 분홍색 마법진이 그려진 채 허공에서 부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성문으로 이어지는 무지갯빛 다리가 걸려 있었다. 다리 아래로는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땅이 보이지 않았다.

이 아름다운 광경에 김애경이 헛웃음을 짓는다.

"여기 악마계 맞아? 천상계 아냐?"

"릴리스 취향이 이래. 겉모습에 속지 말고 안을 봐. 저곳은 환락의 도시이고 정신 빼놓고 다니면 타락해서 악마계의 주민이 돼."

"조심해야겠다."

"안에 들어가서 차원 호텔 하나 잡자."

"차원 호텔?"

"차원문 열 수 있는 곳이야. 거기서 귀걸이 하나씩 주는데 여기 있는 동안은 반드시 차고 다녀야 해. 안 그러면 경비들이 추방시킨다."

"경비쯤이야 잡아 족치면......"

"쉽지 않아. 6성이 제법 많아서."

"아, 그럼 차고 다닐게."

트레일러를 몰고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문은 금과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는데 화려함이 상상을 초월했다. 보는 순간 눈이 멀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

열린 문을 향해 달려가자 저절로 시간이 느려지며 트레일러의 속도가 떨어진다. 그리고 짙은 안개가 끼며 음침한 목소리가 일행의 머리에 울려 퍼졌다.

[통행료.]

"가져가라."

[그러지.]

트레일러가 한 차례 크게 덜컹거렸다.

한스가 뒤를 돌아보더니 소리쳤다.

"노, 놈들이 상품을 빼갑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시커먼 촉수가 트레일러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상태다. 더욱이 피의 정수와 죽음의 정수를 마구 집어다 빼내고 있었다.

김애경이 잔뜩 분개하여 두 주먹을 쥐었다.

"저것들이......"

"그만 둬. 이게 통행료야."

"뭐?"

"성문을 한 번 통과할 때마다 화물의 1/10을 통행료로 내야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악마계에서는 아주 저렴한 비율인데? 마몬 같은 악마는 절반을 통행료로 받기도 해. 사실 이것 때문에 여기가 이렇게 흥한 거지. 세금이 적으니까."

"그......"

"그래도 몸에 걸친 것까지 셈하지는 않잖아?"

진정하라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김애경이 한숨을 쉬더니 허탈한 눈으로 정수를 빼가는 촉수들을 바라본다.

"저걸 어떻게 모았는데......"

"괜찮아. 더 불리면 되지."

"으, 역시 세상 장사 중에 제일은 땅 장사라니까. 릴리스라고? 궁전 하나 지어놓고 돈을 다 빨아먹잖아."

"잘 아네."

"두고 봐. 나도 언젠가는 차원 부동산 장사를 하고 만다."

"하하하."

김현은 그저 웃어 넘겼다.

이때쯤 통행료 징수도 완료되었다.

[통과.]

촉수가 사라지고 시간의 흐름도 정상으로 돌아갔다. 트레일러가 다시금 기운차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세희가 성문을 자세히 관찰하더니 주위를 살핀다.

"악마는 안 보이네요?"

"성벽에 깃든 악마에요. 7성 등급이라 우리가 간파하기는 힘들죠."

그것은 김현도 마찬가지. 김현에게 혼멸 성혼이 있다고는 하나 7성 등급 은신 계열 성혼을 꿰뚫어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니까.

악마계에 와서는 처음 조우하는 7성 악마다. 일행은 숨을 죽이고 성벽을 통과했다. 그러자 화려한 흰금 궁전 내부가 펼쳐진다.

"아!"

"대단하네."

이것은 대리석과 금과 보석의 향연.

보이는 모든 건물이 흰 대리석이다. 여기에 금으로 벽화를 그려 놓았다. 벽화 주요 지점마다 보석이 장식되어 있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분홍빛이 금과 보석을 반짝이게 만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전신이 노곤해진다. 악마가 네 쌍의 날개를 펼쳐 재주를 넘고, 흉악한 마수가 금색 채찍의 지시를 따라 온갖 묘기를 부렸다.

늑대 인간, 거인, 해골 기사, 미이라가 그걸 구경하다가 박수를 쳤다. 악마가 우아하게 절을 하자 까만 막대 같은 걸 던진다. 악마계의 화폐, 지옥돌이었다.

"이건 진짜......"

에일리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피터가 눈을 빛내며 김현에게 묻는다.

"여기 원래 악마만 사는 곳 아니에요?"

"흰금 궁전은 전 차원계에서 환락으로 유명한 곳이거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쾌락을 제공해. 그러니까 관광하러 오는 외계종도 많지."

"와아......"

"흰금 궁전이라는 이름에 딱 맞네요."

길은 널찍하고 복잡했다. 위아래로 마구 얽혀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트레일러가 제멋대로 질주하고 있으니 신기한 일이었다.

이 또한 공간 왜곡.

서로 만날 의도를 가지지 않으면 영원히 교차하지 않는다. 흰금 궁전의 여행자들은 자기 편할 대로 어디든지 가면 됐다.

"거기 여행자 분들! 호텔을 찾으십니까? 저희 '서큐버스가 다 빼줘'로 오세요!"

"서큐버스는 한 물 갔죠! 엘프입니다, 엘프! 싱싱한 엘프가 있어요!"

"어마, 다양한 출신 분들이 계시네. 그럼 우리 호텔로 오셔야죠! 일만 명의 무희가 대기하는 곳! 어떤 차원계, 어떤 종족이든 맞춰드려요!"

여긴 기본이 성애 서비스인가 보다. 김애경과 이세희, 에일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반면 서경태와 피터는 귀를 쫑긋 세우고 호객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조심해. 잘못하면 성병 걸린다."

"예? 성병이요?"

"응. 그 중에 최악은 릴리스가 퍼뜨린 거지. 잘못하면 악마로 종족 변환된다니까?"

"으윽, 전 저런 거 관심도 없어요."

피터가 가장 먼저 나가떨어졌다. 아닌 척 하면서 귀를 기울이던 한스와 한철군도 마찬가지다.

종족을 변화시키는 성병.

몇몇 종족은 일부러 그 성병에 걸리기 위해 질펀한 밤 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지구와 비슷한 변방 차원의 종족들이 그러곤 했는데, 그렇게 악마계로 이주해봐야 영원토록 노예의 굴레를 벗어나질 못한다.

'저곳이구나.'

김현은 옛 기억을 더듬어 궁전 한쪽으로 달렸다.

궁전에서도 가장 외곽. 지구의 호텔보다는 훨씬 화려하지만 흰금 궁전의 다른 호텔보다는 확실히 허름한 그곳.

확실히 일행의 반응도 뜨뜻미지근했다.

"저기가 목적지야?"

"돈도 많은데 왜......"

김현은 씩 웃었다.

홱 지나쳤다. 좌회전하여 언덕을 오르자 하나의 성과 같은 호텔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여기 좋다!"

"들어가서 쉬고 있어. 한스 사장님은 정수 팔 곳 알아보시고요. 이 근처에 널린 게 상점이니까 호텔 지배인한테 물어보면 될 겁니다. 귀걸이만 차면 안전은 확보되니까 궁전 안에서는 혼자 다녀도 좋아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요."

"예, 사령관님."

"아, 다들 다른 건 몰라도 여기서 술이랑 담배는 하면 안 됩니다."

"도박은요?"

"적당히 하는 건 괜찮아. 아, 돈 잃은 건 나중에 배당에서 다 깐다."

"쩝."

"술이랑 담배는 왜 안 되는데요? 도박이 더 위험할 것 같은데......"

"여기 도박은 철저히 정확하게 돌아가거든요. 최소한 속임수도 안 쓰고, 매혹이나 유혹도 안 걸어요. 술이랑 담배는 우리가 아는 그런 게 아니고 마약입니다. 지구의 코끼리는 한 모금만 마셔도 즉사할 정도로 독하죠."

"으엑."

그제야 이세희가 질색을 하며 물러선다. 한스나 한철군은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 정도 독한 약이라면 이 둘이 마셨다간 사경을 헤매야 할 테니.

호텔에 등록부터 했다. 피의 정수와 죽음의 정수를 상당히 많이 줘야 했다. 그래도 앞으로는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할 수 있으니 나쁜 선택은 아니다.

김현 혼자 떨어져 나와 아까 보았던 허름한 호텔로 향한다.

차오 박사의 일기에서는 여기서 암상인을 만났다고 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비슷한 부류가 많이 보였다고.

당시 암상인이 쓰던 접선 암호도 기록되어 있었는데 과연 통할까? 이들에게도 까마득한 과거 시점일 텐데.

한 번 써보자.

"선량함에 찌든 마수 뿔차 한 잔, 정의에 물든 악마 간 한 근, 천상의 태양광을 듬뿍 받은 지옥초 담배 한 개비."

호텔의 레스토랑에 들어가 주문을 하자 악마 웨이터가 미친 놈 보듯이 본다.

"그런 건 없는뎁쇼?"

"없으면 만들어 오면 되지."

"흠...... 주방장님께 여쭤 보리다."

웨이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안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붉은 피부의 뚱뚱한 악마가 씨근덕대며 튀어나온다.

"이 사기꾼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그 낯짝을 들이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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