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공허의 형상 -1-
춥다.
막막하다.
아주 중요한 무엇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이 심연으로부터 올라와 전신을 갉아먹는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이 이럴까?
평생을 두고 완성시킨 예술품이 눈앞에서 박살나는 걸 예술가의 마음이 이럴까?
공허하다.
혼종으로서의 괴리감이, 영혼과 육체의 이탈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갈증이 느껴진다.
피에 대한 갈증이, 영력에 대한 갈증이……
끔찍한 무력감.
뭘 하려고 해도 어떤 욕구도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대로 누워서 숨만 쉬고 싶다는, 아니 그마저도 놓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있다면 딱 하나. 절절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환영.
"크흑."
가볍게 신음을 흘렸다.
그녀?
아니, 그녀라고 할 수는 없지. 그 존재라고 해야겠지. 여자도 남자도 아닌 중성의 악마니까.
"릴리스…… 으드득."
애써 이를 갈며 적개심을 불태워 본다.
금세 사라져 버렸다. 입술에 남은 낙인 때문에. 그것이 김현의 감정을 조금씩 릴리스에 대한 흠모로, 애정으로, 욕망으로 바꾸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가면 김현의 미래는 뻔하다. 끝도 없는 갈증에 빠진 채 릴리스를 찾겠지. 지구에 대한 생각은 모두 내팽긴 채 릴리스의 육체만을 탐할 것이다.
커져 가는 영육의 괴리. 릴리스라면 자신의 권능으로 김현의 영육을 누더기처럼 기워 갖고 놀 것이다.
자기가 질릴 때까지, 대충 천 년 정도?
그 다음에는 끝. 다른 애첩들처럼 하렘에 내팽개칠 게 분명했다. 릴리스의 보살핌이 없으면 김현은 생존할 수 없으니 거기서 끝이 나겠지.
'그럴 수는 없어.'
이건 말 그대로 인형 아닌가. 운명에게, 외계종들에게 희롱 당할 때보다 더 잔인하다.
떨리는 손을 들어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꼬깃꼬깃한 비단 주머니를 하나 꺼낸다. 그것을 간신히 입구를 벌려 거꾸로 잡아서는 탈탈 털었다.
턱! 퉁퉁!
7성 승급을 위해 준비했던 물건들이 탈탈 쏟아진다.
유령왕의 눈물, 흡혈귀 공작의 핏방울, 역천의 굴레, 망혼의 장식, 죽음의 원, 염라 미소……
김현의 눈이 흔들렸다.
'부족해.'
다들 빼어난 보물이지만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
7성 등급 성혼.
명천의 우물 같은 장소라면 이것들을 이용하여 도박을 걸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뭘 어쩐단 말인가.
"젠장."
가슴이 짓이겨지는 허무함에 몸을 눕힌다.
또다시 떠오른다.
릴리스가……
미소 지으며 흉측한 남근을 들이대는데, 생리적인 혐오감이 들기는커녕 욕망이 불타며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다.
공허와 욕념이 괴롭히는 와중에도, 김현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 난관을 빠져나가려면 블러드 공작의 도움이 꼭 필요해.'
모든 혈주는 자기 사도의 상황을 알 수 있다. 단, 다른 존재의 방해가 없는 때만. 그리고 다른 세계에 있으면 감도가 떨어지는 것이 당연지사.
릴리스의 방해를 뚫고 블러드 공작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는 방법은 두 가지 정도 된다.
죽거나, 승급하거나.
어차피 지금 번지는 괴리감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7성으로 승급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죽거나 노예가 될 테니.
김현은 툴툴거리며 웃었다.
'외통수네, 외통수.'
언제는 안 그랬나?
항상 그랬지. 언제든 무엇을 대가로 바쳐야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눈을 감는다.
고혹적인 눈짓을 보내는 릴리스의 환영을 무시하고 기억을 훑는다. 22세기 인류가 발악하며 쌓았던 모든 지식을 검색한다.
지금 같은 상황을 벗어날 실날같은 희망을.
언뜻, 김현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어려웠다.
허무한 무력감과 싸우고, 릴리스의 유혹 속에서 정신을 유지하며 옛 기억을 더듬는 것은.
더구나 유령과 흡혈귀의 혼종은 22세기에도 대략적인 개념만 있던 거였다. 그걸 실제로 구현한 것은 김현이 최초이니 사실 무에서 새로 시작한다고 봐야 했다.
'없나……'
자연히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연관성이 있는 몇 가지 연구가 머릿속을 떠돌았지만 하나 같이 부족했다.
차가운 절망감이 등을 기어오른다. 급기야 정신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너무나 추워서, 너무나 배가 고파서 두 팔을 끌어안고 벌벌 떨었다.
"춥다."
덜덜덜.
실제로 턱이 떨리며 윗니와 아랫니가 마구 부딪치고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창문을 본다.
불야성이, 분홍빛 하늘 아래 환락의 도시가 펼쳐진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유리가 반사하는 흐릿한 그림자,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고통에 겨워하는 자신이 모습이 망막에 아프게 맺혔다.
조소를 짓는다.
나는 저리도 작고 연약한 사람이구나, 싶어서.
쟁반을 깨뜨리고 벽장에 숨은 어린아이.
혹은 자궁 속에서 차가운 낙태 기계를 마주한 태아.
쓰라린 감정이 가슴을 친다.
김현은 멍하니 유리창만 보았다. 아니, 그 안의 어린아이를, 태아를 마주했다.
이상하다……
갑자기 어떤 영감이 떠오른다.
간질거린다. 깃털로 코 아래를 자극하듯 재채기가 나올랑말랑 한다. 아주 미약한 느낌이 뒤통수를 슬쩍 어루만지고는 그대로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김현은 그 영감을 잡아챘다.
"태아……"
그래, 태아.
나는 씨앗. 거대한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아직 개화하지 않은, 그래서 미약하기만 한 존재.
사고가 순식간에 비약한다. 사막에서 한 줄기 샘을 찾아 헤매는 나무의 뿌리처럼 무한으로 뻗어나간다. 그리하여 단 하나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만다.
지금 김현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괴리다, 영혼과 육체의 괴리.
그 타협할 수 없는 차이점.
여기서 오는 허무.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이 허무에서 답을 찾으면 어떨까? 허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이끌어내어 그걸 새로운 기둥으로 삼는다면?
'그게 가능해?'
불사계와 유명계 모두 극도의 실(實)을 추구한다. 그 과정에서 육체, 혹은 영혼을 버리는 것. 자연스러운 음양의 화합을 깨뜨리고 하나의 면만 특화시킨다고 할까.
'해보자.'
완전히 새로운 영역.
그나마 혼돈계에 대해 연구했던 차오 박사의 개념이 이것과 비슷하다.
허무에서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킨다.
이것은 몸 안에 작은 세계를 갖는 것과도 일맥상통하지 않은가.
한 가지 상상을 했다.
혼돈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빅뱅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우주가 탄생하는 장면을.
이 우주.
혼돈계의 괴물이나 차오 박사의 99륜처럼 자신의 존재 안에 만들면 어떨까?
'좋아.'
눈앞에 늘어놓은 보물들은 다 소용없다. 애초에 준비했던 건 현재 상황을 발전시키는 것에 불과했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안다.
왼손을 이마로, 오른손을 심장으로 가져갔다.
잠깐은 멈칫했다.
'바보짓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때마침 릴리스의 환영이 김현을 유혹한다.
[여에게로 오라, 아름다운 이여. 그대에게 영원의 도락과 항구한 평화를 선사할 지니.]
거짓말.
지금은 진심이겠지만 결국 릴리스는 변심한다. 또, 불사계와 악마계의 보호를 받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이겠는가? 악마, 마수, 흡혈귀, 늑대인간, 언데드가 판을 칠 텐데?
인류를 지키려면 이 수밖에 없다.
김현은 마지막 남은 의지로 유명석과 불사심을 단번에 뜯어냈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진다.
고통에는 이골이 난 김현조차 견디기 어려운 통증.
유명석과 불사심은 김현의 육체와, 영혼과 이미 일체가 되어 있다. 이걸 뜯는 건 말 그대로 영혼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과 같다.
괴리감이 커진다.
영혼에 완전히 구멍이 뚫렸다.
완전한 결손.
복구할 수 없는 상처가 김현이라는 존재에 아로새겨진다.
푸화학!
전신에서 피가 터진다.
구멍이란 구멍이 다 찢어진 것 같다. 불그죽죽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가운데 반투명한 영기가 뒤를 따랐다. 김현이 있던 화려한 방이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여기서 그치지를 않는다. 헉헉대면서도, 모든 감각을 상실하여 어둠 속에 갇혔으면서도 온 몸을 난자했다.
자해?
아니다. 불사체를, 유명흔을 걷어내려는 것이다.
불사체는 혼원체에서 비롯된 김현의 육체. 무구이되 보물이나, 사실상 김현의 몸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유명흔 역시 마찬가지다. 명천의 우물이 가진 힘에서 태어났으며 김현의 영혼과 완전히 결합되었다.
이 둘을 뜯는다고?
이것이야말로 미친 행위. 지금 김현에게서 둘을 제거하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그러나 김현은 그렇게 했다.
팔과 다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몸통도 머리도 떨어진다. 남은 것이라고는 정체불명의 고깃덩이 하나가 전부. 유명흔이 허공을 떠돌며 구슬픈 울음을 토해냈다.
"그으으……"
김현을 이루던 모든 인자가 떨어져 나갔다. 이제 김현에게는 성혼 밖에 없다. 그나마 강대한 혼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4개의 성혼이 위태롭게 깜빡이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자아를 유지하는 것이 기적이라면 기적. 김현은 누운 채 자신을 관조했다.
허무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차단된 감각으로도, 꿈틀대는 성혼으로도 무엇도 느낄 수 없다.
실패일까?
유명흔이 자신을 불러달라고 울어댄다. 불사체가 꿈틀거리며 자신을 향해 기어오고 있다.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의지만 발하면 원상 복구하는 것이 가능하다.
영혼이, 육체가, 상처 입은 김현의 존재가 그것들을 간절히 원했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의 갈망이, 아니 그들의 갈증이……
'그렇구나.'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피에 대한 욕망도, 영력에 대한 욕구도 모두 이들의 것이었다는 점을.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바라던 게 아니었다.
나는 원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김현은 이제 자신을 마주보게 되었다. 깊고 깊은 심연에서, 무수히 많은 유혹을 물리쳐 가며 답을 찾는다.
뜻밖에도 간단했다.
'자유!'
그 한 단어를 목 놓아 불러본다.
자유롭고 싶었다.
운명에서, 외계종들의 결박에서 벗어나 한 세상 즐겁게 살다 가고 싶었다.
인류의 자강 독립?
사실 그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22세기의 아론은 탄생부터 외계종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고 인생 내내 외계종에 시달리다가 시공 회귀를 했다. 외계종들을 적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21세기에 온 뒤로 오롯이 인류의 자강 독립만을 위해 행동했느냐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을 때도 많았다.
'맞아, 그랬지.'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마음.
살포시 미소 짓는다.
그리고 이때쯤 모든 혼력이 김현을 떠났다.
성혼이 물감이라면 혼력은 도화지. 바탕 없이는 어떤 그림도 그려지지 않는다.
금이 간다. 으깨지기 시작한다. 붕괴하고 있었다.
김현의 존재도 마찬가지.
얼룩처럼 남은 영육이 허물어지면서 자아 또한 스르륵 녹아 없어진다.
기다렸다.
최후까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네 개의 성혼이 모두 녹아 순수하기 그지없는 힘으로 환원되는 그 순간까지……
그리하여 마지막.
나락으로 추락하는 그때에 어떤 명령어를 발동시켰다.
[폭주]
불사체가 희미한 빛을 뿜는다.
불사체의 재료가 된 혼원체, 그 이전의 혼원의수, 아니 최초에 만들었던 붕괴의 손.
거기 새겨져 있던 술식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아니, 남은 수준을 넘어 불사체와 불사심, 심지어 유명석과 유명흔에도 새겨졌다.
이것들이 일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거기에 공명하여 방 안에 잔뜩 묻은 피와 영기도 들끓는다. 결국 유출된 성혼까지 영향을 미쳐, 완전히 흩어지기 직전에서 재차 유형화되며 허공에 글자를 새겨 넣는다.
[혼왕] [혈왕] [혼멸] [혈마]
김현도 그것을 느꼈다.
온도가 올라간다.
용암 바다에 들어온 것 같다.
가히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 혹은 고요하기 짝이 없는 태풍의 눈.
여기 깃든 힘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애첩과 사랑을 나누던 릴리스가 놀라 고개를 돌리고, 경비병 악마들이 일제히 비상을 외칠 정도.
터럭만큼만 시간이 있었어도 그들이 뭘 어찌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반응하기 전 김현이 재차 약속의 언어를 외쳤다.
[폭주!]
그것이 결정타였다.
순간 세상이 숨을 죽였다.
고요가 내려앉는다.
중심에서 빛이 번져 칼날처럼 하늘을 찔렀다.
찢어지는 세계.
언뜻 공허가 엿보인다. 시커먼 어둠이 괴수처럼 이 환락의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두가 그것을 느꼈다.
탑에 갇혀 있던 동료들도, 흰금 궁전에서 도박을 즐기던 자들도, 통곡의 굴에서 촉수에 찔려 최후의 신음을 흘리던 희생자도……
선명히 보인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움트는 장면이.
폭주하는 빛.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별궁도, 흰금 궁전도, 악마계마저도.
빅뱅이다!