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헌터사-130화 (130/200)

# 130

릴리스

애첩.

릴리스라면 전 차원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미녀다. 사실 릴리스의 애첩이 되는 것이 소원인 악마도 꽤 많다.

하지만 김현에게는 절대 피하고 싶은 일.

일단 애첩이 되면 릴리스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릴리스의 하렘에서 릴리스만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눈이 굴러간다.

'어쩌지?'

당장 눈앞의 경비병들은 기껏해야 4성, 5성 급. 김현이라면 혼멸 성혼을 동원해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다.

그 뒤가 문제.

이곳은 릴리스의 권역. 권역 안에서 릴리스는 거의 신과 같은 위세를 뽐낸다. 반항하다가 릴리스가 눈길 한 번이라도 주면 일행 전원이 위험해진다.

할 수 없지. 여기서는 통제에 따르는 수박에.

순순히 발을 내밀었다.

"좋아, 따라가지."

그 한 마디로 일행의 행보가 결정.

김애경과 이세희가 김현을 한 번 보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김현이 그런 것처럼 발을 내민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왕님께서는 나만 데려오라고 하지 않으셨나?"

슬쩍 떠보았으나 악마들은 완고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데려오라는 명령이시다."

'제길......'

그대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몰래 피를 끓여 블러드 공작에게 연락을 해보았으나 먹통. 평소에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생각하면 누군가 손을 써둔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릴리스의 애첩이 되어야 하나?

자력으로 현재 상황을 타계할 방법은 안 보인다. 릴리스에게서 해방되려면 블러드 공작의 도움이 필수였다.

'이렇게 시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끌려가면서, 김현은 흐리게 웃었다.

안 그래도 시도할 기회만 엿보고 있긴 했다. 최소한 한 달 이내로 시도할 생각이었지. 필요한 재료도 챙겨가지고 다녔고.

그걸 이렇게 극한 상황에서 하게 될 줄이야......

'운명의 봉우리나 죽은 심연이었으면 좋을 걸.'

무리를 해서라도 블러드 공작에게 두 장소의 이용 권리를 얻을 걸 그랬나?

아서라. 짐승의 마신이나 부정의 마신이 허락하지 않을 거다.

악마들은 일행을 끌고 흰금 궁전 중심으로 날아갔다.

릴리스의 하렘이 있는 곳.

역시나 엄청나게 화려했다. 눈이 닿는 곳마다 보석 없는 곳이 없었다. 휘황한 광채가 눈을 사로잡고 정신을 혼란시켰다. 끈적끈적한 신음이 울려퍼지며, 온갖 종족들이 상상치도 못하는 형태로 성행위를 즐기고 있었다.

단지 육체를 결합시키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수십 쌍이 엉켜 기이한 촉수로 서로를 연결하고 배덕감을 맛보았다. 서로의 육체를 반만 교환하여 즐기는가 하면 이들의 행위를 구경하며 기계에 제 성기를 넣고 수음하는 자도 보였다.

한 다크 엘프가 자기 남성기를 자기 여성기에 넣은 채 음탕한 질문을 던졌다.

"어머, 여왕님의 새 노리개인가 봐?"

선두에 선 악마가 주의를 준다.

"닥쳐라, 노리개. 애첩이 되실 분이다."

"정말? 하아, 신기한 냄새네. 어째서 흡혈귀와 유령의 힘이 동시에 느껴지지?"

다크 엘프가 코를 벌름거렸다. 그리고 열기에 가득 찬 눈으로 김현을 쳐다본다.

"하렘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랑 한 판 어때? 쑤시면서 쑤셔지는 재미가 각별하다고."

다크 엘프가 음탕하게 허리를 흔든다.

종족 특성 상 아름답긴 하지만 기본은 남성체. 거기에 억지로 여성체를 쑤셔넣었는지 반쯤 부푼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역겹기만 하다.

"됐어."

"에이, 비싸게 굴지 말고. 형씨들도 같이 즐기면 어때?"

"닥쳐라!"

악마 하나가 창을 거꾸로 잡고는 다크 엘프의 목구멍에 쳐 박았다. 다크 엘프가 창에 꿰인 물고기처럼 푸득거린다. 눈을 까뒤집으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하아, 하악, 좀 더......"

"이 노리개 새끼가?"

"대충 꿰어놓고 가자. 늦으면 여왕님께서 화내신다."

결국 배가 관통 당해 벽에 꽂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쾌락에 겨워 침을 흘려대니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것 같았다.

환락의 정원을 지나 궁전에 도착.

겉보기에도 화려하지만 속은 완전히 미쳤다. 정신 나간 감각의 조각품이 사방을 장식하고 있었다. 통째로 보석을 깎아 만들었는데, 보이느니 외설적인 조각과 그림 밖에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김애경이 한 마디를 할 정도.

"취향이 좀......"

많이 그렇지? 김현도 속으로 동의했다.

내부는 그나마 직접적인 성애를 즐기는 자들은 없었다. 저마다 장죽을 물거나 물 담배를 즐기고 있었다. 술을 홀짝홀짝 마시거나, 영체를 흡입하는 자들도 보였다.

그들을 보자 조금은 긴장되었다.

보란 듯이 펼쳐놓은 정보들.

최소가 5성 등급 아닌가. 6성도 곳곳에 보이고, 7성에 서넛이 거드름을 피우는 중이었다.

그들이 김현을 보고는 색기 어린 시선을 보낸다.

[신입인가?]

[여왕님께서 좋아하시겠어.]

[1백만 번째지?]

[맞아.]

[그렇게 수집을 완료하고 싶어 하시더니, 결국 소원을 이루시는군.]

[총애를 받겠어.]

[못 생겼는데? 차라리 저 뒤에 암컷들이 낫겠어.]

[외모의 미추는 아무래도 좋지. 중요한 건 맛이야, 맛.]

[흐으, 유령과 흡혈귀의 혼종은 무슨 맛일까?]

[기다리다 보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오겠지.]

[여왕님께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시고, 그 다음으로 상위 서열들이 다 맛을 본 다음에?]

[억울하면 서열을 높이던가.]

여과 없이 쏟아지는 말 말 말.

들으라는 듯이 풀어놓는 말에 머리가 다 혼미해질 지경이다.

이윽고 릴리스의 애첩들이 머무는 내궁까지 통과. 대전의 거대한 보석 문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각 차원계의 황금과 비단으로 장식한 대전. 붉은 양탄자가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그리고 그 끝에 한 존재가 앉아 김현 일행을 굽어보았다.

언뜻 보면 인간을 닮은 존재. 다른 점이라면 길쭉한 검은 꼬리와 머리에 솟은 산양의 뿔, 여섯 개의 동공이 혼재하는 눈과 풍만한 세 개의 가슴 정도.

아, 우뚝 솟은 남성기와 아래 달린 여성기도 빼놓을 수 없지. 릴리스는 국부를 노출한 채 그 주변만 비단으로 살짝 드리워놓고 있었다. 사실상 전라 상태라고 하겠다.

"눈 마주치지 마. 마주치면 매혹당해."

영음으로 말해봐야 어차피 알아들을 터. 대놓고 일행에게 경고했다.

릴리스가 귀엽다는 듯 김현을 내려다본다.

악마들이 족쇄를 회수했다. 릴리스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는 뒷걸음질 쳐 물러나간다.

"가도 좋다."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안개 너머에서 들리듯 모호하게 울려퍼진다.

이때, 생각지도 못한 음성이 들렸다.

"예, 여왕이시어."

그와 함께 뒷걸음질 치는 한 여성.

낯이 익다.

우연처럼 눈이 마주쳤다.

미네엘.

블러드 공작의 권속이 엉뚱하게도 릴리스에게 무릎을 꿇고 있었던 것.

우연처럼 미네엘과 눈이 마주쳤다. 미네엘은 태연한 기색이다. 네 까짓 게 날 보면 어쩔 거냐는 듯이. 김현이 이곳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태도.

"쯧."

이제야 전후 사정을 알겠다.

김현이 혼종이라는 사실은 불사계 내에서는 암암리에 널리 알려졌다. 처음 불사계에 갔을 때부터 블러드 공작이 숨기질 않았으니까. 미네엘이 그걸 알고는 릴리스에게 일러바친 모양.

본인은 상을 받고, 꼴 보기 싫은 변방 차원 원주민은 자기 눈앞에서 치워버리니까 좋다 이거지. 릴리스의 애첩은 좋은 대접을 받지만 새장 속의 새인 건 변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라."

김현은 혀를 강하게 깨물었다.

벌써부터 릴리스의 폭발적인 염기가 김현의 영혼을 탐닉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유령과 흡혈귀의 괴리감이 그것을 분쇄한다.

영혼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혈정의 거부로 실패한다. 릴리스의 염기에 반응하는 육체의 욕망은 유명석의 제지로 파르라니 꺾이고 만다.

천천히 머리를 드는 김현.

눈동자를 내리깔려 했으나 그것만큼은 불가능했다. 릴리스의 힘은 이미 김현의 신경계를 장악한 다음이었으니.

눈이 마주친다.

여섯 개의 동공이 뭉쳐 흥미롭다는 듯 김현을 본다.

"혼종이라니...... 이런 재미난 일이 있나."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는 릴리스.

두 갈래로 갈라진, 뱀을 연상시키는 보랏빛 혀.

이세희가 슬쩍 릴리스를 훔쳐봤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余)에게 오라, 아름다운 이여."

아름답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생각과는 관계없이 몸이 멋대로 움직인다. 황공하다는 듯 머리를 조아리고 양탄자를 따라, 계단을 올라 릴리스의 앞에 섰다.

그러자 강렬한 체취가 훅 올라온다.

뭇 세계의 영웅을 매혹하고, 신과 악마를 쾌락에 잠기게 한다는 릴리스의 육향.

김현의 눈이 몽롱하게 변했다. 반면에 내부에서는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령과 흡혈귀가.

그 탓에 릴리스의 유혹은 오히려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김현의 영육에 난 균열이 더욱 깊어지고, 괴리감이 더욱 심해질망정 자아만큼은 멀쩡하게 유지하고 있던 것.

릴리스가 손을 뻗는다. 여섯 개의 손가락이 나란히 김현의 턱을 훑는다. 거칠면서 뜨겁고, 부드러우면서 냉정한 손길에 저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아름답구나."

몽환적인 목소리로 김현을 희롱한다.

"푸흐흣."

그게 너무 웃겨서 무심코 실소하고 말았다.

릴리스가 나른한 웃음을 짓는다.

"왜 그러느냐?"

"내가 아름답다고 하는 게 웃겨서."

"호호호, 그래. 그대 종족의 기준에서 그대는 미추의 서열을 따지자면 앞에서 반의 반에 들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여는 육체의 미추를 따지는 경지는 진즉에 벗어났느니라. 그대는 실로 아름답다. 세상에, 유령과 흡혈귀의 혼종이라니! 그것도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으로 탄생한 혼종이니 이토록 아름다운 이가 우주에 또 누가 있겠느냐? 전 차원계를 통틀어서도 너는 유일하다. 여는 많은 아름다운 이를 수집하였고, 그 중에는 그대와 비슷한 혼종이나 혼혈도 많았지만 그대와 같은 이는 없었다. 천사와 악마의 혼혈? 광명족과 암흑족의 혼종? 그대가 전 차원계 보석 중에도 가장 아름다운 보석인 세계의 눈물이라면, 그들은 한낱 다이아몬드 한 점에 불과하다."

낯간지러운 찬사.

더욱 무서운 점은 이게 릴리스의 진심이라는 사실.

김현이 읽을 수 있게 마음을 모두 개방하고, 정신의 방벽조차 몽땅 풀어놓고 진심으로 김현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 이것이 릴리스가 뭇 영웅들을 함락시킨 비법이지.

아름다운 외모? 화려한 말솜씨?

헛되다. 정말로 강력한 무기는 단순한 진심일지니.

릴리스는 김현이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벌어지는 괴리를 들여다보듯, 김현에게 얼굴을 바짝 붙이며 속삭인다.

"아름다운 이여, 거부하지 마라. 부디 여의 사랑이 되어다오. 그대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구나. 여의 사랑이 된다면 여는 모든 것을 다해 그대를 사랑하겠다."

릴리스의 시선이 저만치 아래 일행을 훑는다.

"강하고 아름다운 이들이구나. 여 또한 그대의 고향 행성에 벌어지는 일을 잘 알고 있다. 지참금으로 내 후원을 받아 가면 어떻겠느냐? 자랑 같지만 여의 말은 다른 악마들에게도 조금은 먹히곤 한다. 블러드 공작에게 했다는 요구는 들었다. 그것을 여가 해결해주마. 불사계와 악마계, 두 세계가 지구를 공동 보호령으로 삼겠다. 두 세계의 보호 아래 그대의 고향 행성은 영원토록 평안을 누리리라."

달콤하고 치명적인 유혹.

숨결이, 손길이, 시선이 김현의 영혼과 육체를 샅샅이 훑는다.

릴리스는 벌써 김현을 애무하고 있었다. 혀를 귀에 집어넣고, 손가락으로 입술을 어루만지고, 꼬리로 엉덩이와 사타구니를 자극한다.

정신이 아찔했다.

겨우 유지하는 자아가 날아갈 것만 같다.

'수락해도 되지 않아?'

불쑥 그런 마음이 고개를 쳐든다.

보호령이면 22세기의 지옥보다는 낫다. 인간의 법이 악마와 불사 종족들에게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그들도 나름의 법으로 여러 규제를 받으니까.

그러나......

김현은 유혹을 물리쳤다.

"거부한다."

"어째서냐? 지고의 쾌락과 영원한 평화가 이미 네 손 안에 있거늘."

손을 가져와 세 개의 유방을 만지게 하는 릴리스.

묻어나올 듯한 우윳빛 감촉이 욕념을 솟구치게 한다. 하지만 역시, 유명석과 불사심에서 차가운 기운이 나와 영육의 괴리를 벌린다. 그 끔찍하도록 이질적인 느낌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거부한다."

몸을 덜덜 떨며 말했다.

유명석이, 혈정이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물과 기름 같은 둘을 묶어 놓았던 천운이, 명천의 우물이 내렸던 가호가 다하고야 만 것.

릴리스가 그걸 보더니 미소를 짓는다.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아름다운 이여."

김현을 끌어안더니 길게 키스하는 릴리스.

보랏빛 혀......

독기로 가득 찬, 죽음조차 유혹하는 뱀의 혀가 김현의 입을 흠뻑 음미했다.

릴리스가 속삭인다.

"아름다운 이여, 그대가 상하는 것은 원치 않노라. 시간은 얼마든지 줄 테니 잘 생각해 보거라. 그대의 뜻에 반하여 억압하는 것은 여 또한 좋아하지 않으니......"

나갔던 악마들이 들어온다.

애첩들의 질투어린 시선을 받으며 김현을 데리고 인근 숙소로 데리고 갔다.

일행 역시 마찬가지.

단, 서로 격리된다.

김현은 별궁에, 일행은 높다란 탑에 유폐되었다. 삼시 세 끼 식사만 공급 받을 뿐, 김현이 수락 의사를 밝힐 때까지 갇히는 신세였다.

한 가지 더.

김현의 입술에 분홍색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영겁의 낙인.

선명한 릴리스의 자취가 김현을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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